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9화 〉 393 백씨 가문의 아가씨들 上
* * *
프라버의 명물 주점에서 오크통 채로 사 온 고급 흑맥주, 그리고 손님용 객실에 갖춰진 여러 증류주와 발효주를 더한 뒤 이실리테가 만들어온 안줏거리로 시작한 회식은 비자룩스 이후 오랜만에 즐거운 술자리가 되었다.
=뭐어~? 풉, 도령네 집에 처음 도착했을 때 이슬이 네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모르지? 킥킥킥.=
=내가 뭐, 뭐!=
=쿡쿡. 이슬이 아가씨 표정이 엄청 위험하긴 했어~.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남자친구 집에 놀러 간 음흉한 아가씨 같은?=
=맞아맞아. 거기다 도령 방에 처음 들어갔을 때 표정은 진짜…….=
=아, 아니야! 주인님, 아니에요! 저거 다 거짓말이에요!=
=야! 난 플뢰란 말이야! 거짓말 같은 건 안 한다구! 도령, 도령은 어떻게 생각해?! 이슬이 저거 순 변태 맞지!?=
“…이실리테는 변태가 아니다.”
소파에서 여자친구들의 수다를 들으며 흑맥주를 마시던 환인의 대답은 이실리테에게는 안도를, 안느에게는 불만을 주었다.
그러나 이어진 이야기에 입장은 역전되고 말았다.
“그저 좀 많이 밝히는 평범한 아가씨일 뿐이지.”
=……푸흡.=
=큽… 아하하하하!=
일순간 정적이 이어지다가 안느와 유르파의 폭소가 터졌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화내는 것도, 토라지는 것도 아니면서 그 모두에 해당하는 엄청난 얼굴을 한 채 부들부들 떠는 모습은 웃지 않고는 못 견딜 정도였던 것.
안느는 배를 잡고 웃다가 급기야 그녀의 어깨를 탁탁 때리며 깔깔거렸고, 수치심과 민망함이 폭발한 이실리테는 그녀를 덮쳤다.
=웃지 마! 웃지 말라고!=
=꺄흐흑! 아, 아팟! 아하하핰! 꺄아~! 가슴 꼬집지 마!=
자그마한 폭력으로 주인님 앞에서 민망함을 푸는 이실리테.
그녀에게 깔려 옆구리와 가슴과 어깨와 팔을 꼬집히면서도 웃음을 그치지 않는 안느.
그런 둘을 보며 엄마 미소를 짓다가 잔이 빈 환인에게 두 손으로 술을 따라주는 유르파.
그리고 진심으로 즐거운 것처럼 구김살 없이 웃는 여동생.
=…….=
백치령은 탁자 가장자리에서 알싸할 만큼 차갑게 식힌 흑맥주를 홀짝이며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영혼사와 영혼 기사라는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마치 한 가족 같은 분위기는 백치령에게 의문과 함께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어떻게 저렇게 사이가 좋을 수 있을까.
영혼 기사는 보통 영혼사를 지키고 그 대가로 명예를 받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고결하고 명예로운 사람들이기 마련인데 저들에게는 고결함과 명예보단 편안함과 아늑함이 느껴진다.
‘역시 깊은 사이가 맞겠지?’
존경심과 애정과 충성심과 복종심이 섞인 관계. 그중에 가장 강한 감정은 애정일 테지.
백치령이 네 번째로 흑맥주 잔을 채웠을 때 물망초 꽃처럼 작고 단아하게 웃던 백려강이 입을 열었다.
「이실리테 양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환인 님을 사모하는 게 눈에 훤히 보일 정도였으니까요.」
=아… 아가씨?=
=오! 그때 이야기 좀 더 해줘. 그저께는 듣다가 다들 잠들어버려서 끝까지 못 들었잖아.=
「네에. 그때는 이실리테 양도 자신의 마음을 잘 모르는 상태로 보였어요. 하지만 분명 좋아하는…….」
=꺄악! 말하면 안 돼요…!=
입에 담기에는 너무 부끄럽고 민망한 마음이 적나라하게 공개될 상황.
황급히 몸을 날려 백려강의 입을 막으려 든 이실리테는 그녀보다 더 빨리 반응한 안느에게 사로잡혀 움직임이 봉쇄당하고 말았다.
