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1화 〉 405 재각성
* * *
정신을 잃었지만 환인은 마냥 속 편하게 기절해있지 못했다.
또다시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눈동자에게 주시당하는 꿈을 꾸다가 깼던 것.
“…….”
이번에는 뇌가, 시신경이 수천수만 조각으로 찢어지는 격통은 없었다. 이점을 고려하면 기절했을 때 본 것은 단순한 기억의 재생이고…….
‘처음 본건 현실이었다는 뜻이겠지.’
환인은 누운 채로 흙집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이마를 매만졌다.
그것을 본 이유는 논리적으로도 하나뿐이다.
‘영기 때문인가.’
영기가 신체의 세맥을 넓히다 뇌의 특정 부분을 활성화시켰고, 통상적으로는 볼 수도 없고 일어날 리도 없는 현상을 일으킨 것.
빼꼼, 환인의 시야로 백려강의 청초한 아가씨 얼굴이 들어왔다. 크고 예쁜 푸른색 눈동자가 한차례 깜빡이곤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한다.
「여러분. 환인 님이 깨어나셨어요. 환연, 유르파.」
백려강의 알림에 밖에서 우르르 들어오는 여자들.
=일어났구나. 도령, 일단 물부터 좀 마셔.=
=음~. 열은 없고 환각이나 착란 증세도 안 보이네.=
안느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킨 환인은 몸 상태가 나쁘긴커녕 무척 가벼워진 것을 느끼며 그녀가 내미는 물을 받아 마셨다.
=주인님. 속을 편하게 해주는 야채즙이에요.=
이어 이실리테가 내미는 신선한 야채즙도 마신 환인은 유르파가 자신을 진맥할 수 있게 팔을 내밀며 물었다.
“유르파, 감기는 다 나았습니까.”
=어휴. 나야 진작에 다 나았지. 나보다 자기 몸부터 걱정해.=
“저도 괜찮습니다.”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맥박을 재는 유르파에게 작게 웃어준 환인은 창밖의 환한 날씨를 보고 여자친구들에게 물었다.
“내가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지.”
=주인님이 쓰러지시고 이틀이 지났어요.=
“…….”
이틀인가.
=응, 몸에 이상은 없어. 적어도 보이는 대로 건강해.=
유르파의 진료 결과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난 환인은 이리저리 관절을 돌려보았다.
이틀간 잠들어있었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관절 상태가 부드럽다.
잠깐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니 척추를 따라 대하처럼 도도하게 흐르던 훈기와 한기가 전신 세맥으로 퍼져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무협 소설 같은 데서는 이런 걸 두고 기경팔맥의 타통이라고 하던가.
전신 세맥이 확장되었고 머리까지 뚫렸으니 환골탈태의 현상이라 봐도 무방할 텐데 몸 상태는 몸이 조금 가벼워진 것 외에는 변함이 없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는 거겠지.’
아니면 영기는 기와 전혀 다르다던가.
환인의 몸풀기를 지켜보던 안느는 그의 어깨며 허리, 옆구리 등을 짚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은 곳도 없고 컨디션도 좋아 보이네.=
“그래. 신체의 변화는 없지만 컨디션만큼은 괜찮군.”
=변화가 없는 게 아닌데…… 자기, 여길 좀 봐주겠니?=
환인은 유르파가 내미는 거울을 들여다보았고, 자신의 눈에서 은은한 금빛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문양의 힘으로 영혼 시야를 연 것도 아닌데 이렇다.
“이건 등급이 오른 여파인가. 이렇게 특징적인 변화면 대놓고 정체를 숨기는 것은 어렵겠군.”
자신의 눈매를 매만지며 말하는 그의 감상에 여자친구들이 작게 웃는다.
조금 걱정했었는데 말하는 걸 보면 진짜 괜찮은 거 같네.
유르파의 어깨에 서 있던 환연은 멀쩡해 보이는 환인의 모습에 참고 있던 궁금증을 꺼내 들었다.
