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0화 〉 414 지하 개미굴
* * *
위상석이란 위상력을 다루는 생물이 본능적으로 명치에 생성하는, 이를테면 두 번째 심장이다.
첫 번째 심장은 피륙으로 이루어진 생명의 원초. 두 번째 심장은 세계 불가사의의 근원인 위상력의 결정.
단순한 마수, 괴수에서 한층 더 나아가 성수??, 진수?가 되기 위해서는 두 번째 심장이 반드시 필요하다.
생명의 원초와 불가사의의 근원을 하나로 수합하여 보다 상위 차원의 생물로 진화하는 것, 그것이 고고한 마수와 괴수들의 본능적인 지향점인 것이다.
위상석은 위상력을 다룬다고 해서 모든 생명체에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보다 복합적인 감정의 교류의 발생 없이 생물로서 순수하게 근본적인, 감정의 밑바닥에 위치한 본능의 생물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무구의 과실.
그러한 근원을 산채로 잃게 되면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자발적인 추출과 승계로 진화의 흐름에서 벗어나 평범한 생물로서 삶을 끝마치는 것.
다른 하나는 고차원의 존재가 될 기회를 박탈당해 타락하고 영락해 복수와 분노의 짐승이 되는 것.
개미굴 심장부의 타락한 바르둘은 후자였다.
자신의 영지인 숲에서 생을 보내며 불가사의의 근원을 키워나가던 바르둘은 어느 날 자기 영지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이동하며 신경을 자극하는 존재들을 감지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나설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다섯 중 넷은 모피도 없고 근육도 없어 허약하기 짝이 없는 암컷들. 남은 하나는 수컷이지만 키도 작고 비실비실 허약해 보이는 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배한 늑대들을 보내 신경을 거스르는 것들을 치울 생각이었지만, 놀랍게도 허약한 수컷이 대다수의 늑대를 해치우는 기염을 토했다.
바르둘은 호기심이 일었다.
겉보기에는 툭 치면 죽을 것처럼 허약해 보였는데 뭔가 강함의 요소가 있는 건가? 있다면 자신이 한층 더 강해지는 것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늑대들을 물리고 자신이 직접 나섰다.
이어 바르둘은 허약한 수컷과 싸우면서 놀람에 휩싸였다. 그냥 보잘것없는 놈이 아니라 숲 깊은 곳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주술사 같은 힘을 쓰는 놈이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반사신경과 동체시력도 자신보다 뛰어났고 무기를 쓰는 방식도 자신보다 훌륭했다.
하지만 자신은 우월한 육체에 바위도 부수는 힘과 하루종일 싸워도 지치지 않는 불굴의 재생력을 지녔다. 그에 비하면 이 수컷은 척 봐도 비루하기 짝이 없는 체력에 자신의 절반도 안 되는 왜소한 몸뚱이였다.
지쳐가는 게 눈에 보이는 놈에게 질 이유는 없다.
바르둘은 수컷과 싸우며 자신의 성장 방향을 그 싸움에서 알게 되었고 이 싸움 이후 자신은 좀 더 강해질 수 있다고 확신을 가졌다.
그랬는데 한순간의 실수로 허리가 베였고, 뱃속에서 정체불명의 폭발이 연달아 일어나며 어떻게 손쓸 틈도 없이 삽시간에 패색이 짙어졌다.
바르둘은 죽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끝도 없이 성장해 저 번개 치는 산의 주인에게 도전할 위대한 산숲 늑대의 정점이다. 이런 내가 여기서 이 왜소한 체격의 수컷에게 죽는다고?
급기야 허벅지가 크게 베이며 쓰러진 바르둘은 왜소한 수컷의 무기가 자신의 머리에 당장이라도 꽂힐 것처럼 치켜 올라간 것과, 크기만 크고 단단하기만 해서 쓸데도 없는 진수의 거대한 발이 내려오는 것을 목격했다.
그리고…… 도망쳤다.
왜소한 수컷의 신경이 크기만 할 뿐이라며 업신여기던 진수에게 신경이 쏠린 틈을 타 비탈에서 굴러떨어져 숲으로 도망쳐 들었다.
