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3화 〉 417 타락한 바르둘
* * *
옷과 장비를 챙겨입고 의자에 걸터앉은 환인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개미굴에 그런 장소가 있었구나……. 안느 아가씨 마음이 많이 아팠겠네.=
=내가 이렇게 마음이 약한 줄은 처음 알았어. 혼자 여행 다닐 때는 이렇게 감상적이지 않았는데…….=
=그게 나쁜 건 아니잖아. 감상적이라는 말은 그만큼 감정이 풍부하다는 뜻이니까.=
여자친구들이 알몸으로 정사의 흔적을 닦으며 나누는 대화가 들려온다.
앉은자세로 목과 어깨, 허리를 가볍게 돌리며 스트레칭을 하자 우두둑, 몸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와 함께 약간이지만 몸이 편해졌다.
‘조금 무리했나.’
등급 성장인지 재각성인지 모를 현상으로 거의 이틀을 잠들어있었다.
깬 뒤에는 곧장 키메라의 출현 이유를 찾았고 개미굴로 들어가 밤새 움직이며 전투까지 벌였다.
그 뒤에는 개미굴을 탈출하느라 영기가 급속도로 소비되었고 이후에는 여자친구 셋과 몸까지 섞었으니 아무리 체력 단련을 꾸준히 한 환인이라지만 힘에 부치는 걸 느낀 것.
개인용 아공간 주머니에서 원기 회복용 6급 마도구, 구원??을 꺼낸 환인은 마도구에서 쏟아지는 원기 회복 효과를 받아들이며 눈을 감았다.
몸을 이완시키고 머리를 비우자 여자친구들의 대화가 멀어지고 옅어진다. 이어서 후각과 촉각마저도 희미해지고 세상이 온통 새카맣게 변해 심해로 잠기는 느낌이 그의 오감을 뒤덮었다.
명상 상태에 들어선 그의 감각에 느껴지는 것은 손에 쥔 구원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기운뿐.
자연스럽게 그 기운에 의식을 집중하자 마도구를 쥔 손을 통해 몸 안으로 밀려들어 오는 것이 시각적으로 형상화되고, 이어서 같은 막사 안의 여자친구들, 막사 입구에 앉아 가까이 다가오는 여기사들에게 눈을 부라리는 비상이 인지되더니 주둔지 범위까지 넓어졌다.
횃불처럼 일렁이는듯한 생명의 기운이 전후좌우 무수하게 느껴진다. 어느 기운은 하늘을 날아 이동하고 어느 기운은 땅을 걸어 움직인다.
모두 제각기 다른 움직임을 보이는 기운들.
‘이건…… 문양 강화 영혼 시야와 비슷하군.’
영혼 시야로 보는 빛은 영혼의 생명이고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육신의 생명인가. 갑자기 이건 왜 보이는 걸까. 이것도 성장의 여파인가.
외부 감각을 모두 차단하고 그것에 집중하고 있던 환인은 어느 순간 청각이 열리면서 여자친구들이 재잘재잘 떠드는 소리가 쏟아졌다. 잡생각에 집중이 끊어진 탓이다.
집중이 끊기자 나머지 오감도 차례대로 열린다.
잠시 멍하니 앉아있던 환인은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었다.
이러면 어떠하고 저러면 어떠한가. 기감 확장으로 주변 감시에 편할 것 같지만, 주변 감시는 환연이 훨씬 더 잘한다.
환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섹스 전까지만 해도 50% 정도였는데 지금은 70%가량 빛이 충전되어있다. 영기 흡수 행위를 하면 문양 에너지도 조금씩 회복되는 건가.
