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419화 (419/813)

〈 419화 〉 413 지하 개미굴

* * *

사전 준비는 계획 구상과 마련에 쓴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이루어졌다.

대공동 전체를 단번에 무너트리는 것은 불가능하지만,부분적으로 구조가 헐거워지게 하는 것은 간단하며 주변 지반의 바위와 자갈을 옮겨오는 것도 중급 땅의 정령 아홉이면 수월할 정도.

그렇게 준비작업을 끝내놓고 본격적인 수계??를 펼치기 전,식사를 진행한다.

「맛없어…….잔뜩 힘내야 할 때 기사단 보급 식량 따위를 먹어야 한다니…….」

=야,연이 너 입이 되게 고급스러워졌다?이 정도면 모험가나 여행자가 먹는 음식 중에서 상위10%는 되는 건데.=

하늘 기사단에서 나눠 받은 전투식량으로 배를 채우던 안느가 환연의 푸념에 킥킥 웃는다.

보급품의 항목은 안느의 말대로 상당한 고급품이었다.

육포는 스테이크 사이즈로 두툼하면서도 말랑거려 한우처럼 결대로 잘 찢어지고 맛도 너무 짜지 않아 먹기 좋다.

사과나 복숭아의 과육은 잘 익어서 촉촉하면서도 달콤했고,빵은 조금 퍽퍽하지만,육포를 사이에 끼워 과일과 함께 먹으면 상큼한 고기 샌드위치 느낌이다.

보존 주머니에 들어있어 품질도 신선한데다 나름대로 사회 상류층 기사들이 먹는 거이니만큼 신경 쓴 흔적이 역력했던 것.

하지만 폭군룡의 미궁에서 태어나자마자 환인에게 거두어져 그들이 먹는 음식만 먹으며 지낸 환연에게는 기준 미만으로밖에 안 보이는 음식이었다.

「…그런 거야?」

그랬기에 환연은 안느가 또 자신을 놀리나 싶어 이실리테를 돌아보며 물었고,이실리테는 육포를 돌돌 말아서 빵과 함께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의 나는 곰팡이 핀 딱딱한 빵을 칼로 곰팡이 핀 부분만 긁어내고 먹었고 육포도 소금 덩어리 같은 걸 먹었어.생과일은 가끔 발견하는 과일나무에서 따 먹는 정도가 아니면 구경도 못 할 정도였으니까.이 정도면 평민들도 먹기 힘든 고급품인 게 맞아.=

=맞아맞아.나도 장마 기간에 여행하다가 음식 관리를 못 해서 빵에 곰팡이가 폈던 적이 있었는데,한 번은 곰팡이 핀 부분만 버리고 먹는데 뭔가 물컹한 게 씹혀서 보니까 빵 속에 반쯤 잘린 구더기가…….=

「꺄아악!밥 먹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거야아!」

안느의 생생한 경험담에 환연이 경악하며 빵 부스러기를 그녀의 얼굴에 던져댄다.

안느는 얼굴에 빵가루를 맞으면서 웃다가 남은 빵과 육포 샌드위치를 입안에 털어 넣었고 이실리테도 조그맣게 웃으며 식사를 끝마쳤다.

“그럼 시작하지.”

계획은 간단하다.

지하수맥이 흘러 들어가는 통로를 단번에 무너트려 막는다.그리고 지하23층 대공동의 하나뿐인 출입구 또한 지반을 매몰시켜 막아버린다.

이후 타락한 바르둘과 키메라,개미들의 반응을 확인하면서 살아남은 놈들이 억지로 출구 쪽 벽을 뚫고 탈출하지 않게끔,대기 중인 지하21층 통로로 빠져나올 수 있게 구멍을 뚫는다.

구멍 근처에서 중상급 영혼 강령을 받은 이실리테와 안느가 대기하다 키메라와 개미가 나오는 족족 머리를 깨부수는 것.

「한다!」

환인이 꺼내준400g정령석,자기 덩치보다 더 큰 정령석에 답삭 매달린 환연의 외침과 함께 쿠구구궁,먼 곳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굉음과 함께 불안감을 자극하는 진동이 지하를 휩쓸고 지나갔다.

