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407화 (407/813)

〈 407화 〉 401 린덴 촌락

* * *

불타 쓰러진 나무방책과 무너지고 박살 난 수십여 채의 집과 곳곳에 피를 먹어 붉어진 땅.

“…….”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야트막한 언덕의 작은 촌락에서 벌어진 참사의 흔적에 환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풍경을 보자마자 마음속에 떠오른 두 가지 마음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당한 재앙을 두고 느끼는 불쾌한 감정.

사람들이 당한 재앙을 목격했음에도 무심한 감정.

두 가지 감정이 혼재되니 정신이 어지러워진다.

=우리가 늦어도 너무 늦었나 봐…….=

=어쩌면 처음부터 늦었을 수도 있어.=

=으응? 처음부터 늦었다니…… 아.=

왜 마음이 둘로 나뉘는 걸까 잠시 생각해보던 환인은 여자친구들이 주고받는 이야기에 감정을 끊고 생각을 정리했다.

짐작 가는 이유가 너무 많은 탓이었다.

그리고 떠올린 것은 노트북에 담긴 기가를 넘어 테라 단위에 가까운 전문 서적들.

‘시간 내서 살펴봐야겠군.’

자신은 선천적인 성격장애다. 여기에 정신병도 발병하면 거의 답이 없을 테지만 그래도 치료 방법이라던가 알아보는 것이 좋겠지.

이 상황에 믿을 것은 정신력을 강화해주는 그리모암의 완륜 뿐. 환인은 팔목에 차고 있는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여자친구들의 대화를 듣는다.

「처음부터 늦었다니요? 유르파 언니, 무슨 뜻인가요?」

=생각해봐. 타락한 바르둘이야. 지능적이고 영악한 놈이 외부에 도움을 요청한 사실을 몰랐을까?=

「……외부에 도움의 손길을 청하러 사람들이 나갔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바르둘이 촌락을 공격했다는 건가요?」

=난 그쪽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해. 비가 내려서 흔적이 많이 씻겨 내려갔지만, 대충 일주일은 넘은 흔적인걸.=

=환연아. 주변에 수상한 건 없어?=

이실리테의 질문에 유르파의 어깨에 앉아 눈감고 팔짱을 끼고 있던 환연이 입을 열었다.

「애들을 불러 모아서 반경 500m 안을 낱낱이 살폈는데 이형종이나 괴물 같은 건 안 보여.」

비상의 등에서 내린 환인은 색 변화 마도구를 조작해 비상의 깃털을 먹구름 색으로 바꾼 뒤 부탁했다.

“비상, 하늘에서 주위를 감시하다 뭔가 접근하거나 하면 알려다오.”

큐삣.

슈아아악—

이제는 원숙한 성체가 된 비상이 방정맞은 날갯짓 소리도 없이 매끄러운 바람 소리와 함께 비 내리는 하늘로 빠르게 날아오른다.

먹구름과 같은 색으로 바꿔놨으니 어지간히 눈이 좋지 않은 이상 하늘을 날고 있는 비상을 알아보진 못하겠지.

마차와 쿠에들을 마을 입구 근처 큰 나무 아래에 옮겨놓는 여자친구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둘로 나눠서 촌락을 살펴보도록 하지. 영혼을 볼 수 있는 려강은 이실리테, 안느, 유르파와 함께 저쪽으로 가고 환연은 나와 함께 간다. 단독 행동은 하지 말고 뭉쳐서 다녀라. 수상한 점을 발견하면 즉시 말하도록.”

=네, 주인님.=

=엉.=

「네.」

환연을 후드 망토 옷 사이에 들인 환인은 광창의 코어를 쥐고 빗물이 흐르는 땅을 걸으며 주위를 살폈다.

경사각이 10도 정도 되는 마을. 파릇파릇한 식물이 자라고 있는 계단식 논과 밭. 엉망으로 팬 길과 강한 힘에 부러져나간 듯한 나무. 무언가에 박살 난 울타리.