=이슬이 꼭지 빨개진 것 좀 봐. 율이 언니가 진짜 제대로 물었나 보다. 많이 아파?=
=조금 쓰라려.=
=으… 미안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서…… 여기 회복제 있으니까 발라줄게!=
=읏. 그, 그냥 제가 할게요. 이리 주세요.=
=아하하. 이슬이 꼭지가 섰네, 섰어. 언니 손길에 느낀 거야?=
=조용히 해…!=
속옷을 입으며 꺅꺅 작게 소란을 피우는 소리에 그녀들을 돌아보자 잘 먹고 푹 쉰 것처럼 얼굴에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여자들은 다들 서큐버스의 자질이 있다더니. 농담으로 치부할 게 아니었군.
환인이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한줌도 안될 것 같은 팬티 차림에 바로 바지를 입느라 젖가슴이 출렁이던 안느가 환인을 돌아본다.
=도령, 벌써 나가게?=
“그래. 그전에 원기를 회복시켜줄 테니 이리 와라.”
겉만 봐서는 필요 없을 듯하지만, 성행위는 남녀 모두 열량을 많이 소비하는 운동이다.
엔돌핀의 과다 분비로 피로를 잠시 잊은 상태일 수 있으니 이후에 있을 전투를 생각하면 손을 써두는 게 좋겠지.
환인이 손을 내밀자 안느는 상반신 알몸으로 냉큼 환인의 옆에 찰싹 붙으며 히히 웃는다.
그런 그녀의 개미허리에 손을 올려 원기를 불어넣고 =하읏.=, 셔츠에 팬티 차림인 유르파와 이실리테도 환인의 품에 안겨 왔기에 그녀의 등 어림을 어루만지며 원기를 충전해주었다. =으읏.=, =아응.=
“그럼 밖에서 기다릴 테니 다 입고 나와라.”
=으응. 금방 입고 나갈게!=
=바로 나갈게요.=
막사를 나서자 후끈한 열기와 함께 기사들이 만들어내는 분주한 소란이 피부에 와닿았다.
기사들이 모여있는 주둔지 공터 쪽으로 잠시 시선을 주고 있자니 푸른색 영혼 상태로 비상의 등에 앉아있던 백려강이 웃으며 날아들었다.
「환인 님, 푹 쉬셨나요?」
“영기는 확실하게 충전했지. 그런데 저곳이 조금 소란스러운듯한데.”
막사 입구를 몸으로 막고 있던 비상이 다가와 들이미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묻자 백려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로 라드하 부대장님이 짐승신님의 포효를 쓰겠다고 하셔서 그 준비 작업 중이라고 해요.」
“그건 뭐지. 마도기인가.”
「네. 거대 괴수 퇴치용 7급 결전 마도 병기랍니다.」
“이름이 거창하군. 성능도 그 정도인가.”
「저도 풍문으로 들었지만…… 명중하면 7급 이형종도 일격에 분쇄한다고 해요.」
7급 이형종. 아직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한 등급이지만 환인의 머릿속에는 자연스럽게 푸른 불꽃 호랑이와 산거북이 떠오르고 있었다.
펄럭, 천이 거두어지는 소리와 함께 여자친구들이 나오는 것을 본 환인은 백려강에게 영기를 약간 흘려 넣어주고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라드하 부대장을 만나 듣는 게 좋겠군.”
=무슨 이야기?=
“라드하 부대장이 대 괴수용 결전 병기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질문은 안느가 던졌지만 놀란 반응은 유르파에게서 나왔다.
=결전 마도 병기? 정말? 몇 급짜리인데?=
“려강이 7급이라 하더군요. 그게 어떤 건지 알고 있습니까.”
기사들이 모여있는 공터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묻자 유르파가 옆으로 바짝 붙으며 눈을 반짝였다.
=응응. 발사관은 희귀하고 고가의 보석이랑 신비 금속으로 만들고 발사체는 7급 위상석을 사용하는데 현존하는 부여 기술의 정수가 결집된 병기야.=
=설마 7급 위상석을 한 발에 쓴다는 건 아니겠지?=
=그 설마가 진짜란다.=
=헤엑.=
“7급 위상석을 통으로 사용한다면…… 강력하긴 하겠군요.”
