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405화 (405/813)

〈 405화 〉 399 알소프로 가는 길

* * *

백중강의 배웅을 받으며 성을 나온 환인 일행은 오가는 행인들의 무수한 시선을 끌어당기며 프라버 북문을 나섰다.

원래라면 관광 도시인 만큼 나갈 때도 일정량의 통행세를 내야 한다. 가령 들어올 때 9은화를 냈으니 나갈 때 90동화를 내야 하는 식이다.

그러나 환인이 성자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기도 했고, 영혼사는 기본적으로 대부분 지역에서 통행세 무료 혜택을 받기에 흔한 검문조차 받지 않고 도시를 나설 수 있었다.

=어휴. 도령이 왜 정체를 감추려 하는지 이번에 진짜 절실하게 느꼈네.=

엄청난 인파가 둘러싸는 바람에(길은 막지 않았다) 식량과 음식 재료조차 구매하지 못하고 떠밀리다시피 도시를 나오게 된 안느가 작게 투덜거린다.

마차 안에서 유르파와 함께 얌전히 있다가 그 이야기를 듣고 마차 벽을 뚫고 나온 백려강이 묻는다.

「이실리테, 식량을 준비하지 못했다면 다시 돌아가는 게 좋지 않나요?」

=식량은 언제나 한 달의 여유분을 갖춰두고 다니기 때문에 괜찮아요. 마차 뒤쪽하고 위쪽하고 마차 안에도 식량을 채워놨거든요.=

이실리테가 말하는 곳을 살펴본 백려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 독특하게 생긴 마차는 수납공간도 많고 그 수납공간도 전부 보존 기능의 보관함이라서 수납량도 어마어마하다. 그러니까 식량이 이렇게 많이 보관되어있는 거겠지.

=하지만 신선한 채소나 과일은 곧 떨어지니까, 가까운 마을을 찾아서 보충하긴 해야겠어요.=

여기서 가장 가까운 마을은 도보로 8일, 마차로는 3일 정도 걸리니 채소와 과일이 바닥나기 전에 다음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영주 전용 승합 마차를 능가할 정도로 호화스러운 마차를 신기해하며 둘러보던 백려강은 이내 비상을 타고 마차보다 조금 더 앞서 나아가고 있는 환인에게 눈길을 주었다.

「…….」

그의 단단한 뒷모습에 자연스럽게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린 백려강은 두 손으로 뺨을 감싸 쥐고 부끄러워했다.

생각할수록 부끄럽기 그지없다.

자신은 그저 언니에게 용기를 주려 했을 뿐인데 어쩌다 그렇게 됐을까.

휘이이이잉—

알류겔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푸른 하늘과 맞닿은 알류겔 호수의 전경이 드러나며 정신적 상쾌함이 밀려온다.

그녀의 입가에도 싱그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비록 죽어서라지만 그토록 바라던 소원이 이루어졌다. 앞으로 어떤 여정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까.

상상만 해도 기대되어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백려강이었다.

프라버를 나온 환인 일행은 낭떠러지 절벽으로 형성된 알류겔 호숫가를 따라 북상했다.

날씨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출발 당일만 해도 푸른 하늘에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어 가슴이 시원해지는 풍경이었지만, 이틀째부터는 저 멀리 수평선에서 먹구름이 밀려오기 시작했던 것.

로탄 산지를 지난 뒤 비가 그쳤기에 우기가 끝났을 거라 생각했지만…….

「우기는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어요. 아마 며칠 뒤부터 한 달 중 24일 동안 비가 오고 사이사이 태풍도 쉬지 않고 찾아올 거예요.」

백려강의 이야기에 우기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실리테가 고개를 갸웃했다가 묻는다.

=그럼 어제 출항한 전함들은 위험한 거 아닌가요? 폭풍에 휘말린다는 뜻이잖아요.=

「정면으로 폭풍에 맞서지 않는 한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아요. 물신님의 축복 덕분에 프라버 앞바다는 폭풍이 쳐도 파도가 높지 않거든요. 근처에 잠시 정박할 섬도 많은 편이구요.」

=전함이니까 폭풍 대책도 충실하지 않을까? 종족 연합의 여객선만 봐도 파도 분쇄랑 수평 유지의 마도 장치는 필수로 장착되어있는데 전함이면 두말할 것도 없겠지. 율이 언니, 안 그래?=

=맞아~. 덕분에 돈도 좀 벌었단다?=

=돈? 무슨 돈?=

=백 공자님한테 호흡석이랑 수류 조절, 휴대용 담수화 마도구를 왕창 팔았거든!=

그러면서 뿌듯한 얼굴로 매출 기록부를 보여주는 유르파.