=이야기를 방해하는 나쁜 어린이는 이 안느 언니가 붙잡았으니까, 계속 말해봐. 분명히 좋아하는……?=
=으으응! 우읍!=
제발 그러지 말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이실리테의 모습에 백려강은 입을 가리고 예쁘게 웃다가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그런 백려강을 바라보던 백치령은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나한테도 저런 모습을 보여주지.’
이것도 남 탓이라는 걸 그녀도 이제 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진심이기도 했다.
백치령도 여느 여자들처럼 예쁘고 아름다운 걸 좋아한다.
비단 식물이나 무생물, 작은 동물에 한해서만 통용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도 아름다운 사람을 좋아하고 예쁜 사람을 좋아한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자신의 별궁 시녀는 성에서도 예쁜 아이만 뽑았고, 특출나게 예쁜 아이는 직접 담당 시녀장에게 맡겨 전용 시녀로 육성했을 정도.
그랬기에 백치령은 여동생을 좋아했었다.
아직 어리던 그녀의 눈에도 너무나 예뻤으니까. 저런 아이가 언니, 언니 부르며 같이 놀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하지만 그런 백치령의 바람이 이뤄지는 일은 없었다.
어느 정도 철이 들었을 무렵 백치령은 장녀로서 제왕학과 함께 지배자에게 필요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숨 돌릴 시간도 없이 하루 4시간만 자며 그 외 모든 시간, 밥 먹고 씻고 옷 갈아입는 시간까지도 공부의 일환으로 보냈다.
잘못하거나 실수하면 크게 혼났다.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그게 당연할 뿐, 칭찬 따윈 없었다.
힘들어서 울어보아도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백씨 가문의 장녀가 함부로 눈물을 보인다고 더 크게 혼났다.
그러나 백려강은 아니었다.
힘든 공부와 교육 없이 사람들에게 이쁨만 받았다. 아름답다며 추종받았다.
좋아해야 할 일인데 백려강은 언제나 고개 숙이고 우울한 표정이었으며, 자신을 보더라도 언니라고 살갑게 부르기는커녕 다가오는 것조차 두려워하며 피하거나 도망치는 모습을 보였다.
가혹하고 힘든 일정에 마음속에서 어둠이 자라기 시작하던 백치령은 그런 여동생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왜 나만 이렇게 힘들어야 하지?
쟤는 왜 편하게 지내는 거야.
그러면서 저렇게 힘든 척이나 하고.
밉다.
시간이 흘러 소녀에게서 벗어나 처녀가 되었을 때 백치령은 모친이 다른 귀부인과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엿듣고 백려강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어렸을 때 엄마가 죽었고, 예쁘장했기에 정략결혼이 결정되었으며, 팔려 갈 신세라 이것저것 가르치지 않았기에 편하게 지낸 거라고.
사람들의 악의를 막아줄 울타리가 되어야 할 모친이 없었기에 가벼운 대인 기피증 증세를 보이게 된 거라고.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자신이 먼저 다가갔으면 됐을 텐데, 마음이 삐뚤어지기 시작해서 오히려 더욱 날을 세워 백려강을 매도했다.
아니, 질투했다.
세상에서 한 손에 꼽을 만큼 예쁘고 사랑스러워서였구나. 그래서 꽃처럼, 파랑새처럼 가둬놓고 비싸게 팔기 위해 가꾸는 거구나.
그러고 보니 저 애의 어미도 외모만으로 아버님의 마음에 들었다지…….
=…….=
과거를 떠올리던 백치령은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예전이었다면 미모 하나만으로 편히 사는 백려강을 속이 쓰리고 배가 아플 정도로 질투했을 텐데 이제는 그냥 전부 내려놓았다.
전부 저 악당 같은 성자님 덕분이다.
그에게 끌려온 첫날, 자존심이 땅에 떨어진 유리창처럼 산산이 조각났다.
다음날 끌려다니며 본 진정한 성자의 면모에 산산조각이 났던 유리가 잘근잘근 밟혀 가루로 변해버렸다.
이어서 하늘을 꿰뚫고 세상을 영혼의 빛으로 밝힌 기적에 가루로 변한 자존심이 홀랑 불태워져 재가 된 기분을 느꼈다.
한둘만 경험해도 성격이 변화할만한 일을 연달아 세 번이나 겪었다.
