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6화 〉 400 알소프로 가는 길
* * *
이실리테가 폰드 고릴라의 녹색 털이 수북이 난 등가죽을 벗겨내는 걸 보며 폰드 고릴라의 영혼을 회수한 환인은 영혼 등급이 중급이란 사실에 조금 놀랐다.
중급 영혼이라면 5~6급 이형종과 비슷한 수준이니까.
‘광창의 위력이 예상 이상이군.’
환인은 손에 익숙해지기 위해 막대기 형태로 되돌린 광창을 만지작거리며 만족스러워했다.
무두질용 장검이 잘 들지 않아 다중 검기를 일으켜 가죽에 칼집부터 내는 이실리테다.
저런 가죽에 더해 팔뚝 근육과 뼈를 통째로 잘라버렸음에도 반발력이 거의 전해지지 않았다.
이만한 절삭력이라면 폭군룡의 미궁 지하 5층에서 마주친 아룡종에게도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정도
다만 공복 자극이라는 부정적인 효과가 어색하다.
‘아주 살짝 허기가 들었나.’
자신의 몸 둘레보다 3배는 더 두꺼운 팔을 세 개, 다리를 하나, 그리고 그 팔 만큼이나 두꺼운 목, 이렇게 다섯 번을 베고 이 정도 공복감이라면 7마리를 잡았을 때 허기로 행동이 굼떠질 것이다.
하지만 그건 다섯 번이나 창질을 했을 때의 이야기.
방벽을 활용해 견제와 피해를 주며 두 번의 창질로 끝낸다면 18마리는 잡을 수 있겠지.
그리고 허기와 공복 자극에 대해서는 따로 방안이 없다.
‘익숙해질 수밖에.’
=와. 이놈 고추 엄청 작네.=
=……안느.=
=야야 이슬이 너도 봐봐. 이 덩치라면 고추 길이는 한 60cm~80cm는 되어야 할 텐데 20cm밖에 안 되잖…… 아얏! 아파아!=
=기지배야. 이상한 거 보지 말고 가죽 벗기는 거나 도와.=
=너 힘 엄청 세져서 진심으로 때리면 진짜 아프거든? 때릴 때 말하고 때려.=
=알았으니까 얼른, 거기 힘줘서 잡아당겨.=
=칫.=
「쿡쿡쿡.」
이실리테와 안느가 수다를 떨고 백려강도 옆에서 함께 하며 폰드 고릴라의 가죽을 벗겨나간다.
폰드 고릴라는 인간 형태였지만 영혼 시야로 확인한 시체의 색은 적색이 감도는 노란색이었다.
먹으면 독과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큰 고깃덩어리.
=주인님, 피를 뺀 뒤에 고기를 물에 담가두고 정화술도 펼치면 먹을 수는 있다고 배웠어요. 허벅지 안쪽 살이랑 갈비뼈에 붙은 살이 식용에 알맞다고 하던데 갈무리해둘까요?=
“이런 걸 굳이 먹어야 할 만큼 식량이 부족한가.”
=그건 아니지만요.=
“맛이 뛰어나다던가.”
=그냥 참고 먹을 수 있는 수준이라고 했어요.=
“그러면 버리도록 하지.”
모피가 붙어있는 등가죽 쪽은 무두질을 잘해놓으면 절상에 강해지기에 그것만 채취하고 나머지 고기와 뼈는 다 버린다.
그렇게 해체된 폰드 고릴라의 잔해를 방치하고 떠나려던 일행은 유르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폰드 고릴라는 다른 종의 암컷이나 여자를 납치해서 새끼를 치기로 유명해. 소굴을 찾으면 이런저런 재물이 쌓여있지 않을까? 덩치도 크고 좀 나이를 먹은 거로 보였으니까.=
=어? 하지만 여긴 도시 근처잖아. 치안군을 생각해보면 여기 자리 잡은 지 얼마 안 됐을 거 같은데 뭐 쌓인 게 있으려나.=
안느의 지적에 유르파는 고개를 끄덕이며 반대 의견을 낸다.
