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4화 〉 398 알소프로 가는 길
* * *
다음 날 아침.
「언니, 언니?」
=으에에…….=
풀린 눈, 칠칠치 못하게 벌어진 입, 어젯밤 격렬한 정사로 인해 흐트러진 녹색 머리카락과 몸에 묻은 흔적들.
환인의 침대에서 일어난 직후의 백치령은 지능이 절반 정도 감소한 모양새였다.
아무래도 정신을 잃은 그녀의 육체를 가지고 백려강과 2시간가량 성애를 나누었던 게 탈을 일으킨 것 같다고 환인은 판단했다.
백려강은 육체에 쏟아지는 감각을 1/2에서 1/3 정도밖에 느끼지 못했지만, 육체와 그 육체의 원주인은 모든 쾌감을 전부 받아들였을 테니까.
더욱이 그 부족분을 채워주기 위해 환인은 원기 방출이라는 잠자리 한정 최음성 기술과 피학에 약한 육체의 약점을 공략해 막대한 쾌감을 육체에 쏟아부었다.
평범한 섹스에서 얻는 쾌감이 수도꼭지를 열어 나오는 물이라면 환인과 백려강이 한 것은 소화전에서 쏟아지는 소방 물줄기.
중간중간 백려강의 의지와 다르게 물 밖으로 나온 생선처럼 퍼덕거리던 육체를 생각하면 뇌에 데미지가 들어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백치령은 프라버 영주 가문의 장녀다.
비록 큰 실책을 저질러 가문에서 한 번 제명당했다지만, 복권이 확정된 상황에 이런 지능 감소가 영구적인 현상이었다면 작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겠지만…….
파아아앗—!
=헤으응……!=
평온의 파동을 맞고 백려강의 손에 이끌려 샤워실에 들어갔다 나온 백치령은 정신적으로 매우 피로해 보였지만, 어쨌든 원래의 지능을 되찾을 수 있었다.
“어디까지 기억이 납니까.”
이제 동이 터오는 시각, 몸에 수건을 감고 침대 가장자리에 기운 빠진 모습으로 앉아있던 백치령이 질문에 담담하게 대답한다.
=……기절하기 전까지와, 중간중간 여동생이 제 몸으로 성자님과 사랑을 나눈 것이 생각납니다. 정신을 차릴 때마다 막대한 쾌감에 다시 기절하길 반복했지만 말입니다.=
“인지능력에 문제가 생기진 않았나 보군요. 아무튼, 고맙습니다. 당신 덕분에 려강과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허락도 없이 멋대로 사용했으면서…….
백치령은 조금 기가 막혔지만 뭐, 넘어가 주었다.
그 예쁜 여동생을 위해서리라고 생각하면 그리 기분 나쁘지도 않았고, 이 일로 여동생에게 품은 미안함을 아주 약간이지만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생했습니다.”
=……여러모로 신경 써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정식으로 환인의 체벌 종료를 선언 받고 객실을 떠나기 전, 백치령은 마지막으로 여동생과 짧게 대화를 나누었다.
=려강. 다음에 혹시 프라버를 지날 일이 있다면 날 찾아오거라. 너에게라면 내 얼마든지 몸을 빌려줄 터이니.=
「말씀만으로도 고마워요, 언니. 그리고…… 어제 그… 허락도 없이 한 것은 죄송했어요.」
미안해하며 허리를 꾸벅 숙이는 여동생에게 백치령은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진하게 맺힌 얼굴로 웃음 지었다.
=아니다. 네가 아니었다면 용기를 낼 수도 없었을 것이고 솔직히…… 나도 기분 좋았으니까. 지금 상태로는 몇 달간 성욕이 조금도 들지 않을 거 같은데 당분간 상당히 바쁠 테니까 이건 꽤 도움이 될 테지.=
「언니…….」
=……잘 지내거라. 다음에 보자꾸나.=
「네, 언니.」
성내 시녀들이 아침 식사를 가져와 이실리테의 지시에 따라 다이닝 룸으로 옮기는 사이 환인은 어제 백중강이 가져다준 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분량도 A4 사이즈 4장 정도밖에 안 됐고 조사 결과도 요점을 담아 간략했기에 어제 모두 머릿속에 집어넣었지만, 그래도 혹시 놓친 부분이 있을까 다시 자세히 살핀다.
‘결국 알소프가 보낸 첩자로 확정되었군.’