「환인.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됐어? 등급이 오른 거야?」
그 질문에 다른 여자들도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바라본다.
“……모르겠군.”
「흐응? 내가 보고 들은 거에 따르면 성장에 특징이 생기면 그거랑 연관된 능력이 생긴다고 해. 6시간 동안 뭔가를 겪었으니까 그거랑 관련된 힘을 얻은 거 아냐?」
정령을 통해 여기저기서 들은 것을 이야기해주는 환연. 그걸 들은 환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말한 모르겠다는 것은 등급이 오른 건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일단 능력이라면 영혼술이 한층 강력해진 것은 확실하다.”
힘이 세졌다면 등급이 오른 거 아냐?
주인님께서 생각이 있으신 거겠지.
환연이 이실리테와 그런 눈빛을 주고받을 때 진지해진 유르파가 묻는다.
=자기, 뭔가 특별한 걸 본 거구나?=
눈치 빠르게 자신의 의중을 파악한 유르파.
다시 자리에 앉아 잠시 생각하던 환인은 숨길 건 아니라고 생각하며 노트와 펜을 꺼내 자신이 본 것을 그려주었다.
모양이 다 다른 백색 꽃이 지평선까지 흐드러진 땅.
우주를 잘라다 붙여놓은 하늘과 푸른 행성.
지평선에서 솟아오른 하얗고 거대한 나무와…….
=이, 이게 뭐니?=
「……되게 불길하게 생겼네.」
허공과 공허의 눈동자.
요점을 잡아 특징을 묘사해 그려내는 실력이 좋아 본 것을 감각적으로 그려낸 세 장의 그림에 여자들은 작게 신음을 흘렸다.
백려강은 그중 하얀 나무가 그려진 종이를 가리켰다.
「저 이 나무랑 비슷한 걸 알고 있어요.」
“어떤 나무지.”
으흠. 목소리를 가다듬는 것처럼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가슴에 손을 올린 백려강이 낭랑한 목소리로 성우처럼 이야기를 꺼낸다.
「스스로 빛을 내뿜는 하얀 나뭇잎과 하얀 나무 기둥이 수십 킬로미터까지 자라나 검은 하늘을 떠받치니, 우주의 진리와 신님의 의지가 그 하얀 몸에 깃들어있도다. 뭍 성수의 경외와 존외를 한 몸에 받으며 세계에 빛을 뿌리는 우주수 그 이름은 길리아미.」
백려강은 모여든 여자들과 환인의 시선에 부끄러운 듯 꼼질거리며 말을 끝맺었다.
「파레 사의 신전기행에 나오는 신님의 정원, 그곳에서 정원을 떠받치는 우주수의 그림이랑 비슷해요.」
=파레 사? 그 사람 니오네브레스 역사상 최대 최악의 사기꾼이잖니. 그리고 신전기행 그 책은 금서로 지정되어서 다 불태워졌다고 들었는데…….=
유르파의 의구심 가득한 이야기에 안느도 곱고 치렁치렁한 은발을 매만지며 중얼거린다.
=신전기행…… 나도 읽어보고 싶었지만 어디에도 구할 수 없어서 포기한 책 이름이네.=
책의 이름인 신전도 신님을 모신 전각이라는 뜻의 신전이 아니라 신의 앞??이라 해서 신전에 기행?行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해석하면 신 앞을 여행하며 보고 듣고 느끼고 겪은 것을 적은 책.
=신전기행은 출간되자마자 책을 접할 수 있는 이들 사이에서 어마어마한 논란이 일었어. 그런 상황에 말 한마디 한마디가 논란이 된 파레 사는 결국 모습을 감추었고 책자는 각 신전이 나서서 모두 회수한 뒤에야 소란이 끝났다고 해.=
=신기한 이야기네…….=
환인이 그린 나무 그림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리는 이실리테. 그 행동에 백려강이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이실. 그 그림을 이쪽 꽃밭에…… 네 그렇게. 그 책에 그려진 삽화가 이런 형태였어요. 꽃밭 한가운데 우뚝 솟은 그림이요.」
그걸 본 안느가 턱을 쓸어내리며 환인을 돌아본다.