이실리테와 안느, 백려강은 거기에 적힌 판매 품목과 금액을 보곤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다 얼마야. 은화가 백, 천, 만…… 3만 1,700닢? 317금화?!

=우, 우와. 진짜 언니는 돈을 쓸어 담을 수 있구나…….=

=자기가 슬쩍 귀띔해준 게 있어서 성에 머무는 동안 그것만 만든 덕분이야. 하지만…… 급하게 만드느라 수율이 그리 높지 않은 게 아쉬워. 불량을 조금만 더 줄였으면 6배 수익까지 볼 수 있었을 텐데.=

산란못 미궁에서 획득한 위상석을 다량 소모했다.

2급 위상석 31개, 3급 위상석 6개, 4급 위상석 5개로 총 59금화 정도.

여기에 금속 소재까지 더하면 60금화가 조금 넘는 수준.

이걸로 382개의 마도구를 생산했는데 그중 21개의 성능이 기준에 살짝 미달하였으며 9개는 내구성이 부족했고 2개는 제작 도중 파손되었다(환연이 힘 조절을 실수해 핵이 되는 위상석에 깊은 흠을 내버렸다).

거기다 급히 양산하느라 아낄 수 있는 부분도 아끼지 못하게 컸다. 시간만 충분했다면 꼼꼼하게 검수하고 제작해서 수익을 최대 8배까지도 노릴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고작 사흘 만에 400개에 가까운 마도구를 만드신 건 굉장하다고 생각해요. 가문의 부여 술사들은 보통 마도구 하나를 제작하는데 재료와 설계도가 다 있더라도 40개 정도가 한계라고 하던걸요?」

=환연이 도와준 덕분이야~. 시간이 굉장히 걸리는 극세공을 연이가 다 맡아줬거든.=

신장 20cm의 반요정이라 작은 손으로 세밀한 작업에 굉장한 공을 세웠다고 추켜세워줬지만, 환연은 천장에 매달린 꽃바구니 침대에서 밖으로 내민 발끝만 까닥였다.

‘아무튼…… 도령은 전쟁 상인도 잘할 거 같아.’

판매 목록 중 두 가지는 수상전에서 '반드시'라고 할 만큼 필요한 것들이다.

호흡석은 물속에서도 일정 시간 숨을 쉴 수 있게 해주며 수류 조절은 물속에서 움직임을 좀 더 빨리할 수 있게 해주는 전투용 마도구.

휴대용 담수화는 전쟁용은 아니지만, 소변을 담더라도 1시간에 걸쳐 마실 물로 바꿔주는 수통이기에 보급의 부피를 획기적으로 줄여주는 중요한 전략 물자로 취급된다.

그걸 준비하라고 지시했다는 뜻은 전쟁이 벌어지고 전비에 투자가 늘어날 걸 읽었다는 것이 아닌가.

아니…… 전쟁이 나도록 유도한 건가?

‘그럴 리가.’

만약 정말로 전쟁을 유도했다면 굳이 힘들게 양식장 산업의 로드맵 기초를 짜줄 리가 없다. 그냥 몇 가지 단서만 제공해줘도 알아서 싸움을 시작할 테니까.

그가 만든 양식사업 기본 골자가 적힌 책자를 본 안느는 이걸 종족 연합 국가에서도 쓸 수 없을까 일순간 고민했을 정도로 획기적이었다.

규모는 프라버 만을 기준으로 했기에 굉장히 대규모적이었지만, 그야 해안에서 쓸 수 있도록 축소하면 되는 일이니까.

그런 기획을 아무리 사전 지식이 있다 해서 쉽게 만들 수 있을까? 그리고 만든 걸 그냥 제공해주었을까?

