〈 436화 〉 430 프라버 북쪽 연안
* * *
서울을 포함, 경기도가 통으로 들어갈 만큼 넓은 프라버 북쪽 연안. 그곳을 가로지르는 데는 3일이 걸렸다.
만약 다른 행렬처럼 하루에 대여섯 번, 밀물이 들이칠 때마다 섬이 되어버린 언덕이나 구릉에서 대기하며 물이 다시 빠지길 기다렸다면 환인 일행도 이동에 일주일 넘게 걸렸을 것이다.
=주인님. 저기 나루터예요.=
=마차를 태울 정도로 큰 나룻배도 있네.=
연안의 최동단에 도착해 작은 산자락을 넘은 일행은 해협처럼 폭이 좁아지는 장소에 형성되어있는 나루터를 발견했다.
20에서 30km가량 되어 보이는 폭의 해협 건너편도 희미하게 나루터가 보인다.
오는 길에 랍스터를 닮은 4급 마수 떼에게 공격받던 상단 행렬을 구해주고 사례와 함께 받은 정보와 일치한다.
「나루터라고 해서 작을 줄 알았는데 저 정도면 작은 항구라고 해도 되겠어요.」
배후령처럼 환인의 뒤에서 둥둥 떠 있던 백려강이 그의 어깨에 손을 살짝 올린 채 감상을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나루터는 대규모였다. 크고 작은 배만 오십여 척에 가까웠고 접안 시설까지 있었으니까.
배도 나룻배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는 평저선에 정식 용골까지 붙어있는 선박도 있다.
하지만 운행 중인 배는 그 1/10도 되지 않는다. 5명에서 10명 정도 태울 수 있는 배 대부분은 뭍으로 끌어올려져 보트 거치대 같은 것에 고정되어있었고 해협 사이를 오가는 배도 없다.
나루터를 향해 내려가기 시작하자 안느가 손을 들어 정오의 따가운 햇볕에서 그림자를 눈에 드리우며 중얼거린다.
=장사가 안되는 걸까? 오가는 배가 없는걸.=
“지역 특성상 소규모보다 대규모로 찾는 일이 많겠지.”
=아, 위험 지역이라 사람들이 모여서 움직이니까 그렇겠네.=
=저만한 크기라면 마차를 옮길 배는 금방 구하겠어요.=
일행이 나루터를 찾아온 이유는 좀 더 편하고 안전하게 반도로 넘어가기 위해서였다.
연안은 수위가 높아봤자 2~3m 정도에 물살도 강하지 않고 파도도 약하다. 마차에 부력을 걸어 이동해도 부담이 없다.
그러나 수심이 깊어지는 곳, 본격적인 호수는 수심도 수십 미터인데다 파고도 높고 거칠다. 까딱 잘못하면 파도에 휩쓸려 마차가 뒤집힐 수도 있는 거다.
부력의 술법 외에 균형 조율 술법과 무게 강화 술법을 부여하면 전복의 위험은 줄어들겠지만, 유르파가 아무리 6급 비술사라고 해도 여러 술법을 동시에 발동시켜 유지하는 것은 힘들다.
환인은 어깨까지 뒤덮은 왼팔의 빛을 한차례 쓸어내리며 오는 길에 갑각류 마수 시체를 훔쳐가려다 자신의 손에 죽은 맹금류 괴수의 영혼을 꺼냈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강령하자 예상대로 찡— 하는 감각이 눈을 한차례 휘감고는 시력이 대폭 늘어난다.
강해진 시력으로 나루터를 전체적으로 살핀다.
숙박시설 같은 석조 건물 세 채와 배를 손질 중인 사람들, 근처에 작은 돛단배를 띄워놓고 낚시 중인 사람들. 그 외에 나루터 주변도 문양 강화 영혼 시야로 전부 살폈다.
‘부자연스러울 만큼 조용하지만, 낚시꾼들의 안색은 평범하다.’
긴장감 같은 것은 전혀 없고 드러나는 기세도 일반인과 다를 게 없다.
직업자도 아니고 영혼의 빛이나 생명의 빛이 유별나게 빛나지도 않으니 알소프가 심어놓은 첩자나 습격자일 가능성은 적겠지.
근처에 숨어있거나 은신해있는 인물도 없고…….
“…….”
환인은 멍한 표정으로 느릿하게 뒤따라오는 여덟 영혼을 돌아보았다.
알소프 영주를 향한 원한과 분노에 반쯤 혼재, 악령화한 들개 전사단의 영혼들.