불타 천장이 무너진 집으로 간 환인은 하급 정령을 몸에 강령한 뒤 문짝을 뜯어내고 안쪽을 살펴보았다.

“…….”

하던 일을 팽개치고 다급히 뛰쳐나간 흔적이 무너진 천장 사이로 눈에 들어온다.

밖으로 나온 환인은 빗물에 조금씩 씻겨나가는 핏자국을 따라가다가 가축마저도 전혀 남지 않은 촌락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시체가 안 보이는군.”

「……그러네. 정령으로 둘러봐도 안 보여. 바르둘이 다 가지고 간 걸까?」

“죽인 시체를 한곳에 모아뒀다면 필시 피 웅덩이가 넓고 진하게 맺혔을 거다. 하지만 그런 흔적이 없는 것을 보면 가능성은 작지 않겠지.”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여놓고 그 뒤에 옮겼다고 하기에도 핏물이 맺힌 곳이 적다.

저항흔도 옅고 질질 끌거나 끌려간 자국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환인. 영혼은 없어?」

영혼한테 물어보면 자초지종을 수월하게 알 수 있을 텐데. 그런 의도로 물은 환연은 돌아온 대답에 고개를 갸웃했다.

“영혼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괴물한테 습격당해 죽었으면 원한이 강하게 남을 텐데 하나도 없다구?」

상황이 너무 암담하고 희망이 없어서 죽자마자 성불한 건가?

하지만 환인이 해준 이야기에 그 가설은 제외했다.

“숨어있어서 내 눈에 안 보이는 걸 수도 있지. 아니면 처음부터 죽지 않았거나.”

「……사람이 죽지 않았다면…… 바르둘이 산채로 끌고 갔다는 건데 이렇게 흔적도 안 남기고 데려가는 거면…….」

더 위험한 거 아닌가? 평범한 바르둘이 아닌 거 같은데. 엄청나게 센 괴물… 아니 괴수나 악수?

환연이 자그마한 머리를 굴리며 고민하는 사이 촌락에 하나뿐인 출입구로 돌아나간 환인은 입구 근처에 새겨진 다툼의 흔적을 발견했다.

압도적인 힘의 싸움으로 이루어진 흔적이 아니라 비슷비슷한 신체 능력의 일반인들이 싸운 흔적.

비 때문에 희미해져 가는 흔적을 살피던 중 환인은 목덜미를 옅게 스치고 지나가는 감각을 포착했다.

“…….”

살기는 아니다. 그렇다고 좋은 기운도 아니었다.

뭔가…… 본능적으로 꺼림칙한…….

탐색을 마친 환인은 마차로 돌아가 비에 흠뻑 젖은 후드 망토를 벗어 탁탁 털고서 마차의 돌출부에 걸어놓는다.

쿠에~

쿠으읏.

쿠엥.

자신을 돌아보며 쿠쿠 우는 쿠에들을 마차에서 풀어주자 갑갑했던지 푸르륵— 강아지처럼 몸을 털더니 날개와 머리를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켠다.

수고해준 쿠에들에게 먹이 주머니에서 과일과 채소 몇 개를 꺼내 먹여주고 있으니 환연이 날아와 소리쳤다.

「알았어! 타락한 바르둘은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인 거야! 압도적인 힘의 차이에 죽은 사람은 절망해서 그냥 성불한 거고 바르둘은 시체랑 살아있는 사람이랑 모두 끌고 가버려서 마을에 시체도, 사람도 안 남은 거지!」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추리를 말하는 환연의 몸에 자신의 손수건을 둘러준 환인은 나무 아래서 내리는 비를 구경하는 쿠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맞지? 내 추리가 환인의 추리랑 같지?」

“그럴 가능성도 있다.”

「엥…….」

그 말은 다른 가능성도 있다는 거잖아. 다른 이유가 있나? 뭐지?

환연이 다시 고민을 시작하고 얼마 후, 환인이 잘 보이지 않는 비상을 찾고 있을 때 백려강과 함께 반대쪽으로 갔던 여자들이 흐려진 얼굴로 돌아왔다.

