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5화 〉 409 지하 개미굴
* * *
개미굴의 통로는 생각보다 높고 넓었으며 바닥도 제대로 평탄화가 이루어져 있었다.
=천 마리가 넘는 키메라들이 오가면서 다져졌나? 걷기 나쁘지 않은걸.=
=천장도 4m에 가깝고 폭도 3m는 가뿐하고…… 이런 굴을 만들어야 해서 인간형 키메라가 천 마리씩 있었나 봐.=
빛도 닿지 않는 지하의 암석 동굴, 묵묵히 동굴을 걷던 안느가 입을 열자 기사검을 늘어트린 채 그 뒤를 따르던 이실리테가 받아준다.
=그만큼 있으면 유지도 어려울 텐데 어떻게 지하에 머무는 거지?=
=…정말이네. 2차로 몰려왔던 키메라도 덩치가 작은 게 아니었는데 먹는 건 어디서 수급하는 걸까.=
「사람 고기 아니야?」
사람 고기라니. 환인의 어깨서 땅의 정령으로 선행 정찰하던 환연의 대꾸에 이실리테와 안느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습격해온 키메라의 덩치는 다양했다.
1차 습격 때의 곤충+인간 합성 키메라는 인간 사이즈였지만, 2차와 3차의 혼합 키메라 중에서는 코디악 베어의 3배에 달하는 개체가 있었을 정도였다.
환인의 손에 맥없이 사살당한 삼두 늑대 키메라도 거미 다리 등을 제외해서도 말보다 조금 더 큰 수준.
그만한 크기의 개체가 신체를 유지하기 위해 섭취해야 할 하루 열량이 어느 정도일까.
그보다 작다지만 곤충+인간의 키메라는 숫자가 천여 마리였다. 천여 마리가 하루 소비하는 식량이 어마어마할 텐데 그걸 다 어디서 충당했을까.
=그, 꼭 사람… 고기라는 법은 없잖아. 사냥 보내서 주변의 동물이나 짐승이나 괴물을 잡아 올 수도 있고? 개미처럼.=
=그렇게 주변이 초토화돼서 키메라가 알려지지 않은 거였을까……?=
“…….”
환연의 정령력을 아끼기 위해 빛 막대 마도구를 들고 이동하는 중이었기에 광량은 충분한 상태.
여자친구들의 대화를 들으며 나아가던 환인은 벽과 천장의 암석벽을 계속해서 살폈다.
우둘투둘하게 깎인 벽에 가죽이 단단한 키메라가 여러 차례 문지르고 비비며 지나쳤는지 짐승의 흔적과 마모되어 매끈하게 변한 벽.
예전에 유르파가 만들어주었던 마취 단검을 한 자루 꺼내 벽을 긁자 허연 가루가 후드득 떨어진다.
‘석회 지반인가. 카르스트 지형일 수도 있겠군.’
중급 정령을 확보하다 발견했던 땅 꺼짐, 용식함지의 흔적과 주변에 존재하던 크고 작은 호수 및 강을 생각해보면 가능성은 크다.
그 말은 지하에 수원이 존재할 테고…….
=도령은 어떻게 생각해? 괴물들이 뭘 먹고 살 거 같아?=
“……사람은 식량으로 쓰지 않을 거다. 사람이 키메라의 주요 재료일 테니까. 대신 키메라가 완성품만 나오지는 않을 테니 실패작은 키메라들이 잡아먹고, 밖에서 잡아 온 신선하거나 영양가 높은 단백질은 이 개미굴의 주인에게 바쳐질지 모르지.”
촌락에 죽은 가축이 없던 것과 밭은 멀쩡했던 걸 보면 육식을 할 테니 십중팔구는 그런 시스템으로 돌아갈 거다.
환연이 말했던 사람 고기보다 더욱 흉흉한 설명에 이실리테와 안느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이다. 키메라들의 생태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짐승과 사람을 소재로 쓴다는 것뿐이니까.”
키메라의 생태에 대한 환인의 궁금증은 적지 않았다.
키메라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종이 다른 생물이 한데 합쳐지는 데에 외과 시술은 전혀 없었다. 누가 합성을 시도하는 거지? 어떤 식으로?
여왕개미 같은 존재가 먹어서 만드는 건가? 아니면 둘 이상의 생물을 하나로 합칠 수 있는 생명체가 존재하나? 그것도 아니라면 술법적인 요소의 합성?
=갈림길이네.=
내리막길을 따라 나아가는 중 갈라지는 길에 도달했다. 앞으로 두 갈래 길로 나뉘는 게 아니라, 이미 나뉘어 있던 길이 하나로 합쳐지는 길이다.