6급의 흔한 위상석도 금화 몇백 닢은 한다. 7급이라면 금화가 천 단위일 텐데 그런 걸 한 번에 소모한다니.
=맞아. 발사 준비 작업에 시간이 되게 걸리지만, 위력만큼은 절륜하다고 표현할 정도야. 그걸 쓸 정도라니… 라드하 부대장님이 이 사태를 정말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으신가 보네.=
하긴. 지구에도 비싼 미사일은 한 발에 수십억에서 수백억은 하니.
환인과 그의 여자들이 공터에 다가가자 여기사들이 공손히 묵례하며 자리를 비켜준다.
그 사이에서 일행은 대포의 포신과 흡사하게 생긴 일자형 쇠막대기를 볼 수 있었다.
길이는 7m에 지름 1m정도. 현대의 밀리터리 관련자가 본다면 당장에 “저거 자주포 포신 아냐?”할 정도로 택티컬한 모양새다.
‘……정말 자주포 포신을 떼어온 건가.’
한쪽에는 정확한 원통형 구멍이 나 있는데 안쪽에 강선이 보인다. 반대쪽에는 카트리지와 흡사하게 생긴 사각형 구조물이 붙어있었는데 환인이 보기에 그것이 방아쇠로 보였다.
그 외에는 포신 좌우에 각각 2개씩 손잡이가 달려있는데, 네 명이 각자 하나씩 잡고 날아오르고 다른 한 명이 카트리지 쪽에 붙어 방향을 조준해 발사하는 방식.
환인이 결전 병기를 살펴보며 현대 지구인의 지식이 가미된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을 때 미로=라드하가 말을 걸어왔다.
=성자님, 오셨습니까.=
“부대장님.”
미로=라드하는 결전 병기를 살피는 환인을 향해 겸연쩍은 듯 어험, 헛기침하곤 조금 으스대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결전 병기를 보고 계셨군요.=
“예. 대강은 일행에게 들었습니다만, 직접 보는 건 처음이라 조금 신기합니다.”
=그러실 겁니다. 결전 병기는 도시 중에서도 마도 공학이 일정 이상 발달한 곳에서만 만들 수 있으며 그 존재도 극비 중의 극비니까요.=
결전병기를 만들어 활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로 진짜 도시인지 아닌지 갈릴 정도라고 자랑스레 말하던 미로=라드하는 환인의 질문에 뻘쭘해졌다.
“그걸 우리에게 보여주어도 괜찮은 겁니까.”
=그, 성자님께서는 영주 대리님에 군사령관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신 분이시니까요.=
으흠, 다시 헛기침한 미로=라드하는 슬쩍 환인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그보다는 저… 성자님과 영혼 기사님들의 무위를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 분께서는 직접 저 지하 개미굴로 들어가 괴물을 겉으로 끌어내실 정도의 실력을 지니셨으니까요. 하지만…….=
“위험하니 이번만큼은 뒤에서 지켜보길 바라시는 거군요.”
=어…? 네, 네. 말씀대로입니다. 성자님 같은 분께서 만에 하나 다치시거나 불의의 사고를 당하신다면 그것은 라드세아, 나아가 니오네브레스 대륙의 크나큰 손실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알겠습니다.”
=…저 괴물은 우리 하늘 기사단에게 맡…… 넹?=
“이런 병기까지 준비하셨을 만큼 치밀하게 계획을 구상하셨을 텐데 어찌 그 노력을 무시하겠습니까. 다만 말씀하신 것처럼 만에 하나가 있으니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큼은 허락해주시길.”
=어… 아아, 네. 물론입니다. 예.=
선뜻 물러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미로=라드하는 잠깐 버벅댔지만, 이내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숙여 보인 뒤 기사들을 다그쳐 준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환인이 공터 가장자리까지 물러나자 안느가 조금 불만인 얼굴로 중얼거렸다.
=우리가 다 준비해놓은 건데…….=
“아깝게 생각하지 마라. 전투라는 것은 늘 계획대로 흘러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니까.”