=주인님, 생존자는 한 명도 없었어요. 아예 시체조차 남지 않았어요.=

「영혼으로 남은 분들도 안 계셨어요…….」

=피난 장소 같은 곳을 촌장 집 지하에서 발견했는데 그곳도 박살 나서 엉망이 되어있더라.=

=비축 식량 중에서도 고기는 거의 남지 않았어. 있는 건 치즈나 시든 채소 정도…자기는 알아낸 게 있니?=

여자친구들이 한마디씩 하는 것을 들어준 환인은 그녀들에게 물었다.

“타락한 바르둘에 대해서 다들 얼마나 알고 있지.”

=응? 어, 루크랑 족만큼이나 종류가 다양하고 외진 곳에서 짐승처럼 살아가고…….=

=사람을 싫어하지만 그렇다고 막 선공해오는 건 아니에요. 더러워서 피한다는 느낌이네요.=

“바르둘이 전염병을 일으키는 경우는 없나.”

「전염병……인가요?」

“그래. 예를 들자면 물리고 시간이 지나면 권속화 한다거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를 환인은 자신이 본 것에 비춰 설명해주었다.

평범한 사람이 다툰 듯한 흔적. 놀라서 집을 뛰쳐나간 흔적. 울타리가 강한 힘에 부서진 게 아니라 몸싸움에 밀려 넘어진 듯한 흔적.

무엇보다 직업자에 해당하는 강한 힘으로 인해 벌어진 흔적이 거의 없으며 흔적이 가리키는 시간대가 한날한시라는 데에 주목하자 여자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심각해졌다.

=그런…… 증상은 들어본 적이 없지만 전혀 없다고는 못하겠네.=

“그런가.”

=네. 비슷한 현상을 일으키는 재해급 마인이나 마수가 없지 않아요.=

「재해급은 뭐야? 10분위 등급제랑은 달라?」

환연의 질문에 이실리테가 짧게 설명해준다.

=재해급은 마을이나 도시에 피해를 줄 수 있는 괴물을 뜻해. 예를 들자면 흡혈귀.=

피를 빨아먹으며 저주를 몸에 불어넣는 걸로 부하를 잔뜩 늘려나갈 수 있으며 그렇게 태어난 부하도 피를 먹어 강해지면 또 부하를 늘릴 수 있다.

내버려 두면 도시도 쑥대밭이 되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아서 재해급이라고 부른다는 설명.

=확실히 도령 말대로라면 영혼이 없는 거 하고 시체와 사람도 없는 게 설명이 돼. 그러면 바르둘이 타락하면서 권속화 능력을 얻게 되었고 그걸로 린덴 촌락을 멸망시켰다는 이야기…….=

휘이이이잉—

말 하다 말고 불어온 서늘한 바람에 입을 다문 안느는 소름을 쓸어내리는 것처럼 팔뚝을 만진다.

「그, 그러면 큰일이 아닌가요? 전염성 권속화 능력이라면 재해급으로 분류되잖아요……. 도시에 연락해서 지금 상황을 알리는 게 좋으리라고 생각해요.」

=나도 려강 아가씨랑 같은 생각이야. 자기, 백 공자님한테 연결하는 게 좋을 거 같아.=

솨아아아—

불어오는 강한 바람에 잎사귀가 스치며 수령이 수백 년은 될법한 거대한 나무가 스산한 소리를 낸다.

점차 어두워져 가는 시각.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간간이 불어오는 강풍에 어수선하고 쓸쓸한 소리가 울려 퍼지니 여자들은 이유 모를 한기를 느끼며 몸을 떨었다.

평소 질문이나 대답을 바로바로 해주던 것과 다르게 무언가에게 정신을 빼앗긴 것처럼 느린 환인의 반응도 그러한 한기를 부채질한다.

=……주인님?=

자신들을 보지 않고 비 내리는 지평선을 응시하고만 있는 환인. 이실리테는 심장에 공포가 조금씩 스며드는 것을 느끼며 환인의 소매를 살짝 잡았다.