쿠궁,쿵.쿠구궁…….

=……진동이 왜 계속 이어지지?한 번으로 끝나는 거 아니었어?=

「윽,내가 준비에 너무 심혈을 기울었나 봐.생각보다 더 넓은 범위가 무너져내려 지하수맥이 대부분 막혔어.」

=오,그거 잘된 거 아냐?=

「강바닥에 돌출부를 잔뜩 만들어서……사방공학을 적용한 대로 암석이랑 토사가 안 쓸려내려 가서 삽시간에 막혔는데 그 뒤로도 다 쏟아져 내려서…….」

=물은?물은 어떻게 됐는데?=

「어……엄청난 속도로 대공동을 채우고 있어.금방 물이 차올라.바르둘이랑 개미 여왕이 당황한 눈치고 각성 키메라들도 우왕좌왕하고 있어…….」

안느와 이실리테는 그리 말하며 우거지상을 짓고 있는 환연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야기대로라면 일이 굉장히 잘 풀리고 있는 게 아닌가?그런데 왜 저렇게 우중충한 표정이지?

쿠구궁,콰광­콰구구구……!

이번에는 가까운 곳에서 지진에 가까울 정도로 강한 진동이 터져 나왔다.이 진동은 대공동의 출입구를 틀어막은 거겠지.

=일이 잘 진행되고 있는 거 아냐?왜 울상인 건데?=

“그건 내가 설명해주지.지하수맥이라는 건 이를테면 혈관 속을 흐르는 피,혹은 모유와 같다.유량이 족히 초당 수천 입방미터라면 꽤나 큰 젖줄기라고 볼 수 있을 텐데 그런 맥이 끊어졌다면…….”

=……대지에 여파가 생길 수 있다는 거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수맥 단절로 인한 전단력으로 균열이 생길 수도 있고 지반 함몰이 일어날 수도 있다.호수나 강이 마를 수도 있고 수맥의 변화로 지전류가 발생해 생태계가 크게 변화할 가능성도 있지.”

전단력은 뭐고 지전류는 뭐야?안느와 이실리테는 환인이 하는 설명이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땅에 심대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만큼은 인식했다.

“사태를 해결한 뒤 원래대로 돌리려 했지만…….”

찌이이잉—

말하던 환인은 갑작스럽게 이명 현상이 벌어지는 것을 느끼고 미간을 좁혔고 안느는 지구인의 가청음을 능가하는 귀로 개미 여왕이 발산한 초음파의 잔향을 캐치했다.

이실리테는 검희로 재각성한 이후 날로 상승하고 있는 감각으로 공기가 불온하게 변한 것을 포착했다.

=개미굴의 분위기가 변했어.=

=응.방금 개미 여왕이 휘하 개체에 지시를 내렸나 봐.날카로운 소리가 개미굴 전체를 훑고 지나갔어.환연,대공동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설명 좀 해봐.=

쿠궁,두두두…….간헐적인 진동이 이어지는 중에 눈을 감고 특대 정령석을 안은 채 집중하고 있던 환연이 눈을 떴다.

「물이 무진장 빠르게 차오르고 있어.어느 정도냐면 소용돌이가 생기면서 지반이 낮은 쪽은 이미 물에 잡아먹혔을 정도?여왕개미랑 바르둘은 대공동의 가장 높은 곳에서 부하들한테 화내는 중이야.얼른 벽에 구멍 뚫으라고.」

=구멍이 뚫려서 도망치면 곤란하잖아?!=

「지금 지반 흔들리고 진동 일어나는 소리, 23층 지하 통로 죄다 천장 무너트리면서 나는 소리야.놈들은 절대 탈출 못 해.」

조금 지친 기색이 드러나는 환연의 설명에 이실리테가 우려를 드러냈다.