=도령이 이걸 봤다는 건 그 파레 사도 사기꾼이 아니었단 건가?=
“아니었을 거다.”
「확신하는 말투네?」
“방금 려강은 스스로 빛을 내뿜는 하얀 나뭇잎과 하얀 나무 기둥이 수십 킬로미터까지 자라났다고 표현했지. 하지만 나는 하얗고 거대한 나무라고 했을 뿐이었다.”
「어? 정말 그랬네.」
“그래. 내가 본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말해주지 않은 것도 알고 있으니 그 파레사라는 사람은 정말로 신의 정원에 방문했다는 뜻이겠지.”
=…그럼 도령이 본 장소도 신의 정원이라는 뜻이고…… 이 눈 그림은, 설마 신님의 눈이야……?=
안느의 중얼거림에 흙집 안이 조용해진다.
여자들의 시선이 기괴한 눈의 그림을 응시하고 있을 때 유르파가 얼른 눈이 그려진 종이를 차곡차곡 접어 환인의 손에 들려주었다.
=파레 사도 하급이지만 벨티칼의 메이트리아크였어. 그런 여자도 교단에 끌려갔을지 모른다는 의혹을 사고 있는 만큼… 자기, 이건 다른 데 가서 이야기 안 하는 게 좋을 거 같아.=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교단이 나서서 책을 회수했을 정도다. 파레 사가 모습을 감춘 것도 교단의 의지가 들어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반강제적으로 주제를 끝낸 유르파는 짐짓 환한 얼굴로 짝짝, 분위기를 환기하듯 손뼉을 두 번 치며 환인을 바라본다.
=혹시 자기는 등급이 성장한 게 아니라 이슬이 아가씨처럼 재각성한 게 아닐까? 이런 걸 본데다 6시간이나 시간을 보냈으니까…….=
“아우라가 드러나지 않으니 알 수가 없군요. 아우라만 나타났다면 등급의 성장인지, 직업의 변화인지 알기 쉬웠을텐데 말입니다.”
피식 웃은 환인은 흙마루에서 내려가 눈이 그려진 종이를 아직 불이 붙어있는 아궁이에 던져넣고 흙집을 나섰다.
“일단 능력이 얼마만큼 강해졌는지 확인을 해봐야겠습니다.”
여자친구들과 밖으로 환인은 얼핏 봐도 1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황폐해진 촌락을 철거하고 그곳에 망루를 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늘에는 같은 복장의 조인족 직업자들이 날아다니며 주위를 감시하는 중이다.
“프라버에서 온 사람들인가.”
=응. 율이 언니가 보낸 통신을 받은 백 공자가 하늘 기사단이랑 인부들을 파견해줬어. 저 기사단은 어제 오전에 도착했고 지금 촌락을 철거하고 있는 사람들은 오늘 도착했어. 그리고…….=
환연의 주도로 숨겨진 개미굴 입구를 여러개 발견했으며 그 근처에 감시 인원을 배치해 감시 중이라고 설명해준다.
기사들이 하늘을 날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인가.
부서지고 무너진 민가가 절반 가까이 철거되어 촌락의 형태가 사라지고 있는 린덴을 잠시 둘러본 환인은 안느를 돌아보며 물었다.
“습격은 더 없었나.”
=응. 그날 이후로 굴에서 나온 괴물도 없었어. 그 외에 우리 마차가 핵심 프레임까지 뒤틀리고 쪼개져서 수리 불가능 판정을 받았다는 거 빼면 특이 사항은 없네.=
부서진 마차의 원한을 불태우는 안느를 힐끔 본 환인은 100여 명이 한창 철거 중인 촌락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이런 상황이면 능력 테스트는 힘들겠는데…… 음.’
그때 환인의 시선이 따가운 햇빛을 피해 나무 그늘에서 낮잠 자고 있는 비상의 머리 위를 향했다.