프라버 영주 직속 특수부대인 바람 추적자, 전원이 고속 비행을 할 수 있는 조인족 부대가 부엉이 남자의 인상착의와 초상화를 바탕으로 역추적을 한 끝에 알소프에서 출발했다는 단서를 찾아낸 것이다.
‘이렇게 되면 레심의 복수는 어둠 속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것과 마찬가지군.’
부엉이 남자의 뒤를 캐내서 들어가면 알소프의 영주까지 이어질 텐데 개인이 도시와 싸울 수 있을 리 없으니까.
그의 성정을 보자면 직접적인 복수는 부엉이 남자를 해치우는 것으로 끝내고, 되돌아와 프라버 군부에 투신해 알소프를 치는 데 힘을 보탠다는 길도 있지만…….
‘프라버는 알소프와 적대 정책을 짓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야기를 듣지 못했지만 틀림없이 그럴 거라고 환인은 확신했다. 하지만 그게 전면전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전면전을 벌이더라도 최소 10년 뒤, 어장 양식에 성공한 이후의 일.
자신이 어족자원연구 방식과 사료 배합률 공식과 일부 표본을 제공해주었다지만, 여태까지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 대규모 양식장이다.
시간이 많이 들 텐데 그의 복수심이 그만한 시간을 기다릴 수 있을까.
「환인환인. 저기 봐. 전함이 출항하고 있어.」
아침을 먹고 광창 나인볼그의 코어를 만지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환연이 부르는 소리가 그의 귀를 찔렀다.
그녀가 서 있는 창가로 다가가자 수 킬로미터 바깥임에도 아스라이 들려오는 함성과 화려하고 요란한 출항식이 눈에 들어온다.
펑 퍼펑
와아아아아…….
하늘에 빨갛고 파란 연막이 펑펑 터지고 함성이 이어진다.
그리고 앞바다라고 할 만큼 넓은 알류겔 호수 너머를 향해 중세의 전열함을 절반 정도 축소한 듯한 전함 열 척이 힘찬 고둥 소리와 함께 출항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전쟁이 벌어지려나 보네.=
출발 전, 예쁜 치마 차림의 유르파가 왼쪽에 서며 중얼거리고 하체에 딱 붙는 바지 차림의 안느는 오른쪽에 서서 이야기를 받는다.
=프라버 시민들의 지지도 되돌아왔고 알소프를 향한 적대심도 역대 최대치를 찍었다고 했으니 지금이 출항하기에 최적의 타이밍이겠지.=
=응? 그건 어떻게 알았니?=
=시녀 아가씨들이랑 이야기를 나누다가 알게 됐어. 려강이가 투신한 뒤로 백중익 영주의 광증이 터지면서 쉬쉬하던 게…….=
백려강이 자살하고 영주가 광기를 일으키니 사람들은 그 원인을 백려강의 자살과 그로 인한 알소프 간의 마찰로 생각했다.
정략결혼이 정해진 딸의 자살로 호족의 프라이드에 큰 상처가 나버렸는데 설상가상으로 알소프와 분쟁까지 터져 해협이 막히니까 영주가 돌아버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랬는데 백려강이 목숨을 끊은 정확한 이유, 알소프의 수작질로부터 도시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거라는 사실과 호족 가문의 여인으로서 시민들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녀의 정절에 우호론과 동정론이 급속도로 퍼졌고…….
=……반대로 알소프를 향한 적개심은 하늘을 뚫은 거야.=
=의외인 걸. 알소프의 분쟁이 시작된 계기가 려강 아가씨라고 생각해서 원망하는 목소리가 클 거로 생각했는데.=
=사람들은 정략결혼이 성사되었더라도 알소프의 더러운 야심이라면 어차피 이런 일이 언제고 벌어졌을 거라고 믿고 있다고 해. 그래서 지금 려강이는 프라버 시민들 사이에서 도령만큼이나 영웅으로 취급받고 있어.=
=그렇구나.=
갈매기 떼와 함께 하얀 포말을 남기며 나아가는 함대를 응시하던 환인은 이실리테가 백려강과 함께 방에서 짐을 챙겨 나오는 걸 보고 창가에서 몸을 돌리며 말했다.
“다들 출발 준비는 끝났나.”
=엉. 다 했어.=
=나도~.=
“그럼 나가지.”
