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397화 (397/813)

〈 397화 〉 391 항구 도시 프라버

* * *

끼룩— 끼룩——

“…….”

작은 새의 울음소리가 아니라 갈매기 우는 소리에 고개를 든 환인은 창밖이 밝아오며 서늘한 밤공기 대신 미적지근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꼈다.

벌써 날이 밝았군.

노트북으로 시선을 내린 환인은 민물 어족자원의 사료배합 급여 변화에 대한 어족의 생육 챕터의 마지막을 확인하고 노트북을 덮었다.

5시간 동안 필요한 정보를 추스르고 정렬한 뒤 니오네브레스에서 알려지면 안 될 정보와 알려주어도 될 정보를 선별하고 종이에 옮겨적다 보니 생각보다 작업 시간이 길어졌다.

한숨도 못 잤지만 그다지 피곤하지는 않다.

오히려 오랜만에 철야하며 서류작업을 했더니 전 직장에서 수라장에 가까운 야근을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외부 영업 부서에 저지른 실수가 커다란 클레임으로 돌아와 인사팀에게까지 업무가 배정되어 전 사무실 직원이 총동원되었던 일.

거의 30년 치 누적된 영업 결산 자료, 보관도 정리도 엉망이어서 소트 기능과 검색도 쓰지 못해 하나하나 상대 쪽에서 보내온 자료를 비교 검토해야 하는 단순무식하고 방대한 업무량.

그걸 해결하느라 이틀을 밤새웠는데 그때와 비하면 이 정도는 피로의 축에도 못 낀다.

거기다 당시의 일은 남이 저지른 사고를 떠맡아 수습하는 거였지만, 이 일은 오로지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하는 작업이다.

느끼는 피로의 역치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주말에 일이 끝난 덕에 곧장 부시 크래프트를 하러 떠났었지.’

몸도 정신도 피로한 상태에서 숲에 들어와 숲의 청량한 기운을 느끼며 해먹에서 낮잠을 즐긴 추억, 그러다 밤의 추위에 잠에서 깨 커피를 마시며 별빛 가득한 숲의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추억이 연이어 떠오른다.

추억이 향기가 되어 쌉싸름한 커피의 향과 차가운 숲의 밤공기 냄새가 코를 스치고 지나가니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끼루룩— 끼룩—

재차 들려오는 갈매기 울음소리에 이름 모를 그 삼림형 미궁에서 전투기 사이즈의 괴물 갈매기에게 공격받던 기억도 떠올린 환인은 등받이에 등을 기대 한 뭉치의 종이 다발의 내용을 마지막으로 검토하다가 피식 웃었다.

‘지금이라면 그것도 잡을 수 있겠지.’

턱, 작은 노트 정도 두께의 서류를 내려놓은 환인은 품에서 광창이라는 쇠막대기를 꺼냈다.

그냥 봐서는 미약하고 부실한 세공이 들어간 묵빛 막대기지만, 귀속 각인을 끝내 자신이 의지만 밀어 넣으면 빛의 창으로 변하는, 유물 중에서도 두 손에 꼽힐 만큼 유명한 유물 무기다.

극도의 절삭력을 발휘하거나 아니면 아예 무기로도 못쓰거나. 중간이 없는 무기지만 환인에게는 방벽이라는 마도기가 있어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리고 공격력이 막강하다는 점은 장점이 될지언정 단점이 되지는 않는다.

힘 조절이 의미 없을 만큼 모든 걸 베어버린다고 해서 상대를 제압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

무릎 연골을 날려버린다던가 팔의 관절을 베어버린다던가.

부웅웅웅웅——

의지를 넣어 광창을 발동시키자 말벌 수십 마리의 날갯짓 소리가 나며 길이 3m의 광창이 형태를 드러낸다.

잠시 광창의 아름다운 형태를 감상하던 환인은 창을 거두고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는 백치령을 돌아보았다.