초등학생처럼 작고 땅딸막한 하급 정령과 다른, 환연과 비슷하지만 그보다 좀 더 어려 보이는 소녀.
비상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비상의 머리 위에 앉아 흥흥~ 다리를 흔들고 있던 녹색 정령과 눈이 마주쳤다.
「이제 나도 보이나 보네.」
자신을 아는 것처럼 웃음을 보이는 녹색 소녀의 행동에 환인은 영혼 시야를 열었고, 환연과 비슷한 키의 정령 주위로 강한 바람의 기운이 맴돌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전까지는 색계통만 볼 수 있었는데. 이것도 변화점인가.
여자친구들을 돌아보니 안느는 강한 백색의 기운이 흐르는 중이고 유르파는 별다른 기운이 없다. 영혼 상태인 백려강도 마찬가지.
그런데 환연은…….
「왜 날 봐? 그보다 진짜 쟤가 눈에 보여?」
빨주노초파남보백흑, 아홉 가지 기운이 눈이 아릴 만큼 그녀를 휘감고 있다.
‘이 빛은 속성과 관련되어있나.’
만약 이 빛이 정말 속성 적응력을 가리킨다면 전투에도 꽤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하며 환연의 질문과 녹색 정령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래.”
언제고 환연이 지나가듯 비상을 좋아하는 바람의 정령이 비상을 따라다닌다고 했었다.
거기에 미루어본다면 비상의 머리 위에 있는 저 녹색 정령이 그 정령인 게 확실한 상황.
“네가 비상을 따라다닌다는 중급 정령인가.”
「맞아. 이제야 날 보네.」
“놀랍군. 대화도 가능한 건가.”
환인이 살짝 놀란 기색을 드러내자 중급 바람의 정령이 으스대는 여중생처럼 흥흥거린다.
「난 중급 바람의 정령이라구. 머리도 덜 여문 하급…… 야아아! 나 방금 구슬로 만들려 했지!?」
손을 살짝 들던 환인은 앙칼진 고양이처럼 아르릉거리는 중급 정령의 반응에 손을 다시 내리고 의문을 표시했다.
“구슬화를 싫어하는 정령은 본 적이 없는데. 중급은 다른 건가.”
「……다 같을걸? 나도 그건 재미있어 보이니까. 근데 그거 한 번 하고 나면 정령계로 돌아가야 해. 돌아가면 언제 다시 나올 수 있을지 모르고…… 그렇게 되면 비상이랑 헤어져야 하잖아. 절대 싫어!」
자고 있는 비상의 머리 위에 납작 엎드려 비상과 절대 헤어질 수 없다고 소리치는 정령의 모습에 환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표정이 위협적이었을까.
=날 구슬로 만들어서 써버리면 정령계에서 너 나쁜 놈이라고 소문 다 퍼트리고 다닐 거니까?! 어둠의 정령을 때렸을 때하곤 비교도 안 되는 고생을 하게 해줄 거니까!?=
……라며 협박 아닌 협박을 하는 중급 바람의 정령이다.
그것까지 알고 있을 줄이야.
환인도 굳이 비상을 좋아하는 정령을 떼어놓을 생각은 없었기에 널 영혼 구슬화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주고서야 정령 소녀의 경계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저 반응도 그렇고, 앞으로는 중급 정령도 구슬화 할 수 있게 된 것 같으니 전력이 한층 더 강해지겠군.’
중급 영혼은 미궁에서나 만날 수 있을까. 밖에서는 손에 넣기 어렵다.
손에 넣더라도 영혼의 생전 신체 능력에 따라 힘, 체력, 순발력, 정신력의 향상 등 개체별로 효과가 다 다르기에 원하는 강화 효과를 아무 때나 부여할 수 없다.
하지만 정령으로 만든 영혼 구슬로 강령하면 힘, 체력, 순발력 등 신체 능력이 전반적으로 골고루 상승한다.
전투에는 후자가 훨씬 유용한 것이다.
거기다…….