=주인님은 다른 변수가 발생하리라고 보시는 건가요?=
“아니. 그저… 결전 병기로 타락한 바르둘을 간단히 해치울 수 있다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너희가 위험 부담을 안고 돌격하는 것을 보지 않아도 되니까.”
그럼 우리의 안전 때문에 물러섰다는 건가?
자신들이 못 미더워 물러났다고 생각한 이실리테와 안느가 조금 의기소침해지자 유르파가 작게 웃으며 그녀들을 위로했다.
=사실 키메라는 돈 안 되기로 유명한 괴물이야. 저런 인공적으로 탄생한 키메라가 아니라 태생부터 조류, 파충류, 포유류 세 가지 머리를 달고 태어난 키메라는 진수로서 추앙받는 만큼 퇴치하면 막대한 물질적 이득이랑 명예를 얻을 수 있지만 저런 건 말 그대로 쓰레기 덩어리거든.=
「어째서? 저놈 정도면 못해도 6급 괴물일 거 같은데, 등급이 높을수록 시체가 비싼 게 정석이잖아.」
잠에서 깼는지 유르파의 가슴골 사이에서 환연이 모습을 드러내며 묻는다.
=그건 맞지만, 순수할수록 가치가 높아지는데 저 육체는 시체를 끌어당겨 이뤄낸 몸뚱이잖아. 인위적으로 살점을 모아 만든 육체라서 더럽고 오염되어있기 마련이라 저런 몸뚱이는 그냥 폐기물이야. =
=그러니까 돈은 안되면서 위험하기만 한 적이라는 거네.=
=하지만 전투를 돕지 않으면 나중에 뒷말이 나오지 않을까요?=
=아냐~. 자기랑 아가씨들이 저 지경이 될 때까지 놀기만 한 것도 아니잖니? 하마터면 매몰될 뻔한 상황을 헤쳐 나오면서까지 개미굴을 무너트렸으니까 말이야. 그러니 여기서는 그냥 물러나서 뒷짐을 지고 지켜보는 게 좋다고 봐. 그래도 욕먹지 않을 거니까.=
이야기를 경청하던 백려강이 호기심에 물었다.
「저 키메라 안쪽에는 본체가 있잖아요. 그 본체도 가치가 얼마 안 되나요?」
=프라버의 결전 병기가 어떤 식인지는 모르지만, 저 형태를 보자면 투사체를 발사하는 방식일 테고 포효라는 단어를 쓴 걸 보면 범위 공격일 가능성이 커. 만약 제대로 적중당한다면 본체도 박살 나버릴 테니까…….=
「돈은 안 되겠네요. 키메라가 만약에 살아남으면 우리가 나설 기회가 올지도 모르는 거구요.」
=맞아. 아까 저 괴물이 촉수 다리로 뿌린 액체 스프레이, 틀림없이 다른 다리로도 뿌릴 수 있을 테고 분사 속도도 빠르니 되게 위험한 공격이라고 봐. 대비를 해둬도 솔직히 아가씨들이 위험해질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는데 저들이 나서주니 고마운 일이지. 그렇다고 저들에게 손해인 것도 아니고.=
저들은 무수한 사망자를 낸 거대 괴수 타입의 괴물을 실질적으로 퇴치하는 데 힘을 썼다는 명예를 얻을 수 있다.
이쪽도 비슷하다. 녹색 성자는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미리 눈치채고 대규모 피해를 낳기 전에 사태를 최소화했다는 명예가 주어질 테니까.
=자기가 참 좋은 타이밍에 빠진 거야. 만약 저들이 실패한다면 오히려 이쪽이 마무리를 짓는 것으로 더 큰 명예를 얻을 수도 있고 말이야.=
유르파의 이야기를 듣다가 와, 감탄하면서 그를 돌아본 여자들은 이내 머릿속에 물음표를 띄웠다.
그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게 굳어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도령,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나 보네.=
“조금.”
