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4화 〉 428 알소프로 가는 길
* * *
르아웬=아기오시스, 땅신 교단의 다섯 추기경 중 한 명인 그녀는 한밤중에 의자매의 통신 요청을 받으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불길하다. 그렇지 않아도 일감이 쌓여 쉬지도 못하고 있는데……. 뭔가 큰일을 가지고 온 거 같은 예감이 그녀의 지친 마음을 건드린다.
그리고 그 불길함이 현실화하는 장면에서 르아웬은 두 손을 모아 코, 입을 가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평온의 파동 비슷한 거로 영혼을 갑자기 현세로 끌어내는 장면에서도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놀랐지만, 그래도 이거에 비하면 사소한 거였다.
알류겔 대호수의 1/4을 차지했다고 평가되는 알소프의 영주가, 지금 라드세아 최상류층에서 한참 쟁점이 되는 중인 비자룩스의 녹색 성자를 습격했다고?
영도의 필두 성녀 닌실=아나그 님의 초청을 받아 가고 있는 성자를 습격하다니. 아무리 프라버를 집어삼키려던 음모가 성자님으로 인해 분쇄되었다지만 진짜 미친 거 아냐??
‘이 망할 근육 돼지…… 날 일감에 치어 죽이려고…….’
아니, 영도에 들른 다음에 곧장 귀환하랬더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길래 알류겔 호수의 중급 도시 영주가 앙심을 품고 암살자까지 보낸단 말인가.
며칠 전 그녀가 보낸 선물, 희귀한 수액 괴물을 자신의 가문 꽃 모양으로 굳히고 자신의 탄생석으로 장식한 머리핀이 도착했을 때는 정말 기뻤는데.
그게 오늘을 염두에 두고 미리 보낸 사죄 표시가 아니었을까 의심암귀까지 생겨날 지경이다.
그랬는데 르아웬은 아직 일감이 다 쏟아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흐으으윽……!」
「카드람……! 카드라아아암……!!」
「으, 으으으으……!」
습격자 영혼들이 갑자기 머리며 몸을 쥐어뜯고 할퀴는 등 자해를 하더니 보기에도 불길한 적색 불꽃 같은 것에 휩싸이고 있다.
대 서고의 지식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저건 급격한 혼재화 혹은 악령화의 전조다. 그것도 하나둘이 아니라 여덟이 동시에.
[안.]
=…….=
의자매를 불렀지만 반응하지 않는 모습에 르아웬은 성자님과 의자매를 믿고 일단 계속 지켜보기로 했다.
「아, 안돼…… 아아…….」
회색 들개 귀의 니누는 손톱을 세워 뺨을 긁거나 어깨에 닿는 회색 머리카락을 잡아 뜯는 것처럼 당겨대며 불안과 공포, 분노에 헐떡였다.
영체 상태가 아니었다면 뺨이 패이고 머리카락이 다 뜯겨나갔을 정도로 강박적인 행동.
비단 니누뿐만 아니라 다른 일곱의 영혼도 마찬가지로 크고 작은 불안과 분노를 호소하며 헐떡이니 그녀들의 몸 주변에 붉은 아지랑이가 점차 번져 나오며 불길을 두른 듯한 모습으로 변해간다.
환인은 다들 불안에 기반한 분노와 공포를 호소하는 모습에서 무언가 사유가 있음을 눈치챘다.
단순히 배신당했다고 분노에 혼재화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저 모습은 좀 더…….
‘자기 자신, 목숨보다 소중한 것에 위기가 닥쳤다는 걸 깨달았을 때에 가깝다.’
잠깐 생각하던 환인은 고개를 돌려 온몸이 꽁꽁 묶인 채 넋이 나간 두 명, 들개 전사단의 생존자를 응시했다.
오른쪽 어깨가 뿌리까지 잘려 나간 습격자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유르파가 들고 있는 두루마리에 시선을 고정 중이다.
환인은 그 습격자에게 약화시킨 영혼 폭발 구슬을 날렸다.
쿵!
=…커헉!=
직경 3m의 폭발을 정통으로 맞은 습격자는 전신을 쇠뭉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작게 피를 토하며 나뒹굴었다.
몸을 묶고 있던 밧줄과 입고 있던 의복, 후드 망토는 단번에 걸레짝이되어 너덜거렸고 그 사이로 맨살과 젖가슴이 드러난다.
환인은 별 생각 없이 재차 영혼 폭발 구슬을 던졌다.
