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8화 〉 392 항구 도시 프라버
* * *
백중강은 가문의 신하들을 알현의 방에 소환해놓고 백중익에게 달려가 자초지종을 설명, 백관들과 함께 후속 조치와 대응의 구상을 부탁했다.
그리고 백중강 본인은 즉각 대기시켜놓은 창천 기사단, 그리고 하늘 기사단을 이끌고 빛기둥이 발생한 곳으로 달렸다.
빛기둥이 올라왔다는 것은 혼재가 발생했든 뭐든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성자님이 계신다는 것이고.
여기서 백중강이 주목한 것은 근 20년 이내에 발생한 혼재 사건 중 가장 크게 터진, 비자룩스의 재앙 사건이었다.
혼재가 터지는 것은 보통 영혼사를 초청할 여력이 없거나 너무 외딴 오지에 떨어져 있거나 하는 촌락, 마을이 대부분이다.
도시일수록 혼재가 발생할 가능성이 극도로 떨어지는데 그 이유는 도시의 영주 정도 되면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혼재가 발생하지 않게끔 주기적으로 영혼사를 초빙하고 승령천제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어디 누락되는 곳이 발생하는 법. 그런 곳은 대부분 영주의 시선이 닿지 않거나 닿길 거부하는 뒷골목 뒷세계다.
하지만 뒷세계 주민들은 오히려 혼재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한다.
자신들은 그런 영주의 자비와 혜택을 기대할 수 없기에 혼재 감응화??花, 신님들이 내려준 구원화라고 불리는 일라일 꽃을 영업장이나 본거지 주변에 도배해놓고, 나아가 사람을 처리하는 것도 본거지에서 먼 곳에서 해치우는 것이다.
그로 인해 크고 넓은 도시일수록 혼재가 발생할 가능성이 작아지는데, 얼마 전 비자룩스에 터진 혼재는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호족 가문 내에 발생한 재앙화였다.
때문에 라드세아의 호족들은 비자룩스의 재앙화에 주목했고, 가문 내에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그 이유를 철저하게 분석했다.
원인에 주목한 것은 백중강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조사 과정에서 고작 며칠 만에 제대로 숙성되어 원한과 증오를 가지고 혼재가 태어날 수 있으며, 그렇게 숙성되어 태어난 혼재는 무려 4급 직업자인 기사까지 세뇌 및 정신 지배로 수족처럼 부릴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추산 1.5만 명의 군중이 모인 곳에 혼재가 발생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성자님이 검희와 성투사라는 대단한 영혼 기사를 거느리고 있다지만, 고작 세 명이 두려움과 공포를 모르고 절대 후퇴하지 않는 1.5만의 군세에 뒤덮인다면……!
부르르—
생각만 해도 오한에 휩싸인 백중강은 애조인 주황색 쿠에를 타고 창천, 하늘 기사 52명과 함께 빛기둥에 홀려 통행이 멈춘 대로를 질주했다.
=실후르테, 달려라! 달려!!=
쿠에에엑~!!
두두두두두……!
현란하고 화려한 쿠에 기승술을 펼쳐 정체된 도로의 마차 지붕을 밟고 날아오르고, 건물의 외벽을 타고 달리다 지붕 위로 뛰어올라 고속 활강을 펼치며 기사들이 뒤따를 길을 보여준다.
고작 2km도 되지 않는 길을 달려가는데도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고 피가 졸아드는 기분.
1시간 같은 5분이 지나고. 쿠에 레이스에 출전했다면 압도적인 차이로 1등을 거머쥐었을 랩 타임을 기록하며 프라버 서북 방면 중심가 광장 거리에 도착한 백중강과 기사들은…….
=허…….=
=…….=
=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순간 아무 생각도 못 하고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우우우우우웅——
회백색 빛이 가득 찬 광장에 수백, 수천 마리의 빛 정령이 춤을 추는 듯 빛방울이 아롱지며 허공을 헤엄친다.
그런 빛의 군무 아래에서 빛기둥의 중심을 향해 무릎 꿇은 1.5만 명의 군중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이 닿는 곳에 홀로 우뚝 서 있는 녹색 성자.
신비하면서도 거룩하고 장엄한 광경에 백중강의 작고 아담한 몸에 소름이 치달았다.
=…….=
동시에 크나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언제 한 번이라도 시민들에게 저런 숭배와 숭상을 받은 적이 있던가.
도심지에 모습을 드러내면 사람들이 관심과 함께 약간의 존경심을 보여주긴 한다. 하지만 슬쩍 피하는 사람이 더 많다. 자신을 발견하곤 부담스러워하며 오던 길을 되돌아 가버리는 이들은 훨씬 더 많다.