=그렇게 막 무너트리다가 개미굴이 통째로 무너지는 거는 아니지?=

「안 무너지게 중간중간 흙기둥도 세워두고 있으니까……하으.」

힘겨운 듯 짧게 신음을 흘린 환연이 다시 눈을 감고 실황 해설하는 것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각성 키메라도 벽을 파내고 있고 땅속에 숨어있던 호위 개미도 모두 튀어나와서 무너진 출입구를 파헤치려고 하는데 신체가 전투용이라서 그렇게 효율적이지 않아.대신 식량창고랑 배양실에 있는 일꾼 키메라들이 더 빠르게 파내고 있어서 그쪽을 막는 게 더 힘들어…….」

찌잉—찌이이잉—…….

=…여왕개미가 필사적인가 보네.=

「방금 높낮이 차가 높은 지형에도 물이 차오르기 시작해서 그래.」

“환연.일꾼 키메라들이 있는 곳은 내버려 두고 출입구 쪽 보강에 더 신경 써라.”

「응.……앗,저쪽에서 혼합 키메라가 내려오고 있어.」

=개미굴에 퍼져있는 키메라들이 여왕개미가 부르는 소리에 내려가고 있나 보네.저쪽은 내가 맡을게.=

몸을 돌린 안느가 천벌의 망치와 성벽의 방패를 내밀며 통로 한켠으로 나아가고,얼마 안 가 키야아악—키메라의 포효 소리와 함께 두두두두,달려오는 소리,이어서 쿵,콰광,퍼걱­살점이 터지고 뼈가 박살 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와.대공동 벽 일부가 무너지고 있어.토사 때문에 물이 뿌옇게 변하고 있는 데다 소용돌이까지 엄청 심하게 치고 있어서 여왕개미가 겁먹었나 봐.」

찌이잉—!찌징—찌이이잉—!

「앗!여왕개미가 주둥이에서 노란 액체를 발사하는데 그게 벽에 닿으니까 막 녹아내려!하지만 소용없죠?내가 다시 틀어막죠?안 통하니까 화나죠?」

찌아아앙—!!

우르르릉—

여왕개미와 초음파가 날카롭게 귀를 후벼파고,개미굴 전체가 흔들리는듯한 진동이 이어서 전해진다.

바르둘과 키메라들이 문제를 일으켜서가 아니다.시속100km를 넘는 유속이 여러 개의 와류를 만들어내며 점차 수위가 높아지니 대공동의 중심부에서 천장을 지지하던 석주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물론 환연이 천장이 붕괴하지 않도록(붕괴하면 자신들도 떨어지니)땅의 정령으로 바닥을 보강한다.

그러는 사이 드디어 수위가 대공동의 바닥을 전부 집어삼켰다.

여왕개미는 수많은 알이 들어있는 배가 완전히 물에 잠긴 채 찌익찌익 울음을 토해내고 타락한 바르둘은 일어서서 성난 포효를 지르며 각성 키메라를 재촉해 벽을 뚫으려 애쓰는 중이다.

각성 키메라는 감정이 거세되었는지 주먹과 팔다리가 망가질 정도로 벽을 때리고 산성액을 토해내고 위상력을 에너지화해서 벽을 향해 쏘아내는 중이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통로는 진작 지나쳐서 멀쩡한 땅을 파헤치는 중이거든.바보들이네.」

“어느 정도로 깊이 들어왔지.”

「5미터 정도는 돼.」

“그럼 그 부분을 무너트려서 매몰시켜버려라.”

「저것들 신체 능력이면 금방 빠져나올 텐데?」

“상관없다.타락한 바르둘에게 심적 압박을 주기 위해서니까.”

환연의 실황 중계를 듣고 있으면 각성 키메라도 타락한 바르둘의 수족일 뿐이라는 사실이 전해져온다.

거기에 타락한 바르굴의 능력은 전투보다 보조 쪽에 더 치중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뒤에서 버럭버럭 고함만 지르고 있다.

그 잠깐 사이 여왕개미의 반신까지 물에 잠기고 있을 정도인데 힘을 쓰지 않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의구심이 생기는 상황.

이때 파내던 굴이 갑자기 무너져 매몰된다면 정신적으로 상당히 핀치에 몰리게 될 거다.

「알았어!」

쿠르르릉…….

작은 진동이 일어나고,땅을 파헤쳐나가던 각성 키메라 여덟 마리가 생매장되어버린다.