=프라버의 군은 지난 몇 달간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잖니. 크라빈 마을을 제때 돕지도 못했을 정도니까.=
=어음.=
=그게 거의 반년에 가까운 시간이니까 찾아볼 가치는 충분할 거 같은데…… 자기 생각은 어떠니?=
“잠깐 찾아볼 가치는 있겠지요. 길 잃은 영혼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환연.”
「응. 500m 안에는 없어. 저쪽에서 일직선으로 달려왔으니까 저 방향으로 가면 뭔가 있지 않을까.」
“같이 가지.”
손을 뻗어 날아온 환연을 후드 망토 안으로 집어넣고 비상의 옆구리를 툭 건드린다.
쿠엣.
펄럭 몇 번의 날갯짓으로 하늘 높이 날아오른 비상의 등에서 환인은 하늘을 선회하며 침엽수의 녹색 숲을 살폈다.
어디 수상한 점이나 부자연스러운 곳이 없는지, 키 3m 이상 되는 유인원이 보금자리로 삼을만한 곳 위주로 훑는다.
잠시간의 시간이 지나고, 환인의 목에 매달려 정령 감응으로 주변을 함께 살피던 환연이 그의 뺨을 톡톡 때리며 반쯤 변명하듯 말했다.
「있지. 그 녹색 네 팔 고릴라, 엄청 빨랐었어. 500m를 몇 초 만에 달려들어서 경고할 틈도 없었으니까.」
“500m 바깥에서 뭘 느끼고 찾아온 건지 기이할 따름이군.”
「아무튼 정신 놓고 있다가 경고 놓친 거 아니니까.」
놀다가 습격을 방치했다고 생각하는 게 싫어서일까. 환인은 드물게 두 번이나 강조하는 환연의 머리를 어루만져주었다.
“알고 있다. 정령이 빈틈없이 분포하고 있는 것도 아니니 구멍이 생길 수도 있겠지.”
그리고 폰드 고릴라가 나무를 타고 거의 날듯이 날아오는 것은 자신이 먼저 발견했었다. 광창의 위력 실기 테스트를 위해 내버려 뒀을 뿐.
“그보다 소굴이 잘 숨겨져 있는 건가. 평범하게는 안 보이는군. 비상, 눈에 띄는 게 있나.”
꾸으~
비상도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안 보인다며 숲을 두리번거린다.
그사이 환연은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땅의 정령을 불러 모아 주변을 샅샅이 뒤졌고 얼마 안 가 습격받은 지점에서 700m 정도 떨어진 자그마한 언덕에 동굴이 있는 것을 찾아냈다.
그곳을 찾아가니 과연, 폰드 고릴라가 들락거릴만한 바위 동굴이 있었다.
「동굴 안에 살아있는 건 없어.」
악취와 오물로 가득한 동굴 입구에서 정령으로 동굴 안쪽의 위험 요소를 대강 살핀 환인은 비상의 배를 가볍게 차면서 다시 날아올랐다.
“돌아가서 모두 데리고 오지.”
여자친구들과 함께 동굴이 숨겨져 있는 작은 언덕에 도착한 환인은 주변을 살피다가 폰드 고릴라가 어떻게 자신들을 찾아온 건지 알게 되었다.
언덕 위 가장 높은 나무에 올라가면 호숫가가 눈에 훤히 들어왔던 것.
폰드 고릴라가 자주 오르락내리락했는지 굵은 나무 기둥 표면이 꽤나 반질반질하다.
「환인~. 입구 다 정리했어.」
땅의 정령을 불러 입구 주변의 오물을 다 파묻은 환연의 호출에 환인은 사람이 서서 이동할 수 있을 만큼 넓은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갔고, 깊이가 10m 정도 되는 동굴 끝에 금방 다다를 수 있었다.
‘생각보다 깔끔하군.’