쿠궁!
=아악!=
두 번의 폭발에 옷은 기능을 완전히 상실해 천쪼가리로 변해 흩날렸다. 알몸이 된 습격자는 전신에 타박상과 찰과상을 입은 모습으로 피를 뿌리며 쓰러져 신음을 흘린다.
=윽……! 흑, 으극…….=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신음하는 적색 머리카락과 여우 귀 여자.
환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그의 여자들은 물론이고 분노에 잠겨가던 여덟 영혼과 르아웬까지 굳어서 쳐다보기 시작한다.
갑자기 왜 저러시는 거니?
모르겠어. 무언가를 알아차린 거 같은데.
모두의 시선이 모였지만, 환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멀리서 방벽 패널을 꺼내 알몸이 된 여자를 수색했다.
패널을 막대기로 만들어 입 안의 어금니나 입천장과 입 바닥을 확인하고 음부에 깊숙이 찔러넣어본다. 마찬가지로 항문 쪽도 여자가 괴로움의 숨을 토해낼 정도로 깊이 밀어 넣어 체크한다.
‘숨겨둔 한 수 같은 건 없군.’
있더라도 영혼 폭발의 충격에 부서졌거나 고장 났을 테니……. 환인은 입가에 한줄기 핏물을 흘리며 헐떡이는 여자에게 다가가 머리채를 틀어쥐고 들어 올렸다.
=아윽……!=
“두루마리의 정확한 효과를 들었을 때 네 눈빛이 변하더군.”
=…….=
“말해라. 그자에게 어떤 지시를 받았었지.”
=나, 나는…….=
크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혼란에 빠져있음을 보여준다. 고통과 몸수색이라는 치욕을 받았음에도 그보다 더 큰 충격으로 분노가 덮어 씌워진 모습이다.
그 충격이라는 건 보나 마나 영혼의 가시화와 혼재화 징조이겠지. 환인은 일부러 살기를 지우고 담담하게 물었다.
“이 습격이 끝나면 너만은 살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었나.”
=……!=
흠칫하고 떨리는 어깨. 긍정임을 뜻하는 반응에 지켜보던 여덟 영혼이 지옥의 울음소리 같은 귀곡성을 흘리며 외팔이가 된 여자를 향해 기어 오려 한다.
「크뤼그으으……!」
「이…… 짐승만도 못한 개년이이……!」
「죽일 거야……! 죽일거야아아악…!」
“닥쳐라.”
분노에 미쳐 날뛰려 하는 여덟 영혼을 강제력으로 침묵시킨 환인은 다시 외팔이 여자에게 눈길을 주었다.
방금 소요가 충격요법이 되었는지 머리채를 잡힌 여자, 크뤼그는 이성을 되찾은 모습으로 이를 악다물고 환인을 노려보며 말했다.
=나, 나는 카드람 이니티 알소프 영주님의, 먼 친척 가계의 차녀다. 나를… 현혹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다.=
“알소프 영주가 우리를 죽이려고 습격자를 보낸 건 맞다는 이야기군.”
=……?!=
이런 멍청한 년이 집단을 이끌고 있다니. 환인은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팔을 휘둘러 크뤼그를 길바닥에 내동댕이친 뒤 혈광을 흘리기 시작하는 여덟 영혼을 향해 물었다.
“무엇이 네놈들을 불안과 분노에 떨게 만드는 거지.”
덜덜, 분노에 어깨를 간헐적으로 떨며 헐떡이던 여덟 영혼이 두서없이 소리친다.
내 아들이, 딸이, 노모와 아빠가, 여동생이, 가족이 알소프 영주의 관리를 받고 있다는 것.
크뤼그 저 빌어먹을 년이 같은 처지라 했지만 이제 보니 자신들의 감독역이었다는 것.
가족을 지키기 위해, 부양하기 위해 하기 싫었지만, 이번 습격 지령을 받아들였다는 것.
“그렇군. 성자를 공격하기까지 한 작자가 죽은 사냥개를 다루기 위해 잡아놓은 볼모를 챙길 리 없겠지. 비밀이 새어나갈 수도 있는 노릇이니 묻어버리는 게 손쉬운 해결책일 테니까.”
「흐으으으윽……!」
「아아악! 안 돼…!」
「니안! 니아안…!!」
애써 외면하던 사실이 환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자 여자 영혼들이 일제히 광기의 패닉을 일으킨다.
“입 다물고 정신 차려라.”