환인은 타락한 바르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과 자신의 추리를 들려주었다.
“그토록 집요한 괴물이 저런 형태로 끝을 맺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결전 병기를 사용하더라도 끝나지 않을 거 같군.”
=그럼 싸울 준비를 해두는 게 좋겠네.=
그가 저리 말했다면 높은 확률로 현실이 된다.
전의를 불태우며 말하는 안느에게 고개를 끄덕인 환인 일행은 부대가 출발하는 것을 보고 쿠에들의 등에 올라타 적당히 거리를 둔 채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20분이 지난 괴물의 겉모습은 이전과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차이라면 환인의 문양 강화 영혼 폭발에 찢겨나갔던 살점이 모두 복구되어 본체가 분홍색 역겨운 살점에 다시 파묻힌 상태라는 것.
그랬지만 하늘 기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전투를 개시했다.
의외로 전투는 본격적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빈틈을 만들어 곧장 결전 병기를 쏘는 게 아니라 줄기찬 공격으로 피해를 누적시켜 결전 병기로 마무리를 짓는 방식이었던 것.
끠뼤꼐꼐꼐꼒!!
무너져 흘러내리는 토사 탓에 함몰 지반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허우적대며 분노하던 괴물은 하늘 기사들의 집단 린치에 정상적인 발성 기관에서 절대 안 나올 비명을 지르며 여러 촉수를 미친 듯이 휘둘렀다.
굵기가 7m 정도 되는 채찍이 휘둘리면 이러할까. 귀가 찢어질 듯한 파공성이 울려 퍼지며 수십 미터의 촉수 네 개가 허공을 쉬지 않고 가른다.
하지만 하늘 기사들의 공중 기동은 완충된 파리만큼이나 재빨랐다.
더군다나 앞선 전투에서 부상으로 열외 되었던 21명 중 17명이 회복약으로 치료받고 복귀했기에 기사단의 전력은 90%이상 보존된 상태.
하늘 기사들은 촉수 채찍을 피해 공중전용 2m 길이 세검을 휘둘러 살덩어리 몸체를 지지하고 있는 다리만 집요하게 공격한다.
퀴레레레레레렊!!
38명의 공격에 무수한 상처가 나기 시작한 괴물은 급기야 격노의 포효를 지르며 촉수를 크게 팽창시킨다.
=변이액 분사!!=
=변이액 분사!!=
그 장면에 기사들은 복명복창하며 서로에게 경고했고, 촉수 끝이 가리키는 방향만 피해 오히려 이때가 기회라는 듯이 다리를 미친 듯이 썰어댔다.
그 결과 스프레이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분사되었다. 만약 제대로 분사되었더라도 대기 중인 청술사의 힘으로 방향이 바뀌었을 테지.
이후에도 두 차례, 마지막에는 양쪽 촉수로 스프레이를 뿌렸지만 기사들은 아무도 스프레이에 적중당하지 않았다.
“저 스프레이가 변이를 일으키는 건 확실한가 보군.”
=어떻게 확신하는 건데?=
「안느 바보. 저 괴물이 자기 몸에는 절대 안 뿌리잖아.」
=…앗.=
물론 몇 명은 스프레이에 아주 약간 닿기도 했다. 그러나 수막이라는 마도구가 스프레이 공격을 제대로 막아내는 도구였는지 스프레이에 닿은 하늘 기사들은 재빨리 이탈, 아주 빠른 횡전rolling 비행으로 혹시 모를 몸에 묻은 액체를 털어버리고 본대와 합류해 공격을 이어나간다.
촤작— 츠걱—!
그렇게 끈질긴 공격을 가해 10분 만에 9개의 촉수를 잘라내자 키 60m의 괴물은 자기 몸을 제대로 지탱하지 못해 몸을 크게 휘청였다.