지난 사흘간 여자들의 팔다리를 뒤덮은 검은 자국은 점점 몸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럴수록 표정도 흐리멍덩해지며 자율적인 의사가 사라져간다.
‘곤란한데.’
반도에서 알소프까지 추정 이동 시간은 8일. 반도의 중심부에 있다는 인구 3만의 큰 마을에 들르지 않고 곧장 알소프로 향할 경우에 걸리는 시간이다.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을까.
환인은 부정적으로 보았다.
저 여자들의 영혼을 영혼 구슬로 만드는 것도 생각해보았었다.
현재 영혼 구슬의 최대 유지 시간은 192시간으로 8일, 알소프까지 충분한 시간이지만 영혼 구슬로 만든다고 해서 상태가 보존되진 않는다.
내부에서도 시간이 흐르며 외부의 감각을 느낀다는 것은 구슬로 만든 정령들의 반응에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정신 차려라. 카드람에 대한 원한이 고작 그 정도인 거냐.’
강제력으로 정신을 일깨우자 배회령처럼 흐리멍덩한 얼굴에 지성이 돌아온다.
「읏…… 으으으…….」
「흐으윽…….」
점차 이성이 흐려지고 있다는 걸 자신들도 알고 있는지 서글픈 분노의 신음을 흘리며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여자 영혼들. 그 모습에 환인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더 때를 생각하며 저들을 이용할 계획을 세웠는데, 아무래도 시더가 특이한 사례였던 듯하다.
입장도 다르긴 하지.
오울링의 시더는 참혹하게 살해당했음에도 몇 달간이나 영혼으로서 이성과 이지를 유지하고 있었을 만큼 강하고 고결한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진상을 알게 되어 분노와 타락으로 반 악령화 하긴 했지만,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그대로였고 그런 아들을 지켜야 한다는 목적은 그녀의 이성을 단단히 붙잡았었다.
그런 시더도 중간중간 분노에 이성이 잠기곤 했었다. 그런데 저들은 그런 극기가 부족하다.
일단 자신을 습격하려다 되려 살해당했고 정신을 추스를 틈도 없이 배신당하고 이용당했다는 사실에 악령화 했으니까.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점차 가까워지는 나루터를 응시하며 해결책을 고민하는 환인의 귀로 안느와 백려강의 대화가 들려온다.
=야아. 려강아 잠지 보여. 너무 높이 올라가지 마.=
「꺄아! 다, 다 보신 거예요?!」
=아니 네가 보여준 거지…….=
「보여줄 생각은 없었는걸요!」
=그러니까 높이 올라가지 마…… 아니, 그냥 율이 언니한테 옷 만들어달라고 하는 게 어때? 그거 그냥 옷감 원단을 몸에 감았을 뿐이잖아. 풀리기도 쉬운데 사람들 사이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간 네 알몸, 다른 사람들한테 다 보여주게 될걸?=
「하지만…… 복잡한 옷을 입으면 유령 상태에서 정찰이나 감시를 해야 할 때 빨리 벗지 못하잖아요.」
=뭐 드레스 복식이라도 하게……?=
「……??」
고개를 돌리자 당연히 그런 게 아니었냐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뜬 백려강이 그의 시야에 담긴다.
안느는 살짝 백치미를 드러내는 백려강을 향해 ‘이런 아가씨 같으니.’ 하는 얼굴로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후드 로브면 충분해. 벗기도 간단하고 네 모습을 숨기기에도 좋으니까.=
「제, 제가 흉한가요……?」
=그게 아니야. 넌 내가 이때까지 본 여자 중에 제일 예뻐. 그런 의미에서 외모를 숨길 필요가 있단 거야. 너무 눈에 띄는 외모니까. 겸사겸사해서 후드 로브를 쓰면 네가 영혼인 것도 감출 수 있고.=
「아……. 네! 유리 언니께 여쭤볼게요!」
환인은 마차 안으로 들어가는 백려강과 그런 그녀의 뒤에서 조금 지친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안느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영기… 정기? 그걸 주입하면 진해지는 영혼. 영혼의…… 한기, 그걸 흡수하면 흐려지고 옅어지는 영체.
시더와 귀접을 했을 때 몸이 아팠던 것은…… 아니. 귀접까지 할 필요는 없나.
그의 시선이 다시 돌아가며 음울한 분위기의 들개 전사단 여자 영혼들로 향했다.
저 영혼에게서 한기를 흡수하면 타락하는 속도가 줄거나 회복될까?