=안느. 무슨 생각 하길래 심각한 표정이야?=

=……응? 앗, 그렇게 보였어?=

이실리테의 지적에 안느가 에헤헤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도령이 만든 양식사업 기획 말이야. 그거 진짜 획기적이라서 메리아놀에 도입할 수는 없을까 잠깐 생각했어.=

=메리아놀은 사면이 바다잖아. 수산물은 보급도 유통도 많지 않아?=

=알류겔이 바다처럼 넓다지만 진짜 바다는 아니잖아. 하지만 메리아놀은 진짜 바다로 둘러싸인 만큼 신수에 가까운 괴수도 엄청 많아. 원양까지 나가는 건 불가능이나 다름없고 근해에서 작업하지만…… 내륙까지 판매되기에는 어획량이 부족하거든. 플뢰도 프라우드도 다들 생선을 좋아하니까.=

백려강은 이실리테와 대화를 나누는 안느를 보며 크고 예쁜 눈을 끔뻑였다.

으응? 메리아놀에 도입……? 성투사가 교단의 상급 직위라고는 하지만…… 국가 정책에 발언할 수 있을 정도였나요?

교양과 상식으로 배운 자신의 지식과 안느의 발언 사이에 묘한 틈이 느껴지는 백려강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대화가 점차 일반적인 파티답지 않게 높은 수준으로 흘러가는 것에 귀를 기울인다.

=그 양식개론은 진짜 큰 힘이 될 수 있어.=

=힘? 정치 쪽으로 말이니?=

=응. 생선의 정기적이고 안정적인 수급처가 생기는 것만으로도 상위계층으로선 더할 나위 없는 호재야.=

기호에 가까운 식량을 정기적으로 공급해준다는 것은 시민들의 지지를 받기에 충분한 요소니까.

=그러니까 도령의 그 기획은 정치적으로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는 거야. 도령은 그런 걸 프라버 영주한테 대가 없이 준거고. 그게 어떤 의미인지 조금 생각해봐야 한다고 봐.=

「엣…….」

그게 그렇게 굉장한 거였어? 백려강이 놀라는 사이 유르파가 그런 백려강을 보며 비교적 정확한 답을 내놓았다.

=려강 아가씨 때문인 게 아니니?=

=내 생각도 유리 언니랑 비슷해. 주인님은 려강을 데려오려고 프라버 영주님께 선물을 쥐여준 거 같았어.=

=……으음? 그, 그런가?=

안느는 ‘영혼’인데다 솔직히 외모만 두고 보면 이실리테보다 더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백려강을 바라보았다.

예쁘다. 아름답다. 착하다. 거기다 영혼이라는 점에서 환인의 관심을 끌기도 했고.

아무튼!

그 책자가 도령이 전쟁을 유도하기 위한 계책이라면, 이제부터 알소프의 권역으로 들어가는 만큼 자신들의 행동도 좀 더 긴밀해져야 하고 긴장을 바짝 세워야 한다고 말하려던 안느는 헷갈려져서 입매를 일자로 만들었다가 오물거렸다.

에잇, 고민해서 뭐 해. 직접 물어보면 되는 거지!

=도령! 도~령~!=

안느의 호출에 마부석 쪽으로 다가갔던 환인은 그녀들의 의문에 “너희들의 생각이 맞다.”고 확답을 주었다.

누구를 특정한 게 아니라 안느, 유르파, 이실리테 모두의 생각에 긍정해준 것이다.

프라버가 힘을 쌓아 알소프와 싸워 괴롭혀주길 바랐으며, 유물 급 무기를 받은 보답이기도 했으며, 려강을 잡음 없이 데려와 동료로 삼기 위한 선물이기도 했다고.

=…….=

=…….=

「…….」

설마 이유가 세 가지나 될 줄은 몰랐던 여자들은 할 말이 없어져 서로를 쳐다보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내리막길이 살짝 시작되는 경사에 시선을 준 이실리테가 마차의 속도를 조절하며 환인에게 묻는다.

=주인님. 선물로 받은 광창이 그렇게 좋은 건가요?=

“그래. 이게 있다면 미궁에서 내가 전열에 나서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환인이 광창의 코어를 들어 올리자 태양 빛과 같은 순백의 빛이 금속 막대에 모여들어 아홉 날의 창 모습을 드러낸다.

