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2화 〉 386 항구 도시 프라버
* * *
백중익에게 평온의 파동을 펼치는 사이사이 2시간. 환인은 객실에서 마냥 놀거나 쉬지 않았다.
백중익의 병세를 보고 노트북을 켜 조류 학술 자료와 수의학 쪽의 전자 서적을 검색해 비슷한 병명을 찾고 조류가 병에 걸렸을 때 치료 방법 같은 것을 조사했다.
그러나 조류와 조인족 간의 차이점을 알 수 없는 데다 수의학과 의학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환인이었기에 이 방식은 금방 접어서 치웠다.
대신 알아보기 시작한 것은 영기의 활용법이었다.
영기는 일종의 생기다. 살아있는 생물이라면 많고 적음과 위치의 차이는 있지만 다들 영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영혼에게 영기를 흘려 넣어주면 대상은 주입받은 영기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일시적으로 실체를 가지게 된다.
그렇다면 사람이 영기를 주입받았을 때는 어떻게 되는가.
이것은 여자친구들에게 시험해본 결과 그 효과를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오…… 왠지 몸에 힘이 넘쳐흘러! 기운이 막 나는 느낌이야!=
“몸에 부담은 없나.”
=네. 막 목욕하고 나온 것처럼 상쾌하고…… 몸이 무척이나 가벼워요.=
=느낌은 강장제를 한 사발 마신 거 같은데 몸에 부담이 전혀 없네. 영기에 이런 효능도 있었구나…….=
=이 정도라야 영혼의 실체를 드러내게 할 수 있는 거겠지?=
작용과 부작용에 대해 면밀히 검토한 뒤 여자친구들에게 영기를 흘려 넣어주었더니 모두 생명의 빛이 더더욱 찬란해졌던 것.
지금 다 죽어가는, 생명의 빛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인 영주에게 영기를 흘려 넣어주면 일시적인 차도 효과를 보일 테고, 그사이 치료를 집중적으로 받으면 회생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그래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
환인은 어째서 백중익을 치료하는데 미묘한 반감이 드는지 그 이유를 분석했고, 그게 백려강으로 인해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백려강은 착하다. 자신이 자살할 근본적인 이유를 준 가족조차 미워하지 않으며 원망하지 않는 점에서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훗날 백중익을 살릴 수도 있는데 살리지 않았다는 걸 백려강이 알게 된다면…….’
백중익을 치료하지 않을 경우, 그리고 백중익을 치료할 때 발생하는 손익을 담담하게 계산한 환인은 백중익을 치료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천품이 선량한 백려강이라면 부친을 일부러 살리지 않았다는 걸 알아도 자신을 미워하지 않겠지.
하지만 슬퍼는 할 것이고 그게 호감도의 하락에 영향을 줄 것은 틀림없다.
믿음이라는 근본을 건드릴 수 있는 주제인 거다.
=어엇!? 아, 그으…!=
부산스럽게 약을 조합하고 백중익의 부리 속에 흘려 넣고 순백의 광채를 뿌리느라 정신없이 움직이던 약사와 치료술사는 갑자기 자신들 사이에 끼어드는 환인을 보곤 억눌린 항의의 신음을 흘렸다.
차마 치료에 방해된다고 밀쳐내지 못하고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는 사람들.
“잠시만 비켜주십시오.”
=하지만…….=
=성자님에게 자리를 내어드리도록.=
=…….=
=…….=
백중강의 지시에 물러서는 약사와 치료술사들. 환인은 한결 움직이기 편해진 상황에 오른손의 장갑을 벗고 백중익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에 시선을 집중하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검지에 손을 올린 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천천히, 육체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오른손을 통해 원기를 천천히 방출하며 백중익의 가슴에 흘려 넣기 시작하니 환인의 오른팔을 따라 미약한 아지랑이가 피어나며 은은한 열기가 주변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어?=
=엇…….=
환인의 원기가 백중익의 가슴으로 흘러 들어가자 =끄으, 으으으… 흐으으…….= 금방이라도 숨을 멈출 것처럼 벌벌 떨던 백중익의 몸뚱이가 천천히 늘어지며 격통의 신음이 차츰 누그러져 간다.
‘원기가 예상 이상으로 많이 흘러 들어가는군.’
주머니에서 주황색 6급 위상석을 깎아 만든 원기 회복 마도구, 구원을 꺼내 쥐고 원기를 보충하며 원기를 흘려 넣길 한참.
위험한 고비를 넘긴 것처럼 백중익의 표정과 상태가 한결 안정되고 호전되어간다.
“……후우.”