큐삣~
검은색의 연예인 밴과 비슷하게 생긴 마차 근처에서 쿠르티, 쿠핀, 쿠라와 함께 서 있던 비상은 환인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곤 꽁지깃을 살랑거리며 반가워했다.
끄잉. 뀨우으~
환인이 뺨을 비벼오는 비상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으니 마차에 짐을 싣던 안느가 그걸 보곤 피식피식 웃는다.
=비상이도 되게 얌전해졌어.=
=그러게. 예전이었으면 같은 방에서 주인님이랑 잘 거라고 떼쓰고 난리를 피웠을 텐데 요즘은 얌전히 쿠르티하고 마구간에서 지내고.=
쿠웃?
「어머, 비상이가 난리를 피웠으면 보통 일이 아니었을 텐데……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저는 떼쓰는 비상이한테 화나고 비상이도 말리려는 저한테 화나서 무기 들고 싸우고 주인님은 말리시고…… 결국 잠시 신세 지기로 한 분의 집에서 별채를 안내받았었어요. 비상이는 주인님의 방이 보이는 마당에서 지내고 주인님은 방문 활짝 열어놓고 주무셨고요.=
쿠엣!
부끄럽게 어렸을 때 이야기를 왜 꺼내!
과거의 흑역사를 폭로 당해 화가 난 비상이 쿠르티와 쿠핀, 쿠라를 마차에 매고 있는 이실리테를 부리 끝으로 쿡쿡 찌르며 항의한다.
=아~ 미안해. 잘못했으니까 찌르지 마.=
쿠우! 큐잇!
=미안해, 미안.=
「후후. 두 분은 참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비상과 이실리테가 아웅다웅하는 것을 바라보며 부러워하는 백려강에게 안느가 웃으며 말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비상이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사람이 이슬이니까. 도령을 제외하면 이슬이랑 가장 오래 지냈고 비상이 밥도 이슬이가 제일 많이 챙겨줬고.=
그 말을 증명하듯이 이실리테에게 투정을 부리는 비상의 모습은 우정과 애정이 듬뿍 묻어나는 모습이었다.
갑옷 사이로 드러난 맨살을 부리 끝으로 물고 찌르고 있지만 누가 봐도 장난이고.
그렇게 출발 준비가 마무리되어가고 있을 때, 백중강이 여전히 피로에 쩔은 모습으로 찾아왔다.
=성자님.=
“백 공자.”
=하마터면 출항식 때문에 배웅도 해드리지 못할 뻔 했습니다. 하하하.=
수면시간이 극도로 줄어들었는지 백중강의 눈빛이 위험할 정도로 번들거린다.
“일감에 치여 쉴 시간도 없으실 텐데 괜히 바쁘게 오가시게 된 것은 아닌지.”
=프라버의 은인이신 성자님께서 떠나시는데 당연히 만사 제치고 달려와야 하는 일이지요.”
사실 어젯밤에 객실을 찾은 것도 출항식을 하는 사이 성자님이 떠나실 것 같아서 미리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사정상 인사를 드리지 못했고, 오늘 출항식을 마치자마자 부랴부랴 돌아온 거였는데…….
‘정답이었군.’
조금만 어정거렸다면 늦었겠지.
백중강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품에서 묵직한 비단 주머니를 꺼내 환인의 손에 올려주었다.
“이것은…….”
=이건 성자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자님께서 저희 백씨 가문이 성자님께 드리는 ‘정당한’ 자문료 및 상담료지, 절대 뇌물이나 사례, 보상금이 아님을 밝힙니다.=
그러면서 빙긋 웃는 백중강이다.
“…….”
환인도 픽 웃으며 어림잡아 100닢이 넘게 들어있을 듯한 주머니를 아공간 동전 주머니에 넣었다.
영혼사로서 한 일에 대해 큰 보상이나 대가를 챙기는 것은 영혼사로 활동 중인 자신이 호족과 유착 관계가 되어 부패나 타락했다고 여겨질 수 있다.
그리되면 자신을 못마땅해하는 인간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줄 수도 있는 일.
하지만 영혼사와 전혀 무관한 가문 내 재정적 문제 해결에 관한 컨설팅 비용이라고 하면 문제는 없다.
혹자는 뇌물을 주기 위한 눈속임이라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프라버의 변화를 보면 자연스럽게 사라질 주장이다.
오히려 그런 식의 주장을 하는 쪽에게 치명적인 반격을 넣을 계기가 된다.
