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4화 〉 388 백치령 PART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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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느의 관리 감독 아래 치욕스러운 자세로 몇 시간이나 반성문을 쓴 백치령은 모멸감에 몸을 떨면서도 환인에게 거역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당연하다. 지능, 상황 판단, 교섭력, 회화술, 기술, 직업, 신분, 지위……. 그녀로서는 무엇하나 환인을 이길 수 있는 분야가 없었다.
하물며 그는 술법사 계통으로 분류되는 영혼사임에도 압도적인 전투력을 보여주었다.
집행청 앞에서 마주쳤을 때 흑색 나무창으로 바닥을 박살 내는 것을 봤지만, 그건 마도기나 유물의 힘을 빌려서 한 것으로 생각했다.
자신도 단검 엽사지만, 근력 강화 마도구를 다수 착용하면 힘만큼은 근력 전사 못지않은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때문에 그 정도쯤은 별것 아니라고 여겼던 거다.
하지만 백려강을 공격하려 했을 때 백치령은 환인의 진면목을 보았다(고 착각했다).
뒤돌아있었음에도 자신이 달려들던 기척을 느끼고 걷어차서 날려버린 정확도와 기감.
백려강의 가슴을 공격하려 했을 때 자신의 손목을 낚아챈 뒤 자기가 반응하기도 전에 바닥에 패대기친 그 반사신경.
아마도 주 무기인 창을 들면 자신은 손도 써보지 못하고 패배당하겠지.
몸도, 마음도 한 번씩 굴복해버린 상황에 반감이 드는 게 이상한 일이다.
무엇보다…….
‘반성문을 쓰라고 했을 때 들려준 예시.’
거기서 반성문을 쓰기 싫다고 버텼다면 그 남자는 틀림없이 예시로 들어준 것 중에 하나를 선택했겠지.
=너 또 딴생각하고 있지.=
=……?!=
=내 종족 선천 능력이 뭔지 자꾸 깜빡깜빡하는 거 아냐?=
=서, 성자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오!=
=…….=
멀대같이 큰 플뢰 성투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니 몸이 저절로 떨려온다.
백치령이 안느의 살벌한 시선에 침을 꼴깍 삼키고 있을 때 객실 문이 열리며 환인과 이실리테, 백려강이 객실로 돌아왔다.
=도령 왔네. 고생했어.=
“음.”
한밤중, 7번째 평온의 파동을 쓰고 돌아온 환인은 여전히 거실 바닥에 무릎 꿇고 엎드려 반성문을 쓰고 있는 백치령을 바라보다 방벽 패널 두 개로 그녀의 옆에 쌓인 7장의 반성문을 가져왔다.
=……?!=
저게 뭐야.
희뿌옇고 넓적한 판이 반성문을 가져가는 모습에 흠칫 놀란 백치령은 이어서 반성문을 읽는 남자의 행동에 잔뜩 긴장했다.
팔랑, 팔랑팔랑.
“전부 같은 내용이군.”
=응. 잘못을 뼈에 새기라고 반복해서 쓰게 했어.=
“그래. 내일부터는 매번 다른 내용으로 쓰게 해라.”
‘매번 다른 내용으로?! 저 한 장을 적는데도 머리에 쥐가 나는 줄 알았는데!?’
안느는 매일 다르게 반성문을 쓰도록 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싶었지만, 경악하고 있는 백치령을 보곤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
“수고했다. 들어가서 쉬고 이실리테도 다음 시간까지 쉬도록.”
=네, 주인님. 목욕 준비할까요?=
“아니. 2시간 뒤 나가기 전에 잠깐 샤워하는 걸로 하지. 려강, 너도 그녀들과 함께 가서 쉬어라.”
「저는 안 쉬어도 괜찮은…… 아앗?」
=그러지 말고 이리 와. 안 그래도 려강 아가씨한테 묻고 싶은 거랑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거든?=
「아, 그… 여자들의 친목회라는 건가요?」
=응? 어… 맞, 지?=
「와아. 저 이런 거 처음이에요! 어떻게 하는 건가요? 뭘 하면 되나요? 얼른 가요.」
=어, 어어.=
환인이 이제부터 뭘 할지 눈치챈 안느가 백려강을 데려가려다 그녀의 반응에 당황하며 오히려 끌려간다.
이실리테도 환인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인 뒤 백치령에게 찔러 죽일 것처럼 차가운 시선을 보낸 뒤 망토를 벗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갑작스레 조용해진 거실에 환인과 단둘이 남게 된 백치령은 불안이 엄습해오는 것을 느꼈다.