일체의 잡생각 없이 환인을 향해 경외심을 보이는 시민들을 보자 자신도 저렇게 사람들에게서 숭배받고 싶고 존경받고 싶다는 마음이 싹튼다.
성자님처럼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숭배받을 정도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자신이 다스릴 도시의 시민들에게는 진솔한 존경을 받고 싶다.
그러한 욕구가 그의 심장을 달구고 마음을 뜨겁게 만들고 있었다.
작은 아기 펭귄에게 보다 구체적이고 뚜렷한 인생의 목표가 생기고 있을 때, 환인은 광장 한켠에 출몰한 백중강과 기사들을 발견하곤 머릿속으로 일련의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백려강을 보낸 게 아쉽군.’
설마 배우가 무대와 함께 출현할 줄이야.
백려강이 있었다면 그녀에게 영기를 주입해 모두에게 보이는 것으로 자신의 성불행과 관련해 일련의 흐름을 그녀에게 집중, 그녀를 자기희생의 성녀로 둔갑시켜 평판을 회복시키는 한편 백중강과 백려강을 엮어 여러 가지 산적한 이미지와 평판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환인은 속으로 혀를 찼다.
몇 가지 차선의 방책이 있지만 그쪽 루트는 성과를 백중강과 호족 가문에 모두 집중시키는 길이다.
이제 와서 백씨 가문을 도와주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렇다고 도와줘야 할 이유도 없기에 구상한 계획을 전부 파기한 환인은 주황색 쿠에를 타고 있는 백중강에게 다가갔다.
=……성자님.=
“제가 놀라게 해드린 것 같습니다.”
=아, 아닙니다.=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애조의 등에서 뛰어내린 백중강이 환인에게 달려가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였다.
=저는 꼼짝없이 성자님께서 위험한 상황에 빠지신 거라 믿고 그만…….=
‘내가 펼친 빛기둥을 보고 혼재가 발생한 거라 짐작한 건가.’
얼굴을 보니 듣기 좋으라거나 아부를 위해 하는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환인은 고개를 들어 마찬가지로 하조下?한 기사들을 둘러본 뒤 자신을 우러러보는 백중강에게 시선을 주었다.
“백 단장. 지금 이 상황이 어째서 벌어졌는지 알고 있습니까.”
=……시민들의 불만이 임계치까지 도달해서, 성자님께 구원과 안녕을 바라고 모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정도면 합격이다.
환인은 폐기한 구상 중 하나를 꺼내면서 친근한 척 백중강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그를 광장 중앙, 공연이나 행사 때 사용하는 단상으로 데려가며 말했다.
“맞습니다. 지금 시민들의 마음은 불안과 두려움으로 썩어 문드러지는 중입니다. 내적으로는 영주님으로 인해, 외적으로는 알소프로 인해서.”
=…….=
“이 상황에 어중간한 대처를 진행하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하겠지요. 그러한 상황을 막기 위해서는 저들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비춰줄 빛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빛이 되어줄 사람, 사람들의 불안을 평화로운 방식으로 원천 제거할 수 있는 사람은 백중익의 자제이자 차기 영주로 확정된 백중강뿐이다.
그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시민들의 불만과 불신이 팽배할 수 있지만, 다르게 보면 부친의 업을 아들이 해소하려는 식으로 조정할 수도 있다.
지금은 평온의 빛기둥으로 다들 정신적 안정을 이룬 상황. 그 점을 이용한다면 인식의 반전은 어렵지 않게 끌어낼 수 있겠지.
환인은 자신과 백중강을 향해 의문에 찬 시선을 보내는 시민들을 느끼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성공적으로 빛을 비춰준다면 오랜 시간이 걸릴 이미지 개선 작업은 단숨에 해결되겠지요. 한다면 사람들의 집중이 높아지고 관심이 쏠린 지금입니다.”
=으음.=
“사람들의 불안을 해소하고 모두의 마음에 희망 있는 미래를 보여주는 일, 할 수 있겠습니까.”
=해 보이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새벽, 성자님의 경고 이후 사람들의 불만을 해소하고 달랠 방안을 모색하며 대중 앞에서 할 연설을 준비했다.
원래 계획은 모두의 관심과 시선을 집중시킨 뒤 분위기를 한 방에 전환할 보상안과 향후 행동을 발표할 생각이었지만…….
‘지금이라면 몇 마디 말만으로도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어줄 수 있다.’
보상을 당장 발표할 필요는 없다.
모두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에 대한 사과와 무고한 시민들의 희생을 가문이 전력을 다해 배상하겠다고만 해도 믿음이 상당수 돌아올 것이다.