왜소한 수컷이 뒤쫓아올까 겁먹고 숲속 깊이, 깊은 곳으로 도망쳤다.
그렇게 도망치며 생사를 오가던 바르둘은 어느 순간 두 번째 심장이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내 두 번째 심장! 추운 계절이 20번 지날 시간 동안 쌓아왔던 힘이!
자신을 더욱 고고한 존재로 만들어줄 힘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바르둘은 미쳐버렸다.
그 왜소한 종자가 자신의 심장을 가지고 도망쳐버렸다. 쫓아가서 쳐 죽이고 도로 되찾아야 한다.
그래야 하는데 상처가 너무 깊어 재생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
바르둘은 짐승과 괴물을 닥치는 대로 죽여서 자신의 몸에 욱여넣고 뜯어먹었다. 몸이 찢어지는 고통 따위, 두 번째 심장을 잃어버렸다는 사실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몸을 치료하는 와중에도 자신의 두 번째 심장이 점점 멀어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안돼, 안돼! 초조함에 몸이 채 낫지도 않았지만, 바르둘은 자신의 심장을 쫓기 시작했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왜소한 놈을 쫓을수록 놈과 흡사하게 생긴 것들이 모여 사는 곳, 그리고 똑같이 왜소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진 놈들이 우글거리는 것을 보게 되었다.
거기다 얼마나 빠른지 자신의 다리로는 쫓아가긴커녕 갈수록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바르둘은 포기하지 않았다. 상처가 낫기는커녕 악화하며 배와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팠지만, 자신의 심장을 쫓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것이고 재회의 그날이 그 왜소한 놈이 죽는 날이라고 생각하며 부지런히 움직였다.
높은 산을 넘었다.
우거진 숲을 가로질렀다.
자신에게도 위험한 독충과 괴수, 마수가 넘치는 정글도 지났다.
무수하게 싸웠다. 싸우고 잡아먹었다. 잡아먹힐 뻔도 했다.
그것을 반복하다 보니 언제인가부터 배가 아프지 않게 되었다. 새로운 힘도 얻었다.
그 대가로 바르둘은 자신이 명예로운 산숲의 고고한 늑대라는 사실을 잊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내 심장! 내 심장!!
크오오오오오오—!!!
심장의 기운이 사라졌다. 처음에는 착각인가 했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심장이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영원히 심장을 되찾지 못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정글을 가로지르던 바르둘은 완전히 미쳐 타락해버렸다.
주변에 살고 있던 생물은 전부 때려죽였고 모두 잡아먹었다. 그런데도 풀 길 없는 분노와 광기에 미쳐 날뛰던 바르둘은 검고 딱딱하고 튼튼하고 더럽게 많은 놈들을 때려죽이고 그 우두머리와도 싸워 이겼다.
그러는 과정에서 사흘 밤낮으로 싸웠고, 덕분에 머릿속의 피가 조금 빠져나가 광기가 가라앉은 타락한 바르둘은 끈적하고 질척거리는 악의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왜소한 놈과 똑같이 생긴 것들을 죽이자. 모두 죽여버리자. 남김없이. 전부다!
갈 곳 잃은 원한을 풀기 위해 타락한 바르둘은 새로이 얻은 능력으로 여왕개미를 지배해 인간을 찾아 움직였다.
처음 사로잡은 인간들은 맨주먹으로 때려죽였다. 시체는 여왕개미에게 먹이로 던져주었다.
두 번째로 잡아 온 인간들은 밟아 죽였고 세 번째로 잡아 온 인간들은 찢어 죽였다.
그러던 중 타락한 바르둘은 인간의 뇌가 무척 맛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산채로 뇌를 빨아먹기 시작했다.
뇌를 먹으며 지성이 싹을 틔웠고 여왕개미가 부하를 늘리는 것에서 깨달음을 얻은 타락한 바르둘은 키메라를 만들기 시작했다.
좀 더 빨리 인간을 죽이기 위해서. 좀 더 많은 인간을 사로잡기 위해서.
