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3화 〉 387 백치령 PART1
* * *
무언가를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을 한 백려강의 부탁에 환인은 잠시 생각하다 그녀의 손을 잡고 영기를 넉넉하게 흘려 넣어주었다.
온통 푸른색의 영혼이 충분한 영기를 받아들이며 삽시간에 생전의 화사한 모습을 되찾는다.
허공에서 화사하게 퍼져나오는 빛무리와 함께 마치 천사가 강림한 듯 모습을 드러내는 백려강.
영혼 상태의 백려강도 아름답긴 하지만, 아무래도 색이 덧입혀져 있지 않은 푸른색 상태로는 사람으로 안 보인다.
살아 움직이는 아름다운 그림, 혹은 홀로그램처럼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영기를 받아 색이 덧입혀지고 모습도 좀 더 진해지면 그때부터는 환인이라 해도 시선이 저절로 향하는 수준이 된다.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백려강을 본 순간 시선이 몇 초 정도 강제로 고정 당할 정도의 절세 미녀가 백려강인 거다.
환인의 여자들은 허공에 갑자기 나타나는 백려강에게 저도 모르게 시선을 향했고, 환인도 자신에게 천사의 미소를 보여주는 백려강에게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그러나 백치령만은 표독한 얼굴로——
퍽!
=꺄흑.=
백려강에게 달려들었지만, 환인에게 자비 없이 배를 걷어차여 나뒹굴었다.
우당탕 소리를 내며 성대하게 나가떨어진 백치령은 언제 좌절하고 있었냐는 듯이 오뚝이처럼 발딱 일어나 당황하고 있는 백려강을 향해 재차 몸을 날렸다.
저것 때문에 내가 이 꼴이……!
턱.
=읏?!=
백려강을 향해 주먹을 내지르려던 백치령은 환인에게 손목을 잡히자마자 붕, 몸이 띄워지고는 이내 낙법도 잡지 못한 채 돌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콰광!
=——끄헉…!=
팔이 잡힌 채 등부터 떨어져 비명이 아니라 폐부 속의 공기를 토해낸 백치령은 등뼈가 부러진 듯한 격통에 몸을 떨면서 허덕였다.
그것도 잠시, 악에 받친 얼굴로 백려강에게 다시 달려들려는 순간, 그리모암의 혁대를 발동시킨 환인의 싸커 킥이 그녀의 배꼽에 꽂혔다.
퍽—!
=컥!=
쿵! 우지끈, 두두두둑…….
축구공처럼 날아가 책장을 부수고 바닥에 떨어진 백치령의 위로 부서진 책장 파편과 책등이 후두둑 떨어진다.
‘발동 속도는 강령보다 그리모암의 혁대가 더 빠르군.’
벨트는 의지를 담아 혁대의 아무 곳이나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발동되니.
유물 벨트의 근력 강화로 약 60kg의 여자를 축구공처럼 날려버린 환인은 무기를 뽑아 드는 여자친구들을 제지하고 책더미에 파묻힌 백치령에게 다가갔다.
“백치령 전 단장.”
그리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에 꿈틀거리는 백치령의 풀잎처럼 선명한 녹색의 머리채를 틀어쥐고 들어 올린다.
뿌드득
=아악……!=
60kg의 하중을 견뎌내는 두피 쪽에서 섬뜩한 파열음이 났지만, 환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트린 백치령에게 물었다.
“제가 우습게 보입니까.”
머리채에 모든 체중이 실린 백치령이 신음과 헐떡임을 함께 흘리며 퀭해진 눈으로 환인을 노려본다.
환인은 그 시선을 무표정으로 받으며 말했다.
“당신의 원망을 받아야 할 사람은 영주와 공자, 그리고 저일 텐데 당신은 여동생에게만 분노를 표출하는군요. 만만한 사람이 백려강이라는 겁니까.”
홱!
콰당탕!
=아악!=
혀를 씹었는지 입가로 한줄기 옅은 핏물을 흘리는 백치령을 내동댕이친 환인은 손가락에 걸린 녹색 머리카락 한 줌을 털어내며 말했다.