「뒤쪽으로 땅 정령을 보내볼게……. ……음, 저쪽은 다른 개미굴 입구랑 이어져 있는 곳 같아. 계속 위로 올라가기만 해.」
수첩을 꺼낸 환인은 1층이라 적고 입구에 들어온 뒤 이동 거리와 갈림길을 그려 넣고 말했다.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종이 한 장에 개미굴처럼 복잡한 지형을 표시하는 것은 가시성을 생각했을 때 힘든 일이다. 그나마 간단한 방법은 높이에 따른 층으로 구분해 지도를 만들어나가는 것.
‘지하 500m까지 내려가는 일이 없기를 바래야겠군.’
그랬다간 10m를 기준으로 삼는다고 해도 50층으로 나눠야 할 테니까.
키메라들이 나온 곳을 개미굴이라 부르게 된 이유는 처음 조우한 키메라들이 사람 몸에 개미나 바퀴벌레의 몸 부위가 붙어있어서였다.
환인이 처음 개미굴이라 부르자 그의 여자들도 개미굴이라고 말하게 되었고 미로=라드하와 하늘 기사들도 덩달아 개미굴이라 부르게 된 것.
그게 아니었다면 키메라 덴den이라고 부르게 되지 않았을까.
그랬는데…….
=진짜 개미굴이네.=
안느가 그리 말했을 정도로 지하 통로는 개미굴의 형상을 띄고 있었다.
긴 통로와 중간중간 위치한 작은 굴이나 다음 통로가 붙어있는 공동. 갈림길은 거의 나오지 않았고 통로는 줄곧 내려가는 식이다.
적인 키메라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가끔 나타나더라도 여자 알몸에 개미 다리가 붙어있고 어깨, 목 부위에 개미 머리가 더 붙어있거나 한 일꾼 느낌의 키메라였다.
으, 아각…… 기익. 끼이…….
기이한 신음과 함께 좌우 눈이 뒤집히거나 흔들리는 등 따로 노는 여자의 얼굴.
그런 키메라는 환인 일행과 마주쳐도 공격해오지 않았다. 애초에 어디가 아픈 듯 굴에 웅크리고 있거나 더듬이가 뜯겨나간 개미처럼 한 자리를 빙글빙글 돌고만 있었던 것이다.
상태도 좋지 못했다.
다리가 썩어가고 있거나 몸에 난 상처가 끔찍하게 곪아 구더기가 끓고 고름이 줄줄 흘러내리는 건 보통이다.
자궁이 몸 밖으로 딸려 나와 뜯긴 채 상처 부위에서 찐득한 피를 흘리고 있거나, 항문과 내장이 파열되어 임산부처럼 뱃속에 피가 들어찬 상태로 피와 내장을 흘리며 돌아다니거나, 사람 머리가 박살 난 채 개미 머리로 돌아다닌다거나.
「으엑. 왜 저렇게 된 거야? 같은 놈들끼리 저런 거 아냐?」
=…….=
=…….=
배불뚝이가 된 채 항문으로 내장을 수 미터 늘어트리고 손가락뼈가 드러날 정도로 벽을 벅벅 긁고 있는 여자 키메라를 처음 본 이실리테와 안느는 무기를 휘두르지 못했다.
살기가 흐르는 전장이었다면 여자가 아니라 전사로서 개의하지 않고 싸웠을 거다. 그러나 여자로서 그 장면을 보고 만 둘은 진저리가 날 정도로 참혹한 장면에 한순간이지만 굳어버렸던 것.
움직이지 않는 그녀들을 대신해 하늘 기사단 물자 창고에서 챙겨온 철창으로 키메라의 머리와 심장을 부순 환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마음이 쓰라린 표정을 짓는 여자친구들에게 말했다.
“깊게 내려가면 갈수록 더 심한 꼴을 보게 될 거다. 마음 단단히 먹어라.”
=네.=
=응…….=
“…유르파가 이야기하지 않은 것을 보면 키메라가 사람으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그러니 보는 족족 빨리 죽여서 괴물의 몸뚱이에 갇힌 영혼을 풀어주는 것이 그녀들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자비일 거다.”
=응.=
그 일로 스위치가 전환된 두 여자는 뭔가 알 수 없는 체액이 뿌려진 굴과 갉아 먹힌 듯한 뼛조각이 버려져 썩은 내를 풍기는 공동을 지나며 병든 일꾼 키메라와 마주치는 순간 키메라의 머리를 자르고 심장을 터트렸다.
푸욱—
=아, 윽…….=
열두 마리째 일꾼 키메라가 이실리테의 기사검에 뒤에서 심장이 꿰뚫리며 작은 신음과 함께 축 늘어진다.