‘한 번 시도해볼 가치는 있겠어.’
환인의 눈빛이 탐구심으로 짙어졌다.
나루터에 도착한 환인은 환연을 불러 정령으로 건물 내부를 훑어보라고 지시했다.
파악해야 할 요소는 안에 있는 인간들의 등급과 장비 수준, 소지품 같은 것들.
「알소프의 첩자나 감시자 같은 인간이 있나 찾아보라는 거지?」
“그래.”
정령에게 집중하기 위해 자신의 안주머니로 들어오는 환연을 받아준 환인은 이실리테에게 말했다.
“저기 뱃사람으로 보이는 여자에게 가서 지금 바로 건너편으로 갈 수 있는지 물어보고 와라.”
=네, 주인님.=
=도령. 나는?=
“뒤쪽 건물의 창가에서 이쪽을 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 마차 호위가 모두 자리를 뜨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겠지.”
힐끔 뒤를 돌아본 안느는 이실리테가 비운 마부석에 자연스럽게 착석한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는 시간이 지나고, 넝마 같은 조끼에 샅바 같은 팬티만 입은 여자가 이실리테와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다가 마차로 다가온다.
‘수달인가.’
엉덩이에는 갈색 단모가 뒤덮은 길고 뾰족한 꼬리가 달려있고 머리 위에는 작고 동그란 귀가 쫑긋거린다.
미녀 상이라기보다 귀염 상인 얼굴이지만, 몸 곳곳에 흉터가 있고 얼굴에도 이마에서 왼쪽 눈을 가로지르는 옅은 상처 자국이 있어 사나운 인상이다.
=지금 바로 건너겠다는 사람들이 댁들이야?=
“당장 건너길 원합니다.”
=그건 곤란한데. 50명이 채워져야 배가 움직이거든.=
전혀 곤란하지 않은 얼굴로 길고 부드러운 꼬리를 좌우로 살랑살랑 흔드는 수달녀.
갈색 눈동자가 안느와 마차, 마차를 끌고 있는 세 마리 쿠에와 홀로 움직이지만 뭔가 밀짚 쿠에답지 않게 우아한 쿠에 한 마리를 차례대로 훑는 것을 환인은 말없이 응시한다.
잠시 후 태연한 안색으로 허리에 손을 올린 수달녀에게 물었다.
“대금은 충분히 내겠습니다. 혹시 안된다면 가능한 뱃사람을 소개해주시겠습니까. 소개료는 섭섭치 않게 챙겨드리겠습니다.”
=여기 박달 나루터는 우리 박달 패가 운영해. 건너편 수달 나루터는 수달 패가 운용하고. 그러니까 나한테 말해면 되는데.=
그러니까…… 응? 하고 말끝을 흐리며 엄지와 검지를 비비며 씨익 웃는 수달녀의 모습에 환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환인은 손을 뻗어 검지로 수달녀의 머리를 가리킨다. 그 모습에 수달녀가 경계심을 내비치는 순간.
핏—
문양 강화 영혼 폭발 구슬이 수달녀의 옆머리를 스치고 지나가 해협 사이로 쏜살같이 날아갔고.
……꾸구구구궁…!!!
강렬한 폭발과 함께 족히 수십 미터의 물보라가 치솟으며 굉음과 진동을 퍼트렸다.
나루터에서 낚시하거나 그물과 배를 손질하던 사람들이 놀라 벌러덩 자빠지고 폭음에 놀란 사람들이 건물에서 쏟아져나온다.
그러는 가운데 꽁꽁 언 모습으로 물보라가 천천히 가라앉는 장면을 바라보던 수달녀가 뻣뻣하게 움직이며 환인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미안합니다. 저기에 마수가 보인 것 같아서.”
=…….=
“사람에게 위협이 되는 것은 치워버려야… 안전한 여행이 되기 마련이지요.”
수달녀는 한겨울의 알류겔 호숫물보다 더 차가운 환인의 미소에 갑자기 오줌이 마려워졌다.
무직자이지만 그녀도 어느 정도 직업자와 법사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법사는 마법이나 술법을 쓰기 위해 주문을 외워야 하고, 직업자도 힘을 쓰려면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는 뭔데 주문이나 정신 집중도 없이…….
“멈춘 대화를 다시 할까요. 우리는 마차에 계신 분을 모시고 알소프로 가는 길입니다. 돈보다 시간이 중요해 지금 즉시 배를 띄우길 원하는데,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하냐고 물으면서 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걸까.