감정이 더 강한 감정에 덧칠될 정도의 경험을 연이어 겪고 났더니 과거의 자신이 품었던 부정적인 감정 따윈 코웃음이 나올 정도로 하찮게 느껴지게 된 것이다.
거기다 반성문을 적으며 자아 성찰까지 했으니……
그러다 보니 오히려 백려강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여동생에게는 진짜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고 이제는 몸도 없어졌으니까.
자유를 얻었다지만 동생에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지 않은가.
악당인지 성자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저 남자를 따라가거나, 아니면 성불하거나.
「백치. 이거 깎아줘.」
=알았소.=
작은 요정의 부탁에 사과배를 깎아 먹기 좋게 잘라준 백치령은 과도를 닦고 냅킨 위에 내려놓다가 해맑게 웃던 백려강과 시선이 마주쳤다.
「…….」
그리고 백려강이 자신을 향해 살포시 미소를 지어준 순간 뭔가, 마음속에 불순물처럼 남아있던 질투 같은 추한 감정의 잔재가 봄바람에 녹아내리는 서리처럼 사라져가는 것을 느꼈다.
어렸을 때 그토록 보고 싶었던 미소, 저 천사 같은 미소를 15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언니.」
=……왜 그러지.=
「아니에요. 그냥, 이렇게 불러보고 싶어서…….」
청초하게, 혹은 수줍게 웃는 여동생의 모습에 백치령은 가슴 속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왔다.
입을 열었다간 가다듬지 않은 감정이 날것 그대로 튀어나올 거 같아 억누르며 대답했다.
=조금…… 더 일찍, 그렇게 불러주지 그랬느냐. 15년 전에 그리 불러주었다면…… 그랬다면 내가 널 지켜주었을 텐데…….=
그리 말했던 백치령은 고개를 붕붕 젓고 말을 고쳤다.
=아니. 다시 말하마. 나는…… 네가 15년 전에 그리 불러주길 바랐었다. 너같이 예쁘고 아름다운 동생이 있었으면 해서…….=
「죄송해요……. 그때는 모든 게 무서웠었어요. 아버님도, 오라버님도, 언니와 동생들도…….」
그랬던가……. 나는 그때부터 무섭게 굴었었구나…….
=…지금은 무섭지 않은 것이냐.=
「네. 지금은 표정이 무섭지 않아요.」
=내 표정이 어때서…….=
말하던 백치령은 백려강이 가져온 손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다 얼굴 이곳저곳을 만져보았다.
……이게 내 얼굴?
언제나 곤두서있던 눈매와 눈썹 끝이 평온하게 가라앉아있다.
늘 찌푸려져 있던 미간이 말끔하게 펴져 있으며 내 얼굴이지만 정말 마음에 들지 않던 못마땅한 기색이 남김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것만으로도 인상이 확 변했다.
얼굴 일부에 여동생의 느낌이 느껴질 정도로. 같은 피가 이어진 혈연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언니…….」
멍하니 거울을 들여다보던 백치령은 여동생의 조심스러운 부름에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러면… 앞으로도 언니라고 불러도 괜찮은…… 건가요?」
=…방금 15년 전에 그리 불러주길 바랐었다고 했지.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구나. 너에게 몹쓸 짓만 한 년인데, 날 언니라고 불러주는……?=
말하던 중 갑자기 오른쪽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려 흠칫, 손으로 얼굴의 절반을 가린다.
백려강은 그런 백치령의 손을 두 손으로 살포시 잡고 말했다.
「좀 더 일찍 다가가지 못해서 죄송해요, 언니.」
=아니… 아니다. 사과는 내가 해야지. 미안하구나. 내가 너에게 다가갔으면 되었을 일인데……. 미안하다. 정말로, 미안하다…….=
팔을 뻗은 백치령은 15년 만에 돌아온 여동생을 품에 안고 눈물을 흘렸고 백려강도 십수 년 만에 생긴 언니의 품 안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조용히 그녀들의 애환을 바라보던 환인이 끼어들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백려강의 뺨을 타고 흐르는 맑은 빛의 액체, 영혼의 눈물을 손으로 받아내었다.
영롱한 빛을 담아 흘러내리는 반영체를 보자마자 저것은 회수해야 하는 거로 파악했기 때문.