광창을 선물로 받았다는 이야기는 들었었지만, 일정이 조금 바빠서 제대로 보는 건 지금이 처음이다.

안느는 환인의 손에 들린 길이 3m의 광창을 구경하며 물었다.

=광창의 소문은 나도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그게 그 정도야?=

“소문은 어땠지.”

=음? 음, 일단 빛 속성이라서 그림자나 어둠 속성에 되게 강한 거 하고, 불 속성도 약간 있어서 적을 찌르거나 베면 상처를 태워버려 치료나 재생을 어렵게 만들어.=

손을 꼽으며 설명하는 안느의 입에서 장단점이 계속 흘러나온다.

=무기 자체가 빛이라서 길이 조절도 자유자재에, 빛을 쏴서 원거리 공격도 가능해. 빛이라서 내구도가 의미 없고 평소 보관이 편하다는 점도 있어. 약점은 빛이라서 같은 빛 속성한 데에는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해. 닿는 건 전부 지져버리고 태워버리고 증발시켜버리니까 손대중도 어려워. 대련용으로는 사용이 어렵지. 사용하면 정신력이랑 체력을 사용한다는 점은 장점이자 단점이야. 내가 아는 건 이 정도?=

“잘 아는군. 하나를 제외하면 안느의 설명이 맞다.”

=틀렸다는 건 어떤 건가요?=

“정신력과 체력을 쓰는 것이 아니라 정신력과 열량을 소비한다. 광창을 휘두르면 공복이 빠르게 찾아와.”

그냥 형태만 유지하고 있어도 식사 직후 3시간 정도면 허기가 강하게 드는 수준이다.

광창을 발동시켰다가 회수하길 반복하면 허기가 급속도로 찾아든다. 밥 먹고 1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끔찍한 공복에 손과 다리가 떨릴 정도.

“아마도 이 빛의 형태가 뭉개지거나 소멸하면 그만큼 공복을 자극받는 거겠지.”

=열량이 소비된다니…… 원리가 궁금한걸.=

“복합적인 요소가 있겠지만 대체로 소화력이 강해지면서 체력도 일부 끌어다 쓰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더욱이 정신력에 소비되는 열량도 무시하지 못할 테지요.”

바둑이나 체스처럼 뇌의 사용량이 높은 직업군은 가만히 있어도 하루에 6천 칼로리를 소비하기도 한다.

그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광창은 잘못 사용하면 신체 균형을 망가트리는 무기가 될 수도 있다.

본격적인 전투에 사용하며 날의 마모가 심해질 경우 시간당 2천 칼로리는 가볍게 소모한다는 뜻이니까.

“위력은…….”

잠시 주위를 둘러본 환인은 창극을 40m 정도 떨어진 바위로 향한 뒤 의식을 자극하자 창의 끝에서 짧은 레이저가 발사되어 바위에 엄지 굵기의 깊은 홈을 내버린다.

같은 위치에 한 번 더 발사하니 두께 1m 정도의 바위에 구멍이 생겨났다.

“단순 위력은 바위에 겨우 구멍을 내는 수준이지만, 고열의 특성상 단백질에 매우 강한 면모를 보인다. 이 두 가지가 합쳐지면 외피가 단단한 고등급 이형종이라 해도 약점을 찌를 경우 중상을 입힐 수 있겠지.”

이실리테의 다중 검기처럼 길이도 늘일 수 있으니 근­중거리도 커버가 가능하다. 즉, 이 무기 하나만 있다면 근­중­원거리를 전부 감당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설명을 해주었지만 ‘확실히 편리해 보여도…… 그렇게 좋은 건가?’ 정도의 감상밖에 못 느끼는 여자친구들의 눈치에 살짝 웃으며 광창을 거두어들였다.

100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다. 나중에 마수의 습격을 받게 되면 그때 무력 시범을 보여주는 게 그녀들을 이해시키는 데 도움이 되겠지.

광창의 무력 시범 기회는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수평선밖에 안 보이는 알류겔 호숫가의 자갈밭을 따라 저 멀리 보이는 곶을 향해 이동하던 중 왼편의 숲에서…….

크워어어어!!