강제력을 담은 지시에 광기를 일으키려던 여덟 영혼은 우뚝 멈춰서서 혈광이 뚝뚝 떨어지는 눈동자로 귀기를 피워 올리기 시작했다.
오울링에서 잔혹하게 살해당했던 시더=루브이주처럼 여덟 영혼의 팔다리가 검은색으로 타들어간다. 몸 주위에는 적색의 불길한 빛이 흐르고 눈도 이제는 혈안血?이 되었다.
자신들이 성자를 공격해 몰살당했으니 자신의 가족 역시 대역죄인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하리라는 것에 완전히 미쳐버린 모양새.
“이성을 잡아라. 타락에 무너진다면 이 자리에서 소멸시키겠다.”
「…….」
「…….」
환인의 강한 의지가 담긴 강제력에 여덟 영혼은 광기와 분노를 가슴속에 모아둔 것처럼 조용해졌다.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여자 영혼들은 스르륵— 환인의 앞에 알몸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대표로 회색 들개 혈통의 니누가 피눈물을 흘리는 얼굴로 환인에게 애원한다.
「성자님을 공격한 죄를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저희의 혼이 나락으로 떨어져 소멸하더라도 달게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만, 다만…… 부디 한 줌의 아량을 베푸셔서… 저희가, 카드람 그 작자를 지옥으로 데려갈 수 있도록……! 알소프 성까지만 동행을……! 허락……!」
말을 하다 보니 다시 광기가 일어나는지 부들부들 떨며 애원하는 니누와 그 뒤의 일곱 영혼을 바라보던 환인은 냉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을 들어준다면 스스로 원념을 모두 내려놓을 건가.”
「예…!」
「그놈과 그놈의 가족들만 죽일 수만 있다면……!!」
「흐으으으…….」
=저 성자의 말을 듣지 마라! 카드람 영주님은 너희들의 가족을 절대 소홀히 하지 않아!!=
땅에 내동댕이쳐졌던 크뤼그가 작게 피를 토하며 소리쳤지만, 진실을 깨달은 영혼들은 원한과 증오가 담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니누가 서늘하게 웃으며 한과 원념이 담긴 목소리를 낸다.
「후후후. 호호호호호. 크뤼그, 크뤼그 이 불쌍한 년. 너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솥에서 삶아진 사냥개일 뿐이거늘. 아직도 수백 토막으로 만들어 생으로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그 인간을 두둔하느냐.」
「우리가…… 우리가 카드람 그 개자식에게 이때까지 어떤 일을 당했었는데……!」
「너만! 우리가 그놈의 노리개가 되어, 장난감이 되어 굴려질 때도 너만 무사했지! 이 빌어먹을 년!」
「받아먹은게 많으니 아직도 꼬리를 흔드는구나! 더러운 사생아의 쓰레기 앞잡이 년!」
=아니야……! 의뢰를 수행할 때마다, 카드람 님이 하사하신 은화와 금화가 생각나지 않는 거냐?! 그것은 전부 그분의 은총……!=
환인은 어떻게든 상황을 무마하려 애를 쓰는 크뤼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조용히 끼어들었다.
“너는 들개 전사단을 맡은 위치인듯하니 묻지. 알소프 영주는 들개 전사단의 전사들 가족을 정말로, 아무런 사심 없이 그들을 보살폈다고 짐승신님의 이름에 걸고 맹세할 수 있나.”
=…….=
환인의 질문에 크뤼그는 물론 니누 외 7명과 그의 여자들까지 숨을 멈추었다.
여기서 짐승신님의 맹세를 언급해? 대체 무슨 생각으로……? 라는 경악이 깃들어있는 안색이다.
환인은 그런 낌새를 느꼈지만 일단 말을 꺼냈기에 천칭으로 크뤼그의 명치를 누르며 대답을 강요했다.
“대답해라.”
=……!=
“대답을 못하는 것을 보면 뻔한 일이지. 직업자로 구성된 전문 집단을 운용하는데 은화와 금화 같은 금전적 보상은 당연한 일. 오히려 기만이군. 후한 보상을 내놓았더라도 사냥개들의 가족을 인질과 볼모로 삼았다는 사실은 변치 않을 테니까.”
고개를 푹 숙이는 크뤼그와 뭔가 이상한 느낌으로 조용해진 좌중을 둘러본 환인은 여자친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살아있는 증거물이 자살하지 못하도록 잘 묶어놔라.”