자신이 명예로운 산숲 늑대임을 완전히 잊은 타락한 바르둘은 증오와 악의와 욕망에 따라 움직이며 촌락을 몇 개나 멸망시켰고 키메라를 끝없이 불려나갔다.
그러던 중 타락한 바르둘은 자신의 심장이 다시 출현한 것을 깨달았다.
뭐지? 사라졌던 게 왜? 어떻게?
잘은 모르지만 멀지 않은 장소다. 되찾아야 한다. 내 심장을!
……그런데 왜 찾아야 하지?
모르겠다. 모르지만 저것은 내 것이다. 내 것은 내 손안에 있어야 한다.
타락한 바르굴은 기운이 움직이는 방향을 예측하고 무리를 이끌었다. 와중에 촌락 세 개를 더 멸망시켰고 새로운 둥지를 꾸렸다.
그러고 있는데 심장의 기운이 멀어지는 게 아니라 이쪽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괴물이 된 바르둘은 끅끅 웃었다.
웃으며 수천 마리로 불어난 키메라에게 명령을 내렸다.
가서 내 심장을 찾아오라고.
끄, 으— 아아……!!
환인은 자신을 향해 울부짖으며 살기를 뭉텅이로 내뿜는 괴물을 묵묵히 응시했다.
자신에게 전투의 희열을 가르쳐준 바르둘.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바르둘이 여기에 있다니, 어떻게 된 걸까.
아니, 상황은 명백하게 하나의 사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날 쫓아왔겠지.’
저 바르둘과 마주쳤던 곳은 지도의 축척이 맞다고 했을 때 이곳에서 1,700km가량 떨어진 장소다.
말이 1,700km지 서울에서 속초까지 직선거리로 150km밖에 안 되는데 그보다 10배는 더 먼 곳에서 자신을 따라왔다고?
환인은 자연스럽게 목걸이로 만들어 목에 걸고 있는 핏빛 위상석을 떠올렸다.
저 바르둘이 흘린 피 웅덩이 속에서 획득한 재생력을 늘려주는 위상석.
이게 이정표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아무리 먼 곳에 있어도 알 수 있는 절대적인 표식 말이다.
……아아아아악—!!!!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지르는 바르둘의 모습을 환인의 눈빛이 훑고 지나간다.
그전까지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던 마음은 바르둘과 침식 그리고 융합 중인 여왕개미에 각성 키메라까지 살펴보았을 때 차갑게 식어있었다.
한순간이지만 그날의 희열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말 그대로 헛된 기대다.
저것은 전사나 무인이 아니라 한 마리의 괴물일 뿐.
퍼버버벙—!
비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타락한 바르둘의 촉수와 연결된 각성 키메라가 희뿌연 기운을 쏘아내고 발밑의 여왕개미도 차오르는 물에 반쯤 잠긴 채로 주둥이에서 산성 용액을 토해냈다.
그 공격들과 스쳐 지나가는 이실리테의 다중 검기 두 자루.
“이실리테, 여왕개미의 다리와 배부터 잘라내라. 환연은 바르둘의 공격에 지반이 무너지지 않게 신경 쓰도록.”
말이 끝난 직후 빛의 검 두 자루의 궤적이 급격하게 꺾이며 한 자루는 여왕개미의 다리를, 다른 한 자루는 여왕개미의 꾸물거리는 길고 허연 배를 꿰뚫는다.
촤악 쓰거걱—
끼이이익……!
그것을 응시하며 일반 영혼 방패를 펼쳐 날아오는 에너지 투사체를 슬쩍슬쩍 비껴 흘린다.
‘영혼술이 성장해서인가. 영혼 방패가 꽤 멀리 떨어진 곳까지 움직이는군.’
대공동과 이곳 21층 통로 사이에는 15m가량의 지반이 존재하니 이 정도라면 영혼 방패의 생성 거리는 30m.
활용성이 대폭 증가한 것과 다름없다.
콰광— 콰과광!