“뭔가 느껴지는 게 없나.”

=……?=

=…??=

느껴진다니, 뭐가?

영문 모를 질문이지만 심상치 않음을 느낀 이실리테와 안느는 곧장 무기를 빼 들었고 유르파도 지팡이를 꺼내 쥐었다.

이실리테는 당황하는 환연에게 시선을 주었다.

뭔가 있어?

아무것도 없어!

휘오오오오—

쏟아지는 빗방울이 사방으로 몰아친다. 점점 비가 강해지는 것이, 폭풍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느낌.

삐이익—

환인이 손가락 휘파람을 불자 비상이 쏜살같이 내려와 환인에게 엉겨 붙는다.

“비상. 수상한 점은 없었나.”

쿠우? 쿠흥!

그런 거 없었다는 대답에 환인은 자신의 과민 반응이었나 생각했다.

여자친구들이 아무것도 못 느꼈고 비상도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경계하고 있는 환연의 정령 감시 범위 안에도 걸리는 게 없다.

자신이 느꼈던 기묘한 감각은 기분 탓일까.

잠깐 생각하던 환인은 유르파에게 지시를 내렸다.

“수정구로 프라버에 짧은 전문을 보내주십시오. 린덴 촌락이 멸망했고 타락한 바르둘의 소행으로 보이며, 촌락에 생존자는커녕 가축과 시체마저도 하나 남지 않았다고 하면 됩니다.”

=으, 응.=

유르파에게 지시를 내린 환인은 조금 고민했다.

꺼림칙하니 이대로 촌락을 떠난다는 선택지와 오늘 하루 여기에 머무른다는 선택지.

전자의 경우는 이미 이틀째 강행군을 펼친 상황이다. 마차를 끌거나 하는 걸 좋아하는 쿠에들이 지쳐서 멍에를 풀어달라고 칭얼거렸을 정도.

비까지 내리고 있고 곧 밤이 찾아오니 촌락을 당장 떠난다는 쪽은 모두의 피로도를 생각해보면 곤란하다.

이곳에 하루 머무르는 쪽은 뭔가 꺼림칙 일이 일어날 거 같다는 근거 없는 예감이 드는 상황.

잠시 고민한 환인은 광창의 코어를 움켜쥐며 긴장하고 있는 기색의 여자친구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여기서 하루 쉬지. 불침번은 2인 1조로 1시간씩 나와 이실리테, 이실리테와 안느, 안느와 유르파와 환연, 유르파와 환연과 나, 이런 식으로 로테이션을 돌린다. 백려강은 영기가 모두 소모되는 대로 나와 함께 불침번을 선다.”

=도령.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거야?=

“글쎄. 나도 확신할 수 없어 해줄 말이 없군.”

=미심쩍은 게 느껴서 불침번 방식을 바꾼 거 아니야?=

“린덴 촌락을 멸망시킨 괴물이 아직 이 근방을 떠나지 않았을 수도 있고, 그렇다면 우리가 촌락으로 들어오는 것도 보았을 테니 비까지 내리는 오늘 밤 습격해올 가능성이 있는 만큼 경계하자는 의미에서 바꾼 불침번이다. 내가 꺼림칙한 것과는 관계없어.”

=음…….=

“며칠 강행군하느라 힘들겠지만, 다들 신경 써서 불침번을 서도록 하지.”

=네.=

=으응.=

저녁을 먹어야 할 시간이 찾아왔기에 이실리테는 환연이 만들어준 흙 화로에 냄비를 올리고 스튜를 끓이는 한편, 고기와 채소, 과일 등을 바비큐 식으로 구워 저녁을 해결했다.

날씨가 쌀쌀한데다 비를 맞아 체온이 조금 내려간 만큼 따뜻한 걸 먹는 게 좋아서 정한 메뉴다.

그 후 일행은 긴장을 풀지 않고 문을 활짝 열어둔 마차에서 자기 정비 시간을 가진 뒤 조용히, 정신을 날카롭게 벼리며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환인이 보여준 모습이 그녀들의 경각심과 긴장감을 일깨웠기 때문.

