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1화 〉 385 항구 도시 프라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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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을 유지하는 백중강의 안내를 받아 영주성의 심층이라 할 수 있는 층에 오른 환인은 한쪽이 훤히 개방된 복도에 들어섰다.
푸른 알류겔 호수와 프라버 항만, 항만 근교가 눈에 훤히 들어오는 압도적인 경치.
=성자님, 이쪽입니다.=
말없이 복도를 걸어 4급 직업자 4명이 지키는 문을 지난 환인은 ㄱ자 모양으로 꺾여있는 코너를 돌았을 때, 100평이 넘어가는 넓은 방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환인은 차게 식은 눈으로 영주의 처소 내부를 둘러보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백중익의 처소는 화려함의 극치였다.
중급 도시, 서부 항만 물류의 중심지인 만큼 규모만 보자면 평원의 거대한 도시인 헬루멘을 능가하는 프라버다. 그런 도시의 지배자이자 주인인 백중익의 처소가 화려한 것은 당연한 일.
‘돈 낭비군.’
하지만 타인의 취향은 무시에 가까운 존중을 하는 환인이 이런 생각을 할 만큼 처소의 화려함은 정도가 지나치다 할 수준이었다.
바닥에는 페르시아 양탄자를 연상케 하는 복잡하고 현란한 양탄자가 빈틈없이 채우고 있었고 벽에는 신화의 전투를 묘사한 듯한 웅장한 태피스트리가 곳곳을 장식하고 있다.
천장은 돔 형태의 스테인드글라스로 되어 프리즘 같은 햇빛이 바닥의 무늬를 더욱 화려하게 만들고 있으며 가구 또한 고딕, 바로크, 로마네스크, 르네상스 양식을 떠올리게 하는 책상, 책장, 옷장, 탁자, 테이블, 스툴, 소파, 꽃병과 화병 들로 빈틈없이 꾸미고 있다.
이 정도면 화려함을 넘어서 난잡함까지 느껴질 것 같지만…….
‘신경을 쓰긴 했나.’
졸부가 비싸다는 것만 모아놓은 천박한 화려함은 거의 느껴지지 않고 무수한 양식의 디자인과 실내장식이 한데 어우러져 혼돈 속의 질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형종과 미궁산 소재로 만든 것 같은데.’
소재가 평범한 색실, 목재, 석재도 아니고 전부 미궁에서 출토된 소재로 제작한듯하니 이 방의 인테리어에만 금화가 천 단위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돈 낭비라고 생각하며 처소에 가득한 약 향기를 가로지르며 방의 한켠을 장식 중인 침대로 다가간다.
캐노피가 달린 침대는 킹사이즈 침대 네 개를 합친 것만큼이나 커다랬는데, 백중익은 그 침대에 누워 좌우에 전라의 여성을 끌어안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타인의 체온으로 자신의 체온을 맞춰 생명력을 공유한다는 니오네브레스 특유의 민간요법이다.
영주가 그런 민간요법까지 사용할 만큼 백중익의 모습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영주님, 중강 공자님과 녹색 성자님이십니다.=
치료하던 약사와 성술사의 이야기에 백중익이 눈을 힘겹게 뜨고서는 환인을 바라보다 입을 연다.
=왔군…….=
“머리는 어떻습니까.”
환인의 직설적인 질문에 백중익은 =흐…….= 힘없이 웃었다.
=기운이… 하나도 없지만, 정말 오랜만에…… 머릿속의 미혹이… 걷힌 느낌일세…….=
“정신을 차리셨다니 다행이군요. 내일 오전까지는 2시간 간격으로 와서 계속 평온을 드리겠습니다.”
=크크……. 우선… 고맙다고 해두지…. 네 녀석 덕분에… 가문의, 분란…을…… 막을…… 쿨럭! 커헉, 크르륵…!=
더듬더듬 어렵게 말을 이어가던 백중익의 기침에 약사가 황급히 주사기 형태의 약액을 들고 부리에 흘려 넣어준다.
그것과 곁의 여자가 입으로 전해주는 물을 마신 백중익이 겨우 기침을 가라앉히고 가쁜 숨을 헐떡였다.
“감사 인사를 받기 위해 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 이야기에 기운을 쓸 거라면 돌아가 보겠습니다.”
=큭큭큭….=
영주의 위치에서 받아들이기에는 건방지기 짝이 없는 환인의 태도지만, 백중익은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그 덕에 기운을 차릴 정도로.
