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0화 〉 384 항구 도시 프라버
* * *
드드드—… 쿵.
문이 활짝 열리고, 문 안쪽의 한쪽 벽에 물러나 있던 집사가 낮지만 또렷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로 환인과 백중강의 입장을 알린다.
=창천 기사단장, 백중강 님과 비자룩스의 녹색 성자, 환인 님께서 입장하십니다.=
“…….”
환인은 회랑, 알현의 홀에 들어서자마자 백중익의 병들고 광기에 찬 눈동자에 직시 당하고 있었다.
자신을 치료하러 온 영혼사가 아닌 암살자, 습격자가 아닐까 의심하는 눈초리.
그 시선을 무시하며 100m가량 되는 붉은 융단의 길을 걸어가고 있자니 단상의 옥좌 근처에 서 있는 일단의 인물들, 시야각으로 인해 기둥에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단 아래 가장 가까이 서 있는 여자아이들이 다섯째와 여섯째, 여덟째 동생들이에요. 차례대로 미르닐라, 이아레, 세이스이고…….」
백려강의 인물 설명이 이어진다. 옥좌 밑, 단 중간에 서 있는 백치령과 그 아래의 세 여동생. 그리고 그보다 멀리 자리 잡은 내정 쪽 문관들.
환인은 자신을 불편해하는 백치령과 호기심을 드러내는 세 명의 얼굴과 이름만 기억해두고 이제는 노골적으로 불신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하는 백중익을 응시했다.
=아버님, 말씀드렸던 저 비자룩스의 혼재를 물리치고 평화를 가져다드린 녹색 성자, 환인 님을 모셔왔…….=
융단의 길을 걸어 백중익과 가까워진 환인은 백중강이 예법을 올릴 때 자신도 약식으로 살짝 고개를 숙이며 가슴에 손을 올렸을 때.
=믿지 못하겠다.=
예상했던 소리가 튀어나왔다.
가까이서 보니 부리의 일부가 탈색되며 영향 불균형의 징후가 드러나고 있다. 식생활조차 불균형하며 정신적 피해가 육체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심각한 상태다.
=아버님, 의심을 거두어주십시오. 이분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실된 성자님이십니다.=
=거짓말 마라! 아우라도 없는 놈이지 않으냐! 저런 사기꾼을 녹색 성자라 믿고 데려오다니! 네 녀석도 정신이 나간 것이구나!! 그게 아니라면?! 날 죽이고 영주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게야?!=
쾅쾅, 옥좌의 팔걸이를 앙상한 주먹으로 내려치며 노기를 토해내는 백중익.
난데없는 급발진이었지만 모여있는 이들 사이에서는 별 반응이 없었다.
드러나는 감정은 ‘또 시작이시군.’과 ‘피곤하다.’ 정도. 한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닌 모양새다.
=오해이십니다. 아버님께서도 들으셨다시피 녹색 성자님께서는 무휘광의 영혼사이신 분. 믿지 못하시겠다면 성자님의 영혼 기사이신 헬루멘의 검희, 이실리테 경을 보아주십시오.=
=아우라만 똑같은 년을 검희랍시고 데려오면 내가 모를 줄 알고!? 네놈도 눈알이 제대로 박혀있다면 저놈을 봐라! 이 프라버의 영주인 내게 보내는 모욕적인 시선을! 날 영주가 아닌 시정잡배로 보고 있지 않으냐!!=
오해였다. 환인에게 백중익은 길 가다 마주치는 개미나 잠자리와 다를 바 없는 인물이다.
죽든 살든 관심이 없는데 거치적거리는 불량배 보듯이 할 리가 없지 않나.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뜻.
=아버님…….=
=에에이! 듣기 싫다! 꼴도 보기 싫으니 사기꾼과 썩 사라져!!=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백중강이 다시 설득을 시도하려 할 때, 환인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
“이래서는 치료할 수 없습니다.”