수류탄이 터진 것 같은 굉음과 함께 21층 지반이 들썩거리는 걸 느끼며 환인은 자신을 향해 증오와 격노를 보내는 바르둘의 반응을 주시했다.
다중 검기에 당한 상처로 여왕개미의 배가 찢어져 수백, 수천만의 개미알이 흘러나오며 대공동에 차오르는 물이 허옇게 물들어가고 있지만 바르둘에게서 고통 반응은 나오지 않는다.
핏—
꾸와아아악—!!
장전해놓은 영혼 화살 한 발을 쏘아 바르둘의 촉수와 연결된 각성 키메라의 심장을 꿰뚫었지만, 마찬가지로 꿰뚫린 각성 키메라만 처절한 비명을 지르고 바르둘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융합이 아니라 기생이란 말인가.’
바르둘의 반응을 분석하던 환인은 보이지 않는 공격과 이실리테의 다중 검기에 위기감을 느꼈는지 타락한 바르둘의 패턴이 변하기 시작하는 것을 포착했다.
퍼벙!
놀랍게도 촉수를 채찍처럼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휘둘러 다중 검기 두 자루의 면을 후려쳐 날려 보내면서 이쪽을 향해 각성 키메라를 연달아 집어던지기 시작한다.
정확히 말하면 타락한 바르굴은 일방적인 공격에 열불이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라 복장이 터져 죽을 것 같아 공격 방식을 바꾼 것이었다.
원수가, 원흉이 저곳에 있는데 자신은 여기서 물에 빠져 죽을 걱정을 해야 한다니?
이대로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거다.
그런 타락한 바르굴의 대응에 이실리테는 자존심이 상했다.
=…….=
아무리 거리가 멀어 조작 정밀성이 떨어졌다곤 해도 검기를 쳐내다니.
이실리테가 이를 악물었을 때 환인은 지시를 변경했다.
“이실리테, 날아오는 각성 키메라를 맡아라.”
=네!=
빛의 검이 어지러이 날며 날아오는 각성 키메라를 베어내고 찌르지만, 각성 키메라도 얼뜨기나 팔푼이가 아님을 증명하듯 다중 검기를 후려치고 공격하며 어떻게든 막아내려 애쓴다.
그사이 환인은 점점 수면을 따라 상승하고 있는 바르둘을 응시했다.
천장까지 남은 거리는 불과 40m
여왕개미는 이미 물속에 잠겨 모습을 감췄다. 바르둘의 촉수와 이어진 각성 키메라 셋은 바르둘을 뒤로 감춰 보이지 않는 공격을 대비하는 동시에 견제용으로 에너지 투사체를 계속해서 날리는 중.
그러면서 천장에 닿지 못하고 떨어지는 각성 키메라를 촉수로 잡아 도로 던지기를 반복하는 바르둘이다.
각성 키메라를 던져 다중 검기를 방어하고 튼튼한 덩치의 각성 키메라 셋을 생체 방패로 내세워 안 보이는 공격에 대비한다.
그야말로 견제와 방어의 정석이다.
“아주 멍청하지는 않군.”
그렇다고 해서 똑똑하지도 않다.
정말 똑똑했다면 환인의 행동에서 자신의 반응과 대처방식, 전력과 능력, 지능 수준을 파악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테니까.
‘눈치채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없었겠지만.’
환인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중 검기에 목이 베여 둥둥, 익사체처럼 떠다니는 각성 키메라의 영혼을 끌어당겼다.
유달리 선명하고 은은하게 빛나는 사슴 괴수와 꼬리가 셋으로 갈라진 고양잇과 맹수. 틀림없이 상급 영혼이겠지.
“환연, 강화한 상급 영혼 폭발을 쏠 거다. 폭발에 대비해라.”
「응!」
환인은 그렇게 경고한 뒤 영혼 구슬에 각각 5%의 문양 에너지를 주입, 각성 키메라 세 마리 사이로 기세등등한 바르둘을 향해 황금빛 구슬을 날렸다.
그리고 황금빛 실선을 남기며 날아간 영혼 폭발 구슬 두 개는…….