그사이 환인은 노트북을 꺼내 의학 카테고리에 들어가 정신의학 관련 서적을 찾고 있었다.

일단 대분류에서 자신의 상황에 맞는 항목을 찾아보지만…….

‘어느 것에도 맞지 않아.’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느끼는 선천적 성격장애.

이건 어느 항목에도 맞지 않았고, 시점을 다르게 잡으면 항목 대부분에 적용된다.

일단 우울함이나 불안 장애라고 볼 수 있겠지만 외상 및 스트레스 관련으로도 볼 수 있다. 선천적이니 신체 증상으로도 볼 수 있을까. 평온의 파동으로 인한 물질 관련 중독성 장애로도 분류 될 수도 있고…….

정신과 전문의도 식겁할 증상일 거라고 생각하던 환인은 아카이브로 따놓은 자료 화면에서 정신 질환의 간단한 분류법을 발견했다.

망각, 환각 증상과 사회적응력, 치료방식, 자기 인식 능력의 가불가로 신경증인지 정신증인지를 판단하는 분류법인데 정신증은 대부분이 불가인 상태로 이성적 판단 능력이 무너진 상태를 가리킨다.

이에 따르면 자신은 신경증이다.

신경증에 대한 설명과 포괄적인 치료방식을 확인하던 환인은 현재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는 치료방식은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상담 치료 쪽뿐이라는 걸 확인했다.

‘답이 없군.’

전문용어를 알기도 힘든 판국에 언제 정신의학을 익혀 자기 자신의 상태를 파악해 스스로 치료할 수 있을까.

하고자 하면 하겠지만 지금은 영도를 찾아가야 하는 데다 알소프도 신경 써야 하고 최종적으로는 종족 연합 국가까지 가야…….

“…….”

……어쩌면 지금 이 같은 증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영혼술로 인한 감정의 다양성 때문이 아니라, 알소프 같은 적의에 대한 강박적인 대처 방안 확립에 너무 신경을 쏟아서가 아닐까.

개굴, 개굴개굴개굴, 개굴개굴.

빗소리가 줄고 개구리 우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그 소리를 들으며 노트북을 덮은 환인은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졌다.

더닝 크루거 이펙트처럼 어쭙잖게 정신의학을 독학하려다 상세를 더 심각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며 마차 지붕으로 올라온 환인은 안느가 이실리테와 등을 맞대고 주위를 경계하는 것을 발견했다.

“안느, 조금 자두는 게 좋지 않겠나.”

=괜찮아. 사나흘 안 잔다고 집중력이 떨어지진 않으니까. 괜히 불안감을 가지고 자는 거보다 이렇게 있는 게 더 편해. 그건 도령도 마찬가지잖아?=

씩 웃는 안느에게 환인도 후, 작게 고개를 끄덕여주고 근처에 앉는다.

잠시 촉촉하게 내리는 부슬비 소리와 주인 잃은 논밭에서 들려오는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던 중 안느가 조금 힘 빠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세상을 여행 다니며 죽은 사람, 몰락한 촌락이나 마을은 종종 봤지만…… 촌락이나 마을이 망한 걸 볼 때마다 뭔가, 회의감이 들어.=

“회의감인가.”

=응. 신님들은 정말 우리를 사랑하고 계실까 하는 회의감. 정말 사랑하신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셨을텐데…….=

“종교인으로서는 위험한 생각이군.”

=으흐흐.=

억지웃음을 짓는 안느에게서 시선을 돌린 환인은 캄캄한 초원으로 시선을 주며 말했다.

“사랑하니까 시련을 주는 거라고도 볼 수 있겠지.”

=역설적이네.=

「그런 모순과 역설을 가지고서 해나가는 게 신앙이라고도 하니까요.」

마차 아래에서 슬그머니 올라오며 말하는 백려강에게 안느가 어깨를 으쓱했다.

