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3화 〉 427 알소프로 가는 길
* * *
이실리테는 저쪽에서 백려강과 환연하고 셋이서 잘린 팔이 쥐고 있는 두루마리를 조심스럽게 회수하는 유르파를 바라보다 물었다.
=주인님.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환인은 시체에서 일어날 영혼을 기다리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습격받은 영혼사이자 성자로서 표면적인 대처와 보복을 해야지. 안느, 땅신 교단에 연락 가능한가.”
=응? 가능해. 습격을 알려서 소식을 퍼트리게?=
자신의 기운을 북돋아 준 비상의 머리며 뺨, 부리를 쓰다듬어주면서 고마워하던 안느가 한결 평온해진 얼굴로 물었다.
“그래. 평범한 영혼사도 아니고 성자를 죽이려 했다는 식으로 꾸미면 사방에서 비난이 날아들어 알소프는 자연스럽게 고립될 테지. 프라버의 백중강에게도 이 소식을 전해주면 크게 기뻐할 거다. 저쪽의 목줄에 이빨을 박아넣을 기회가 될 테니까.”
=흠흠. 그 정도면 알소프에게 충분한 철퇴가 되겠네……. 아니 잠깐, 표면적인 대처에 보복?=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에서 장거리 통신 수정구를 꺼내던 안느가 이상한 점을 깨닫고 눈을 크게 뜬다.
“우리 힘이 조금만 약했다면 너희들은 습격자에게 죽었을 거다. 정황을 봐선 날 납치하려는 낌새였지만 너희는 데리고 갈 이유가 없으니까. 그런 지시를 내린 놈에게 솜방망이 철퇴만으로는 만족 못 한다.”
아니 영혼사를 공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텐데 그게 솜방망이 철퇴라는 건…….
안느는 문득 환인과 첫날밤을 치를 때 그에게 맹세한 것을 떠올렸다.
그가 나쁜 유혹에 빠져 사람의 길을 벗어나지 않도록 옆에서 도와주겠다고 한 것. 그가 자신에게 잠시나마 기댈 수 있는 장소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한 것.
후자는 지금도 강해지기 위해 노력 중이다.
예전과 비하면 가늘디가늘어진 손으로 주먹을 꼭 쥔 안느는 며칠 전 환연의 경고를 떠올리며 바로 지금이 나설 때라고 생각했다.
그가 선을 넘어 되려 사회의 지탄을 받지 않게끔 옆에서 제동을 걸어주는 것.
=도령. 도령의 분노는 이해해. 나도 도령을 습격한 알소프에 크게 분노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무고하다고 할 수 있는 알소프의 시민들이 휘말리는 일은 해선 안 된다고 봐. 그 시민들의 목숨을 위해서가 아니라 도령의 앞날을 위해서 말이야.=
“…내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짐작한 건가.”
=일단 알소프 영주는 때려죽이고 영주와 가까운 친인척도 봐가면서 모두 도륙 내버릴 생각 아니야?=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린덴 폐촌락의 일이 알려지면 명성이 더더욱 올라 비자룩스의 녹색 성자라는 이름은 남부와 중부 전체로 퍼져나갈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명성을 올렸다는 점에서 이제는 확실하게 목표량을 달성한 셈이고,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정당성과 명분을 챙겨줄 테지만 그렇다고 마냥 좋은 일은 아니다.
명성이 높아지니 그만큼 음습한 행동을 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 때문에 환인은 몇 가지 우회적인 보복 방식을 생각하고 있었다.
‘알소프 영주는 죽이고 연좌제를 직계 2세까지 적용하려면…….’
자신이 쓸 수단은 정해져 있다.
영혼을 이용해 혼재를 퍼트렸다간 영도에서 조사라도 나오면 용의선상에 자신이 올라갈 가능성이 크다.
이 세계의 고위층을 향한 범죄 추적 방식은 꽤 마법적이라 어디서 자신의 행적이 흘러나갈지 모르니까 영혼사의 힘을 써서 보복하는 것은 제외.