=…….=

광창의 발동 소리에 잠에서 깼는지 아직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얼굴로 자기 얼굴을 문지르는 백치령. 흘러내린 이불 위로 슬슬 퍼렇게 변해가는 그녀의 볼기짝이 눈에 들어온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백치령은 자신의 처지에 온갖 감정을 느끼며 인생무상을 표정에 드러냈다.

“일어났으면 나가서 씻고 안느에게 가십시오. 그리고 그녀가 말하는 걸 들으면 됩니다.”

=…네…….=

당당함이라곤 1g도 느껴지지 않는 대답을 한 백치령은 움찔, 밑에서 고통이 올라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가 주섬주섬 이불로 아랫도리를 가리고 어기적거리며 방을 나간다.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환인도 노트북을 챙기고 서류도 대충 제본한 뒤 방에 딸린 욕실로 씻으러 들어갔다.

=도령, 애가 완전히 오리궁뎅이가 됐던데, 치료해놓을까?=

가볍게 몸을 씻고 거실로 나온 환인은 안느가 다가와 하는 말에 어제처럼 거실 바닥에 엎드려 조용히 반성문을 적는 백치령에게 시선을 주었다.

확실히 어제보다 바지가 팽팽해 보이고 엉덩이도 어디에 닿지 않도록 부자연스럽게 든 모습이다.

“아니. 저 고통이 자신의 처지와 어제 겪은 심경의 변화와 다짐을 마음에 새겨줄 테지.”

=하긴, 그렇겠네. 그나저나 도령한테 그런 가학 취미도 있었어?=

변태 처녀처럼 히히 웃는 안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환인도 피식 웃었다.

“색다른 경험이긴 했다.”

=오옹. 그럼 오늘 밤에는 내 엉덩이로 해보는 건 어때?=

살짝 야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게 매력적이고 완벽한 엉덩이를 슬쩍 들이미는 안느의 행동에 그녀의 엉덩이를 가볍게 찰싹, 때려준 환인은 소파로 걸어가며 대답했다.

“글쎄. 너의 신체 방어력을 생각해보면 네 엉덩이가 빨개지기 전에 내 손이 먼저 부서지지 않을까.”

=아. 그게 문제네…….=

생각해보면 안느도 그렇고 이실리테도 성투사에 검희다. 육체 능력이 일반인을 아득히 상회하는 직업자인 것이다.

=주인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좋은 아침이야, 자기~.=

「안녕하세요, 환인님.」

“그래. 다들 이리 와서 앉지.”

우르르 방에서 걸어 나오는 여자친구들을 향해 자신의 앞자리를 가리킨 환인은 어제 백중익과 나눈 대화를 들려주었다.

이실리테와 백려강은 환인과 같은 자리에서 들었지만, 안느와 유르파는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모든 이야기를 들은 안느가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갸름한 턱을 매만지며 묻는다.

=그건 도시 주력 산업을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전환해버리는 거잖아. 거기다 알소프라는 적도 있고 프라버 내부에도 혼재 같은 문제도 있고……. 가능한 일이야?=

“나는 이러한 비전이 있을 수 있다고 보여주었고, 그들은 실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을 내렸으니 그런 반응을 보였겠지. 그리고 도움 될만한 약간의 정보 정도는 제공할 생각이다.”

새벽 내내 적어 옮긴 자료 책자를 흔들어 보이자 유르파가 두 손으로 받아 가서 펼쳐보기 시작한다.

환인은 이쪽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반성문에만 집중하는 백치령에게 잠깐 시선을 주며 말했다.

“그리고 시녀가 아침을 가져다주면 먹고 도시로 나갈 생각이다.”

=어? 오늘 출발 안 하고?=

의외라며 안느가 되물으니 반성문을 차분히 적어 내려가던 백치령의 손이 잠깐 멈춘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들다가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화들짝 놀라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반성문을 적는 모습에 안느에게 시선을 옮기며 대답했다.