=이럴 수가! 어떻게?!=
=성, 성술도 아닌데 어찌……?=
약사와 치료사의 경악 섞인 의문들 사이로 놀람과 당황으로 버무려진 표정의 백중익이 들어와 질문했다.
=성자님, 방금은 대체 어떻게 하신 것입니까? 그토록 괴로워하시던 아버님이…….=
“제 원기를 일부 나누어드렸습니다.”
=아!=
=허어!=
그제야 환인의 손에 들린 주황색 위상석의 오브orb를 본 사람들이 탄성을 지른다.
“조용히.”
사람들의 입을 다시 다물게 한 환인은 이번에는 백중익의 이마에 검지와 중지를 대고 영기를 미약하게, 아주 조금씩 흘려 넣기 시작했다.
환인의 손가락 끝, 그리고 그 손가락 끝이 닿아있는 백중익의 이마에 하얗고 파랗고 노란 빛무리가 일렁이자 사람들은 숨도 멈춘 채 눈을 부릅뜨고 지켜본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총량의 5% 정도 되는 영기를 흘려 넣어주었더니 백중익이 가느다란 신음과 함께 금세 눈을 뜬 것이다.
=…이…게… 어찌 된…….=
“아직 죽을 때가 아니란 이야깁니다.”
환인의 대답에 웃는 듯, 혹은 우는 듯 찡그린 얼굴로 긴 한숨을 내쉰 백중익이 중얼거린다.
=허……. 이번에는 신의 정원에… 드는가 했더니…….=
“입 다물고 기운을 보전하십시오.”
=…….=
환인은 무거운 신음을 길게 흘리는 백중강에게 5%의 영기를 더 흘려 넣어주고 물러났다.
약사와 치료사는 이 이상 놀라기도 어렵다는 듯이 멍하니 있다가 환인이 치료를 시작하라는 손짓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백중익의 상세를 돌보기 시작했다.
=세상에. 위험한 시기가 지났습니다. 생명력도, 기운도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일시적인 효과이니 그사이 할 수 있는 치료를 하는 게 좋을 겁니다.”
=아, 네!=
백중강은 바삐 움직이는 약사들과 한결 편안해진 안색의 부친을 바라보다가 조금 혼란스러운 얼굴로 환인을 돌아보았다.
영성은 다들 이런 다채로운 능력을 갖추고 있는 건가? 하지만 자신이 듣기로는…….
‘아니.’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백중강은 부친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환인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버님을 치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자님.=
“영주 님께서는 아직 하늘에 불려갈 때가 아닌가 봅니다.”
방금 신비한 능력으로도 죽을 사람은 죽는다는 건가?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아버님이 살아나신다면 자신이 영주로써 자리 잡을 때까지 굳건히 계셔주는 것만으로 계승의 안정성이 크게 오르고, 돌아가시더라도 이미 상속과 계승 문제는 다 결론지어놨으니 문제는 없다.
지금은 성자님에게 신경 쓰자.
=그러면 나가시지요. 광창의 사용법과 여동생의 처우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
환인은 마치 목줄에 끌려오는 것처럼 따라오는 백치령을 잠시 쳐다본 뒤 백중강을 따라 영주의 처소를 나섰다.
백중익의 처소 앞에서 10분간의 짧은 설명을 듣고 객실로 돌아온 환인은 백려강부터 먼저 살폈다.
“려강. 괜찮나.”
「……네?」
죄인처럼 끌려온 백치령이 뜬금없이 동생의 이름을 부르는 환인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고, 환인에게 다가가던 안느와 유르파는 눈치껏 입을 다물고 적당히 거리를 둬 기다리기 시작했다.
“성에 들어온 이후 쭉 안색이 좋지 않더군. 방금 처소에서는 더욱 그랬고.”
「아…….」
환인의 배려를 느낀 백려강은 몸에 밴 양갓집 규수의 아름다운 미소를 보여주며 수줍게 대답했다.
「그게…… 저는 아버님이 금방이라도 돌아가실 줄 알았거든요. 그러면 영혼이 되실 텐데, 이렇게 된 저를 본 아버님이 가만히 있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 하지만 백치령의 처지가 너와 겹쳐 보여서 그런 것은 아닌 건가.”
「…….」
미소 지은 얼굴이 허를 찔린 것처럼 천천히 흐려지고, 그제야 동생의 영혼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백치령이 울분이 드러나는 얼굴로 환인을 노려본다.
그러면, 저 상태라면 이미 성내 분위기와 자신의 의도 정도는 알아챘을 것이 아닌가. 그런데 굳이 자신을 이렇게까지 몰아붙였어야 했나?