쩌어엉—!!
폭발이 아닌 직경 8m가량의 중첩된 내파??를 일으키며 타락한 바르둘과 각성 키메라 세 마리를 단번에 집어삼켰다.
=……!=
「으헥?」
내파에 의해 덜덜덜덜 떨리는 공기. 파도를 일으키며 둥그런 내파 주변에서 사정없이 밀려나는 수면.
5초가량 유지되던 내파가 사라진 자리에는 피투성이가 되어 물속으로 가라앉는 각성 키메라 세 마리와, 너무 힘줘서 비틀어 짠 수건처럼 너덜너덜해진 타락한 바르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커헉!
피를 왈칵 토해낸 바르둘은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드는 다중 검기 두 자루를 아직 멀쩡한 촉수를 휘둘러 쳐내면서 환인을 씹어먹을 듯한 증오가 담긴 눈으로 노려보았다.
“……!”
눈이 마주친 순간 환인은 위험하다고 직감했다.
숨겨놓은 비장의 한 수가 없을까 의심하며 계속 주시하고 있었던 건데, 현재 타락한 바르둘의 태도를 보면 비장의 한 수 정도가 아니다.
소름과 함께 가슴 두근거리는 희열이 아드레날린처럼 뿜어져 나온다.
표현하자면 환희일까. 환인은 구멍에서 떨어지며 여자친구들에게 소리쳤다.
“이실리테, 안느! 후퇴한다!”
=네? 네!=
…알았어…!!…
이쪽이 후퇴하더라도 저 타락한 바르굴은 집념으로 자신을 추적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쪽에게 편한 전장을 고르는게 정답.
물론 그냥 후퇴할 수는 없다.
지금 타락한 바르둘은 무언가 변이를 일으키는 듯 근섬유가 압축되는 것처럼 형태가 변하고 있다.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지 않는가.
환인은 가진 중상급 괴물의 영혼 구슬로 영혼 폭발 4중첩을 만들고 10%의 문양 에너지를 밀어 넣었다.
그러자 밖에서 하급 정령 구슬 네 개로 시험했던 것보다 더욱 위험한 진동이 웅웅거리기 시작한다.
좀전의 내파형 영혼 폭발은 그저 황금빛만 뿌렸는데. 이건 중첩의 영향인가.
환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화, 환인? 그거 터트릴 거 아니지……?」
“왜 아닐까.”
「미쳤어!? 우리 다 죽을……!」
“환연, 저놈을 놓치지 말고 주시해라. 놓치면 엉덩이를 때려줄 테다.”
「히잉!?」
환연의 고성을 막은 환인은 근섬유가 압축되고 있는듯한 타락한 바르둘을 향해 위험한 광채를 발하는 황금빛 구슬을 집어 던지고.
‘와라!’
환연의 주변을 맴도는 중급 바람의 정령을 자신의 몸에 강령한 뒤.
“뛰어!”
=……!=
=으잇!=
전력으로 개미굴의 통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한쪽 벽을 틀어막고 내려오던 혼합 키메라와 일꾼 키메라를 학살하던 안느가 시속 50km로 달리는 환인의 옆을 따라붙으며 소리쳤다.
=도령! 갑자기 웬 후퇴야?!=
“타락한 바르둘이 뭔가 위험한 짓을 하려 해서 강력한 영혼 폭발 구슬을 던졌다! 환연, 저 앞쪽 코너의 천장에 구멍을 내라!”
「아잇 진짜!」
환인의 목깃 속에 들어가 있던 환연은 그의 지시에 따라 층을 나누는 천장을 무너트렸고, 세 명이 그 구멍에서 뛰어올라 다시 달리려 했을 때.
……과과과광—!!!
이때까지의 진동과 폭음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충격이 그들을 뒤흔들었다.
땅이 지진 난 것처럼 위아래 좌우로 흔들려 넘어지다시피 땅에 엎드렸지만, 환인은 금방 일어나 얼떨떨해하는 이실리테와 안느의 팔을 잡고 일으켰다.
“억지로라도 달려!!”