“그래. 며칠 더 머무르며 영혼과 혼재의 정화를 할 거다.”

=엥? 프라버는 안 돕는다고 하지 않았어?=

“돕지 않는다가 아니고 이 일에 나서지 않는다고 했지.”

=그게 그거 아니야……?=

=……??=

안느와 이실리테가 혼란스러워하니 유르파의 가슴 위에 올라가 물침대처럼 누워있던 환연이 잠기운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보들… 프라버를 도와서 성불시키는 게 아니고…… 환인이 자기 의지로 하겠다는 거잖아…….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아.=

“내가 백중익 영주를 살렸다는 사실을 알소프가 입수하긴 어려울 거다. 물론 아예 모를 수는 없겠지. 내가 성에 들어온 직후 백중익의 병세가 호전되었으니까.”

=그러니까, 성에는 어쩔 수 없이 따라간 거고 프라버하고는 별 관계없다는 듯이 행동할 거라는 말이지? 물증만 주지 않으면 알소프도 이쪽을 찔러보거나 건드려볼 생각을 못할 테니까.=

“그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던 이실리테가 보드랍고 매끄러운 이마를 살짝 매만지며 중얼거린다.

=정치는 정말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많네요…….=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식일 뿐이지.”

저쪽도 머저리들만 모인 게 아닌 이상 자신이 프라버 성에 잠시 머무른 것과 프라버의 영주가 정신을 차린 것 사이에 관계성을 눈치챌 거다.

하지만 명분을 중요시 여기는 만큼 심증만으로 움직일 수는 없을 테고, 이쪽의 사회적 위치가 절대 낮지 않으니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을 거라는 점을 노린 행동일 뿐.

=그런데 자기? 지금 이야기를 전부 백치령 아가씨가 들었는데 괜찮은 거니?=

“예.”

덧붙이는 설명도 없는 단답형이었지만, 그의 대답에 여자들은 의구심을 품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백치령의 행동이 어제와 다를 바 없었다면 그녀들도 우려를 드러냈을 것이다. 저 자존심만 강한 여자가 여기서 들은 이야기를 함부로 떠들고 다닐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백치령은 흡사 자존심이 거세된 것처럼 순종적이며 반항심은 정말 눈곱만큼도 드러내고 있지 않다.

전부 어젯밤 환인의 조교…가 아니라 체벌이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그녀들이었다.

그 후 시녀들이 운반해온 호화로운 식사로 아침을 해결한 환인은 여자친구들에 더해 백치령까지 데리고 성을 나왔다.

다들 회색 후드 로브를 뒤집어쓰고 환인은 비상까지 탄, 널리 알려진 녹색 성자 상태다.

그리고 환인은 똑같은 회색 후드 로브를 입은 백치령의 안내를 받으며 혈흔이 아직도 남아있는 광장에 차례차례 안내해주었다.

=도시에 설치된 공개 심문재판소는 총 열일곱 군데에 설치되어있었습니다. 구역마다 하나씩 만들어졌는데 그저께 성자님이 빛기둥을 만들어내신 곳은 3번 재판장이었어요.=

공개 심문재판소. 의구심이 드는 행동을 한 자들을 잡아 재판이라는 이름의 처형을 진행한 장소.

재판에 회부된 자들은 단 한 명도 살아 돌아가지 못했다는, 고작 50일의 시간이었지만 도시 사람들에게 PTSD를 안겨준 곳.

사형 방식은 다양했다. 어디에는 길로틴이 설치되어있었고 어느 곳에는 교수대가 설치되어있었다. 다른 곳에는 화형이 진행되었고 다른 곳에서는 말을 이용한 거열형이 행해졌었다.

지금은 모두 철거되었지만 약 50일간 17개의 재판소에서 처형된 사람의 숫자는 150명을 넘겼다고.

안느가 불쾌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린다.