=아니, 아닙니다. 잠시만 시간을 주십시오. 아버님을 꼭 설득하겠습니다.=
“지금 평온의 파동을 보여드려도 영주님의 현 상태에서는 사기꾼의 눈속임이라 무시하실 겁니다. 그리고 평온의 파동이라 하더라도 마음을 닫은 사람에게는 효과가 없습니다. 저렇게 거부감을 내비치시면 백 번을 쓰더라도 무의미하겠지요.”
평온의 파동 사용법을 알게 된 이후 줄곧 써오며 일부 사람에게 평온의 파동이 효과를 받지 못하는 것을 목격했다.
놀람이 너무 극에 달해 평온의 파동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이들, 파르히스트의 감옥 미궁에서 만난 풋내기 모험가들이나 극도의 흥분상태에 빠져 적과 아군을 분간하지 못하고 무작정 공격만 퍼붓던 산란못 미궁의 일부 이형종들.
재앙화된 혼재가 내뿜는 영적인 격류에도 힘을 쓰지 못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저렇게나 영혼사를 거부하고 의심하고 있으면 효과가 거의 없겠지.
백중강은 환인이 치료를 포기하시려는 건가 싶어 당황했다.
아버님의 광증도 광증이지만, 성술사의 치료도 사이비라며 거부하고 있고 음식에 독이 있을까 식사도 거의 하지 않고 있으시다.
이러다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아무리 자신이 차기 영주라지만 정식으로 양위 받은 게 아니면 정통성에 흠집이 생기는 데다 지금 이 상황에 이양 절차와 즉위식을 치르는 것도 불가능하다.
정식으로 영주의 자리에 오르지 않는다면 세간의 시선은 물론이고 명령과 지휘 체계를 휘어잡는 데 문제가 발생하며 자칫 군부 쪽의 동생들이 쿠데타를 모의할 여지를 줄 수도 있는 데다…….
아무튼 치료 거부만큼은 막아야 한다.
=죄송합니다, 성자님. 제가 반드시 아버님을 설득할 테니……!=
“치료를 포기하겠다는 뜻이 아니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신 지금부터 영주님을 억지로 재우려 하니 그 점을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
당황이 드러나는 백중강의 눈빛. 불신을 넘어 증오까지 나타나기 시작하는 백중익의 눈빛. 이걸 어떻게 해결하려 할까 궁금해하는 세 여동생과, 그 여동생들과 비슷한 눈빛의 백치령.
=중강 공자님. 아무래도 영주님의 옥체에 손을 대시는 것은 좀…….=
=녹색 성자님께 밤까지 기다려 달라하시면 아니 될는지요.=
환인은 기다리라 하는 늙은 왜가리 머리의 문관을 차가운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영주님의 시간과 안위는 중요하고 제 시간과 일정은 고려할 가치도 없다는 말입니까.”
=예, 예?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아니면 고작 영혼사 나부랭이 주제에 비단 융단 위에 뻣뻣하게 서 있는 것이 불쾌하기라도 하다는 말입니까.”
=그, 그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전투와 죽음, 경이로운 경험을 겪으며 살기가 기백과 위압으로 변해가는 환인의 기세에 늙은 왜가리 문관이 벌벌 떨면서 허리를 숙인다.
환인은 눈빛만으로 꿰뚫어 죽일 것처럼 노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문명인은 무례한 말을 해도 머리가 쪼개지지 않기에 야만인보다 무례하다고 합니다. 당신은 말 한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는 격언을 기억해두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죄, 죄송했습니다…….=
환인이 말 몇 마디로 영주성의 고관의 주둥이를 닥치게 만들고 주변 문관들마저 입을 봉해버렸을 때, 환인을 향한 백중익의 태도가 돌변했다.
=큭큭큭큭. 그래, 무례한 소리를 지껄이다간 머리통이 빠개질 수도 있단 걸 알아야지. 크카카카.=
“…….”