=네.=
=응.=
전사단의 생존자 둘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게끔 꽁꽁 묶어서 한 데 던져놓고 환인에게 돌아간 그의 여자들은 우리가 실수했다는 얼굴로 그의 팔을 꼭 붙잡았다.
그녀들의 손에 잡힌 환인은 굳은 각오가 담긴 여자친구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왜 그러지.”
=주인님이 이 세상의 지식이 편중되어있다는 걸 잊은 저희 잘못이에요.=
=진짜. 설마 거기서 신님의 맹세를 요구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 심장이 철렁했다니까.=
=자기한테 필요한 건 정말 정말 기본적인 거라 사람들이 말로도 꺼내지 않는 것에 대한 지식이야.=
「환인 님. 지금부터 그걸 알려드릴게요.」
그녀들의 손에 끌려 마차 안으로 들어간 환인은 단기 집중 교육을 받았다.
1. 신님의 이름으로 한 맹세는 타인에게 함부로 요구해서는 “절대!” 안된다는 것. 자칫 신의 저주와 분노를 살 수 있다.
2. 각 국가의 주도에 있는 사도님들은 신님의 지상 대행자나 다름없다. 절대절대 무례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3. 신님은 자신을 자주 언급하는 자를 주시한다. 그 이름으로 나쁜 짓을 했다간 영겁 불멸의 저주를 받을 수 있다.
4. 신님의 의지는…….
5. 사도님은…….
6. 주도의 성족과 왕족은…….
“…….”
여자친구들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환인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들의 교육에 대해 요약하자면 ‘신은 오직 경외해야 할 대상. 사도는 절대복종해야 할 대상.’으로 극공경해야만 하는 존재다.
사실과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불문율인지, 아니면 신적인 존재에 대한 경외와 숭배심이 만들어낸 규칙인지 이해조차 되지 않는 이야기들.
현대인인데다 감성과 감상이 일반인과 다른 환인에게 잘 납득가지 않는 이야기다. 하지만…….
“알았다. 앞으로 그 점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도록 하지.”
해당 지역에서는 해당 지역의 법을 따라야지. 여자친구들이 걱정하지 않도록.
이야기가 끝나자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르아웬=아기오시스가 에흠, 작게 헛기침을 냈고 환인은 안느가 손에 쥐고 있는 수정구로 시선을 돌렸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르아웬.”
저번 로탄 산지에서 통신할 때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는 모습에 르아웬은 작게 웃으며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아니에요. 굉장한 것을 보게 되어 오히려 이쪽이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네요.]
“땅신 교단의 추기경께서 보시기에 어땠는지.”
작은 미소와 함께 예의를 차린 접대성 멘트에 르아웬도 빙그레 미소 지으며 대답한다.
[어떻게 환인 님이 성자로 짧은 시간에 발돋움하셨는지 알게 된 장면이었습니다. 영혼이 급격한 혼재화를 이루는데도 침착하고 담대하게 대응하시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어요. 그래서, 그 일 때문에 연락을 주신 건가요?]
“정확히 보셨습니다. 지금부터 알소프로 직행할 생각인데…….”
땅신 교단의 추기경이고 자신들을 주시 중인 르아웬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예법상 오늘 습격이 벌어지게 된 경위를 간략히 설명해주었다.
“……그래서 알소프 영주를 찾아가 사죄를 요구할 생각입니다.”
[혹시 그 여덟 영혼을 그 일에 쓰실 생각이신가요?]
“쓴다는 것은 잘못된 표현 같습니다. 비록 저를 공격한 이들이지만 죽은 자에 대한 최저한의 예우로 그녀들이 바라는 것을 들어줄 생각일 뿐입니다. 알소프 영주와 맺은 은원은 그 후에 해결할 일이지요.”
아 다르고 어 다르다지만 그게 그거 아닌가.
환인의 이야기에 비자룩스 혼재 사건을 기억해낸 르아웬은 이걸 경고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다.
오늘 일을 보았더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비자룩스 혼재 사건과의 연관성이 보였던 것.
이 이슈가 확대된다면 외부의 관심이 비자룩스 혼재 사건에 다시 향할 테고 필연적으로 혼재 사건이 의도적인 테러로 재해석될 수도 있다. 그리되면…….
‘오울링의 생존자 고족 일가가 파르히스트에 의탁하는 바람에 파르히스트도 개입된 상태이고…… 자칫 라드세아 남부로 전화가 번질 수도 있는 일이야.’