빈틈은 그때 가장 크게 드러났다. 가장 굵고 긴 촉수를 땅으로 늘어트려 몸뚱이를 지지하는 것으로 빈틈을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괴물도 마냥 등신같이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드러난 빈틈을 노려 다시 날아들던 하늘 기사 몇 명을 향해 살점에서 더욱 가느다란 촉수 수백 개를 번개같이 뻗어 그 기사들을 낚아챈 것이다.
세 명의 여기사가 촉수에 붙잡혀 살덩어리 속으로 끌려가는 모습에 비상을 타고 주변을 비행하며 전투를 지켜보던 환인은 그 순간 개입했다.
미리 준비해놓은 하급 정령 구슬로 만든 영혼 폭발을 던져 그녀들이 탈출하게 도와준 것.
폭발에 휘말린 촉수가 끊어지고 터진다. 여기사들도 폭발의 가장자리에 휘말려 날개 깃털이 한 움큼 빠지며 휘청이긴 했지만, 끊어지고 터진 촉수를 걷어내며 무사히 탈출하곤 환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끄뤠례례례례렊—!!!
다잡은 날파리를 놓치게 된 분노와 또다시 환인에게 공격받았다는 사실에 악에 받쳐 온몸을 푸르르 떨면서 비명을 지르는 괴물.
짐승신의 포효라는 결전 병기가 쏘아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중간에 이탈했던 다섯 명의 기사가 자주포 포신 같은 병기를 들고 하늘 높이 날아오른 상태였는데 괴물이 움직임을 멈춘 순간 정수리를 향해 조준, 짐승신의 포효를 발사한 것이다.
거의 총알만큼이나 빠르게, 환인도 영혼 시야 덕분에 단련되고 성장한 안력이 아니었다면 놓쳤을 속도로 쏘아진 주먹만 한 구슬은 정확히 괴물의 살덩어리에 처박혔고 이내 폭발이라 해야할지 난도질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현상을 일으켰다.
쿠궁! 쫘자작—! 쯔자자작—!!
흡사 늑대의 발톱 같은 흔적이 대기와 공간을 무수하게 찢어발기며 괴물의 몸뚱이를 잘게 분쇄해나간다.
그 공격이 얼마나 매섭고 난폭한지 500m는 떨어져 있던 환인도 피부가 저릿저릿함을 느낄 정도였고 비상도 황급히 거리를 더 벌릴 정도였다.
…으하……하…! 어……냐…! …괴물 놈……!…
가녀린 아가씨 답지 않게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는 미로=라드하.
그녀뿐만 아니라 공격에 나섰던 하늘 기사들도 각자 기쁨을 표시하며 괴물의 최후를 손가락질한다.
하지만 환인의 눈빛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어진 상태였다.
30초 넘게 유지되는 난도질의 안쪽에 여기서도 보일 만큼 선명한 영혼과 육신의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죽지 않았다.
환인이 그리 생각했을 때 살짝 약해진 난도질의 틈새, 어른이 몸을 웅크려야 겨우 빠져나올 법한 틈을 통해 사람 크기의 시커먼 무언가가 튀어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날개를 펄럭이던 여기사를 말 그대로 찢어버렸다.
내장과 팔다리, 날개와 부서진 두개골이 꽃잎처럼 흩날리는 가운데 여기사를 찢은 무언가는 또다시 가장 가까운 여기사를 향해 날아들었다.
정확히는 찢어버린 여기사의 몸뚱이를 발판삼아 뛰어올랐다.
퍼헉!
두 번째 여기사는 그것에 반응하긴 했지만 한발 늦어 첫 번째 여기사처럼 박살 나버렸다.
그 순간 환인도 괴물의 형태를 정확히 포착했다.
배와 등에 선홍색 촉수가 열가닥 정도 돋아나 일렁이는, 미이라처럼 빼빼 말라 뒤틀린 듯한 늑대인간.
환인은 촉수로 여기사의 심장과 내장을 붙잡아 꿀렁이며 흡수 중인 괴물을 응시했고 괴물 또한 죽은 생선처럼 탁해진 눈으로 환인을 노려보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