=죽은 자의 안녕을 위해야 한다느니, 영혼의 안식을 위해 정온을 지켜야 하고 정갈하고 순결해야 죽어 신의 정원에 들 수 있다느니, 꼴같잖은 위선을 떠는 영혼사들보다 네놈이 훨씬 낫구먼 그래. 크크크…….=
“됐으니 치료를 시작하겠습니다.”
=치료는 무슨! 나는 멀쩡하니 이대로 내버려 둬라!=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처럼 버럭, 역정을 내는 백중익에게 백중강이 나서려는 것을 제지한 환인은 영주에게 걸어가며 담담하게 말했다.
“저는 당신의 신하가 아닙니다. 당신의 도시에 사는 시민도 아니고 라드세아의 국민조차 아니니 당신의 말을 들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 환인을 영주의 호위 기사들이 막으려 했지만, 백중강이 뒤에서 사나운 눈빛으로 막는다.
환인이 옥좌 아래 단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하자 백중익이 상처 입은 짐승처럼 으르릉거렸다.
=그건 맞는 말이지. 하지만 나는 프라버의 영주다! 감히 이 몸에 손을 대겠다는 거냐?!=
“손은 안 대고 치료할 테니 고함 그만 지르십시오. 작게 말해도 다 들립니다.”
=뭬야?!=
“자꾸 악을 쓰면 때려눕혀서라도 강제로 치료하겠습니다.”
=날 때리겠다고?! 프라버의 영주인 이 나를!?=
회랑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고성. 무직자인데다 병에 들었음에도 패기가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환인은 개가 짖는 것처럼 무심한 유리알 같은 눈으로 백중익을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 명령에 이 도시에서 죄없이 죽은 사람이 몇 명인지 알고 있습니까. 수천 명입니다. 그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보지도,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고 냄새를 맡을 수도, 만질 수도 없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마당에 고작 몇 대 맞는 것이 그렇게 분노할 일입니까.”
=…….=
“제가 당신을 치료하는 것은 당신이 훌륭하고 위대해서가 아닙니다. 당신이 이대로 죽어버리면 그 이상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갈 테니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지요. 알아들었다면 입 다물고 평온의 파동이나 받으십시오.”
=…안 받겠다면?=
옥좌의 앞까지 올라온 환인이 무표정으로 주먹을 들어 보이자 백중익이 크크크크큭 가래 끓는 듯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괘씸하고 고얀 녀석이로고.=
굽히고 저자세로 나가면 역정을 내고 반대로 두려움 없이 강하게 나서면 받아들이고.
거기에 환인의 매몰찬 비판에도 ‘나는 영주다. 영주가 영민의 목숨을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뭐가 잘못이냐.’는 식의 반론을 하지 않았다.
정신병을 앓기 전이 어떤 성격이었는지 대충 짐작한 환인은 ‘어디 해볼 테면 해봐라.’ 하듯이 옥좌의 등받이에 등을 파묻고 자신을 쳐다보는 영주에게 평온의 파동을 발사했다.
자신을 중심으로 돔 형태로 퍼지는 게 아닌 전방 집중 방식.
일순간 옥좌 전체가 회백색 빛의 물결에 파묻히자 아래쪽에서 긴장하며 대기 중이던 기사들이 움찔, 하면서 나서려 했지만 백중강에게 제지당한다.
=으…….=
회백색 파동 속에서 흘러나오는 백중익의 힘 빠진 신음.
평온의 파동에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에 환인은 그대로 몸을 돌려 단 아래로 내려가 긴장하고 있는 백중강에게 말했다.
“끝났습니다. 두 시간 뒤에 다시 오겠습니다.”
일방적으로 말하고 회랑 밖으로 나가는 그와 회백색 빛무리에 파묻혀있는 옥좌를 번갈아 보던 백중강이 막내 여동생, 세이스를 불렀다.