“왜 이렇게 괴롭히냐고 물었습니까. 가해자가 피해자인 척 나 억울하고 불쌍하다고 소리 지르며 난동을 피우는데 그걸 좋게 볼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으윽…….=
“백치령 전 단장. 당신이 지금 살아서 공기를 마시고 내뱉을 수 있는 것은 전부 백씨 성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걸 명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리고 그 성이 당신을 무작정 지켜주지 않을 거라는 것도 말입니다.”
=그게 무슨 소용이라고!!=
몸을 돌리려던 환인은 오장육부가 뒤틀려서 나오는 듯한 고성에 백치령을 다시 돌아보았다.
=그딴 게 무슨 소용이냔 말이오! 지위도! 명예도! 재산도! 모두 박탈당해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차라리 죽이라고, 성자에게 죽는 쪽이 그나마 이름을 알릴 길이라며 악을 쓰는 그녀의 눈에는 분노와 설움이 한데 섞여 눈물이 되어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런 언니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백려강의 모습에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쉰 환인은 백치령에게 돌아섰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했습니까.”
=그래! 날 보시오! 성마저도 빼앗겨 평민으로 떨어질 판이오! 이런 내게 무엇이 남았단 말이오!!=
“자유가 남지 않았습니까.”
=그까짓……!=
“당신이 지금 가진 자유는 백려강이 죽어서도 바랬던 겁니다.”
반쯤 쓰러진 자세로 분루를 흘리던 백치령은 환인의 지적에 움찔하면서 백려강을 돌아보았다.
안절부절못하며 이쪽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평생 질투하고 갈망하던 절세 미녀의 외모를 가진 여동생.
“그녀는 가문도, 지위도, 명예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바란 게 있다면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는 자유와 가족애를 느끼고 주고받을 수 있는 가족뿐.”
=그런 말을 믿으라고…….=
“왜 못 믿습니까. 자신을 몰아붙이기만 한 가족을 위해 첨탑에서 몸을 던지기까지 한 그녀인데.”
=…….=
“세상에는 목숨을 버리고서야 자유를 얻은 사람이 있습니다. 굴다리 밑의 고아로 자라 폭행과 굶주림을 이겨내고 고난 속에서 싹을 틔운 사람이 있습니다. 남들이 다 더럽다고 욕하는 종족으로 태어나 박해를 받으면서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처음은 백려강을 가리켰다는 건 백치령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누구란 말인가.
세상에 그런 사람이 정말 있는 건가?
환인의 시선이 거실에 모여있는 여자들에게 향한 순간 그녀들의 과거임을 눈치챈 백치령은 아연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당신은 지식이 있고 건강이 있고 능력도 있으며 창공을 날아다닐 아름다운 날개도 있군요. 가진 게 차고 넘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아무것도 없다고 계속 생각이 든다면, 당신에게 정말 없는 건 마음의 여유와 충족감이겠지요.”
바로 전까지만 해도 세상을 저주하고 싶었던 백치령은 뭔가, 눈앞의 못된 남자가 조용히 하는 말에 독기가 밑 빠진 독의 물처럼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저 말에 반박하면 자신만 못난 년이 되는 기분.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히 누려왔던 부귀영화가 모두 사라져 암담하고 절망에 빠지는 기분.
거기에 자신의 모자람을 지적하는 환인의 비판이 날아드니 복잡하게 휘몰아치는 감정에 분노가 표백되어버린 백치령은 그냥 전부 내려놓고 싶어졌다.
권력이 다 뭔가. 세상을 호령하던 그 아버님도 종래에는 그런 몰골로 간신히 숨만 붙어있는데…….
「언니…….」
백려강은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반쯤 쓰러져 고개를 푹 숙인 언니를 조심스레 불렀다.
「언니의 잘못은… 없어요. 모두 제가 뒷일도 생각 안 하고 몸을 던지는 바람에…….」
백치령은 울컥했다. 저 착한 척… 아니, 착한 척이 아니라 진짜 착한 거겠지만, 자신을 동정하는 모습을 보니 나 자신의 못난 점과 열등감이 사정없이 자극받는 기분에 배알이 뒤틀린다.