물론 이런 이유뿐만이 아니다. 자신이 추정 100 금화나 되는 거액의 자문료를 선뜻 받은 이유는…….
‘이 소문이 퍼져나가면 알소프의 영주는 내가 프라버와 긴밀한 사이가 되었다고 오해하겠지. 프라버의 방비가 견고해져 건드릴 여지가 사라질수록 날 못마땅하게 여길 테니…….’
훗.
부디 이 소식이 빨리 알소프의 영주 귀에 들어가길 바라며 손을 내미는 백중강과 웃는 얼굴로 악수를 나누는 환인이었다.
* * * *
=영주님. 낭군님의 새로운 소식입니다.=
=에센. 내가 낭군님이라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런 말씀은 탁자 위에 올려놓은 그분의 소액자부터 치우고 말씀하시는 게 어떨까요.=
유들유들하게 대답하는 여부관을 찌릿 노려본 시하=사이지는 들고 온 보고서나 내놓으라고 까닥까닥 손가락질했고, 에센셀=리타는 빙그레 웃으며 들고 온 서류철을 두 손으로 공손히 시하=사이지에게 상납했다.
=…….=
펄럭. 펄럭펄럭.
진지한 눈으로 서류를 넘겨보던 시하=사이지는 의자를 뒤로 조금 더 눕혀 눈에 띄게 부풀고 있는 배가 덜 압박받도록 편하게 고치며 심복이라 할 수 있는 부관에게 물었다.
=신뢰성은?=
=70%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낭군님의 활약이 좀 축소된 거 같아요, 그거.=
=프라버 중심지에서 두 번 솟아오른 빛기둥 말이지?=
=예. 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도 그렇고, 프라버 정보부에서 그 현상에 관한 유언비어를 퍼트려 관심이 낭군님께 향하는 것을 교란하려는 시도도 보입니다.=
=시민들은 뭐라고 해?=
=자신들이 제대로 본 것인지 확신도 못하고 있어요. 낭군님 근처에 있었다는 사람은 그냥 평온의 파동이 펼쳐진 줄 알고 있었고요.=
=……그게 정말 그가 펼친 기적일까?=
=낭군님의 위업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자신의 이마 정중앙을 향해 날아오는 각설탕을 샥 피한 에센셀은 더 이상 놀리지 않고 진지하게 발언했다.
=성자님께서 산란못 미궁을 돌파해 소원력을 얻으신 것은 확정입니다. 그 빛기둥, 틀림없이 평온의 파동이 소원력의 힘을 받아 변화한 ‘격’일 테지요.=
=영도의 늙은이도 당연히 눈치챘을 테고……. 후우우.=
시하=사이지는 습관적으로 점점 부풀어 오르는 배를 쓰다듬으며 긴 한숨을 토해냈다.
=너희들의 아빠는 어쩌자고 자꾸 위험한 일에 끼어드는 걸까……. 목숨은 하나뿐인데…….=
=정 걱정되시면 이번 프라버 차기 영주로 공식 확정된 백중강 공자와 상호 무역 거래 회담이라도 제안해보시는 게 어떠십니까? 잘하면 헬루멘프라버 무역 동맹이 결성되어 그분의 뒤를 효과적으로 받쳐줄 수단이 될 거라고 봅니다. 알소프도 이쪽을 신경 쓰느라 함부로 행동하지 못할 테고요. 그 외 그분을 노리고 있는 다른 세력들의 경고도 되겠죠.=
=…….=
세쌍둥이가 자라고 있느라 여느 만삭 임산부만큼이나 커진 배를 따스한 손길로 쓰다듬으며 환인의 행적 보고서를 바라보던 시하=사이지는 프라버의 시정 운영 방침의 변경 조짐 항목에 시선을 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파르히스트 백곰 공녀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으니 그쪽 성주에게도 연락 넣어봐. 동 로아팅스 정글 개통 쪽으로 뉘앙스를 넣어서.=
=그 말씀은?=
=헬루멘프라버파르히스트 삼각 동맹을 생각해볼 때야.=
=옛.=
서류를 내려놓은 시하=사이지는 북쪽 창가에 서서 핑크 다이아몬드만큼이나 찬란하게 빛나는 머릿결을 휘날리며 쨍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제발 좀 위험한 일은 하지 말았으면.
애들이 태어나면 적어도 아빠 얼굴을 한 번은 봐야 할 것 아닌가.