=말이 재판소지 사형장이잖아.=

=공개 사형을 집행당한 자들은 대부분 죽을만한 죄를 저지른 범법자들이었소. 영주님의 상세가 좋지 않아 그 틈을 노리고 지하에서 세력을 확장한 폭력집단의 수괴 같은 자들이었지.=

=진짜? 무고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

=…….=

=다 범죄자였으면 도령이 저렇게 굳은 표정을 하고 있진 않을 텐데? 거기다 첫날 들어왔을 때 도령이 영혼과 감응하면서 알게 된 게 무고한 사람의 사형이었어.=

=…….=

안느의 혐오스러워하는 반응에 백치령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숙였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검사와 조사는 완벽하지 않았고 죄 없는 시민도 일부 재판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는 걸 말이다.

그리고 여자들은 환인을 따라 이동할수록 백씨 가문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환인이 말하기를, 대부분은 백치령의 말대로 범죄 조직 구성원이었지만 비범죄자, 무고한 시민도 적지 않은 수가 있었던 것.

그의 여자들은 얼굴에 크고 작은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환인은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그저 이 상황을 문양의 힘 제어의 시험대로 여길 뿐.

프라버를 방문한 첫날,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아홉 혼재 예비들과 감응하며 기억이 쏟아져 들어오는 경험은 한 번이면 충분하다.

환인은 방벽 패널을 조작하며 단련한 의지력, 그리고 시하가 선물해준 그리모암의 유물 팔찌로 강화된 정신력을 이용해 문양의 힘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원치 않은 원거리 영혼 다중 감응을 차단한다. 자신이 원할 때 원하는 만큼만 영혼의 기억을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을 여는 것도 연습한다.

재판소당 스물에서 마흔의 영혼이 쌓여있었기에 연습 상대는 충분하다.

그렇게 문양의 힘이 의도하지 않게 자신의 영혼술에 개입하는 것을 막고 더 정확하게 컨트롤하는 법을 익혀나가는 동시에 환인은 영혼의 성불을 꽤 폭력적으로 진행했다.

“뭐가 억울하다고 영혼으로 남아 원한을 흩뿌리고 있는 거지.”

「어, 억울합니다! 정말 억울합니다, 영혼사님! 영주의 사병이 저를 무작정 잡아끌고 와 거동이 수상했다며 목을 쳤단 말입니다……!」

“범죄 조직에 몸담은 20년간 네가 죽이고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만 수백 명이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억울하다고 말할 수 있겠나.”

「예? 그, 그걸 어떻게……!」

“영혼사 앞에서 거짓을 말하려 하다니, 너 같은 인간에게 쓸 심력과 기력은 없다. 선택해라. 지금 당장 성불할 것인지, 아니면 소멸당할 것인지.”

「끄악! 아악! 하, 하겠습니다! 할 테니 제발…… 그아각…!」

천칭을 꺼내 길쭉한 봉에 영기를 흘려 넣고 적당히 후려치면 영혼은 그것으로도 타격을 받으며 고통을 호소하다 성불해버린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영체가 끊어질 정도로 두들겨 팬다.

그렇게 범죄 조직에 몸담은 놈들은 평온의 파동으로 정신을 일깨운 뒤 두들겨 패서 성불시켰고, 악바리같이 고통을 버티고 견뎌내며 원한을 뿌리는 자는 영혼 화살로 머리통을 날려 터트렸다.

자비를 권하는 것은 한 번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정말로 무고한 사람은…….

「…없습니다. 가족들도 모두…… 살해당하고…… 제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그런데도 한을 놓고 성불하고 싶으시다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성불하고 싶지 않다면, 방금 그자들처럼 저도 소멸시키실 겁니까……?」

“어떻게 범죄자의 영혼과 무고한 피해를 당해 목숨을 잃은 영혼을 동일시하겠습니까. 그저 보지 못한 것처럼 넘어갈 뿐입니다.”