그래서 대꾸가 뾰족하게 튀어 나갔다.
=너 뭐야. 지금 나 동정해?=
「그, 그게 아니라요…….」
=아니면 입 다물어. 내가 아무리 영락했다지만 죽은 너한테 동정받을 정도는 아니야.=
백치령의 날 선 대꾸에 백려강이 시무룩해지자 안느가 얄미워 죽겠다는 듯이 중얼거린다.
=저 저 말하는 꼬락서니 좀 봐. 망치로 한 대 콱 쥐어박아 주고 싶네.=
그러든가 말든가 소매로 입가에 흐른 피를 닦은 백치령은 무언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비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환인을 분노가 담긴 눈으로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성자 환인. 그간 당신에게 저질렀던 실수와 결례를 사과하겠소. 이건 한 치 거짓도 없는 진심이오.=
처음 봤을 때처럼 꼿꼿해지고 당당함이 드러나는 자세.
=내가 당신에게 하고자 한 말은 이게 전부였소. 이 말을 전달하기 위해…… 그토록 당신을 만나고자 했지만, 오라버니라는 작자는 한사코 당신과 만나는 것을 저지했고 당신은 내 말을 들어주지도 않았지.=
“당신이 자초한 일입니다. 평소 행실이 올발랐다면 백 공자가 그렇게 막아섰을 리 없을 테니까요.”
=…….=
반박할 수 없는 말로만 공격하다니, 하나같이 밉살스러운 남자다.
백치령은 울분을 곱씹으며 중얼거렸다.
=명예를 보전하고자 했지만…… 당신 말대로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려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군.=
아주 머저리 같은 여자는 아니군.
자신의 이야기에서 무언가 깨닫는 점이 있었으니 좌절감을 떨쳐내고 저런 태도를 하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그래서 환인은 조금이지만 백치령이 마음에 들었다.
괴롭히고 못살게 굴고 싶은 마음이 든 거다.
괴롭혀서 눈물을 뽑아내거나 굴욕과 자괴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도 상대에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어야 흥미가 생기는 법이다.
못나고 능력 없고 성격 나쁘기만 한 사람이라면 상대하는 것도 시간 낭비일 뿐.
=당신에 대한 사죄는 아버님과, 오……라비가 말한 대로 당신의 뜻에 따를 것임을 맹세하겠소. 내가 해주길 바라는 것을 말하시오.=
“…….”
환인은 꼿꼿하게 서서 고고한 눈빛을 보내는 백치령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겨 들었다.
사실 그녀가 죽을죄를 지었냐고 자문하면 그건 아니라는 답이 나온다.
자신 관점에서야 건방지고 눈 밖에 난 여자지만, 그녀의 지위와 신분을 생각해보면 백치령이 저지른 일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었던 것.
크라빈 마을에서 마을 사람들을 죽인 것은 상급 영혼사에게 죄를 저지른 놈을 단죄한 것이다.
도시의 영주 직속 기사단, 거기다 영주의 자녀에게 그만한 즉결심판의 권한은 당연히 존재한다.
21 집행 대대가 저지른 짓은 그녀에게 과잉 충성하려는 놈의 독단이었고, 방향성은 완전히 잘못됐지만, 일단 사과하려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랬기에 환인은 그녀가 굴욕을 느끼면서도 원한에 선을 넘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처벌을 생각해내야 했다.
뭐, 백치령의 목을 쳐서 떨어트려도 백중익과 백중강의 태도를 보면 큰 문제로 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좋은 관계성을 맺으려는 백려강과 문제가 생길 게 뻔하다.
그러니 백치령이 원한을 갖지 않으면서도 굴욕을 느낄 처벌을 내려야 하는데…….
‘자존심과 명예에 집착하는 이 나라 호족이라는 인간들의 특성상, 엄청나게 굴욕적일 것이며 생각할 때마다 이불을 걷어차는 수준의 흑역사가 될 처벌.’
마침 적당한 게 생각났다.