똥오줌은 밖에서 처리했는지 동굴 안쪽은 한쪽 귀퉁이에 쌓인 정체 모를 뼈다귀와 여기저기 부러지거나 으스러진 채 썩어가는 여자 시체를 제외하면 깔끔했다.
「읏…….」
=으음.=
=…….=
잠자리로 보이는 곳은 나뭇가지와 이파리가 잔뜩 쌓여있으며 바닥은 고운 흙으로 깔려있고 통나무의 속을 파내서 만든 그릇도 몇 개 보인다.
가죽과 모피가 깔끔했으니 소굴도 깔끔한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
시체에는 아무런 감흥 없이 동굴 내부를 둘러보는 환인과 다르게 백려강은 여자 시체의 상태에 충격을 받았다.
허리가 옆으로 기역자로 꺾인 채 죽어있는 여자.
골반이 으스러졌는지 두 다리가 기괴하게 뒤틀려 죽어있는 여자.
가랑이에서부터 가슴까지 찢어져 죽은 여자.
머리가 수박처럼 으깨져서 죽은 여자.
「너무 끔찍해요…….」
=잡아 온 여자들로 번식하려다가 힘 조절을 못 해서 죽였나 보네요.=
=죽은 것은 안타깝지만 이 정도면 비교적 평온한 죽음이야. 산채로 더 심각한 꼴을 당하는 일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이실리테와 안느의 이야기에 백려강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매를 떨었다.
「이런 죽음이 평온하다니……. 이런 죽음보다 더 심한 일이 있나요……?」
=뭐…… 기생수에게 기생 당해 산채로 괴물이 되거나, 악령에게 쓰여 영혼마저도 오염되거나, 촉수 괴물에게 붙잡혀 알 낳는 숙주가 되어 정신이 망가진 채 죽을 때까지 괴물을 낳거나…….=
자신의 상상 이상으로 끔찍한 이야기에 백려강이 멍한 표정을 짓는다.
=려강, 산란못 미궁 이야기 들으셨나요?=
「네…….」
=그곳이 그랬어요. 마을의 여자들이 개방형 미궁에서 흘러나온 괴물 촉수 개구리에게 잡혀가서 살아있는 채로 괴물의 새끼를 낳는 처지였죠.=
「…….」
흐린 표정으로 죽은 여자들을 바라보는 백려강의 모습에 작게 쓴웃음 지은 여자들은 각자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안느는 죽은 여자들을 향해 성호를 긋고 축성을 외우며 명복을 빌었고 이실리테와 유르파는 여기저기 널려있는 찢어진 옷가지와 가방 등을 한군데에 모아나간다.
환인은 대충 80평 남짓한 동굴을 둘러보고 있었다.
조금 정리한다면 사람이 머물러도 될만한 공간이다. 짐승 누린내가 나긴 하지만 이 정도는 탈취할 방법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렇게 동굴을 둘러보던 환인은 구석 한 귀퉁이에 쪼그려 앉아있는 여자 영혼 하나를 발견했다.
신경 쓰지 않으면 찾을 수 없는 곳에 금방이라도 흩어져 사라질 것처럼 흐릿하고 흐물거리는 영혼.
표정 또한 탈색된 것처럼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다.
“…….”
평온의 파동을 함부로 뿌렸다간 그 힘에도 소멸할 거 같아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환인은 평온의 파동을 최저 출력으로 조심스럽게 뿌렸다.
장갑 낀 손바닥에서 흐린 회백색 기운이 흘러나와 영혼을 조심스레 감싸고, 여자 영혼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
“괜찮습니까.”
흐릿한 시선으로 환인을 응시하던 여자 영혼이 무표정으로 한줄기 눈물을 흘렸다.
「도와…… 주세요…….」
“이 동굴의 주인은 죽었습니다. 이제 당신을 괴롭히는 것은 없으니…….”
「촌락…을…… 도와…….」
뜻밖의 이야기에 환인은 입을 다물었다. 촌락을 도와달라니, 이 여자의 촌락에 문제가 발생한 건가.