선택한다면 정당성이 이쪽에 있는 만큼 직접 찾아가 단죄라고 하며 정면에서 목을 베어 죽이는 쪽이다.
당당하게 습격자를 찾아가 죗값을 받아내는 것, 고위 호족들 사이에서 이제는 할 수 없는 로망 같은 것으로 치부되는 방식이다. 알려진다면 오히려 호응을 보내오겠지.
물론 고위 호족이자 한 지역의 주인인 영주의 자존심은 철근 콘크리트보다 딱딱하고 단단하다.
영혼사 나부랭이가 죗값을 받으러 왔다고 하면 자존심에서라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발뺌도 하겠지.
그때 자존심을 적당히 건드려주면 자존심에 상처가 난 영주는 ‘당장 저놈의 목을 쳐라!’ 이따위로 나올 확률이 높고, 그때 자위권을 발동해 처리하면 끝.
위험 요소라면 적지에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 점인데 이 부분은 땅신 교단을 통해 알소프에 들어간다는 것을 사방팔방에 알리는 정도면 된다.
알소프도 자신들의 행동이라는 걸 숨기고 이쪽을 납치하려 한다는 점에서 이목을 매우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니까.
남의 이목을 그렇게나 신경 쓰는 놈이다. 사방의 시선을 끌어모으면서 자신의 도시에 입장하는 영혼사를 해친다는 선택지 따위, 알소프의 영주는 절대 고르지 못하겠지.
여기까지 생각하던 중 안느의 제동이 들어왔던 것이다.
환인은 ‘어때? 내 말이 틀려?’ 긴장하며 눈빛으로 묻는 안느를 잠시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맞다. 직접 찾아가 우리를 공격한 죗값을 받아낼 생각이었다. 자존심 강한 호족이라면 절대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이쪽을 공격할 거라 예상하는 만큼 그걸 이용한다면 알소프 영주의 목을 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의 설명을 들은 안느는 눈을 끔뻑였다. 뭐야, 예상했던 것하고는 다르게 훨씬 건설적이잖아?
“……예상했던 것과 달리 훨씬 건설적이라고 생각하는 얼굴이군. 너는 내가 뭘 할 거라고 예상했었지.”
=엣. 아니, 그게……. 영혼을 혼재화시켜서 알소프에 막 퍼트린다던가? 비상이를 타고 하늘에서 영주성을 향해 문양 강화 영혼 폭발 구슬을 마구 떨어트린다던가 문양 강화 영혼 화살로 영주실이 있는 곳에다가 난사한다던가…….=
=…….=
“…….”
환인과 이실리테의 말 없는 시선에 안느의 새하얀 얼굴이 빨개졌다.
=안느…… 그동안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어?=
=그, 그런 건 아닌데…….=
이때까지 도령의 행보를 보면 꼭 그럴 거 같았는데……라고 생각했지만, 안느는 입 밖에 꺼내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잠시 그 모습을 구경하다 피식 웃은 환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어떻게 보면 날 정확히 꿰뚫어 본 셈이군. 나 혼자였다면 알소프라는 도시 하나를 지워버리는 쪽으로 계획을 세웠을 것이고, 그 수단에는 안느 네가 말한 것도 포함되었을 테니까.”
=아…….=
=음….=
“사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영주성 지반을 지워버린 뒤 매몰시켜버리는 거지만.”
=……그게 가능한 거야?=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
문양 에너지로 강화한 중첩 영혼 폭발은 내파 형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일체의 흙먼지를 일으키지 않았었다.
그 말은 소멸과 관계된 속성이라는 뜻.
문양 강화 영혼 화살로 땅에 깊은 구멍을 내고 그 구멍에 문양 강화 영혼 폭발을 던져넣어 터트리면 지반 아래에는 공동이 생긴다. 지반을 지지하는 기둥이 없는 공동에 충격이 가해지면 필연적으로 무너지기 마련.