가을날의 갈대밭에 불을 놓은 것처럼 활활 타오르게 될 텐데 그걸 눈앞의 남자가 모를까?
‘그건 아니겠지.’
르아웬은 깊어지려는 생각을 적당히 끊었다.
[알겠습니다. 성자님께서 연락을 주셨다는 것은 이 안건에 대해 땅신 교단의 보증이 필요하신 것이겠지요. 증거는 수정구에 담아놓은 영상으로 충분히 해결될 것이니 제 이름으로 인가를 내리겠습니다. 그 외에 필요하신 것이 있으신가요?]
“이번 습격에 대한 사죄를 요구하기 위해 알소프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널리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오히려 악수가 될 거예요. 절궁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절궁?은 무슨 비유법이지. 호랑이 굴에 스스로 들어간다는 것과 같은 속담인듯한데.
“괜찮습니다.”
[……알겠습니다.]
이미 그를 돕기 시작한 마당이다. 불가해한 요청이라 해도 최연소 영성이 된 그와 밀접한 관계를 맺기로 한 이상 믿고 움직여주어야겠지.
[그리고…… 사과드릴게요. 이렇게나 일찍 연락을 주실 줄 몰라서, 아직 추기경 회합이 추진 중이라 성자님께 유의미한 소식을 전해드리지 못할 상황이에요.]
‘메리아놀에 우리를 안전하게 초대하기 위해서 준비하겠다는 그 이야기인가.’
아무래도 메리아놀의 중추에 차원 방랑자를 강제 소환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아직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환인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재차 눈치를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괜찮다고 대답해주었다.
영도까지는 적어도 2주에서 3주의 시간이 남아있으니까.
그 후 환인은 유르파에게 통신 수정구를 요청해 백중강과 연결,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알려주었다.
[짐승신님 맙소사! 즉시 기사단을 파견토록 하겠습니다!]
성자 습격의 살아있는 증거물이 있다고 하자 희색을 띈 백중강은 즉시 경갤리선을 일행이 있는 곳으로 파견했고, 연락한지 5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좌우에 20개의 노가 돋아난 세 척의 갤리선이 120m 높이의 절벽 해안으로 다가왔다.
선두의 갤리선에서 날아오른 것은 프라버의 제 1기사단인 창천 기사단의 부단장 및 상급 기사 5인.
전원이 조인족이자 5급 이상인 상급 기사 다섯은 환인에게 척, 경례를 올린 뒤 크뤼그와 다른 1명을 압송해갔다.
복잡한 절차나 이야기 없이 빠르게 움직여 사라진 기사들. 그리고 휘하 기사를 먼저 보내낸 부단장은 날개깃털 투구를 옆구리에 끼운 채 허리를 꾸벅 숙였다.
누군가와 닮은 알류겔 호수의 에메랄드빛 같은 머릿결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여러모로 프라버를 신경써주시는 성자님께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백중강 영주 대리께서도 무한한 감사의 말씀을 전해달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이것은 영주 대리께서 성자님께 드리는 감사의 마음이 담긴 보상입니다.=
“…….”
건네주는 주머니 속에는 족히 35금화는 할법한 5급 위상석이 네 개나 들어있었다.
그걸 받아 챙기면서도 누군가를 닮은 잠시 바라보고 있자니 그 시선을 눈치챈 부단장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백치령 군사령께서는 제게 사촌 언니가 되십니다.=
“그랬군요. 어쩐지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예. 그리고 그…… 저 개인적으로도 성자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잘 지내고 있나 보군요.”
=…예? 아… 예. 무척 잘 지내고 있습니다. 사람이 완전히 바뀐 것처럼 저도 동생이라 불러주시니까요.=
“그 소식이면 됐습니다.”
부단장은 그 이상의 이야기는 필요 없다는 성자의 기색을 읽고 조금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데……. 역시 이 정도는 되어야 그 언니를 180도 바꿀 수 있는 거겠지.
부단장은 다시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깃털 투구를 쓰고 절벽을 뛰어내렸다.
등에 난 녹색 날개가 활짝 펼쳐지며 프라버로 선회하는 갤리선을 향해 활강하는 부단장.
그 아름답고 매끄러운 비행에서 백치령을 떠올리던 환인은 몸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친구들, 그리고 여덟 영혼에게 지시를 내렸다.
“출발한다. 들개 전사단 너희는 알아서 쫓아오도록.”
=응.=
=네.=
「예…… 성자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