「…제가 혼재가 되어 재액을 뿌리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건 프라버의 영주 가문과 당신이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하도록 못 본 척, 못 들은 척, 자기 일이 아닌 척 넘어가고 내버려 둔 시민들이 감내해야 할 일이겠지요.”

「…….」

“당신의 결정을 존중하겠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남고 싶습니다. 이 도시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이 일이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 제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억울해서, 원통해서 성불할 수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이 당신의 한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길 영혼사로써 빌겠습니다.”

「크흑……. 흐으윽…….」

그렇게 재판소를 전전하며 평온의 파동을 무수하게 쏘아대고 다녔기 때문일까.

어느덧 도시에는 비자룩스의 녹색 성자가 재판소였던 곳을 돌며 성불행을 진행 중이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반응은 환인이 생각한 것 이상이었다.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생업을, 하던 일을 팽개치거나 그만두고 소문을 따라 재판장과 재판장 사이를 달리고 모이기 시작했던 것.

환인이 네 번째 재판소에 도착해 성불행을 진행하고 있을 무렵에는 사람들이 무수하게 모여들어 구름 같은 인파를 형성해갔다.

그즈음 이실리테는 레드릭 얼터를 꺼내고 다중 검기도 소환해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고, 안느도 천벌의 망치와 성벽의 방패를 꺼내 사람들이 환인에게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벽을 만들었다.

유르파도 지팡이를 꺼내고 자신의 가슴골 사이에 들어가 있는 환연의 도움을 받아 불과 물과 바람의 대형 속성 구슬을 몸 주변에 띄워 위압감을 연출했다.

얼핏 수천 명을 넘어 만 명에 가까운 군중에게서 환인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성자님, 성자님…….=

=아아…….=

=짐승신님이시여…….=

군중은 알아서 거리를 둔 채 환인을 향해 무릎을 꿇거나 두 손을 모으거나 해서 죽은 가족의, 실종된 형제자매들을 위해 기도를 올리기만 했다.

중간중간 환인이 평온의 파동을 펼치면 평온의 효과를 받은 사람들이 울음을 터트리거나 눈물을 흘리며 오열하기도 한다.

환인은 구름처럼 모여들었지만, 결코 100m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을 돌아본 뒤 작게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심각하게 안쪽부터 썩어 문드러지고 있군.”

환인의 작은 목소리에 영기가 모두 소진되어 푸르게 변한 백려강의 표정이 흐려진다.

「이 정도일 줄은 저도 상상하지 못했어요…….」

백중익이 움직이고 있을 테지만 그가 과연 이러한 상황을 알고 있을까.

사태가 생각 이상으로 심각하다는 걸 인지하고 움직이느냐, 아니면 적당히 생색내기로 움직이느냐에 따라 결과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 날 것이다.

오전 중에 진행한 성불행으로 도시의 시민들에게 상당한 기대와 희망을 심어주었다.

만약 적당히 생색내기로 움직였다간 자신의 성불행과 비교되어 ‘지금 장난하나?’ 같은 생각으로 도화선에 불이 붙어 그간 쌓인 불안과 불만이 일시에 폭발해 대대적인 폭동으로 변질할지 모른다.

‘조금 전까지 창천 기사단원으로 보이는 자가 몰래 따라오고 있었는데…….’

지금은 눈에 띄지 않는다. 만약 보고가 올라갔다 하면 백 공자도 멍청하지 않으니 사태가 심각하다는 건 인지하겠지.

그렇다면 나도 적당히 챙길 것을 챙기는 게 좋겠지.

자신을 메시아처럼 바라보며 기도를 올리는 군중을 잠시 바라보던 환인은 백려강에게 말했다.

“려강. 먼저 객실로 돌아가 있어라. 환연, 너도 다.”

「네?」

「왜?」

“빛기둥을 펼칠 거다.”

「으익, 알았어.」

「네, 환인 님.」

환연이 먼저 쏜살같이 하늘 높이 치솟아 성으로 날아간다. 백려강도 그 모습을 바라보곤 환인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이고 뒤따라갔다.