=세이스, 성자님을 동편 호수의 방까지 모셔라. 성자님이 곧 나라고 생각하고 극진히 모셔야 할 것이다.=
=오라버니. 성자님은 제가 모시겠어요.=
단을 내려오는 백치령을 무심히 바라본 백중강은 고개를 한차례 저었다.
=너는 안된다. 세이스, 뭣하느냐.=
장남의 독촉에 입술을 깨문 장녀를 힐끔 쳐다본 막내는 유명한 영혼 기사와 함께 돌아나가는 성자를 향해 날듯이 잰걸음으로 다가갔다.
‘큰언니도 이제 끈 떨어진 연 신세겠네.’
내심 고소하다는 심경을 숨기면서.
객실로 돌아오는 길에 갈매기인지 신천옹인지 모를 날개를 등에 달고 있는 소녀는 실은 촉새가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쉬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랬습니까.”
“그러셨군요.”
“예.”
처음에는 예의상 몇 마디 받아주었지만, 한 번 질문에 대답해주면 세 개의 질문이 다시 돌아왔기에 환인은 그 뒤로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지만…….
=……했거든요? ……했는데요. ……했지만 ……해서…….=
세이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환인에게 질문의 폭격을 해댔다.
정보로서도, 관심으로서도 하등 가치도 없는 수다의 홍수.
환인이 질린 기색을 희미하게 드러내자 백려강이 미안해하며 사과한다.
「죄송해요, 환인 님. 세이스가 원래 조금 말이 많아요…….」
이건 조금이 아닌데.
이런 수다로 상대의 혼을 빼서 정보를 캐내려는 수법이 아닐까 의심했을 정도였다. 조금일 리 없지 않은가.
그러다 객실에 도착하자 세이스가 환한 얼굴로 기대감을 드러내며 물었다.
=앗, 성자님 저도 들어가도 될까요? 성자님의 동료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도 많은데—.=
“안됩니다.”
환인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매몰차게 거절하며 그녀가 보는 앞에서 문을 닫아버렸다.
세이스도 영주의 자녀인 만큼 고급 정보를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궁금해할 법한 정보는 세이스가 아니라 백중강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다.
저런 쓸데없이 말만 많은 여자와 대화하는 것은 사양이다.
망토를 벗어 이실리테에게 넘겨주며 거실로 들어가자 거실에 앉아있던 안느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며 묻는다.
=오, 다녀왔구나. 어땠어?=
=으음. 백중강 공자님이 말할 때는 광증이 머릿속까지 치민 것처럼 치료를 거절했는데 주인님이 몇 마디 하니까 오히려 좋아하면서 얌전히 치료를 받았어.=
=……? 도령이 뭐라고 했는데?=
=보통 호족이라면 무례를 범했다며 엄청 화낼 정도…….=
=……???=
이실리테의 이야기만으로는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다.
미쳐서 치료를 안 받겠다고 게거품을 물다가 호족이 화낼 이야기를 했는데 오히려 좋아하면서 치료를 받았다니?
평소처럼 무심한 얼굴로 소파에 앉는 환인을 따라간 안느는 그에게서 자초지종을 듣고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했다.
=그런 사람이 있지. 자기 앞에서 주눅 들거나 복종하는 것보다 대들거나 맞서 싸우려는 당돌한 걸 좋아하는 사람.=
이실리테는 그 말대로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그때 주인님의 태도를 기꺼워할 리 없으니까.
=그리고 신기한 게 다섯 번째 아가씨부터는 이름이 옛 식이 아니더라.=
2시간 뒤에 다시 나가야 하는 걸 알고 있는 이실리테는 망토만 벗어 옷걸이에 걸어두고 스툴에 앉으며 말했고, 신분 덕분에 그 이유를 알고 있는 안느가 설명해주었다.