이제 빛이 팔꿈치가 아니라 어깨까지 뒤덮은 자신의 왼팔을 바라보던 환인은 영혼 구슬의 유지 시간이 2배로 늘어난 것을 깨달았다.
시험 삼아 흥흥 콧노래를 부르며 앞을 지나가는 하급 바람 정령을 붙잡아 영혼 구슬로 만들자 192시간, 8일의 구슬 유지 기간이 느껴졌다.
「어휴, 정령 납치범이 따로 없다니까.」
중급 바람 정령의 중얼거림을 무시한 환인은 흙과 돌로 이루어진 촌장의 집을 해체하려는 인부들 쪽으로 다가갔다.
=헛, 성자님.=
“이 집을 해체하시려는 겁니까.”
=예에. 해체해도 쓸만한 자제가 나올 것 같지 않아서 아예 부숴버리려던 참이었습니다요.=
손바닥을 싹싹 비비는 다람쥐 머리의 인부에게 잠시 사람들을 물려달라 부탁한 환인은 방금 구슬화 한 하급 정령 구슬을 영혼 폭발 구슬로 전환했다.
‘그러고 보니 그곳에서 문양의 힘을 있는 대로 끌어올렸는데…….’
2일간 기절해서 회복된 걸까, 70% 정도 차 있는 게 느껴진다.
이번에는 그냥 쏘아보고, 두 번째는 문양의 힘을 넣어 쏴보기로 한 환인은 하급 바람 정령이 구슬 안에서 롤러코스터를 탄 사람들처럼 꺅꺅거리는 걸 느끼며 손가락을 내밀어 집을 가리켰다.
그 순간 영기의 대맥에서 소량의 훈기가 눈 깜짝할 사이 영혼 폭발 구슬로 흘러 들어가더니…….
콰과과광!!
화살보다 빠르게 날아간 영혼 폭발 구슬이 직경 10m의 폭발을 일으켰다.
커다란 충격파가 터진 것처럼 땅이 뒤집히고 집의 일부가, 지붕이 산산이 조각나며 흙먼지가 자욱이 퍼져나간다.
쿠궁, 쿠르르릉
집의 절반이 날아가서일까. 나머지도 무너지는 모습에 여자친구들이 명불허전이라며 감탄한다.
=와, 산란못 미궁 때보다 확실히 강해졌네. 이 정도면 4급 이형종도 연달아 맞으면 못 버티겠어.=
=폭발에 피부가 찌릿찌릿할 정도……인데, 자기? 왜 그러니?=
“산란못 미궁에서는 중급 이형종의 영혼을 거두어 3중첩, 4중첩을 썼었습니다.”
=……?=
“방금은 중첩하지 않은 하급 정령으로 펼친 영혼 폭발이었습니다.”
=네??=
=으응?=
「……???」
여자들의 눈에 무수한 물음표가 떠올랐다.
방금 그게 하급 0중첩? 그럼 중급 4중첩을 하면 어느 정도로 세진다는 거야?
문양의 힘을 넣으면 거기서 또 더 강해지는 거 아니니?
위력 미쳤네.
환인 님은 영혼사가 아니라 영혼공격사였나요?
혼란스러워하는 여자친구들을 두고 환인은 하급 정령 구슬 네 개를 꺼내 영혼 폭발 구슬로 전환한다.
이번에는 문양의 에너지를 5%정도 주입하자 원소핵처럼 뭉친 영혼 폭발 구슬이 황금빛을 뿜어내며 웅웅거리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안 보이던 통상과 다르게 황금빛으로 빛나는 원자핵 모양의 구슬은 그냥 보기만 해도 위협적이다.
=도, 도령. 그거 위, 위험해 보이는데…….=
=자기? 자기!? 그거 여기서 썼다간 주변 다 날아가는 거 아니니?!=
여자친구들의 제지가 없었어도 직감적으로 보통 위력이 아님을 눈치챈 환인은 가까이서 터트릴 생각이 없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며 적당한 표적지를 찾던 환인은 3km 정도 떨어진 구릉 언덕의 홀로 우뚝 선 나무 한 그루에 시선을 주었다.