환인은 그 육신에서 빠져나오는 영혼을 강제력으로 붙잡아 평온의 파동으로 정신을 일깨워서 열두 번째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이 개미굴을 무너트리기 위해 밖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당신을 이렇게 만든 존재를 기억하고 있습니까.”
「몰라요…… 싫어, 더는 여기에 있고 싶지 않아…….」
“…….”
흐느낌과 함께 빛무리로 변해 사라지는 여자 영혼을 바라보던 환인은 키메라를 통해 정보를 알아내기는 어렵겠다고 느꼈다.
2차와 3차 습격 때도 사람의 영혼 몇몇을 붙잡아 개미굴 내부 상황에 대해 물었지만, 영혼들은 대부분 떠올리거나 생각하고 싶지 않아하며 그대로 성불해버렸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보이는 대로 붙잡고 물어봤지만 이쯤 되니 뭔가 정신이나 영혼 쪽을 조작해 기억을 삭제하는 건가 싶을 지경.
미련이나 한을 내려놓고 성불한 게 아니어서일까. 몇 개 나오지 않은 빛 구슬을 회수한 환인은 수첩을 열어 지도를 갱신한다.
환연을 통해 땅속 깊이를 확인해가며 10m 단위로 층을 바꾼 지도 어느덧 12번.
12층, 12번째 수첩에 공동을 그려 넣던 환인은 졸린 지 눈을 비비는 환연을 보고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하 120m 지점까지 내려왔는데도 보이는 건 병든 일꾼 키메라들 뿐.
갈림길은 거의 없는 외길 형태의 개미굴인 만큼 이 정도 내려왔으면 주력이라 할 수 있는 키메라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해야 할 텐데 여전히 한 마리도 안 보인다.
‘정말로 석회 동굴 같은 곳에 모여있는 건가.’
생명체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식량도 중요하지만 식수는 그보다 더 중요하다. 그러니 수자원 근처에 모여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더 좋지 않다.
석회 동굴이 폐쇄된 곳이라면 다행이지만, 보통 석회 동굴 근처에는 용식 분지가 있고 동굴은 그런 곳과 이어져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곳으로 이 사태를 일으킨 괴물이 도망쳤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네요.=
=으음. 그래서 이만큼이나 내려올 때까지 병든 키메라 밖에 못 본 걸려나. 안 좋은 이야기인걸…….=
바깥에서 환연과 하늘 기사단 소속 황술사가 조사한 결과 개미굴은 직경 7km 정도임이 판명되었다.
넓이로 치자면 광화문에서 한강 사이 강북 일대가 전부 들어오는 영역. 도망쳤다면 이제 와서 뒤를 쫓는 것은 늦다.
“그 점을 우려해서 습격을 해왔던 키메라를 모두 해치운 뒤 바로 들어온 거였지만……. 허탕을 칠 것도 염두에 두어야겠군.”
키메라 소재를 확보하기 위해 병력을 보낸 게 아니라 이실리테와 안느의 강함을 눈치채고 이쪽의 발목을 잡기 위해 보낸 게 그 2차 키메라 부대라면 제대로 당한 거다.
=그리되면 엄청난 후환이 풀려난 거나 다름없겠네.=
“그러지 않기를 바래야지.”
라드세아, 나아가 니오네브레스의 안녕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지구 귀환 행보에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
문양의 힘을 늘리려면 미궁을 돌파해 소원석의 힘을 흡수해야 하는 것으로 짐작 중인데 키메라 사태가 장기화되고 확산하면 그러기 어려워질 테니 말이다.
「화안이인…… 졸려서어, 집주웅을… 몬하게써어…….」
“그래. 네 힘이 필요할 때 깨워줄 테니 조금 자둬라.”
「미아내…….」
자기 뺨을 찰싹찰싹 때리고 허벅지를 꼬집으면서 1시간을 더 버틴 환연이 잠에 빠져들었다.
반은 인간이고 반은 정령이라지만 체구가 작아 생명 활동이 사람과 다른 환연이다.
하루에 12시간은 자야 하고 먹는 양도 자기 몸무게(환인이 느끼기로 250g 정도)의 2배는 된다.
먹은 것을 소화하는 소화 흡수 효율이 뛰어난지 볼일을 보지 않고, 하루에 500g 정도 되는 식사만 어떻게 하면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는 것을 보면 정령 쪽 핏줄이 뭔가 작용을 하는 것 같은데 아무튼.