구강 구조가 영장류와 흡사한 포효가 울려 퍼지더니 팔이 네 개 달린 녹색 체모의 거대 고릴라가 뛰쳐나왔던 것.

=폰드 고릴라야!=

=에엥?! 연못이나 늪 근처에서 사는 게 왜 여기까지 튀어나왔어?!=

「아, 이 근방에는 늪이랑 못이 많아요. 우기 때 내린 비가 고여서 1년 내내 유지되거든요.」

등급은 4급에서 6급 사이지만, 저 두꺼운 팔 네 개로 해오는 공격도 그렇고 지형지물과 도구까지 이용하는 탓에 성체면 기본 5급으로 취급한다.

머리 높이만 3m가 넘어가니 성체 폰드 고릴라일 테고 그럼 최소 5급이라는 거겠지.

=괜히 길에서 벗어났나?=

환인이 비상을 타고 하늘에서 길잡이를 해주니 헤맬 일이 없어 지름길이 되는 곳을 선택해 이동 중이다.

좀 둘러 가더라도 길을 따라갔으면 저런 걸 만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쿠워워워웤!!

이쪽을 향해 투기와 살기를 드러내며 드리밍을 하는 폰드 고릴라의 행동에 이실리테가 마차를 멈춰 세우고 내려서 레드릭 얼터를 꺼내 든다.

안느도 천벌의 망치와 성벽의 방패를 꺼내 들며 앞으로 나서니 폰드 고릴라는 생각 이상으로 강적의 기세를 느끼곤 뒤로 주춤 물러났다.

강한 암컷들이 많이 보이길래 앞뒤 가리지 않고 뛰쳐나왔는데…… 저 큰 무기를 든 암컷들, 왠지 하나하나가 자신과 비슷하거나 세 보인다.

뾰족한 송곳니와 잇몸을 드러내며 위협하던 폰드 고릴라는 암컷들의 투기를 느끼곤 슬그머니 주둥이를 다물었다.

…왠지 실수한 거 같다. 그냥 돌아갈까?

그리고 물러나려는 몸짓을 취했지만…… 암컷들은 오히려 투기를 더욱 내뿜으며 다가오기 시작한다.

……쿼어어어어엌—!!!

쾅쾅쾅쾅쾅!

비교적 똑똑하다곤 해도 짐승. 이실리테와 안느의 투기에 자극받은 폰드 고릴라는 다시 송곳니를 드러내며 팔 네 개로 땅을 쾅쾅 내려찍으며 흉성을 터트렸다.

수컷의 자존심이 있지, 못해도 한 마리는 잡아서 둥지로 데려가겠다!

그때 뒤에서 바람 소리와 함께 덩치 큰 무언가가 착지하는 걸 느낀 폰드 고릴라는 재빨리 앞뒤 포위 형태를 피해 숲을 등지며 캬아악­! 날카로운 포효를 질렀다.

비상을 타고 지상으로 내려온 환인은 그런 고릴라를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유인원 주제에 내 여자를 탐내다니, 그 문어 대가리 과장만큼이나 불쾌한 놈이군.”

쿠워워워웤!!!

폰드 고릴라로서는 환인이 뭐라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수컷으로서 뉘앙스를 느꼈다.

저 암컷들은 저 볼품없는 수컷의 것이라고. 그리고 자신을 모욕하고 있다고.

당장이라도 저 비쩍 마른 뼈다귀 같은 놈을 내려찍어 곤죽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었지만…… 저 뼈다귀 같은 수컷이 타고 있는 짐승도 자신만큼이나 세 보인다.

아니, 저 뒤에 암컷들보다 더 무서운 투기가 흘러나오고 있는데?

쿠에에—…….

비상의 나지막한 울음소리에 흠칫한 폰드 고릴라는 다시 송곳니를 감추며 도망칠지 고민했지만, 고민은 짧았다.

뼈다귀 같은 놈이 무서운 새의 등에서 내려 건방지게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자신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이다.

폰드 고릴라는 결심했다.

저 뼈다귀 수컷을 내려찍어 곤죽으로 만들어 자존심을 챙긴 뒤 도주해야겠다고.

쿠와아아악—!!