환인은 담담한 태도로 말했다.
“그럼 반성문부터 쓰도록 하지요.”
=……무, 뭐라고…?=
황망해 하는 백치령을 보며 환인은 빙그레 웃으면서 자상하게 설명해준다.
“반성문이라고 했습니다. 크라빈 마을에서 당신이 저질렀던 일을 시작으로 오늘 이 자리에 있게 되기까지 그사이에 벌어졌던 일을 ‘전부’ 빠짐없이, 사죄의 마음을 가득 담아 ‘반성문’을 쓰십시오.”
=…….=
“제가 됐다고 할 때까지, 여기 맨바닥에서, 무릎 꿇고 엎드려서 쓰는 겁니다.”
거실 한복판을 가리키는 손짓에 백치령의 하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고 눈매가, 입 주변이 실룩거리기 시작한다.
후, 우우……. 떨리는 숨결을 길게 내쉰 백치령이 더듬더듬 거리며 간신히 체면을 유지하는 모양새로 입을 열었다. 아니, 협상을 시도했다.
=아, 아니…… 그, 그냥 본인을 하녀라던가, 노, 노예로 취급해도 괜찮소만!?=
“괜찮습니다. 죽을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눈알을 파내고 팔다리를 잘라 한평생 끌고 다니며 놀림거리로 만든다던가, 전직 호족 영애 성노예로 험하게 굴리다가 매음굴에 팔아넘긴다던가, 목을 쳐서 저잣거리에 효수한 뒤 그 밑에 잘못을 적어두고 시체마저도 동물에게 간음 당하도록 방치한다던가. 신분을 그렇게 나락까지 떨어트릴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목이 떨어진 채 자기 몸뚱이가 개나 말, 짐승들의 좆에 유린당하는 걸 보고 싶지 않거든 거실 한복판에서 무릎 꿇고 조아리며 반성문을 써라.
섬뜩한 예시에 오싹, 어깨를 떨었던 백치령은 심장이 두근거리고 쿵쾅거리는 것을 느끼며 환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맨바닥을 돌아보았다.
그런 백치령의 뒤통수에 환인의 마지막 이야기가 날아들어 꽂혔다.
“세상에 널리 퍼질 호족 영애의 자필 반성문이 될 것이니 마음을 다해 적어야 할 겁니다.”
당당함으로 가득 찼던 표정이 굴욕과 절망으로 점철되어가는 것을 보며 환인은 속으로 웃었다.
한평생 무릎이 땅에 닿아본 적도 없을 것처럼 생긴 아가씨가 아무것도 없는 맨바닥에 개처럼 엎드려 종이에 뭔가를 적는 모습은 꽤 즐거운 눈요깃거리가 되었다.
=으…… 끙…… 으득….=
=어허, 사죄의 마음을 담아도 모자랄 판국에 이를 갈다니. 시종 시녀들이 오가는 복도에서 꿇어앉고 반성문 쓰고 싶어?=
=아?! 아니! 그런 게 아니오! 나에 대한 분, 분노 때문에 그런 것이니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소!=
쿵, 육중한 천벌의 망치 머리가 바로 옆을 찍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백치령이 다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는 코가 종이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푹 숙이곤 반성문을 후다닥 적어 내려간다.
=천천히 적어. 한 땀 한 땀 수 놓는 것처럼 진심으로 사죄하는 마음을 담아서, 응?=
=그, 그러고 있소!=
안느의 갈굼을 받으며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을 커피와 함께 지켜보던 환인은 옆에서 유르파가 작게 웃으며 하는 말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자기는 어쩜 이렇게 사람에 맞춰 굴욕을 주는 벌을 생각해내는 거니?=
“육체적 고통이나 학대는 저 여자 같은 사람에겐 자신이 옳았다는 증명과 함께 고난을 감내하게 해주는 첨가물이 될 뿐입니다. 그런 생각을 못할 만큼 정신적인 굴욕을 주려면 강한 자존심을 반으로 꺾어버리는 수단이 필요한데…….”