16시간 가까이 깨어있다가 결국 잠들고 만 환연을 가슴 포켓에 넣은 환인은 수면 효율이 높아지라고 원기 방출로 체력을 회복시켜주었다가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방금 감각은…… 뭐였지.’
뭔가, 이전에 비해 몸 전체를 흐르고 있는 훈기와 한기가 반응한 듯한 감각.
마치 영혼의 파동을 방출할 때와 비슷한…….
“잠시 대기.”
=응?=
여자친구들을 불러세운 환인은 눈을 감고 좀전의 그 감각을 되새기며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한기가 주먹으로 슬금슬금 흘러들어오기 시작한다.
……화아악—!
왠지 지금이라는 생각에 원기 방출 감각으로 주먹을 편 순간, 은은한 금색의 파동이 통로를 가득 채우며 퍼져나가다가 사라졌다.
=어? 뭐야, 방금 그거 평온의 파동……이 아닌데?=
=주인님, 몸에서 힘이 나요.=
“……원기 방출이 평온의 파동과 합쳐졌다.”
=엥? 그게 평온의 파동이랑 합쳐질 수 있는 거였어?=
원기 방출이라면 이실리테와 안느는 물론이고 유르파도 잘 알고 있는 그거다.
그와 몸을 섞을 때 자신들의 성감을 일깨우는 데 쓰는, 지쳐서 기절할 거 같을 때 받으면 단숨에 기운을 차리고 1시간은 더 절정에 허덕일 수 있는 기술.
원래는 그 자신의 체력을 써서 타인의 지친 몸을 회복시켜주는 기술인데 그게 평온의 파동하고 합쳐졌다고?
‘아직 끝이 아니다.’
환인은 자신의 오른손을 깊어진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번에는 한기를 손바닥에 집중, 원기 흡수에 평온의 파동의 묘리를 섞어 펼쳐보았다.
쓰아아악—
그러자 이실리테와 안느의 몸에서 금빛 광채가 흘러나와 환인의 손에 빨려 들어간다.
=앗…!=
=윽?! 방금 체력이 확 빨려 나갔는데…… 이거 설마 원기 흡수야?=
“그래. 범위 체력 흡수 같은데… 피아구분이 안되는군. 원기 방출도 마찬가지일 거 같다.”
빼앗은 체력을 다시 회복시켜주자 안느가 신기하다는 얼굴로 흩어져가는 금빛의 파동을 보며 중얼거린다.
=신기하네. 원기 방출의 파동이랑 원기 흡수의 파동이라니…….=
=이건…… 굉장하네요. 구원 마도구랑 같이 쓰면 제약 없이 아군의 체력을 대규모로 회복시킬 수 있는 거잖아요.=
=적도 회복시킬 수 있으니까 전투 중에는 못 쓰지 않을까?=
=합을 맞추거나 원기 회복 물약을 지참해서 마시면?=
=음, 그건 괜찮네. 단단히 각오하고 있으면 한순간 체력이 빠져나가는 정도는 견딜 수 있으니까.=
하지만 모른다면 갑자기 체력이 빨리는 느낌에 자세나 마음가짐이 크게 흐트러질 테고, 그것은 죽음으로 이어진다.
생각보다 쓸모가 많겠다며 원기 흡수 파동에 대비할 방안을 주고받는 여자친구들.
그 이야기를 듣던 환인은 재차 치민 묘한 감각에 눈빛이 깊어졌다.
아직, 뭔가가 남아있는 기분인데…….
있다 해도 여긴 적의 소굴이다. 알아내는 것은 이 사태가 끝난 이후로 미뤄두자.
“자, 그만 출발하지.”
원기 흡수의 파동 대처 방법 마련에 깊이 들어가려 하는 여자친구들을 제지한 환인은 출발을 선언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자정이 넘어 개미굴에 들어온 뒤로 3시간이 흐른 시각.
잠든 환연을 대신해 영혼 시야를 열어 통로 끝까지 살피고 기감도 같이 확장해 주위를 확인하며 내리막길을 내려가던 환인은 점점 좋지 않은 쪽으로 예감이 맞아가는 것을 느꼈다.
현재 위치는 지하 220m 지점. 이때까지 마주친 키메라는 33마리로 전부 병든 일꾼 키메라였다.
제대로 전투가 가능한 키메라를 단 한 마리도 보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타락한 바르둘은 주전력을 끌고 개미굴을 탈출했다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는다.
점차 적이 도주했을 때에 대한 대처를 마련하고 있을 때 약간의 변화가 찾아왔다.
=주인님……. 아까부터 경사가 사라지고 점차 완만한 평지로 변하는 느낌이에요.=
“여기가 개미굴의 밑바닥인 건가.”