성자님이 옆에 계시니까!
환인은 용감하게 3m 높이 단상으로 올라가는 호족 정복 차림의 귀여운 아기 펭귄을 바라보며 보이지 않게 웃음 지었다.
부디 성공적으로 도시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고 빠르게 프라버를 정상화시켜…….
‘알소프를 정신적으로 압박해주길 바랍니다.’
자신의 활동이 더 편해지도록, 이쪽을 신경 쓰느라 자신들을 향해 보낼 암습자, 습격자들의 수준이 낮아져 갈아버릴 수 있도록, 그렇게 갈아버려 알소프의 무력이 땡볕 아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도록.
[존경하는 시민 여러분. 잠시만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성량 증폭 마도구를 쓰는지 맑고 또렷한 목소리가 광장의 너머까지 널리 퍼져나간다.
[제 이름은 백중강, 창천 기사단의 단장이자 백중익 영주님의 첫째 아들이며 확정된 프라버의 차기 영주입니다.]
[제가 성자님의 허락을 받아 급히 이 자리에 서게 된 이유는, 시민 여러분의 마음속에 커다란 상처를 낸 일을 사죄하고…….]
[여러분의 믿음을 배신하고 가족을 상실케 한 잘못은…….]
그리고 백중강의 진지하고 열정적인 태도의 연설이 이어질수록 단상에 선 사람의 정체에 분노하고 불신하던 시민들의 표정에 일말의 믿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백중강의 연설에는 사람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열정과 패기가 깃들어 있었다.
사람들도 그것을 느끼고 ‘우리에게서 가족을 뺏어간 영주 놈의 아들’에서 ‘이 우울한 상황을 타파해줄 유일한 희망으로 바라본다.
환인은 점차 사라져가는 평온의 빛기둥 속에서 우렁찬 연설을 이어가는 백중강을 보며 보이지 않는 웃음을 좀 더 진하게 지었다.
=와, 이슬아. 도령 또 음흉하게 웃고 있어.=
=안느, 음흉한 게 아니라…… 아니라…….=
=음흉한 거 맞지?=
=…….=
=안느 아가씨도 참. 우리한테나 조금 음흉하게 보이는 거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애로운 미소로 보일 테니까 괜찮아.=
……웃음이 겉으로 드러났나?
여자 친구들의 속삭임에 환인은 크흠, 표정을 고치며 입매를 쓸어내렸다.
백중강의 연설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호족들이나 쓰는 어려운 단어는 최대한 배제했다. 또한 그의 발언에는 힘과 열정, 패기가 가득했으며 마음을 다해 사과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내용 또한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흘려보낸 것이 아니라 내일모레, 정확한 시간을 공지해 정식으로 이번 사태로 인해 피해를 본 시민들에 대한 보상안을 발표하겠다고 이야기했다.
호족이 일반인을 상대로 잘못을 저지르면 적반하장으로 감히 호족에게 대드느냐며 일반인의 목을 쳐날리는 게 평범한 세상이다.
그런데 도시 최상위 호족이, 명분만 있다면 같은 호족을 살해해도 죄가 되지 않는 사람이 진정성을 가지고 사과했다.
효과가 없을 리가 없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지인에게 그 이야기를 떠들어댔고 그 지인은 또 다른 지인에게 퍼트렸으며 도시 신문사는 이례적으로 증간을 발행해 백중강의 연설이 담긴 신문을 호외로 팔아치웠다.
덕분에 백중강의 연설은 갈대밭에 붙은 불처럼 삽시간에 프라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백중강은 그 행동으로 백중익과 가문의 늙은 가신들에게 청취 당하는 처지에 놓여있었다.
=굳이 그 자리에서 그래야 했느냐고 한다면, 마땅히 그래야 했다고 대답하겠습니다.=
=…….=
=…….=
=가문에 돈이 많다지만 무한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알소프의 전함이 협만을 순회하며 군사적 무력 도발을 감행 중이기에 방비를 위해 이쪽도 전함을 투입하여 매달 수백 금화가 증발하고 있습니다.=
상선의 보호를 위한 조치라 하여도 평소에 비하면 쓸데없는 지출이며 이런 분쟁으로 인해 물류의 운송은 지연과 연착되기 일쑤.
여객선은 이미 프라버를 피해 남쪽 항구 마을 요르단에 기항하며 지속해서 방문자가 감소하며 관광 수입 또한 감소하고 있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처럼 피해가 쌓여가는 상황에 내부의 분란은 시간을 두어 치료할 것이 아닌, 특단의 조치로 시민들의 일치단결을 도모해야 하는 겁니다.=
환인까지 참관자로 자리한 가문 회의에서 백중강은 자신의 행동이 틀렸을 리 없다는 강한 자신감을 가지고 백중익과 가신들 앞에서 자기 뜻을 피력했다.