여자들의 부축을 받아 쿠션과 베개를 등 뒤에 받쳐 반쯤 누운 자세가 된 백중익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돌팔이 사이비라고 한 것은 사과하지….=
“환자의 헛소리를 마음에 담아둘 만큼 속이 좁지는 않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크흐흐 웃은 백중익은 처소 한켠에 있는 문, 그 옆의 기사에게 손짓하며 환인에게 다소 짓궂은 얼굴로 묻는다.
=속이 넓은 것 치고는 마음에 담아둔 것이 많아 보였다만…? 정신은 오락가락했지만… 들은 것은 다 기억하고 있다네….=
“이유 없이 뺨을 맞은 것과 아픈 사람의 고함을 같은 선상에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흐하하하…. 그래, 앙심과 노여움은 비슷하면서도 다르지…. 허면 나에게도 섭섭한 감정이 있겠구먼…?=
“섭섭하다는 말로도 부족합니다. 자식의 잘못은 부모의 잘못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크흐흐…… 전도유망한 영성님의 분노를 풀어주려면… 쿨럭, …어지간한 책임으로는 안 되겠지….=
죽어가고 있음에도 은은한 기백이 느껴지는 모습.
영주쯤 되니 그에 걸맞은지 아닌지는 둘째치고 풍모와 품격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지구에서 직장인으로 근무할 때 경제산업자문위원회라는 재계 모임의 운영 보좌로 참석해 거물 정치인은 물론 재벌 총수까지 가까이서 본 적이 있는 환인이었다.
그들에게서는 전혀 없다고 할 만큼 특별함은 느끼지 못했는데, 파르히스트의 성주는 물론이고 프라버의 영주에게도 기백이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
위상력이라는 신비한 에너지가 있는 세상이라서?
기침에 옆에서 건네주는 약탕을 한 모금 마신 영주가 흐으…… 약 냄새가 물씬 풍기는 한숨을 토해내며 말했다.
=자네 덕분에 백씨 가문은 가장 큰 우환을 넘겼네….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면 영주의 위를 아들놈에게 넘겨주지도 못하고 골로 갔을 테지….=
보통 강한 권력을 거머쥔 사람일수록 죽기 직전까지 권력을 넘기지 않으려고, 목숨을 이어가려고 아등바등하다가 추하게 죽기 마련이다.
그런데 담담하게 영주의 직위를 넘겨줄 준비를 마쳤다고 말하며 마음의 짐을 어느 정도 내려놓은 듯한 백중익을 환인은 약간이지만 다시 보았다.
권력의 한 줌도 놓기 싫어 전쟁을 일으켜 수천, 수만 명을 죽게 만든 독재자에 비하면 선녀나 다름없지 않은가.
=아들 녀석에게 들었네. 날 치료해주는 대가로, 가문의 보물고에서 두 가지를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을… 받았다고….=
달칵, 기사가 서 있던 옆의 쪽문이 열리더니 낯빛이 거무죽죽하게 변한 백치령이 하얀 셔츠와 회색 꼭 낀 무릎 바지를 입고 걸어 나온다.
고급 옷감으로 만든 옷이긴 하지만, 민무늬에 투박한 디자인이어서 몇 시간 전의 화려한 기사 정복 차림과 대비되는 차림.
잠깐 백치령에게 주었던 시선을 돌린 환인이 대꾸했다.
“예. 딱히 필요는 없지만 준다고 하니 챙겨서 제 기사들을 무장시킬 생각입니다.”
=크크… 그래, 저런 기사라면… 챙겨줄 법도 하지….=
백중익은 들어온 딸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문 근처에서 한 자루의 명검처럼 우뚝 서 있는 이실리테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듣기로 자네는 창을 쓰는, 무예의 달인이라지……. 어떤가… 내 제안을 한 번 들어보지 않겠나….=
“경청하겠습니다.”
전혀 경청하지 않는 태도였지만 백중익은 세상 너그러운 할아버지처럼 크허허 웃으며 허공에다 손을 집어넣는다.
순간 허공에 복잡한 문양의 술법진이 떠오르며 영주의 손을 삼키는 광경에 환인은 그와 비슷한 문양을 본 기억이 떠올랐다.
파르히스트 성주의 모친, 시두르의 심장에 맺힌 영기.
설마 싶어 영혼 시야를 열어 백중익의 심장을 보자 역시나, 그의 심장에 맺힌 영기의 모양새가 지금 허공에 떠서 그의 팔 한쪽을 삼킨 술법진과 똑같이 생겼다.