그렇다면 개미굴의 깊이는 220m 지점이고 이 층에 타락한 바르굴이 있을 가능성이 큰데.
환인은 판단의 실수를 인정했다.
환연의 정령 감응 범위가 반경 500m라고 해도 정령이 없는 곳은 감지할 수 없다. 그리고 흙이나 땅의 정령이라 해서 땅속에만 사는 건 아니며 땅속을 전부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지상을 더 좋아하고 땅속은 넓게 볼 수가 없다.
그러니까, 자신의 영혼 시야가 물속을 깊은 곳을 못 보는 것처럼 환연도 땅속 깊은 곳은 훤히 볼 수 없다는 뜻.
‘지하 500m 아래에 이상한 느낌이 있는 게 아니었다는 거지.’
환인은 경사가 아니라 평지처럼 이어지는 통로를 바라보다가 광창의 코어를 꺼내 손에 쥐며 말했다.
“개미굴 심부로 의심되는 만큼 방심하지 말고 가도록 하지.”
=네.=
=어.=
그렇게 기감을 퍼트리며 나아가던 환인은 기감 끄트머리에서 병든 일꾼 키메라와는 전혀 다른 생명 반응을 감지했다.
느끼기에도 활발한 기척. 적을 놓쳤을지도 모른다는 회의감이 단숨에 날아갔다.
=도령. 저 앞에서 뭔가가 오는 거 같은데.=
“그래. 이번에는 전투형이다.”
환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저 앞 통로의 코너에서 2차 습격 때의 혼합 키메라와 흡사한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캬아아—!!
이쪽을 발견하곤 흠칫했다가 붉은 눈알을 번뜩이며 쇳소리를 내는 쥐 머리와 깃털 빠진 칠면조 몸뚱이의 혼합 키메라.
“안전하게 가지.”
기감으로 적을 감지하자마자 준비해놓은 2중첩 영혼 화살을 즉시 발사, 달려들지말지 고민하는 혼합 키메라의 투실투실한 칠면조 몸뚱이를 꿰뚫었다.
푸학
끼야아아아악—!!
몸에 영혼 화살의 구멍이 나자마자 귀 따가운 비명을 지르는 혼합 키메라.
하지만 비명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이실리테가 벽을 박차며 달려 나가 기사검에 불어넣은 빛의 검으로 쥐와 사람의 머리를 쳐낸 뒤 바람처럼 자리에 복귀한 것.
비명을 멈춘 혼합 키메라의 칠면조 몸뚱이가 쿵, 쓰러지고 몸뚱이에서 사람의 영혼과 짐승, 괴물의 영혼이 차례대로 빠져나온다.
환인은 망설임 없이 강제력으로 세 영혼을 모두 불러들였다.
「아아……. 자유, 자유다…….」
하지만 남자 영혼은 강제력도 무시하고 그대로 성불, 갈색 칠면조 영혼과 괴수로 보이는 거대한 쥐의 영혼만이 날아왔다.
영혼에게서 뭔가를 알아내는 것을 포기한 환인은 중상급 영혼인 괴물 쥐와 중급인 멧돼지 영혼을 영혼 화살로 전환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바르둘을 놓쳤다고 실망하기에는 이른 것 같군. 주의해서 빠르게 간다.”
=응.=
=네.=
그때를 기점으로 작은 굴, 조그만 방, 통로에 사람과 2마리 이상을 섞어 만든 혼합 키메라가 출몰하기 시작했고 환인은 적이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영혼 화살을 키메라의 몸뚱이에 박아주었다.
뀌에에에엑—!
서걱.
꾸르르륵!?
쾅!
영혼의 고통과 괴리에 미쳐 날뛰는 혼합 키메라 따위는 두 여자에게 연습용 짚단 허수아비나 다름없다.
점차 많아지는 키메라의 숫자에 여자들은 이제부터가 진짜라는 마음으로 전투를 이어나갔고, 환인도 소모한 숫자만큼 키메라의 영혼을 회수해 구슬로 만들어가며 쾌속이라 할 속도로 거침없이 진격해 나아갔다.
뒤쪽은 자신들이 지나오며 정리한 외길. 후방을 걱정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도착한 어느 공동.
=욱, 이게 뭐야.=
=여기서 키메라를 만들어내는 거네요.=
체육관 정도 되는 넓이의 종유동굴에서 일행은 키메라가 탄생하게 되는 과정을 목격했다.
꿀단지 개미를 몇천, 몇만 배나 키운 듯한 모양새. 그 호박색 액체로 가득한 뱃속에서 여자와 괴물, 짐승이 아메바처럼 한데 뭉쳐지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