……쿠구구구구…….
발밑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진동에 여자들은 소름이 척추를 따라 자궁에까지 닿는 것을 느끼고 헐떡이며 그의 뒤를 따라붙는다.
이어서 들려오는 묵직한 충격음들.
…쿵…… 쿠궁…….
불안에 심장이 떨어지는 느낌이 이러할까. 아니면 사신이 낫을 겨누며 등 뒤를 바짝 따라오는 느낌이 이러할까.
세 명은 진심으로 전력을 다해, 태어나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개미굴 통로를 질주했다.
“환연! 구멍!”
「으야압!」
다행히 달려 나가는 중에 키메라나 개미와 마주치지 않았다. 만약 마주쳤었다면…….
쿠구구구구구……!
=흐윽!? 도, 도령! 이거 땅이 무너지는 진동음이야!=
“말할 시간에 달리는 데 집중해라!!”
환인이 생각했던 최악의 상황과 마주해야 했을 것이다.
생매장된 상태로 중급 땅의 정령과 환연의 능력으로 백수십 미터의 지반을 뚫고 올라와야 하는 일.
산소라던가 탈출 방법은 미리 마련해놓았다지만, 테스트를 통해 안정성을 입증한 것도 아니고 그런 경험은 될 수 있으면 하고 싶지 않다.
그러한 일념으로 환인은 강령 효과에 힘입어 시속 45~55km로 달리며 지정 장소에 천장을 뚫길 환연에게 요구했고, 환연은 정확하게 구멍을 내며 일행의 탈출에 박자를 맞춰나갔다.
…쿠구구구구구……!!
「히익,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어……!!」
“이제 지하 7층이다! 지상이 얼마 안 남았으니 힘내라!”
콰광!
또다시 천장을 뚫고 지하 6층으로 올라온 환인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여기서부터 지하 10m 지점까지 약간 휘어진 나선형 코스.’
거리는 대충 3km.
제시간에 도달할 수 있을까.
지금 발밑을 진동시키고 있는 것은 싱크홀 몇 개가 합쳐져 우발라를 형성하며 나오는 현상일 것이다.
영혼 폭발 구슬을 던질 때 돌로네, 싱크홀이 발생할 거라고 생각은 해뒀지만 설마 우발라를 일으킬 정도의 충격이라니.
그 구슬 하나가 대공동을 무너트릴 위력이었다는 게 환인은 약간 믿기 어려웠다.
………쿵! ………쿵!! ……쿵!!!
등 뒤의 지반이 차례대로 꺼지는 진동이 빠르게 가까워져 온다. 환인은 앞서 달리던 안느가 뒤돌아보려는 것을 눈치채고 버럭 고함쳤다.
“후욱, 뒤돌아보지 말고 뛰어!!”
=흐이잉……!!=
=읏……!=
「으앙!」
체력 배분을 하지 않은 전력 질주로 훅훅 숨을 몰아쉬던 환인은 지반이 무너지는 소리가 두두두두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짧게 짧게 끊어지는 것에 천장까지 무너지지 않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최악은 아닐 터. 하지만 이러한 지반 침하의 충격에 언제 천장이 꺼질지 모른다.
수백만 톤을 넘어 수억 톤에 가까운 질량, 물도 아니고 땅이 위에서 떨어지면 그것 자체만으로도 재앙.
환인은 아껴둔 영기를 계속 아껴 만약 추락하게 되면 환연과 함께 바람을 일으켜 쿠션을 만드는 데 쓸지 고민하다가…….
「히이잉…….」
귓가에서 환연이 울먹이는 소리에 훗, 웃으며 바람의 힘을 일으켰다.
그리고 비상이 전력으로 질주할 때처럼 등 뒤에서 강풍이 불어오게 조작했다.
“강풍을 일으킬 거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라!”
시속 50km에 가까운 질주에 등을 떠미는 강풍이 불자 일행의 달리기 속도가 흡사 고속도로의 자동차만큼이나 빨라진다.
빠르게 감소하는 영기.
점점 끝이 다가오는 직선 코스.