=그렇다 하여도 장차 영주가 되실 분께서 천민들 앞에 직접 나서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대리인을 내세워도 되지 않았을지…….=
=그게 가장 고귀한 자리에 계시면서 가장 낮은 곳에 이로움을 행하시는 분의 앞에서 할 말입니까!=
버럭 소리치는 백중강의 기세에 입을 열었던 참새 머리의 노가신이 어깨를 움츠린다.
=가문의 위명과 명예, 자존심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다스리고 보살펴야 하는 이들이 있어야 성립되는 것! 호족의 자존심은 호족으로 있을 수 있을 때여야 가치 있는 겁니다!=
지켜야 할 것이 없는 자의 자존심은 얼마나 보기 흉하고 추한 것이냐는 백중강의 발언에 감히 항변하는 가신은 없었다.
그만큼 백중강의 기세는 이 자리의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가신들의 눈에 현재의 백중강은 백중익의 아들이자 차기 영주가 아니라 프라버의 정당한 영주의 모습 그 자체였기 때문.
=말은 잘하는군.=
노구를 이끌고 옥좌에 앉아있던 백중익의 발언에 알현의 홀에 모여있던 이들의 시선이 모두 백중익에게 향한다.
=……그 말을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지 앞으로 지켜보겠다. 가신들은 전심전력을 다해 중강의 뜻에 따라 일치단결하여 움직이도록 하라.=
=예, 아버님.=
==예!!==
그렇게 회의가 해산하고 관련 실무자들이 모여 2차 논의가 시작되기 전, 백중강이 피로하지만 기운은 잃지 않은 모습으로 환인에게 말을 걸어왔다.
=정말 성자님께는 몇 번이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도 부족한 기분입니다. 보답을 어떻게 드려야 할지…….=
“그 기분을 잊지 말고 선정을 펼쳐나가시면 됩니다.”
백중강은 욕심이라곤 전혀 없는 환인을 잠시 격해진 눈빛으로 바라보다 허리를 꾸벅 숙였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둘째 여동생의 오명도 이번 기회에 모두 벗겨놓을 것이니 부디 지켜봐 주시길.=
이후 사흘.
반향은 어느 정도 환인의 예상대로 이루어졌다.
백중강의 연설은 성내에 근무하던 시종과 시녀는 물론 성의 온갖 장소에서 일하던 사람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처음 백중강을 따라 프라버 성을 방문했을 때 환인이 느낀 것은 사상누각, 모래 위에 쌓은 성처럼 불안정한 감각이었다.
구심점이 되어줄 인물의 부재로 인한 불안감과 알소프의 압박으로 인한 위기감이 성에서 근무하는 시녀, 시종들의 분위기에서 느껴졌던 것.
그러나 지금은 알소프라는 대적자로 인해 약간의 불안은 있을지언정 분위기는 흔들림 없이 안정적이었다.
고작 며칠 사이 백중익의 그림자마저 벗어날 만큼 강렬해진 백중강의 존재감 덕분이었다.
프라버의 중추에서 가까운 사람들이 이럴진대 바깥의 시민들은 더 호의적이었다.
시민들에게 고개를 숙일 줄 아는 호족이라면 자신들의 삶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좀 더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어줄 거라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비자룩스의 녹색 성자가 생각하기도 끔찍한 재판장을 돌며 영혼의 정화와 성불을 이어가니, 시민들은 정말 오랜만에 불안을 떨쳐내고 평온한 일상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약속한 행정 보상안 발표날.
=이게 정말이야……?=
=허어. 일가가 몰살당한 가족은 묘를 교회에 안장시켜주고 사망자는 가족을 포함해 1명당 5금화의 보상이라니…….=
=이봐, 말 똑바로 해. 보상이 아니고 배상이야, 배상.=
=응? 보상과 배상의 차이가 있나?=
=아이고. 이런 머저리 같은 놈을 친구로 두고 있었다니.=
=됐고 얼른 설명해봐. 차이가 뭔데?=
=보상은 정당한 일이었지만 입은 피해를 보상해주는 거고, 배상은 잘못을 저지른 걸 인정하고 그 피해를 갚아주는 거야. 그러니까 백 공자님은 가문의 실수를 인정하셨다는 거지.=
=오오…. 호족 나리가 진짜로 그랬단 말이야?=
가족 중 사망자가 발생했을 경우 1인당 5금화의 배상.