그와 함께 물이 드디어 벽을 파헤치던 곳까지 차오르니 여왕개미의 머리 위에 서 있는 타락한 바르둘이 잠깐 멍청하게 서 있다가 괴성을 지르며 발작하기 시작한다.

퍽퍽,다리를 굴러 여왕개미의 머리를 짓밟고 크아악 포효를 지르며 스트레스가 한계를 넘어선 것처럼 손톱으로 자기 가슴을 헤집어 자해하고 있는 것.

흥분이 촉수에 영향을 주는지 수 미터밖에 안 되던 것이 수십 미터까지 늘어나 미친 듯이 일렁이니 점점 촉수 괴물처럼 변해가는데…….

「으악,타락한 바르둘이 촉수를 뻗어서 주변에 각성 키메라를 낚아채서 융합하고 있어!어어?!다,다리의 혹에서 작은 촉수가 엄청나게 나와서……여왕개미랑도 융합하려나 봐!촉수가 여왕개미의 관절 사이로 침식하고 있어!」

환인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역시 주 능력은 전투가 아니었나.

“환연,바닥에 구멍을 내라.나와 이실리테가 영혼 화살과 다중 검기를 날릴 수 있을 정도로.”

「어?응!」

“그 뒤에는 곧장 지하23층으로 내려가는 길 쪽에 벽을 세워 막아라.반대쪽에서 키메라와 개미들이 오다가 파다 만 곳이라고 착각하고 돌아가게끔.그리고 안느는 맞은편 굴에서 오는 키메라를 계속 막고.이실리테는 나와 키메라를 공격한다.”

=네.=

=알았어!=

다가오던 혼합 키메라 일곱 마리를 해치우고 돌아왔던 안느가 되돌아간다.

환인은 이 자리에서 바르둘의 융합을 방해하며 해치우기로 마음먹었다.

내버려 뒀다간 여왕개미와 융합한 바르둘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땅을 파는 능력이 급속도로 증가해 지상으로 탈출할 수도 있고,이쪽을 공격해올 수도 있고,이쪽이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공격해올 가능성도 있다.

‘모종의 추가 변이가 일어날 수도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밖으로 나간다면 싸우기야 편해지지만,융합침식 이후의 불확정성이 너무 크다.

물도 어느덧 대공동의 절반이나 차오른 상황.

말이 절반이지 눕힌S자 모양에서 단차가 낮은 곳은 이미 천장까지 물이 가득 찬 상태이며 남은 곳은 높은 단차로 지하21층 쪽 바닥과 가까운 지형뿐.

그러니 여기서 결착을 낸다.

「환인!바닥 무너트릴 준비 끝났어!」

“해라.”

뒤쪽에서 안느가 죽여놓은 혼합 키메라의 영혼들은 물론 보유 중인 하급 정령 구슬로 영혼 화살을 잔뜩 생성한 순간.

스르르르—

개미지옥처럼 바닥이 모래마냥 부스러지며 싱크홀 같은 구멍이 생겨나고,지름3m정도의 그 구멍을 통해 촉수 괴물의 모습이 드러난다.

어둠속에 일렁이는 시커먼 물바다.그중 한 곳에서 촉수에 침식당하며 간헐적으로 꿈틀거리는 열차 사이즈의 여왕개미.

바르둘의 배에서 튀어나온 촉수에 흡수당하는 것마냥 융합되고 있는 각성 괴물들.

그리고 촉수 괴물 게임의 라스트 보스처럼 늑대의 형상마저 잃어버리고 있는 타락한 바르둘.

“……!”

찢어진 뱃가죽 위치에 왠지 눈에 익은 늑대 면상.

그 바르둘을 본 순간 환인은 직감했다.

율캄 마을로 탈출하며 호숫가의 숲,산거북 근처에서 마주쳤던 바르둘 그놈이라고.

끄,으—아아아아악—!!!!

그리고 갑작스레 무너진 천장 위,자신을 바라보던 한 인간을 목격한 순간 바르둘이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타락한 바르둘 또한 저 인간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자신의 두 번째 심장을 훔쳐 간 원수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