말을 끝맺기도 힘든 영적 상태인지 영혼은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손을 환인에게 뻗으며 힘들게 애원한다. 눈앞의 남자가 마지막 희망인 것처럼.
「제……발….」
“…당신의 촌락 이름이?”
「린… 린덴…….」
“알겠습니다. 그곳을 찾아가 보겠습니다.”
「가, 가…ㅁ……ㅅ…ㅏ……….」
채 완성되지도 않은 단어 하나를 내뱉다 햇살을 받은 아침 안개처럼 흩어져 사라지는 여자 영혼.
성불한 게 아니라 소멸해버리는 광경에 어느새 다가와 있던 백려강이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런 그녀의 옆에서 환인이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안느가 물었다.
=도령, 무슨 일이야?=
“저 시체의 주인이 촌락을 도와달라고 부탁하더군. 린덴 촌락에서 프라버로 도움을 요청하러 가다 폰드 고릴라를 만난 것 같다.”
가랑이가 가슴까지 찢어진 채 내장을 흩뿌린 모습으로 죽어있는 시체를 가리키자 여자들의 표정에 안타까움이 깃들었다.
한숨을 내쉰 유르파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옷감 한 필을 꺼내 환인이 가리킨 시체로 다가가서 염습하며 중얼거린다.
=4개월간 프라버 내정이 멈춘 여파가 여기저기서 나타나네…….=
=크라빈 마을도 그런 꼴이 되었을 정도니까……. 도령, 다른 시체도 수습할까?=
“그래. 죽은 시기가 비슷한 것을 보면 같은 일행일 수도 있으니 시신은 모두 챙기지.”
여자친구들이 옷감 여러 필을 꺼내 다른 시체 세 구도 감싸는 사이 가방과 찢어진 옷가지를 뒤진 환인은 루크랑 어로 적힌 상소문 두루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촌락 주변에 타락한 바르둘이 자리를 잡아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계속 납치해가고 있으니 도움을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바르둘인가.”
율캄 촌락의 류히 자매들이 해준 이야기가 떠오른다.
루크랑 종족의 한 갈래였지만 문명을 받아들인 루크랑 족과 다르게 문명의 진화를 거부하고 짐승처럼 살아가다 끝내는 짐승이나 다름없게 된 자들.
=타락한 바르둘이 나타났으면 촌락만의 힘으로는 힘들겠네.=
“타락한 바르둘은 일반 바르둘과 어떤 차이가 있지.”
산림형 미궁 근처에서 싸웠던 늑대 인간하고는 다른 건가 생각하던 환인은 이어진 안느의 설명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강하기도 하지만 사람만큼 똑똑하고 사람보다 더 영악한 게 문제야.=
=바르둘은 우리 루크랑과 비교하면 야성을 선택한 대신 지능과 지혜를 포기한 식이에요. 똑같은 갓 성인의 루크랑과 바르둘이라면 루크랑은 바르둘을 신체 능력으로 절대 이기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어요.=
확실히…….
당시 바르둘과 싸울 때의 자신은 삼림형 미궁을 탈출하고 갈색 호브 마을을 털어버리며 전투 감각을 벼려 나가던 시기였다.
전투 감각과 경험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본격적인 전투 센스를 확립한 것이 웨이포드 무렵이었다곤 해도, 당시의 자신은 지금의 이실리테 수준은 된다.
그런 바르둘이 인간의 지능과 지혜를 가지고 더더욱 영악해졌다면 평범한 직업자로도 어쩌지 못하겠지.
근처 마을이 아니라 도시인 프라버까지 찾아가려던 이유가 설명된다.
미이라처럼 꽁꽁 감싸진 시체를 바라보던 환인이 물었다.
“바르둘은 어쩌다 타락하게 되는 거지.”