환인이 비상에게서 스무 걸음 정도 떨어졌을 때 기회만 엿보던 폰드 고릴라는 괴성과 함께 5m를 뛰어올라 환인에게 쇄도했고…….

췻—

꾸꿬?!!

환인은 광창을 꺼내는 동시에 방벽 패널의 검 여섯 자루를 날려 네 개의 손목 안쪽과 발목 뒤쪽의 힘줄을 노려 빠르게 베어버렸다.

완전히 절단한 것은 아니었다. 모피도 그렇고 가죽도 질긴지 절삭력이 부족해 힘줄을 절반 정도만 자르는데 그친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하다.

점프의 최고지점에서 삽시간에 힘줄이 베인 폰드 고릴라는 갑작스럽게 손목과 발목이 뜨끔했지만, 당황하면서도 주먹을 쥐며 낙하해 환인을 뭉개버리려 했지만.

콰아앙­!

자신의 사각으로 피해버린 환인을 쫓지 못하고 아래쪽 팔 두 개로 땅을 내려찍고 말았다.

그 순간 폰드 고릴라는 손목에서 뿌직­ 기분 나쁜 파열음과 함께 불같은 통증이 치밀어 포효를 질렀다.

펴진 아래쪽 주먹이 다시 쥐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두 손은 아직 멀쩡하다.

기분 나쁘게 자신의 발밑으로 지나가 공격을 피한 작은 놈을 손등으로 후려치던 폰드 고릴라는 불현듯 눈앞이 번쩍인다 싶더니 팔이 지져지는 통증에 아가리를 쩍 벌렸다.

왼쪽 아래 팔이 팔꿈치에서부터 사라졌다.

내, 내 팔, 내 팔 어디 갔어?!

그 순간 비쩍 마른 놈에게서 기분 나쁜 빛이 재차 번뜩였고, 이번에는 왼쪽 무릎 아래가 사라졌다.

콰우우우욱!!?

“절삭력이 훌륭하군. 레이저의 관통보다 위력이 더 강해.”

쿠쿵— 비명과 함께 옆으로 넘어진 폰드 고릴라는 눈앞에서 쬐끄만 놈이 다가오는 모습에 핏빛으로 물든 눈알로 흉성을 질렀다.

쿠와아아아악!!

이 쥐새끼 같은 놈이 뭐라고 하는 거야—!!

바위마저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악력으로 기분 나쁜 놈을 움켜쥐어 으깨려던 폰드 고릴라는 또다시 번뜩인 섬광에 자신의 윗팔도 잘려 나간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눈치챘다.

우혹.

이 작은 놈이 제일 위험한 놈이었어.

저 강해 보이는 암컷들이 왜 가만히 지켜보나 했더니…….

쉭—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섬광이 재차 번뜩이자마자 시야가 급격히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짝짓기를 할 암컷을 구하러 나왔던 폰드 고릴라는 그렇게 한 많은 4살 인생에 마침표를 찍었다.

여자들은 바위 같은 폰드 고릴라의 머리가 쿵,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것을 보고 적잖이 감탄했다.

=우와……. 폰드 고릴라 가죽은 어중간한 위상력으로는 잘 베이지도 않는데 종이처럼 잘라버리네.=

=얘들아. 자기, 싸우기 전에 저주 안 걸었지?=

「네. 그냥 베여 죽였어요.…….」

=이제 보니 광창은 공격력이 낮은 주인님께 제일 잘 맞는 무기였네요.=

=어어. 진짜로.=

다른 것은 몰라도 기술과 동체시력, 반사신경과 판단력은 7급 투성인 시하=사이지 영주를 능가하는 그였다.

그의 유일한 단점이 공격력이었는데 그게 해결되었으니…….

여자들은 모기를 잡아 죽인 것처럼 덤덤한 환인에게 다가가며 생각했다.

‘그리모암의 유물을 다 갖추면, 진짜 세계 최강이 되는 거 아냐?’

부족하던 공격력이 보충되었다. 전투 감각은 이미 절정이고 적을 현혹할 디버프도 있다.

여기에 유물로 부족한 신체 능력과 방어력을 갖추면 진짜 세계 최강이 될 거 같은데?

여자들은 왠지 그날이 찾아오길 바라면서도 바라지 않는 모순적인 감정을 느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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