배상을 받을 가족이 없을 경우 도시 행정관이 관리하는 공동묘지에 일가족의 묘를 안치하고 향후 100년간 관리.
마지막으로 백중강의 이름으로 하는 사과.
환인이 보기에 부족하기 짝이 없는 배상안이었지만, 시민들은 이것만으로도 굉장하다며 웅성거렸고 일부는 백중강이 영주가 되면 도시가 더욱 살기 좋아질 거라며 떠들기까지 했다.
도시를 감싸던 보이지 않는 우울함과 음울한 분위기는 단번에 희석되었고…….
“그 사람의 영혼도 성불했나.”
영주와 영주 가문에게 자신의 목숨은 물론 가족까지 잃고 울부짖으며 영주 가문의 향후를 지켜보겠다 외치던 남자의 영혼도 성불을 이뤘을 만큼 도시의 영주 가문을 향한 여론은 부정적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돌아섰다.
17개의 재판장 중 마지막 장소를 정화하고 돌아가던 길.
길거리 노천 주점에서 언제 우울했냐는 듯이 웃고 떠들며 기뻐하는 시민들, 며칠 전에 비하면 180도 반전된 풍경에 환인은 조금…… 아니. 좀 많이 기가 막혔다.
‘조합 같은 것도 없는 마당이라지만 심한 편이군.’
레볼루시옹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도 죄 없는 시민들이 적게는 수십, 많게는 수백 명까지 죽은 마당이다.
시민의 권익 향상 정도는 이루지 않을까 했는데 설마 이 정도로 만족하고 기뻐할 만큼 무지몽매할 줄이야.
이 정도라면 자신도 정치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길 지경이었고, 이러니까 현실의 사상을 지닌 차원 방랑자들을 종족 연합 도시가 거두어가는 거라고 생각이 든다.
=주인님?=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노천 주점을 바라보는 환인의 행동에 이실리테가 무슨 일이시냐며 가까이 붙는다.
“아무것도 아니다. 돌아가지.”
그래, 일면식도 없는 자들의 삶 따위 알 바 아닌 일이지. 나는 내 여자들만 신경 쓰면 될 뿐.
활기차고 밝아진 거리가 기쁜 듯, 구김살 없이 환한 얼굴로 거리를 구경하는 백려강을 보며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던 환인은 안느가 자신의 소매를 잡는 걸 느끼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뭔가 했더니 백치령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은 표정이다.
=도령, 도령도령! 잠깐만! 야, 백치. 그 말 진짜야?=
=진짜라고 하지 않았소. 참고로 저 술집의 흑맥주는 나도 가끔 시녀에게 심부름시켜서 사다 마실 정도로 일품이지. 마셔보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요.=
=도려엉. 이제 프라버에서 일도 다 끝났겠다 저기 흑맥주 사서 뒤풀이하는 건 어때?!=
응? 응? 제발!
애원하듯 간절히 바라보는 그녀의 미모에 잠깐 굳었던 환인은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안될 건 없겠지.”
=고마워!=
=잠깐! 안느 당신이 저기 갔다간 소란이 크게 날거요. 돈을 주면 내가 직접 사 오겠소.=
=뭐야, 너는 돈 없어?=
=…내 재산은 모두 가문에 압류당했소. 내가 가진 건 이 옷 한 벌과 내 것 같지 않은 몸뚱이뿐이라…….=
=어, 어어. 알았어. 신세 한탄은 그만하고 이걸로 돈 되는 만큼 사와. 다 같이 마시게.=
=그러겠소. 아공간 주머니가 있다면 주시오.=
=아, 그런 거면 주인님? 저 잠시 저기 식료품 가게 좀 들렀다 올게요. 뒤풀이 때 먹을 안주를 만들게요.=
「환인. 나는 저기 저 별 모양 사탕 먹어보고 싶어.」
=응? 아, 자기. 나도 저기 잡화점에 잠시…….=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다들 다녀와라.”
=응!=
=네.=
「유르파, 나랑 같이 가!」
=그래그래.=
그의 허락에 삼삼오오 흩어지며 상점가로 향하는 여자들.
기쁜 듯이 사라져가는 그녀들의 뒷모습을 구경하던 환인은 픽 웃으면서 자신의 곁에 서 있는 비상을 돌아본다.
“다른 사람들이야 상관없는 일이지. 안 그러냐, 비상.”
쿠우? 쿠흥.
아무렴 좋다며 자신에게 쓰다듬어달라고 머리를 들이미는 비상을 어루만져주면서 춤추고 노래 부르는 악단을 마음 편히 구경하는 환인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