수달녀는 오금이 저리는 걸 느끼며 황토색 단발이 펄럭일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 가가가능해! 가능하고말고! 그, 그런데 50명이 모여야 넘어간다는 건 사실이야! 저기 여관이랑 터번이 있는 이유도 인원이 맞아떨어지길 기다리는 사람들이 머물기 위해서라고! 보다시피 폭도 넓어서 두어 놈씩 데리고 오가는 건 무진장 비효율적이니까!=
“운행 비용은 얼마입니까.”
=하, 한 명당 2열동화야…….=
환인은 말없이 1열은화를 꺼내 수달녀에게 팅— 소리 나게 튕겨주었다.
눈부시게 반짝이는 은화 한 닢이 날아오는 광경에 깜짝 놀라 두 손으로 받아낸 수달녀는 진짜 1열은화라는 사실에 눈을 휘둥그레 뜬다.
“당장 준비해주십시오. 10분 이내에 출발하길 원합니다. 가능하겠지요.”
=어, 어…… 다, 다른 사람은…….=
“그걸로 부족해서 돈을 더 받겠다는 겁니까…….”
=바로, 바로 준비할게!!=
목소리가 한층 낮아지고 주먹도 불끈 쥐어지는 걸 본 수달녀는 히익, 작게 비명을 지르곤 세 채의 건물 중 가운데 쪽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욕심부리지만 않았다면 적당히 사람들을 태우는 것도 허락해주었을 텐데.
수달녀의 뒷모습과 건물 밖으로 나와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본 안느가 환인에게 속삭인다.
=갑자기 영혼 폭발을 쏴서 깜짝 놀랐어.=
“이쪽을 간 보는 것들에게 배려는 불필요하지.”
냉랭한 목소리에 안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을 노골적으로 훑어보고 실실 웃는 게 마음에 안들긴 했어.
폭발음에 뛰쳐나온 사람들은 다시 들어가지 않고 환인 일행과 서둘러 배를 준비하는 뱃사람들을 구경했다.
그중 몇몇은 환인 일행이 직행료를 냈다는 걸 눈치채고 조심스레 다가와 동승이 가능한지 물었지만, 이실리테와 안느가 서릿발 같은 기백을 내뿜으며 불가능함을 알리자 다들 포기하고 무리로 돌아가 버렸다.
=연안을 통과한 거 같은데 안내인도 없이 마차를 끌고 올 정도잖아. 어디 유명한 탐험가나 모험가일 게 틀림없어.=
=그럼 아까 그 폭발은 박달 패거리가 수작 부리다가 분노를 산 건가?=
=박달 놈들이 돈 밝히는 게 하루 이틀인가. 저분들 간 보다가 역정을 맞은 거겠지.=
=그나저나 동승자를 좀 모으면 돈을 많이 아낄 텐데…… 저 배를 움직이는데 10은화를 요구하지 않나.=
=고명한 탐험자들은 다들 부자라고 하니 10은화쯤이야 간식 값이겠지, 뭐.=
환인은 관중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준비되는 배를 살폈다.
배 크기는 소형과 중형 사이의 여객선 정도로 노가 좌우로 5개씩 붙어있는 평저선이다. 크기도 크고 무게도 있어 보이니 어지간한 파도에는 끄떡도 하지 않겠지.
젖가슴을 훤히 드러내거나 헐벗게 입은 여자들 열 명이 배에 오르고 물속의 전투를 상정하는지 창 종류를 쥔 열 명의 남녀도 오른다.
「특별히 수상한 사람은 없었어.」
“그래. 수고했다.”
품속에서 작은 목소리로 보고하는 환연을 토닥여준 환인은 바지만 입어 하얀 모피를 드러낸 해달 남자가 다가오는 것을 응시했다.
딱딱하게 굳은살이 박인 손. 어디서 잘렸는지 뭉툭한 꼬리. 아까의 수달녀처럼 몸을 수놓은 흉터들.
환인의 온도 낮은 시선에 크흠, 헛기침한 남자가 말했다.
=준비되었으니 타시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배로 돌아간다.
카랑카랑하고 고집이 느껴지지만 강직한 늙은 목소리였다. 또 수작질을 벌였다면 피를 본 뒤 지도상에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려 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 보인다.
환인은 고삐를 쥔 이실리테에게 말없이 신호를 주었다.