“영혼술이긴 하지만 영혼으로 사람을 직접 공격하는 것도 아니다. 지반을 무너트리는 일은 사람들에게 술법의 영역으로 간주할 것이고 피해 범위는 영주성에 국한될 테니 먼저 습격당했다는 명분이 있는 한, 이쪽이 비난과 손가락질을 받을 일은 없겠지.”
=하지만 그 수단을 바로 쓰지는 못하겠네.=
설명 도중 무언가를 깨달은 듯 안느가 진지한 얼굴로 지적했다.
“그래. 그런 것을 이쪽이 공격받아서 보복한다는 단순 선고 이후 실행해버리면 라드세아의 상위 계층이 나를 잠재적 위험 요소로 볼 거다. 그러니 먼저 찾아가서 영주가 스스로 목줄을 죄도록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거지.”
그때 여덟 구의 짓이겨지고 박살 나고 두 동강 난 습격자의 시체에서 영혼이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한다.
환인은 강한 강제력으로 그 영혼을 불러들이며 여자친구들에게 말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있는 이상 얼토당토않은 일은 가능한 저지르지 않을 테니까.”
=으응. 그런 거라면 나도 얼마든지 도울게. 난 도령이 인간으로서 마지막 선을 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니까.=
=저도요.=
“그래.”
자신을 진지하게 걱정해주는 안느와 그 의견에 동의하듯 고개를 연신 끄덕이는 이실리테에게 작은 미소를 지어준 환인은 가까이 다가온 영혼으로 시선을 돌렸다.
「흐아아……!」
「아 안돼. 안돼……!」
「아으아으으흐으으…….」
알몸으로 귀곡성을 흘리며 몸을 비트는 여자 영혼 여덟.
전원 개과인 것은 충성심이 강하다는 종족성에 이유가 있는 걸까.
때마침 두루마리의 조치가 끝났는지 유르파가 술법 두루마리를 들고 백려강, 환연과 함께 돌아왔기에 환인은 그녀들을 뒤에 세우며 이야기를 꺼냈다.
“그럼 취조를 시작하지. 안느, 통신 연결은 어떻게 됐지.”
=어. 잠깐만.=
땅신 교단의 추기경 르아웬=아기오시스, 친구와 통하는 수정구에 위상력을 불어넣은 안느는 잠시 후 수정구에 친구의 얼굴이 떠오르는 걸 보고 환인에게 말했다.
=도령, 연결됐어.=
[뭐? 야, 돼지야. 한밤중에 이게 갑자기 무슨…….]
=르아. 급하니까 내 말부터 들어. 우리가 방금 정체불명의 습격자들한테 공격받았거든? 도령은 습격자들이 알소프에서 보낸 자들이라고 확신하고 있단 말이야. 지금부터 취조 시작할 거니까 일단 보고 이야기해.=
[……하아. 알았어.]
환인은 골치 아픈 듯 미간에 예쁜 주름을 만드는 은발녹안의 미녀를 바라보다가 주먹을 쥐고 잠시 정신을 집중한다.
그리고 손바닥을 펴서 평온의 파동을 방출하는 요령에 영기를 담아 펼쳤다.
화아아아—
회백색의 파동이 한층 강한 빛을 띠고 영혼을 지나가자 회색의 영혼 여덟이 일제히 제 색과 이성을 되찾는다.
평온의 파동에 원기를 담을 수 있다면 영기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게 되는군.’
그걸 지켜본 르아웬은 손등으로 눈을 비비다가 눈썹에 힘을 잔뜩 주며 중얼거렸다.
[…뭐야 저거?]
=조용히 하라니까. 일단 보고 있어. 영상도 당연히 기록하고 있지?=
[당연히…… 아니 진짜 뭐지?]
이지를 되찾은 알몸의 여자 영혼 여덟은 더욱 공포에 질린 얼굴로 환인을 바라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영혼사를 몇 번 봤지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영혼사는 본 적이 없었다.
소문은 틀리지 않았다. 최연소의 영성이 틀림없다. 그러면서 성자라고 불리는 인물. 그런 사람에게 우리가 무슨 짓을……!