그리고 손바닥 정중앙에 눈물이 떨어진 순간, 환인은 뭔가 몸 안에 박하 액기스 원익을 뿌린 것처럼 청량한 감각이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고 이어서 따스한 무언가가 다시 몸 전체를 뒤덮는 감각을 캐치했다.
‘이건…….’
몸 안에 펼쳐진 영기의 통로가 그 따스한 기운에 자극받는 느낌.
마치 그동안 흡수했던 영기가 소화되지 않고 고여있다가 일순간 녹아내려 이제야 내 것이 된 감각이다.
왼팔을 뒤덮은 빛에 시선을 준 환인은 영혼 구슬 최대 보유 개수가 대폭 증가한 것을 알게 되었다.
헬루멘을 나온 이후로 거의 늘지 않던 영혼 구슬이 84개에서 94개로 10개나 늘어난 거다.
‘영혼의 눈물, 음기의 결정체여서인가.’
영혼 구슬의 증가 속도는 파르히스트를 떠난 이후 줄곧 하향세를 그렸다.
순수한 개수 증가 속도를 비교해보면 파르히스트 이전과 파르히스트 이후가 비슷비슷한 수준이다. 그러나 영기의 확보 속도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라졌다.
이실리테, 안느, 유르파와 매일 잠자리를 하며 그녀들에게서 얻는 영기 덕분이다.
영기는 이를테면 양적인 기운, 훈기다. 반대로 영혼에게서 회수하는 빛 구슬은 음적인 기운인 한기고.
즉 여자친구들에게서 매일같이 흡수하는 영기 덕분에 훈기는 과다포화 상태였고 영혼 성불을 통해 흡수하던 빛 구슬, 한기는 미비해서 불균형 상태였다는 이야기.
그러한 불균형 상태를 방금 눈물 한 방울이 대부분 해소했다.
‘앞으로 음기의 확보에 더 집중해야겠군. 귀접으로도 이러한 한기를 확보할 수 있을지 재차 검증해보고 싶은데.’
시더와 귀접을 하며 한기를 흡수해봤었지만, 그때는 영혼 구슬이 더 늘지 않았었다.
물론 그때는 많은 양의 한기를 흡수하지 못했었다. 조금 흡수했더니 시더의 영체가 불안할 정도로 흔들렸기 때문.
그걸 백려강을 상대로 시험해볼 생각은 없다.
‘여자 노상강도들을 만나거나 알소프가 여자 습격자들을 많이 보내주길 기대해야겠군.’
라드세아에서는 여자의 인구비가 비정상적으로 높아 범죄를 저지르는 여자를 보기 쉬운 편이다.
거기다 여자를 살려둔 상태에서 영기를 모두 갈취하면 생기는 현상 실험은 하기 어렵지만, 영체를 데리고 다니다가 음기를 모두 흡수해버리는 건 타이밍만 보면 되니 어렵지도 않고.
생각은 길었지만 실제로는 1초도 지나지 않은 시간.
환인은 자신을 바라보는 백려강과 백치령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손을 올리며 말했다.
“백치령. 이제 반성문은 쓰지 않아도 좋습니다. 체벌도 이 시간부로 끝입니다.”
=네…?=
“당신이 긍정적으로 변화했다면 더 이상 손을 쓸 이유는 없습니다. 그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아, 네…….=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여동생의 존재감 덕분에 정신을 차린 백치령은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운 와중에 간신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
아쉬움이라니, 미쳤어 진짜!
백려강과 백치령의 화해를 지켜보며 술자리는 자연스럽게 끝났고, 환인이 그의 여자들과 함께 목욕하러 들어간 사이 백치령은 자기 뺨을 짝짝 때리며 속으로 반성을 촉구했다.
체벌이랍시고 자신의 엉덩이를 때리고 범하던 악당 같은 성자가 온화한 미소를 보여준 것에 조금이지만 설렜었고, 엉덩이 체벌이 끝났다는 이야기에는 기쁨이 아니라 아쉬움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쉬움이라고? 내가 그에게 엉덩이를 맞고 그 뒤를 이어 섹, 섹스하는 걸 기대하고 있기라도 했다는 거야?
=…….=
입술을 앙다물고 자아 성찰을 시도한 백치령은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그 체벌 ‘코스’가 싫지 않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볼 수 있었다.