마차가 승선하자 일행을 확인한 해달 남자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통해 모습을 감추었고, 얼마 안 가 둥 둥 둥 규칙적인 북소리와 함께 노가 움직이기 시작하며 배가 슬금슬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촤아악— 촤아아악— 접안 시설에서 빠져나오자 10개의 노가 힘차게 물살을 밀어내기 시작하니 처음에는 느릿하던 속도가 점점 빨라지며 순식간에 가속도가 붙는다.
환인은 선상에서 점차 멀어지는 박달 나루터를 돌아보다가 눈을 감고 기감을 펼쳤다.
배는 이중 구조로 갑판 아래는 선저였다. 아까 먼저 배를 탄 여자들 10명이 2인 1조로 대형 노를 붙잡고 노를 열심히 젓고 있다.
일행을 데리러 왔던 하얀 수달 남자는 북을 두드리며 노젓는 타이밍을 알려주고 있었고 무기를 들고 타던 열 명의 남녀는 그 근처에서 대기 중이다.
‘전원이 같은 일족인 건가.’
박달 패거리라고 한 걸 보면 맞겠지.
거칠고 사나운 삶을 이어왔는지 노잡이 여자고 무기를 든 남녀고 빠짐없이 몸에 흉터가 새겨져 있다.
갑판으로 올라가는 계단 쪽에 탈출구가 있는 것을 보면… 위기 상황이 발생하면 배를 버리고 탈출하는 거겠지. 무기를 쥔 자들은 탈출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일 것이고.
환인은 선저에서 신경을 끊고 해협 건너편으로 시선을 주었다.
지금 배의 속도와 거리를 가늠해본다면 건너편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20분에서 30분 사이.
아까 생각한 것을 실험해보기에 적당한 시간이다.
“비상, 선창으로는 내려가지 마라.”
쿠우?
“거기에 있는 계단 말이다.”
쿠~ 쿠엣.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에 호기심을 보이는 비상을 말린 환인은 고개를 돌려 마차 근처에 수호령처럼 붙어있는 들개 전사단의 여덟 영혼, 그중 리더 격인 니누를 불렀다.
회색 영체에 붉은 기운을 두르고 팔다리뿐만 아니라 어깨 너머 옆가슴, 다리를 넘어 서혜부까지 검게 물든 니누가 무표정에 무감정한 얼굴로 대답한다.
「부르셨습니까.」
‘당신들 상태는 당신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이대로는 알소프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당신들은 혼재나 악령이 되어버리겠지요.’
「…….」
‘그렇게 되면 저는 당신들을 소멸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니누는 천천히 시선을 내리며 고개를 숙였다.
적색의 아우라가 불안한 느낌으로 일렁이는 걸 보며 환인은 담담하게 제안했다.
‘당신들에게 시술해볼 것이 있습니다. 만약 이게 통한다면 당신들에게 어느 정도 시간이 주어질 겁니다. 받아보겠습니까.’
「예.」
머릿속에 아교를 부은 것처럼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지만, 니누는 알 수 있었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대로 허무하게 소멸할 뿐이란 것을.
환인은 니누의 동의를 받고 그녀를 영체 이곳저곳을 더듬었다.
손을 그녀의 가슴 속에 넣어 휘저어봤지만 아무런 감각도 없다.
원기를 주입받지 않은 영체는 자신이라 해도 만질 수 없다. 영기를 손에 모으면 만질 수야 있겠지만 그건 영기 소비가 심한 행위. 거기다 지금은 그걸 확인할 때가 아니다.
원기 회복의 마도기를 꺼내 왼손에 쥔 환인은 마도기에서 흘러나오는 원기를 모아 그녀의 영체에 계속 밀어 넣는다.
그러자 점차 물리 반응이 영체에 생겨난다.
약간 늘어진 젖을 건드리니 뭉쳐진 공기를 만지는 느낌이 전해져오며 니누의 가슴이 손길에 따라 일그러진다.
옆구리를 만지고 복근을 건드리고 어깨와 팔다리도 만져본다. 하지만 그 어느 곳도 손이 영체 안으로 밀려들어 가지 않는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안 된다. 영체의 형태가 일그러지는 한이 있어도 손의 침입을 거부하는 상태.
니누의 감정 없는 시선을 받으며 그녀의 알몸을 만져보던 환인은 작게 숨을 내쉬며 그녀의 복근이 선명한 아랫배에 시선을 주었다.
약간 반투명한 아랫배 너머로 희미한 대음순과 소음순의 형태, 그리고 몸 안으로 이어진 좁고 가느다란 통로가 눈에 들어온다.
몸 안으로 이어지는 세 곳 중 하나.
‘시작하겠습니다.’
환인은 담담한 얼굴로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