육신이 있었다면 오줌을 지렸을 정도로 부들부들 떨던 습격자 영혼들은 하나둘 환인을 향해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그런 습격자들에게 서릿발처럼 차갑고 냉정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내가 묻는 말에 솔직하게 답하도록. 그러지 아니한다면 죽어서도 평온을 얻지 못할 것이다.”
혼령까지 쥐어 잡는 듯한 목소리에 몸을 떠는 것도 잠시. 습격자의 영혼들은 환인의 질문에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나의 습격을 사주한 자의 이름을 말해라.”
「……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여덟 영혼 중 회색 늑대 같은 귀에 회색 머리카락의 여자가 B컵 정도 되는 작은 가슴을 꾸욱 누르며 힘겹게 대답한다.
“영혼의 제약이라도 걸려있는 건가.”
「네헷…! 마, 말을 하려 하면 혼, 혼이 찢어지는 격통과 함께…… 혼마저도 소멸…… 헉, 허억.」
아마도 특수한 종속 계약을 맺은 거겠지.
처음 이실리테와 맺으려 했던 종속 비술 계약을 떠올렸던 환인은 후, 차갑게 웃으며 몇 가지 질문을 연달아 던졌다.
이곳에 오기 전에 어디에서 왔느냐. 거기 도착하기 전에는 어디에서 왔느냐, 그전에는? 또 그전에는?
최종적으로 알소프에서 출발했다는 대답을 끌어낸 환인은 습격자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스무고개 질문을 통해 그 정체마저 밝혀냈다.
“이 정도도 대처하지 못하는 어설픈 계약이라니. 멍청한 자들이 주관했나 보군. 아무튼 알소프의 들개 전사단이라…….”
정체는 물론 누가 보냈는지마저 유추해낼 정보를 넘기게 된 회색 들개 계통의 인견족 여자, 니누는 만사를 체념한 얼굴로 고개를 들고 말했다.
「저, 저희의 목적은, 성자님을 해치는 것이 아닙니다. 대장이 가진 전송용 두루마리로 성자님을, 성으로 모시는 것이었을 뿐이라…….」
=그거 말인데, 너희 이용당한 거야.=
갑자기 옆에서 끼어든 유르파의 이야기에 니누가 ‘이게 무슨 말이지?’하는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네가 말한 전송용 두루마리가 이걸 말하는 거지?=
「예, 예.」
=이거, 전송용 두루마리가 맞긴 한데 두루마리에 표시된 술법진을 잠깐 분석해봤더니 전송 위치가 저어기 알류겔 대호수 한복판으로 나오더라. 이게 무슨 뜻일 거 같아?=
「……!」
유르파는 불쌍하다는 듯이 혀를 차고는 투명한 누르훌 열매껍질로 잘 보존 처리해놓은 두루마리를 흔들면서 확인 사살했다.
=너희 주인은 너흴 토사구팽하려 한 거야. 임무에 성공해서 돌아갔다 해도 알소프 영주는 너흴 성자 살해범으로 몰아서 목을 쳐버렸을 거라고.=
여덟 영혼은 자신이 하려 했던 일의 진실에 대한 경악과 충격, 주인에게 배신당했다는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의심은 할 수 없었다. 저 성자와 성자의 영혼 기사가 거짓말로 영혼이 된 자신들을 우롱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거다.
어, 어떻게 그럴수가. 우리가 얼마나 몸을 바치고 마음을 다해 섬겼는데, 우리를 어떻게……!
영혼들은 절망하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증오했다.
[대체…… 안느 너랑 형부 씨는 무슨 일을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수정구를 통해 지켜보던 르아웬이 척 봐도 보통 일이 아닌 사태에 두통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이마를 감싸 쥐었을 때.
「흐으으윽……!」
「카드람……! 카드라아아암……!!」
「으, 으으으으……!」
여덟 영혼이 분노에 휩싸이기 시작했고 환인의 눈빛 또한 이채로 서늘하게 빛을 발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