그리고 덜덜덜덜— 불안을 부추기는 잘고 빠른 진동.
환인은 직감적으로 지반이 한꺼번에 무너지려 하는 것을 깨달았다. 몇 초 남았지? 20초? 10초?
지상까지는 천장의 두께는 22m 정도.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에 환인은 눈을 감았다가 뜨면서 말했다.
“모두 멈춰.”
말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멈추는 여자들. 환인은 바로 환연에게 말했다.
“지상까지 천장 두께가 20m 정도다. 후우, 뚫을 수 있겠나.”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문답 무용으로 힘을 쓰는 환연이었다.
잘게 흔들리는 땅과 머리 위로 쏟아지는 막대한 흙무더기와 자갈들.
그리고 연필심보다 약한 빛 한 줄기가 열린 순간.
=흐아압!=
=이야앗!!=
“……!”
이실리테와 안느, 환인이 동시에 뛰어올랐다.
퍽 소리를 내며 땅에서 빠져나온 네 명은 쏟아지는 햇빛에 눈을 질끈 감았다.
쿠르르그그그—……!!
그 순간 지반이 굉음을 일으키며 반경 수십 킬로미터가 푹 가라앉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밝은 햇살. 굉음과 함께 어지간한 도시보다 더 넓게 꺼지고 있는 땅.
그리고 상승을 멈추고 추락을 앞둔 환인과 그의 여자들.
=…….=
안느는 속으로 한숨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이슬이는 다중 검기를 발판 삼아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다. 도령도 방벽과 영혼 방패가 있고 테크닉과 요령은 세계 최강이니까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겠지.
그러나 자신에게 남은 것은 추락뿐이다.
‘좀, 성술 연습 많이 해놓을걸.’
그랬다면 성광의 날개를 익혔을 테고 몇 초 정도는 날 수 있었을 텐데.
한동안 성술 개발에만 힘쓰느라 연습을 소홀히 했던 게 아쉽다.
=뭘 체념한 표정이야.=
가녀린 목소리에 이어 턱, 팔을 잡힌 안느는 눈을 번쩍 떴고 그 순간 어마어마한 힘으로 하늘 높이 내던져졌다.
=으아아앗!? 뭐 하는, 거야 이, 멍충아아아아……!=
자기 탈출에 힘을 써도 부족할 판에 이 멍청이가 무슨……?!
생각하던 안느는 하늘에서 햇빛을 가리며 쏟아져 내려오는 하늘 기사들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느 기사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왔습니다!=
=……!=
터덕, 여기사들 여섯에게 양 팔이 잡힌 안느는 몸이 둥실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안도와 함께 가슴 깊은 안심을 느꼈다.
저쪽에서는 이슬이도 하늘 기사들의 손에 구출되고 있었고 도령은 언제 왔는지 비상이가 등에 태우고 날아오르는 중이다.
안느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기사들에게 물었다.
=어, 어떻게 이렇게 딱 맞춰서 온 거야?=
안느의 질문에 빨간색 머리카락에 주근깨가 귀여운 여기사가 웃으며 대답한다.
=유르파 기사님과 부대의 황술사 대원 덕분입니다. 지하에 지진파가 크게 일어나서 뭔가 일이 생겼다는 걸 눈치챈 황술사 대원이 보고를 올렸고, 저희 부대장님과 함께 계시던 유르파 기사님이 혹시 모르니 대기하자고 제안을 하셨거든요.=
틀림없이 전투가 벌어지는 여파일 테니 혹시나 만약을 대비해 하늘을 배회하고 있었다는 뜻.
=어휴, 정말 영혼 기사님들과 성자님이 땅을 뚫고 뛰쳐나왔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안느는 여기사의 너스레에 하하…… 안도감에 힘이 빠진 웃음을 흘리다가 흠칫, 몸을 떨며 뒤를 돌아보았다.
…쿠워어어어어어……!!
풀풀 먼지를 피워올리며 광범위하게 푹 꺼져버린 지형 속에서 원한과 분노와 증오로 점철된 야수의 포효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