=그런 경우는 하나야. 고대 라드세아 작명식에 따라 지은 이름은 정실의 배에서 난 아이들이고 아닌 아이들은 첩실 태생인 거.=
=가족인데도 신분에 따라 이름에도 차별을 주는 거야……?=
=같은 호족이라고 해도 정실과 측실의 차이는 호족과 고족만큼이나 차이 나니까. 아무튼, 평온의 파동이 통했다면 며칠은 성에서 머무르겠네? 그 왜, 크라빈 마을의 아가씨들을 치료하는데도 서른 번 정도 써야 했잖아.=
“아니. 오늘 하루 2시간 간격으로 평온의 파동을 써준 뒤 내일 떠난다.”
갑옷을 입고 있는 이실리테 대신 유르파가 차와 커피를 가져와 나누어주며 묻는다.
=급하게 떠나려는 거 같은데 이유가 있는 거니?=
“영주의 상세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광기가 치료되면 반작용과 후폭풍으로 기력 감소가 찾아올 텐데……. 지금 영주의 상세를 보면 길게 버티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몰래 문양의 힘으로 강화한 영혼 시야를 펼쳤을 때 영주의 빛은 말 그대로 꺼질 듯이 희미했었다.
심각하게 얻어터진 21 집행 부대도 생명력은 찬란하게 빛난 것을 보면 강화 영혼 시야로 볼 수 있는 빛은 말 그대로 생명력.
그게 반딧불처럼 희미해졌다면 얼마 못 버틴다는 이야기다.
백려강은 아버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슬픈 표정으로 창가에 다가가 푸르게 반짝이는 알류겔 호수만 바라볼 뿐.
“…….”
=으음. 영주가 사망하면 도시는 추도 기간이라고 해서 출입을 막으니까. 자칫하면 일주일 단위로 붙잡혀있을 수도 있고… 프라버 상황이 준전시 상황이니까 그 정도까진 안 되더라도 도령 신분을 생각하면 며칠은 꼼짝없이 잡혀있게 되겠네.=
「잡혀있는 건 문제 아니잖아. 그거보다 더 큰 문제를 봐야지.」
=더 큰 문제?=
「프라버는 지금 알소프하고 다투고 있지?」
=응.=
「그 알소프가 환인이 프라버 영주성에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어쩔 거 같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영혼사는 공익과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분들이잖아. 그걸 트집 잡으려고…….=
안느의 힘없는 반박에 땅콩 반쪽을 두 손으로 잡고 오독거리며 씹어먹던 환연은 흥,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태어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너희가 보고 듣는 것보다 훨씬 많은 걸 보고 듣고 있어. 이거 알아? 지금 백중익이라는 인간의 자식 중 넷이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고 있다?」
=…….=
=…….=
「내가 보기에 알소프는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환인을 틀림없이 못마땅하게 보고 있을 거야.」
기가 막히는 이야기에 환인의 여자들은 입을 다물고 탁자만 내려다보았다.
“…….”
환연의 이야기가 들렸을 텐데도 백려강은 미동도 없이 한 폭의 그림처럼 창가에 서서 사파이어 빛 호수를 응시하고만 있다.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환인은 다리를 꼬고 앉으며 말했다.
“아무튼 그렇게 알고 있어라.”
=어, 응.=
유르파는 치료 보상을 어떻게 받을지 그 점을 확인해두고 싶었지만…….
‘자기니까 다 생각해둔 게 있을 거야.’
아니더라도 프라버로서는 환인을 절대 거스를 수 없는 처지니 환인이 떠난다고 하면 알아서 챙겨주려 들겠지.
유르파는 한결 마음 놓고 마도구 제작 장비를 거실로 가지고 나와 대규모 전투에 도움 될만한 마도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단 세 번이었다.
=성자님, 아버님께서 정신을 차리셨습니다!=
상급 영혼사 수준인 평온의 파동을 세 번 맞은 백중익이 백태 끼고 충혈된 미치광이의 눈에서 병든 보통 사람의 눈으로 돌아왔던 것.