영주 가문의 호족 영애가 언제 저런 체벌을 받은 적이 있을까. 기껏 해봤자 가정교사에게 벽보고 반성하기나 훈계 정도로 끝났을 테지.
그게 저 자세로 반성문을 적게 만드는 이유라고 하자 유르파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
=하긴. 그냥 평범한 집 아이들도 저렇게 반성문을 적는 경험은 거의 못 해봤을 테니까. 려강 아가씨는 어떠니?=
「저도…… 저런 체벌은 처음 봤어요….」
=저 여자한테 효과적일까?=
「언니는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분이에요. 아마 지금쯤 수치스러워 죽고 싶을 심정이 아닐까요?」
=야! 너 똑바로 안 적어?!=
=무, 뭐 때문에 그러는 거요?!=
=반성문 글귀가 이게 뭐야! ‘잘못한 거 같으니 반성하고 있다.’?! 이게 아주 책임회피가 몸에 배여가지고는!=
=…….=
=자신이 누구고 뭘 잘못했는지! 자기가 일으킨 잘못의 여파를 어떻게 수습할 건지! 자신이 그 잘못을 다시 저지르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할 건지! 목적어를 똑바로 적으란 말이야!=
=자, 잘못했소. 반성문은 적어본 적이 없어서…….=
=너 진짜 내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본다. 조금만 꾀를 부리거나 요령 피우면 저기 프라버 대로 중앙 분수대 앞에서 자리 깔아놓고 반성문 적게 시킬 거니까!=
=…?! 또, 똑바로 하겠소! 잘못했으니까, 다시 적을 테니까 제발 그것만은……!=
화들짝 놀라 안느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는 백치령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백려강.
그 순진하고 착한 면모에 환인은 잠시 후, 밤에 그녀에게 내릴 체벌은 백려강이 보지 못 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백치령이 듣지 못할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백려강에게 말한다.
“그녀를 살려두는 것은 려강, 너 때문이다.”
「……네?」
“백치령이 죽으면 네 잘못이라고 괴로워할 테니까. 영주님을 살린 것도 너를 위해서였다. 그가 광증에 미쳐 죽어버리면 네가 슬퍼할 테니까.”
「…….」
백려강은 놀랍고 또 당황스러워하는 얼굴로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환인 님은 어째서 저를 이렇게 챙겨주시는 걸까요.
“나도 모르겠군.”
「엣.」
설마 속마음을 자신도 모르게 흘린 걸까.
두 손으로 뺨을 가리며 부끄러워하는 백려강에게서 고개를 돌린 환인은 못살게 들들 볶는 안느의 방해 속에서 입을 일자로 꾹 다물고 백지를 채워나가는 백치령을 보았다.
“하나 확실한 것은, 동료로서 너에게 신뢰를 얻고 싶다는 거다.”
「동료…….」
“넌 이제부터 우리와 함께 행동하게 되겠지. 그러다 보면 너에게 도움을 받을 일도 생길 거다. 그런 상황에 가장 필요한 건 서로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지.”
「…….」
“영주님을 살리고, 백 공자의 사죄를 받아들이고, 저 여자의 목을 치는 대신 반성문으로 끝내는 것은 네가 진정한 동료가 되어주길 바라서이기도 하다.”
백려강은 환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두 손을 가슴에 올리며 말했다.
「환인 님은 제가 당신을 도울 수 있을 거라고… 전에도 말씀하셨지요. 정말, 정말로 죽어 영혼이 된 제가 환인 님께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려강. 나는 필요하면 남을 속이기도 하지만, 최소한 동료에게만큼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의 여자들, 이실리테와 안느, 유르파, 환연은 누구보다 그에게 신뢰를 보내고 있으니까.
“이곳에서 말하기는 곤란하고, 도시 밖으로 나간다면 너에게도 이야기해주지. 그러면 너도 날 도울 수 있다는 걸 이해하게 될 거다.”
「……네!」
정말 유령이 된 자신도 환인 님을 도울 수 있다는 걸까?
그렇다면,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무척이나 기쁠 것 같다고 생각하며 백려강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미소를 환인에게 지어주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