환인이 지그시 쳐다보아서일까, 백중익은 묻지도 않은 설명을 해준다.
=가문의 진정한 보고는 영주에게 대대로 이어지는 이 차원 창고라네…. 보물고라 해봤자… 6급 정도의 무기, 방어구, 장신구에 그럭저럭 돈 되는 물건들 정도일까…. 진짜, 보물은 여기에 들어있다네….=
‘저게 개인용 차원 창고를 가진 사람의 특징인가.’
잠시 안을 휘적거리다 빠져나온 영주의 손에는 길이 50cm 정도의 금속 재질 묵빛 완드가 들려있었다.
완드라지만 끝과 끝이 똑같이 생긴 곧은 스틱에 가까운 형태다.
=광창 나인볼그…… 플뢰 족의 대영웅, 창신이라 불리던… 그 슈마리에의 유물이지. 보물고의 선택권 대신 이걸 받는 게 좋을 걸세….=
창신 그=슈마리에의 유물이라는 말에 처소에 있던 환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경악했다.
백중강이 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가 환인에게 다가가 진심 어린 조언을 해준다.
=성자님,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보물고에도 유물이 몇 점 있지만 광창에 비하면 한참 떨어지는 수준입니다. 받아들이시지요.=
“…….”
잘 구슬려 등쳐먹으려는 기색 따윈 일말도 보이지 않는 모습.
백중익은 감회가 새로운 듯이 완드를 어루만지다 침대 옆에 서 있는 시녀에게 넘겨주었고, 시녀는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 환인에게 전달해주었다.
=검희와… 성투사에게 사사할 실력자라면…… 후우…, 자네에게 어울리는 무기가…… 될걸세. 후욱.=
=영주님. 그만 말을 아끼시지요. 건강에 해가 됩니다.=
백중익이 숨을 몰아쉬는 모습에 약사가 옆에서 조언을 주지만, 영주는 귀찮은 듯이 손을 저어 물리고 계속 말한다.
=사용, 법은… 아들놈에게 듣, 고… 후욱. 그…… 다음을, 처리해야겠지. 저 녀석에게… 체벌을 바란다고 했, 던가.=
영주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음울한 안색의 백치령이 있었다.
=…무능한 놈에게 기사단장의 직위는, 과분한… 것이지.=
후우우 숨을 길게 들이마신 백중익이 인정이나 자비는 눈꼽만큼도 없는 서릿발 같은 기세로 말한다.
=저것에게서 프라버의 군을 통솔할 자격을 회수했고 호족의 지위 또한 몰수하였네. 이제 평민이나 다를 바 없는 놈이니 자네가 마음대로 하게. 어떤 일을 하든 신경 쓰지 않을 터이니. 그리고… 그 외의 요구는… 후욱. 전부, 받아들여…… 질 걸세……! 크억! 쿨럭, 커헉!=
할 말을 다 해서일까. 백중익의 상세가 급속도로 나빠져 간다.
=아버님! 치료사, 뭐 하고 있나!=
백중강의 호통에 약사가 황급히 진료대 위에 꺼내놓은 약과 액에 더해 가방에서 꺼낸 것도 조합하기 시작하고 치료사는 땀을 뻘뻘 흘릴 정도로 서서히 눈이 돌아가는 백중익에게 성력을 투사한다.
=…….=
「…….」
침대 쪽에서 소란이 일고 있었지만 환인은 어깨를 축 늘어트린 백치령과, 처소에 들어온 이후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백려강의 표정이 닮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둘 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얼굴에 드러나는 모습.
그도 그럴 것이 백중익은 체벌을 주어 정신을 차리게 할 의도가 아닌, 자신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해 쓸모없다고 여겨 자식인 백치령을 용서 없이 내쳐버렸다.
백려강에게는 부친에게 버림받은 백치령의 처지가 남 일 같지 않은 거겠지.
환인은 잠시 두 명을 바라보다 광창… 같지 않은 광창을 내려다보며 만지작거렸다.
프라버의 차기 영주인 백중강도 경악할 정도로 놀란 물건이다. 틀림없이 범상치 않은 유물이겠지.
어깨가 축 늘어진 백치령을 바라보던 환인의 시선이 죽을 듯이 경련을 일으키는 백중익에게 향했다.
저 경련마저 잦아들면 백중익은 숨이 끊어질 것이다.
“…….”
환인의 생각이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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