=일설에 따르면 바르둘이 루크랑을 잡아먹으면 일정 확률로 타락한다고 하는데 정확한 건 알려지지 않았어.=
배우지 못한 사람이 억지로 공손하게 쓴 듯한 상소문을 재차 읽은 환인은 상소문을 보고 싶어 하는 안느에게 넘겨주며 생각했다.
‘바르둘의 각성 여부는 나와 있지 않지만, 만약은 생각해두는 게 좋겠지.’
환인은 옷감에 꼼꼼히 감싸인 여자 시체 두 구를 짊어지고 이실리테와 안느에게 한 구씩 짊어지도록 한 뒤 여자친구들과 마차로 되돌아갔다.
일행 중에서는 린덴 촌락의 위치를 아는 사람이 없었기에 환인은 비상과 함께 하늘 높이 날아올라 근처의 마을이나 촌락을 먼저 찾았다.
툭, 투둑
쿠에? 쿠우쿠우.
“그래. 비가 오는군.”
그저께부터 호수 쪽에서 밀려오던 먹구름이 결국 머리 위까지 뒤덮더니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조금씩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점차 어두워져 가는 지평선을 둘러보던 환인은 저 멀리 초원 끄트머리에 작은 빛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게 마을의 불빛이라는 걸 확인한 그는 되돌아가 그쪽으로 일행을 이끌었다.
폰드 고릴라가 출현했던 숲은 이미 지났고 알류겔 호숫가에서도 멀어졌다. 목적지의 불빛과 일행의 위치 사이에는 야트막한 언덕과 초원뿐.
콰르르릉—
초원을 가로질러 이동하던 중 하늘이 번쩍이더니 우렛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리고 평원 저 멀리 비가 폭우처럼 쏟아지는 것이 일행의 시야에 들어왔다.
푸른색 하늘과 짙은 먹구름, 그리고 불타는 노을에 커튼처럼 쏟아지는 빗줄기와 이따금 치는 번개 줄기까지.
대자연의 아름다움이 한데 모인 듯한 풍경을 바라보던 안느는 우비를 가져와 이실리테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날씨가 참 아름답네.=
=그러게.=
녹색, 노을 색, 푸른색, 검회색의 자연광. 이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될까.
한동안 풍경을 감상하던 두 여자는 마차와 연결된 쪽창에서 모습을 드러낸 환연의 이야기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실리테. 안느. 저쪽 숲에 늑대 무리가 이쪽을 보고 있어.」
=응, 나도 봤어. 이쪽을 경계하고 있을 뿐이니까 공격해오진 않을 거야.=
저 앞에서 앞장서고 있는 비상이에게서도, 이쪽의 마부석에 앉아있는 안느에게도 범상치 않은 기운이 풀풀 흐른다.
마수도 아닌 짐승인 늑대 떼라면 본능적으로 강함의 차이를 인식하고 자신들을 덮치지 않을 거다.
하지만 유르파의 생각은 다른지 마차 상부 선루프를 열고 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지팡이를 들어 술법을 외웠고.
휘이이잉—
사람 덩치만 한 샛노란 화염 구슬을 늑대들을 향해 날렸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날아가던 불구슬이 허공에서 콰앙! 위협스레 터지며 불을 내뿜자 늑대들이 깨갱, 비명을 지르며 후다닥 달아난다.
그렇게 늑대 떼를 쫓아낸 유르파가 가볍게 야단치듯 이실리테와 안느를 나무랐다.
=얘들도 참. 아무리 그래도 맹수잖니. 저것들이 아예 얕보지 못하게 힘의 차이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게 제일 좋아.=
=그, 그런가요?=
=응. 이제부터 밤이잖아? 우리가 그냥 지나가면 슬금슬금 쫓아올걸? 그러다 빈틈을 보이면 습격할 거고.=
아무리 아가씨들의 힘이 규격 외라고는 해도 우리 자기의 기초 체력은 일반인이고, 우리한테는 연이도 있으니까 애초에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은 피하는 게 옳다는 유르파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실리테와 안느가 듣기에도 그 말이 맞았다.
휴식 중에 습격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 아닌가.