처음 평온의 파동을 맞은 백중익은 비몽사몽 하는 얼굴로 시녀들에게 들려 침실로 직행했고, 2시간 뒤 여전히 비몽사몽 하던 백중익은 두 번째 평온의 파동을 맞고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이때 백중강은 미리 대기시켜둔 치유 술사와 회복 술사를 불러 성술을 퍼붓고 체력은 깎아 먹지 않으면서 회복력이 좋은 약과 약초를 가져와 백중익에게 투여했다.
그러나 신체에 부담을 지우지 않을 만큼 순한 약은 비싸면서 효과도 떨어지기 마련.
2시간 동안 백중익에게는 금화 세 자릿수에 달하는 치료가 쏟아졌고, 세 번째 평온의 파동을 쏘고 돌아온 환인은 30분 뒤에 백중강이 찾아와 백중익이 정신을 차렸다고 알려왔다.
=역시 성자님은 영성이신 게 틀림없으십니다. 광증마저 잠재우는 평온의 파동을 쓸 수 있는 분은 영도의 별 중에서도 세 손가락에 꼽을 정도일 테니까요!=
“그에 대한 확답은 영도에서 받을 수 있겠지요. 영주님이 정신을 차리신 것, 축하드립니다.”
=성자님의 공입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백중강의 감사 인사를 받은 환인은 영주가 자신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에 다시 이실리테와 함께 객실을 나섰다.
=자꾸만 오가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몸이 편찮아 지셨을 테니 멀쩡한 사람이 움직이는 게 당연한 일이지요.”
=…성자님도 알고 계셨군요…….=
“오래 사시길 기도할 뿐입니다. 그리고…….”
백중강이 정신을 차렸으니 내일 오전까지 2시간마다 계속 평온의 파동을 펼쳐줄 것이며, 내일 오전이 되면 도시를 떠나겠다고 하자 귀여운 아기 펭귄의 머리에 작은 상심이 스쳐 지나갔다.
=그…… 려강의 명예 회복 과정을 지켜봐주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성에서 불편함 없이 지내실 수 있도록 편의를 보여드릴테니…….=
미약하게 환인이 며칠 더 머무르길 바라며 꺼낸 말이었지만, 환인에게는 이빨도 들어가지 않았다.
“백중강 단장님이라면 약속을 잘 지켜주시리라 믿습니다.”
대신 되돌아온 것은 다섯 번째 요구사항이었다.
“크라빈 마을과 관련해 통신 수정관리부서에서 저지른 태만과 태업을 단장님이 직접 처리해주셨으면 합니다. 부서장이 사비를 털어 지원 병력을 파견해준 점은 참작해주시면 좋겠군요.”
=예. 그리하겠습니다.=
백중강은 의외로 뒤끝이 강한 환인의 면모에 긴장을 추슬러 올렸다.
크라빈 마을의 산란못 발생 사건은 일어난 지 4개월이 훌쩍 넘었다.
그때의 일을 아직도 기억하며 조직 내 최상위 계층인 자신을 통해 직접 처벌을 요구하다니.
관계자일 뿐만 아니라 현재 권력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이다.
자신이 움직이면 사람 하나둘의 목으로 끝나지 않음을 아실 텐데, 어지간히 뒤끝이 강하지 않다면 할 수 없는 요구이지 않은가.
‘치령의 일을 무마하기 위해 내가 직접 나서서 최선을 다해 진실한 태도를 보인 게 정답이었어.’
만약 평소처럼 부관들을 보내 성의를 보이려 했다면 아마 지금쯤 성자님은 프라버를 빠져나갔을 테고 며칠 뒤 헬루멘과 땅신 교단 본단에서 특사가 찾아왔겠지.
백중강은 턱 아래까지 들이 밀어진 예리한 보검이 목을 슬쩍 찌르고 나가는 것을 느끼며 속으로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긴장의 끈은 놓지 않는다.
환인이 프라버를 무사히 빠져나가 북쪽으로 올라갈 때까지 그가 긴장을 놓는 일은 없을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