그렇게 둘이 충분히 멀어졌을 때, 환인은 문양의 힘을 20%가량 끌어내는 동시에 정신을 집중해…….

“…….”

주먹을 가슴의 문양 위치에 올리고 평온의 파동을 발사했다.

두쿵——

환인의 머리 위쪽으로 한 줄기 빛의 섬광이 뻗어 나와 하늘을 꿰뚫는다.

뒤따라 회백색의 빛이 폭발하듯이 터져 나오며 기둥이 되어 구름을 찢어발기는 동시에 드넓은 광장을 뒤덮어 나갔다.

* * * *

성자 일행이 성 밖으로 외출한다는 보고를 들은 백중강은 순수한 걱정과 염려로 만약을 위해 창천 기사단에 지시서를 내렸다.

창천 기사단은 신호가 오면 10초 이내에 출동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쳐놓을 것. 그리고 기사 두 명은 사복 차림으로 비밀리에 성자 일행을 호위할 것.

멀리서 지켜만 보다가 만약 성자 일행에게 문제가 발생하면 즉시 개입해 도우라는 내용이었다.

그랬던 기사 중 한 명이 급히 돌아와 보고하기를…….

=도시 시민들의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정확히 설명해라. 어떻게 좋지 않다는 거지?=

=성자님을 구원자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해지고 있습니다. 네 번째 방문한 재판소 지역에는 이미 군중이 추산 1.5만 명 가까이 집결했으며 대다수가 성자님께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자칫 성을 향해 시민들의 분노가 향하지 않을까 우려되는 모습이었습니다.=

=…….=

기사의 보고에 백중강은 사태의 심각성을 단숨에 간파했다.

성자님을 구원자로 여기는 것은 문젯거리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성불행에 1.5만 명이나 되는 인파가 모였다니.

사람이 구원을 향해서 모이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짧은 시간에 그만한 사람이 모였다는 것이다.

그만큼 시민들의 가슴 속에 분노가 쌓여있으며 희망을 바라고 있다는 것이지 않은가.

‘일이 이토록 심각해질 때까지 모르고 있었다니.’

아니, 보통 때였다면 신경 쓸 필요도 없이 불만은 천천히 감소해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믿고 신앙할 대상이 생길 경우 다소 맹목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리고 성자라는 비교 대상이 생겼다. 이 상황에 적당히 대처했다간 불만이 감소하긴커녕 시민들의 분노가 가문으로 쏟아질 수 있다.

일개 시민들의 분노와 폭동 따위는 별것 아니지만, 그 뒤에 성자님이 있다는 것과 성자님이 제안한 그 계획에는 시민들의 협조가 중요하다는 사실이 백중강의 우려와 근심을 압박한다.

두쿵——

그때 가슴…뿐만 아니라 몸 전체를 진동시키는듯한 음파가 한 차례, 심장을 묵직하게 찌르며 지나갔다.

=……?!=

=뭐냐! 무슨 일이지?!=

=비, 빛기둥입니다! 사흘 전 발생한 회백색 빛기둥이 도시 서북 방면에서 또 치솟아 올랐습니다!!=

콰당, 의자가 뒤로 넘어질 정도로 벌떡 일어난 백중강은 즉시 테라스로 뛰어나가 서북 방면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장엄한 빛의 탑이 사방을 밝히며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광경에 백중강은 온몸의 솜깃털이 올올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틀림없다. 저건 사태가 매우 심각하니 자신에게 시민들의 대응 단계를 몇 단계 격상시키라는 성자님의 신호다.

=…보좌관! 지금 당장 가문 내 호족 백관 전원을 소집하라! 나는 아버님을 뵙고 오겠다!=

=옛!!=

백중강은 부리 안의 침이 바짝 마르고 심장이 옥죄는 긴장감을 느끼며 짧은 다리로 영주의 처소를 향해 열심히 뛰었다.

* * * *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