저런 늑대 떼와 정면으로 싸우는 게 위험한 일도 아니니 귀찮음과 위험을 예방하려면 처음부터 힘의 차이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게 제일.
=다음부터는 그러도록 할게요.=
=나도 모르게 내 기준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네…. 앞으로 조심할게.=
그렇게 작은 헤프닝을 겪고 밤새도록 부슬비를 맞으며 초원을 가로지른 일행은 자정이 넘어서야 지평선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을은 평범해 보이네.=
“이 마을에는 영혼도 거의 없으니 그냥 지나친다.”
하늘에서 확인한 지평선 마을은 가구 수 500 정도, 추정 인구는 약 3,000명으로 크라빈 마을보다 두 배는 큰 규모였다.
북동쪽과 남서쪽에 각각 하나씩 난 마을 출입문과 마을을 가로지르며 난 포장된 도로를 보면 길을 오가는 여행자들과 농업, 축산업으로 명맥을 꾸려나가는 비교적 흔한 마을.
그런 마을의 정문에 도달한 환인 일행은 환인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본 올빼미 머리의 병사의 환대로 검문 없이 마을에 들어설 수 있었다.
원래는 어지간해서 야밤에 여행자를 마을 안으로 들이지 않는다.
한밤중에는 여행자의 정체를 알아보기도 힘들고 혹시 여행자 사이에 섞여 범죄자가 들어올 수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녹색 성자라는 신분은 모든 검문에 프리패스가 된다.
환인은 자신을 마을 고족의 집으로 안내하려는 올빼미 머리의 병사에게 사도의 집으로 안내해달라고 요청했고, 사도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화들짝 놀라 환인 일행을 성대하게 맞이하려 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기에 성대는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사도께서는 린덴 촌락에 대해서 아십니까.”
=린덴 촌락 말씀입니까? 여기서 서쪽으로 길따라 8일 거리에 있는 작은 언덕 촌락입니다만…….=
그러나 성대한 환영 인사를 받자고 마을을 찾은 게 아니다.
환인은 린덴 촌락의 상소문을 사도에게 보여주며 상황의 긴급성을 알렸고, 린덴 촌락의 위치를 제공받은 환인은 바로 마을을 뜰 준비를 했다.
그게 아쉽고 섭섭해서일까. 희미하게 그런 감정을 드러내는 사도에게 환인이 선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마을에 배회 중인 영혼이 없는 것을 보면 사도께서 인의와 열의를 가지고 마을을 다스려왔다는 뜻이겠지요.”
=아, 아닙니다. 마땅히 사도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으니 사도께서는 충분히 자랑스러워하셔도 됩니다.”
그렇기에 자신이 마을에 머무르지 않고 더 큰 도움이 필요한 린덴 촌락으로 향하는 거라 하자 사도의 입매가 광대뼈에 걸릴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말 몇 마디로 사도를 띄워준 환인은 그의 전폭적인 협조 아래 신선한 채소와 고기를 넉넉하게 보급할 수 있었다.
아무튼.
걸어서 8일 거리라면 이 세계의 보폭을 생각했을 때 300km가 넘는 거리.
마차로도 3~4일은 걸리는 거리지만 보통은 구불구불한 길과 강을, 숲을 피해 움직여야 하기에 늘어난 거리다.
직선거리를 생각하면 거리는 반으로 줄기 십상.
거기다 환인 일행은 없는 길도 만들어서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더욱이 마차를 쿠에 세 마리가 끌고 있다.
일행은 중간중간 계속된 이동으로 지친 쿠르티와 쿠핀, 쿠라에게 원기 방출과 성술로 체력을 회복시켜준 뒤 신선한 과일과 고기로 배를 채워주며 이동을 이어나갔고…….
「아앗….」
=이런.=
=늦었네…….=
휴식과 식사 시간을 포함해 17시간 뒤.
환인 일행은 쑥대밭이 되어 폐촌으로 변한 언덕 위 작은 촌락을 앞에 두고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