뭘 하려고 날 남기고 다 들여보낸…… 아니, 뻔하군.
“따라오십시오.”
=…….=
앞으로 일어날 일을 직감했지만, 알게 되었다고 마음까지 진정되는 것은 아니다.
긴장해서 떨리는 걸음으로 환인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온 백치령은 회색 망토와 코트를 벗어 대충 던져두는 환인을 잔뜩 경계하다 그에게서 날아든 질문에 얼굴을 확 붉혔다.
“처녀였습니까.”
=누, 누가 처녀라는 것이오.=
“당신이 지금 보여주는 태도가 처녀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내 태도가 어때서…….
고개를 내린 백치령은 자신도 모르게 날개로 몸을 감싸고 있음을 깨닫고 무안한 마음에 슬그머니 날개를 접는다.
환인도 그녀가 처녀든 아니든 상관없었기에 그 이상 추궁하거나 캐묻지 않고 주제를 돌렸다.
“걷어차여 등으로 책장을 부수기까지 했는데. 날개는 괜찮습니까.”
=괜찮소.=
“다행이군요.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제가 왜 당신만 따로 불렀는지 알고 있습니까.”
=……본인의 육체를 희롱하기 위해서가 아니오?=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일부러 당당하게 대답했던 백치령은 뭘 생각하는지 모를 환인의 눈동자에 찔끔했다.
내 몸이 목적이 아닌 건가? 그렇다면 왜 처녀라고 물어본 거지?
포도주를 가져와 잔에 따르는 환인을 주시하며 의문을 드러내던 백치령은 그가 내미는 포도주잔을 우물쭈물하다가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애초 목적은 프라버가 어찌 되든 말든 백려강만 데리고 영도로 떠날 생각이었습니다. 알소프와 분쟁 중인 프라버에 오래 있어봤자 알소프의 경계심만 살테고, 치안과 분위기가 나빠진 프라버에서 얻을 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프라버가 어찌 되든 말든?
의미심장한 문구에 눈썹을 찌푸린 백치령은 포도주잔의 1/3을 채운 자주색 술을 단숨에 털어 넣고 창밖을 보고 있는 환인에게 물었다.
=프라버에 큰 문제가 발생할 거라는 말이오?=
하지만 환인은 대답해주지 않고 자기가 할 말만 꺼낸다.
“하지만 백려강이 신경 쓰여 그녀를 위해 몇 가지 행동을 했더니 그것이 나비 효과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이제는 마냥 무시하고 떠날 수가 없게 되어버렸군요.”
환인은 품에서 광창 나인볼그라는 이름의 쇠막대기를 꺼냈다.
주인 각인을 통해 자신이 새로운 소유자가 된 광창에 의지를 밀어 넣자 광창光?이라는 이름답게 아름다운 빛으로 이루어진 창대와 창날이 생성되어 어둠 속에서 선명하고 아름다운 백색 빛을 뿌린다.
광창의 머리는 독특한 모양이었다.
아홉 자루의 날이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져 극?도 아니고 월도도 아니고 파르티잔이나 삼지창도 아닌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었던 것.
“…….”
아홉nine이라는 단어가 이름으로 괜히 붙은 게 아니라는 것처럼 정신을 집중하니 아홉 자루의 날이 사모처럼 구불거리며 늘어나 서로 뒤엉키고 뭉쳐지며 섬뜩하리만치 아름다운 빛무리를 형성해낸다.
백중강의 설명을 들은 뒤 위력 시험 삼아 위상력이 깃들어 더욱 질겨지고 단단해진 합금을 내려쳐 봤는데, 무를 베는 것처럼 단숨에 석둑 잘려 나갔었다.
성수의 어금니로 만든 창보다 더 날카롭고, 내구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압도적인 공격력의 무기.
광창 나인볼그는 자신의 가장 큰 문제점인 공격력의 부재를 단숨에 해소해주는 유물 무기였던 것.
다만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광창을 선물 받아 영주의 목숨을 부지시켜주었지만, 그것으로도 마음의 빚을 남기지 않기에는 부족하다 여긴 환인은 프라버를 떠나기 전, 프라버에 간단한 도움과 조언 몇 가지를 남길 생각이었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저는 프라버를 떠날 때 당신을 원래 위치에 복직시켜달라고 백 공자와 영주님께 진언을 드릴 생각입니다.”