=넌 안 자?=

「잠은 죽어서 충분히 잘 수 있다고들 말하잖아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거짓말이에요. 죽으니까 잠이 오히려 더 없어지는걸요.」

호족 영애의 블랙 코미디에 환인과 그의 여자들이 작게 웃음 지었을 때였다.

쿠우?

쿠르티와 바짝 붙어 서로의 등에 머리를 올리고 졸고 있던 비상이 번쩍, 머리를 치켜들었고 동시에 환인과 그의 여자들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무기를 꺼내 쥐었다.

서늘한 기온 속에 뭔가 작고 기분 나쁜 것이 스멀스멀 기어 오는 느낌.

어둠 속에서 바퀴벌레가 사각갈작거리는 불쾌한 감각.

=도령, 뭔가 보여?=

“괴물인가. 숫자가 많군.”

전개한 영혼 시야로 어둠 속을 꿰뚫어 보는 환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끄에에에…….

끼이이…….

곤충의 곁눈 같은 게 머리 반을 뒤덮거나 몸에 곤충의 신체 일부가 부정형으로 솟아난, 끔찍한 몰골로 변한 사람들의 군대였다.

처적, 사각사각, 가가각……

까드드득, 뜨득.

사람의 신경을 말초에서부터 불쾌하게 자극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온다.

그 소리에 마차 지붕 위로 기어 올라온 유르파가 학을 뗐다.

=읏, 이게 다 무슨 소리라니.=

“유르파, 빛이 필요합니다. 어차피 포위당한 것 같으니 주변을 환히 밝힐 수 있으면 좋겠군요.”

=응. 바로 켤게.=

전투를 염두에 두고 잠을 청했기에 따로 준비할 필요 없이 곧장 특대 광구光? 술법을 외워 하늘로 쏘아내는 유르파.

사람 머리만 한 구슬이 하늘로 치솟아 오르더니 확­ 빛이 터지며 반경 1km가 훤히 밝아진다.

그리고 드러난 풍경은 끔찍 그 자체였다.

취르르….

끼이에엑!

끼기긱… 끄그그극….

=읏.=

=으악 시발!=

안느가 자신도 모르게 상소리를 내뱉었을 만큼 광구로 인해 밝아진 주위 풍경은 살벌했다.

사람과 온갖 곤충을 합성시킨 듯한 괴물이 두 팔과 두 다리로 짐승처럼 엎드린 채 언덕 위, 언덕 아래 할 것 없이 촌락을 포위하고 있는 광경.

어찌나 많은지 쏟아지는 비에 젖어 번들거리는 괴물로 인해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유르파와 함께 마차 위로 올라온 환연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가 울상을 지으며 소리친다.

「아이씨……. 미안해! 저것들 전부 땅속에 숨어있었어!」

그래서 이상하게 꺼림칙했던 건가.

땅속까지 확인 못 한 자기 잘못이라며 자책하는 환연을 달랜 환인은 괴물들이 몸에 걸치고 있는 넝마 같은 옷가지를 보곤 후, 한숨을 내뱉었다.

“린덴 촌락뿐만 아니라 다른 촌락 몇 군데도 당했나 보군.”

「저, 저 괴물들, 전부 사람이었던 거에요?」

“그래.”

그런 괴물이 기괴한 신음과 함께 빛에 이끌린 나방처럼 환인 일행을 향해 접근하기 시작했다.

“온다. 전부 쿠에의 등에 올라타라! 유르파, 소모용 전투 마도구를 아끼지 말고 쓰십시오! 환연은 가능한 많은 적을 지금 쓸어버려라!”

=응!=

「알았어!!」

실수를 만회하겠다는 듯이 송곳니를 드러낸 환연이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뻗자.

촤좌좌좌좍­!!

땅에 흐르는 빗물이 날카롭고 뾰족한 창과 검으로 변해 치솟아오르며 괴물들의 몸을 꿰뚫고 잘라버린다.

끼아아아아악—!!

그것을 신호로 수백, 수천 마리의 괴물도 괴성을 지르며 검은 파도처럼 밀어닥쳤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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