그리모암의 유물 남은 위치라도 빨리 찾아내 세트를 완성하면 걱정이 덜 될 텐데…….
=후유.=
오늘도 그의 걱정에 한숨을 내쉬는 시하=사이지였다.
* * * *
‘엄마!’
‘엄~마~!’
=……!!=
제명당한 것이 거짓말처럼 기존의 하늘 기사단 단장에 복귀한 것은 물론이고 프라버 집행 부대 전원의 통솔권까지 얻어 권한이 더 늘어난 백치령은…….
=또 이 꿈이야…….=
21시간의 격무를 끝마치고 짧은 잠에 빠졌다가 검은 머리의 아름다운 소년 소녀가 해맑게 웃으며 자신의 뱃속으로 뛰어드는 꿈에 눈을 번쩍 떠버렸다.
=…….=
엄청 심란하다. 이건 분명 태몽일 텐데, 그 말은…….
=…으으으으으……!=
선명한 녹색 머릿결이 격렬하게 찰랑일 정도로 얼굴을 문지르던 백치령은 한숨을 푸욱 내쉬고 오라비의 집무실을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가문 소속 치유 술사와 회복 술사를 곁에 두고 산더미 같은 서류에 파묻혀 머리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잠은 자는 걸까? 눈 밑에 저 눈그늘을 보면 회복약과 성술로 버티고 있는 거겠지.
=오라버니.=
백치령의 부름에 잠깐 고개를 들었던 백중강은 그녀의 얼굴을 보곤 다시 고개를 내리며 말한다.
=치령이 아니냐. 이 시간에 어쩐 일이지.=
=…며칠째 검은 머리카락의 두 아이가 제 뱃속으로 뛰어드는 꿈을 꾸고 있소.=
멈칫.
=……검은 머리카락의 두 아이?=
굳은 얼굴의 백중강에게 백치령도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공교롭게도 누군가를 꼭 빼닮은 매우 귀엽고도 아리따운 아이들이었소.=
=검사는 받아보았나?=
심각해진 백중강의 질문에 백치령은 눈썹을 작게 찡그렸다.
=결혼도 하지 않은 처자가 함부로 받을만한 것이 아니지 않소.=
=……지금 내가 생각하는 그가 아니라면 이 자리에서 말하거라.=
=오라비의 격무를 선물해준 그를 말하는 거라면 맞소.=
탁.
깃펜을 내려놓은 백중강은 팔짱을 끼고 잠깐 탁자를 내려다보다가 후,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내가 적당한 인물을 찾아 보내주마. 그리고…… 잠시 헬루멘을 다녀올 준비를 하여라.=
=헬루멘은 갑자기 왜?=
=헬루멘의 위르트 영주께서 무역 회담을 제시하셨다. 거기에 보낼 인선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보니 네가 최적임자일 것 같구나. 그리고…….=
=그리고?=
=……그분도 ‘쌍둥이’를 회임하신 상태라고 하지.=
백치령의 미간이 좁혀든다. 그 표정에 백중강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가 프라버에 들르기 전에 어느 도시에 계셨었는지는 알고 있겠지?=
=흠……. 알았소. 빈틈없이 준비하지.=
=그래.=
백치령은 몸을 함부로 굴렸다고 불호령이 떨어지진 않을까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무난하게 넘어간 것이 의외라고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임신이 확정이라면 그의 아이일 게 틀림없지만, 자신은 결혼도 하지 않은 처자이지 않은가.
아니, 무난하게 넘어간 게 아니라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남부 대초원의 주인도 그의 아이를 밴 게 틀림없을 테니 그걸 빌미로 헬루멘과 관계성을 부드럽게 하는 거라면 이해된다.
백치령도 가문이 현재 필사적으로 숨기며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는 대형 사업 계획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계획이 누구의 머리에서 나왔는지도.
자신의 처음을 가져가다 못해 여동생의 것도, 자신의 성벽까지 바꾼 남자를 떠올리며 조금 복잡한 심사가 되었을 때,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쨌든…….=
=……?=
=아이가 들어선 것은 축하할 일이지. 축하한다.=
=……어, 음. 고맙소.=
=현재 가문 내에서 신뢰할 수 있는 것은 너뿐이다. 앞으로도 프라버의 미래를 위해, 잘 부탁하마.=
=그, 그러지…….=
저 오라비에게 신뢰라니, 뭔가 등이 근지러운 기분이 들었지만 그리 나쁜 느낌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백치령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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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