=……?!=
자신의 조언이 받아들여진다면 필연적으로 인재의 대대적인 등용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 상황이 되면 내쳤던 백치령도 다시 불러들일 가능성이 있다.
저렇게 보여도 백치령은 하늘 기사단을 문제없이 이끌어왔던 지휘관급 인물이니까.
기왕이면 그 복직도 자기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게 명성적인 측면에서 좋지 않겠나.
그러나 거기에는 문제가 두 가지 있는데…….
‘이 여자의 성질머리와 쌓인 내 감정.’
원래 성질머리로 복직을 추천해주었다가 백치령이 사고를 저지르기라도 하면 그 평가 하락은 고스란히 자신에게 이어진다.
환인은 복직이라는 이야기에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린다는 표정의 백치령을 말없이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러자니 당신이 가진 몇 가지 문제점이 걸림돌이군요. 백려강을 대하던 태도도 마음에 안 들고, 당신이 절 엿먹이려 든 기억 때문에 감정이 상한 것도 있고 말입니다.”
=…….=
복직될 가능성을 두고 흥분하던 백치령은 뒤늦게 자신이 한 행동을 떠올리곤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굳은 결심을 한 얼굴로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내일 아침, 백려강 그 아이에게 무릎 꿇고 이때까지 해왔던 행동을 진심으로 사과하겠소.=
“…….”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 이해하고 있소. 그대 말대로 본인이 이때까지 해온 짓이 있는데 어떻게 믿음을 쉽게 얻을 수 있을까.=
무릎 꿇은 채 고개를 숙인 백치령이 고백하듯 읊조린다.
=하지만…… 볼썽사납지만 그대의 지적과 그대의 지시로 반성문을 적으며 적지만 내 과거를 돌아볼 수 있었소. 그리고 그것을 글로 적으며 참…… 꼴사납다고 느꼈소. 나는 정말 명예욕과 승인 욕구만 비대하게 강한 여자였구나…….=
참회하는 것처럼 씁쓸하게 말하는 백치령의 모습에 환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사람 마음과 성격이 말 몇 마디에 쉽게 변한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더더욱 어지러웠을 것이다.
‘그렇다고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고. 며칠간의 일로 심경의 변화가 강하게 일어났단 말인가.’
=복직되든 되지 않든…… 물론 복직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그대가 말한 대로 나는 앞으로 내가 가진 것의 장점을 살리면서 나 자신을 변화시킬 생각이오. 물론 단번에 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소. 하지만…….=
조금 감정이 북받치는 듯, 잠시 숨을 고르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며칠간 느꼈던 심정과 오늘 그대에게 당한 것, 들은 것, 깨달은 것을 기억하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다 보면…… 나도 변할 수 있을 거라고 믿소.=
“……그 다짐이 사실이라면 제가 내세울 복직의 첫 번째 조건은 충족되는군요. 복직의 가장 큰 문제점은 당신의 성품이었으니까요.”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면전에 대놓고 저리 말하는 것을 보니 조금 울컥하는 백치령이었으나, 이것도 심신 수양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열고 받아들인다.
“남은 문제는 하나군요.”
=무슨 문제인지 말씀해주시오. 겸허히 받아들이겠소.=
“두 번째는 당신으로 인해 생겨난 제 개인적인 감정입니다. 강하게 말한다면 원한이 될 테고 가볍게 말한다면 당신에게 받은 골탕을 갚아주고 싶다는 복수심이겠군요.”
=……그, 그건 반성문을 쓰는 걸로 끝난 일이 아니오?=
“제가 언제 끝이라고 했습니까. 분명 반성문‘부터’라고 했을 텐데요.”
=……!=
반성문으로 끝이 아니라 그 뒤가 더 있었어?!
=그, 그러고 보니 내게 처녀냐고 물었었지. 설마……!=
“그건 그냥 물어본 거였습니다. 지레짐작하지 말고…… 으음.”
말하면서 방을 둘러보던 환인은 적당한 의자를 찾아 방 가운데로 가져와서 앉는다.
그리고 자신을 경계하듯 문가로 물러선 백치령을 향해 빙긋 웃으며 자신의 허벅지를 툭툭 때렸다.
“엉덩이를 까고 여기에 엎드리십시오.”
=어, 엉덩……!?=
“예. 이게 다음 체벌입니다.”
상상도 못 한 두 번째 체벌의 내용에 백치령이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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