저 정도면 여기까지 피해가 날아오지 않겠지.
손가락을 든 환인은 표적지를 향해 손가락질했고, 황금빛 영혼 폭발 구슬은 그런 환인의 의지를 읽은 듯 총알처럼 날아가더니.
……쿠구구구궁……!!!
미사일이 터진 것처럼 원형의 충격파를 퍼트리며 작은 먼지 버섯 구름을 형성했다.
「히이익.」
「읏……?!」
귀와 몸이 떨리는 둔중한 폭발음.
하늘을 날아다니며 주변을 감시 탐색하던 하늘 기사단의 기사들이 날아온 충격파에 휩쓸려 참새처럼 어지럽게 날고 인부들은 땅에 머리를 처박은 채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른다.
잠시 후 바람에 의해 먼지구름이 흩어지고 드러난 것은, 스쿱으로 퍼낸 것처럼 구릉 한복판이 직경 10m로 둥그렇게 파내진 모습이었다.
“문양의 힘을 5%가량 먹은 것 치고는 나쁘지 않은 위력이군요.”
=……저게 나쁘지 않은 거야…?=
“20번을 사용하면 문양이 회복되기 전까지 더는 쓰지 못한다. 횟수 제약이 있는 것과 다름 없는 데다 영기도 조금씩 쓰는군. 거기에 영혼 구슬까지 필요하니 그걸 감안하면 적당한 강화라고 생각한다.”
정말 이게 적당한 강화인가?
그의 말이 맞는 건지, 분류하자면 같은 술법사인 유르파에게 여자들의 시선이 모인다.
유르파는 멋대로 실룩거리려는 얼굴 근육을 마구 문질러 진정시킨 뒤에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설명해주었다.
=방금 그 기술은…… 6급 법술사의 진심을 담은 공격, 혹은 7급 법술사의 술법이라 봐도 될 거야. 그래도 술법을 외우는 시간이 없으니까 말도 안 된다고 생각이 들지만…….=
단면적으로 보자면 환인 혼자서 군대와도 싸울 수 있는 공격 수단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깊게 파고 들어가면 이래저래 문제가 생긴다.
=자기의 영혼술은 법술사처럼 다양하지 못하잖니. 특히 범위 제어가 어려우니까 방금의 공격을 근처에서 터트렸다간 동료는 물론이고 자신마저도 폭발에 휘말릴 가능성이 커. 그점을 생각하면 적당하다고 볼 수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나도 모르겠당.=
설명을 포기하는 유르파의 귀여운 말투에 피식 웃은 환인은 자신이 바꿔놓은 구릉지 지형 주변으로 하늘 기사들이 모이는 걸 지켜보았다.
저들이 본 것이 얼마나 빠르게 소문이 되어 퍼져나갈까.
“영혼 폭발은 데몬스트레이션 용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이런 게 눈앞에서 연달아 터지면 군대라 하더라도 사기가 떨어질 테니까요. 진짜는…….”
=영혼 화살, 이지?=
영혼 폭발이 미사일처럼 변했으니 영혼 화살은 뭐, 레일건쯤 되지 않을까 싶은 환인이다.
안느에게 고개를 끄덕여준 환인은 유르파의 보증이 있었으니 자신의 등급을 7급 정도라고 판단을 내렸다.
‘남은 확인 절차는 강령인가.’
영혼술의 등급은 물론이고 몸 안의 영기 통로까지 변화했다.
이때까지는 몸에 과부하가 생겨 중급 영혼은 자신의 몸에 강령하지 못했는데, 영혼술의 등급이 확연하게 성장했다면 과부하도 완화되었을 수 있다.
그 점을 확인해본 뒤에는…….
환인은 햇빛 아래에서 더욱 너덜너덜해 보이는 마차를 보며 눈을 스산하게 빛냈다.
부서진 마차를 보며 슬퍼한 여자친구들을 위해 합성 괴물을 보낸 놈을 찾아 복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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