환인의 정치력과 교섭, 화술이 일반인이나 자신을 능가한다는 걸 깨달은 백치령은 차마 그 울분을 환인에게 향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백려강에게 향한다.
=백려강 너는 죽어서까지 나를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이구나.=
「에…….」
자신의 모습과 목소리가 들리는 건가 움츠러든 백려강의 모습에 환인은 담담한 태도로 백치령에게 말했다.
“백려강은 당신에 대해 별말 하지 않았습니다. 한 말이라곤 당신의 근황 정도일까요.”
=거…….=
거짓말이라고 반사적으로 소리치려던 백치령은 필사의 자제심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래, 거짓말일 리가 없다. 그를 직접 본건 고작 8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백치령도 나름 기사단을 이끄는 몸.
상대의 성향과 품성 정도는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녀가 본 환인의 성향은 이런 거짓말을 할 위인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백치령은 눈물이 흐를 것만 같은 분노가 결국 마음의 뚜껑을 열고 흘러나오는 걸 느끼며 반쯤 악을 썼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왜 본인을 이리도 괴롭히시는 거요?! 본인이 그대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
=21 집행 대대의 행동은 본인에게 잘 보이고자 한 그자의 독단이었소! 본인이 그 행동에 가담한 적은 없단 말이오! 당신에게 위해를 끼칠 의도도 없었소! 그저 그대를 상대로 교섭의 우위를 얻기 위해 계책을 썼을 뿐……! 그게 본인의 직위와 신분을 박탈당할 정도의 잘못이 되는 거요…?!=
백치령이 갑자기 소리 지르는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던 환인의 여자들이 곧 어이없어하며 피식 웃거나 분노를 드러낸다.
안느는 이실리테가 화난 얼굴로 무어라 말하려는 것을 그녀의 손을 잡고 말린 뒤 자신이 직접 나섰다.
=치령 아가씨? 지금 그 말 엄청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는 거 알지?=
=무엇이 말이오!?=
=방금 그 말과 그 행동, 다른 도시의 영주에게 하면 어떻게 될 거 같아?=
=……!=
=아가씨 행동은 지금 우리 도령을 아가씨보다 아래로 보고 있지 않은 이상 나오지 못 하는 말이잖아. 틀려?=
=그, 그건…….=
말하다 보니 화난다는 전형적인 상황을 따르게 된 안느가 자기보다 20cm는 더 작은 백치령에게 다가가 내려다보며 으르렁거린다.
=우리 도령이 정말 네가 함부로 대해도 될 사람이라고 생각해? 나는 추기경과 동기인 땅신 교단의 성투사야. 이슬이는 헬루멘의 영주님한테 기사로서 인정까지 받은 검희 이실리테고. 이런 우리가 모시는 도령이 정말 당신보다 아래라고 생각해? 응?=
=…….=
화가 나다 보니 자연히 목소리도 가라앉고,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있어 부풀려진 체구와 안개처럼 은은하게 퍼져나오는 아우라에 압도당한 백치령이 주춤, 뒤로 물러선다.
=당신의 사상이 그 꼴이니까 이런 일이 벌어진 거야. 당신 오라비가 우리 도령한테 하던 태도 기억 안 나? 공자는 시민들 수백 명이 지나다니는 거리에서 잘못을 허리 숙여 사과했어. 그런데 당신은 어땠지?=
=나는…….=
=크라빈 마을에서 우리 도령의 권한을 침범한 것만 봐도 당신은 한쪽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해야 했었어. 계산을 따지고 체면을 챙기고자 도령을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려는 게 아니라, 도령의 정체를 안 순간 뛰어나와서 용서를 구하고 자비를 간청해야 했다고.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했어?=
입을 꾹 다물고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 백치령의 명치를 안느가 쿡, 찔렀다.
=자존심이 중요하다지만 필요할 땐 자존심도 내려놔야지. 당신은 그 알량한 자존심을 챙기려다 모두 잃은 거야.=
단장의 직위를 박탈당하고 영주의 자녀로서 권한과 혜택도 몰수당해 남은 거라곤 4급 엽사라는 직업뿐
그렇지 않아도 위태롭게 흔들리던 백치령은 안느의 차가운 비난에 마음이 꺾여 풀썩,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흥, 차갑게 조소를 흘린 안느는 표정을 풀고 환인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도령, 미안해. 듣다 보니 화가 나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아니다. 잘해줬다. 그런 말을 내 입으로 하긴 곤란하지.”
그러는 사이 좌절해서 고개를 푹 숙인 백치령을 안쓰러워하는 얼굴로 바라보던 백려강이 무언가 결심한 얼굴로 환인에게 부탁했다.
「환인 님. 제게 영기를 조금만 나누어주시면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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