거기다, 방금 스스로 뺨을 때려 통증을 불러일으켰다고 젖꼭지가 단단해져 가고 그곳에서는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몸이 고통 = 쾌락이라는 공식을 외워버린 듯한 상태.
뭐야. 난, 나는 정말로 맞으면 흥분하는 변태였던 거야……?
백치령은 자신의 성 정체성이 정말로 변태였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강하게 느꼈다.
이 일이 있기 전까지는 남자와 교제는커녕 스킨십조차 하지 않은 깨끗한 몸이었는데…….
좌절하는 것도 잠시. 백치령은 여동생이 자신을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다는 걸 깨닫고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야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자기 뺨을 때리고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몸을 부들부들 떨어댔으니 이상하게 보였겠지.
=아무것도 아니다. 잠깐 번뇌가 밀려와서, 털어버리기 위해 정신을 날카롭게 벼렸을 뿐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들은 여동생의 표정이 이상하다.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수줍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저…… 언니, 너무 자신의 속마음을 억누르는 것도 좋지 않다고 해요. 그리고 환인 님은 그게…… 마음이 넓으시니까, 솔직하게 부탁드리면 환인 님도 웃으면서 받아들여 주실 거라고 생각해요!」
응? ……으응?
백치령은 잠깐 생각했다가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가만히 있기 힘든 감정이 스멀스멀 가슴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 게… 무슨. 려강이 너, 설마…….=
내가 엉덩이를 맞고 헐떡이다 무참하게 유린당하던 것을, 보기라도 한 것이냐?
「네에. 그, 우연히…….」
환인 님과 밤에 사랑을 확인하는 그…… 정사를 치르셨죠? 아침에 환인 님의 침대에서 주무시고 계시던 걸 봤어요.
=……!=
「…….」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백치령은 울상으로 바닥을 노려보며 주먹을 꼭 쥐었고, 그걸 여동생에게 정사 이후를 보여 부끄러워하는 것이라 오해한 백려강은 언니를 뒤에서 상냥하게 안으며 달랬다.
「언니의 심정은 이해해요. 그야 환인 님은 그만큼…… 그러니까 괜찮을 거예요!」
멋있으니까. 여자가 반해서 다가가도 이상하지 않은 분이시니까. 여자가 용기를 내서 고백하면 환인 님은 거부하지 않고 안아주실 것이다.
=아…아니. 그, 그런 말을 상스럽게 어찌 여자가 한다는 말이냐!=
엉덩이를 깐 채 맞으면서 흥분하다가 박히고 싶다고 말하라고?! 그런 말은 꺼내자마자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수도 있는 일인데?! 말도 안 된다!
「하지만…… 환인 님은 세상에 한 분뿐이신걸요.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그건…… 아무리 그렇다 한들 어찌…….=
「환인 님은 내일이나 모레쯤에 떠나실 거예요. 정말 괜찮으세요?」
비슷하지만 다른 이야기를 서로 하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은, 배다른 친자매여서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백려강이 아닌 다른 녀석들이 이렇게 말했다면 백치령은 자신을 음해하고 골탕 먹이거나 곤란에 빠트리려는 수작질로 인식했을 것이다.
그러나 백려강은 자기 목숨까지 남을 위해 바쳤을 정도로 순해 빠진 여동생이다.
자신을 괴롭히고 곤란하게 하려 했다면 더 일찍 했겠지 이제 와서 할 리 없지 않은가.
=…….=
「그러면 저도 언니와 함께 있어 드릴게요!」
=뭣……?!=
「안느 양에게 들었는데, 환인 님은 영혼사로서 영혼에 축복까지 내리실 수 있으시다고 해요. 그렇게 축복을 내려주시면 언니의 몸에 제가 깃들어 용기를 드릴 수 있다고 하니까, 저도 언니와 함께 있어 드릴게요!」
언니가 고민하는 것을 본 백려강은 정말 순수한 마음에 언니를 돕고자 해선 안 될 선택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백치령은 쌓이고 쌓인 오해가 꽃을 피워 ‘려강이도 그런 걸 좋아하나……?’ 착각하기에 이르렀고.
=……알…았어. 네가…… 그렇게까지 해준다면.=
두, 둘이라면 그래도 좀 견딜만 하겠지.
백치령은 상상만 해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그 일을 떠올려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매의 착각과 오해가 불러일으킨, 어떤 의미에서는 대형 사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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