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389화 (389/813)

〈 389화 〉 383 항구 도시 프라버

* * *

환인은 백중강의 마차를 타고 가기로 하고 그의 마차가 돌아오는 사이 유르파를 불러 부탁했다.

“지금부터 갈 곳이 영주성인 만큼 중요한 물건은 신중히 보관했으면 합니다. 특히 그 물건은 저나 유르파 외에는 절대 열어볼 수 없었으면 합니다만…… 방법이 있겠습니까.”

=아… ‘그곳’에서 가져온 ‘그것’ 말이지?=

“예. 이 시대와 맞지 않는 장치라 소지하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어쨌든 안 좋을 테니까요.”

=그러면……. 잠깐만.=

유르파는 주먹 세 개가 들어갈 정도의 주머니를 가져오더니 그곳에 대용량 태양광 발전기 한 세트를 넣고 환인에게 돌려주었다.

들어보니 무게가 1kg가량이다. 8kg에 가까운 발전기를 넣었는데 고작 이 정도라니. 무게 감소가 80%에 가까운 아공간 주머니인가.

“무게 감소율이 어마어마하군요.”

=응. 무게 감소를 극단적으로 올리고 공간 확장은 대폭 낮춘 거야. 그 주머니는 꽉 차서 다른 건 이제 더 못 넣어.=

그리고 그 외 노트북과 발전기 같은 전자기기 및 교체용 예비 부품이 담긴 주머니를 철제 상자에 넣고 술법을 외워 지팡이로 통­ 때린다.

지팡이가 상자와 접촉하자 상자 자체가 금색으로 한차례 번쩍이더니 철컥! 큰 소리와 함께 상자의 이음매가 완전히 사라졌다.

=이걸로 완전 밀봉이야. 자기, 여기 철판에 손바닥 좀 올려주렴.=

그녀가 시키는 대로 손바닥을 올리자 이번에는 녹색으로 한차례 빛났다가 원래 색으로 돌아간다.

=이제 자기의 손이 여기에 다시 닿지 않고 열려고 하면 내부에 부식 연기가 뿌려져 아공간 주머니를 훼손할 거고, 그렇게 되면 주머니 안의 물건은 아공간의 틈에 빠져서 영원히 못 찾게 돼.=

“처음 금빛으로 빛난 것은 상자의 경도 증가입니까.”

=응. 이음매까지 사라져서 부수는 게 아니라 찢어야 하는데 경도까지 높여놔서 이슬이 아가씨의 다중 검기가 아닌 이상 주머니가 부식되기 전에 찢어버리는 건 어려울 거야. 하나 따로 빼둔 것은 혹시 몰라 챙겨둔 거구.=

“완벽하군요. 잘했습니다.”

웃으면서 칭찬해준 환인은 포상의 의미로 그녀에게 키스해주며 엉덩이도 같이 살짝 주물러주었다.

=하읏…♥ 조, 조금 더 강하게 주물러줘도 되는 데에…….=

아무리 변태 같은 행동이라도 환인의 요구라면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유르파는 그의 가슴에 기대며 살짝 속삭였고.

=흑♥=

환인은 웃으며 두 손으로 그녀의 찹쌀떡처럼 말랑말랑한 엉덩이를 강하게 움켜쥐고 살짝 고통이 느껴질 정도로 힘을 주어 비틀었다.

아흑, 자신의 엉덩이가 밀가루 반죽처럼 주물러지며 보짓살과 엉덩이 구멍이 억지로 벌려지는 감각에 작은 교성을 지르는 유르파.

앞 구멍과 뒷구멍이 함께 벌어져 속으로 바람이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

자궁이 욱신거리고 질벽에 피가 몰리며 잔뜩 부푸는 느낌.

그것만으로 약한 절정에 다다른 유르파는 마음을 120% 충족시켜주는 포상에 허벅지를 살짝 떨었다.

덜컹, 쿵. 덜컹덜컹­

백중강과 함께 마차를 타고 프라버 영주성으로 향하는 길. 마차가 펄쩍 뛰며 허리를 통해 전달되는 충격에 환인은 속으로 눈썹을 찌푸렸다.

백중강의 마차는 화려한 외관에 반비례하는 것처럼 탑승감이 엉망이었다.

서스펜션이 도입되지 않은 마차인지 노면의 굴곡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이다.

“…….”

=…….=

마차 내부는 외부처럼 순백색 80%, 황금색 20% 비율로 꾸며져 있어 밝고 화려하면서도 포근한 느낌이었지만 탑승자는 이런 것에 무심한 환인과 마차의 주인 둘 뿐이었기에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했다.

백중강은 맞은 편에서 곧은 자세로 앉은 채 눈을 감고 있는 환인을 조심스럽게 살피다 입을 열었다.

=저… 성자님?=

“예.”

=여동생…… 려강이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여쭈어보아도 되겠습니까?=

“좋다고는 말하지 못하겠군요.”

=…….=

“그녀는 남매들과 타인이나 다름없이 데면데면한 사이였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와서 그걸 궁금해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서슴없이 날아드는 비난에 가까운 비판의 질문.

중급 도시의 차기 영주로서 이런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는 백중강이었지만, 불쾌하다거나 불만스럽다는 감정은 품지 않았다.

며칠 전 영성 하늘 고래가 로탄 산지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것은 틀림없이 눈앞의 젊은 영혼사로 인한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재 영도의 정식 인증을 받은 영성 중 최연소는 100세 평균 종족수명 값으로 보았을 때 70에 가까운 노인이나 다름없는 나이다.

그런데 눈앞의 성자는 아무리 봐줘도 20대에 불과해 보인다.

영성이 할 수 있는 일과 사회적 위치를 생각해본다면 눈앞의 남자는 차후 영도의 수장이 될 수도 있는 인물인 것이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그 아이가 죽기 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었습니다.=

백중강은 진실을 담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프라버와 알소프 간의 분쟁.

지금 이 분쟁에서 명분은 알소프 쪽이 쥐고 있었다.

10년도 전부터 결정하고 진행되어온 정략결혼을 프라버 측이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파기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지구인이 보기에 헛웃음도 나오지 않을 만큼 말이 안 되는 이유지만, 니오네브레스를 넘어 라드세아에서는 호족의 자존심과 프라이드는 어떤 상황에서든 지켜져야 하는 부류다.

정당한 사유 없이 깨어진 약혼, 그것도 결혼을 준비하던 도중에 일어난 일은 프라버를 가해자, 알소프를 피해자로 간주하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사건인 것.

그런데 만약, 그게 알소프의 계략이고 음모였다면?

=현재 프라버가 열세에 몰린 이유는 라드세아의 도시 지배자들, 특히 알류겔 호수와 인접하고 있는 도시의 호족들이 알소프 쪽에 손을 들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위성이 알소프 쪽에 있었기에 친인척 관계가 없는 곳이라면 프라버를 비판하고 있다. 그 명분에 의문을 제기할 수만 있다면 암담한 현 상황에 한 줄기 광명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열쇠는 백려강이 쥐고 있고.

=…이상입니다.=

백중강의 솔직한 대답에 환인은 자신의 맞은편에서 잘못도 없는데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백려강을 바라보았다.

복잡한 인과관계 같은 게 얽혀 손도 대지 못할 만큼 복잡한 상황은 아니다.

알소프 영주의 본심이 어떤가에 따라 조금 이야기는 바뀌겠지만, 어쨌든 이 사태의 발단은 백려강이 자신에게 반하면서 생긴 일인 것이니 그녀 처지에서는 고개를 들 수가 없는 거겠지.

환인은 잠시 생각하다가 그나마 멀쩡한 백중강과 인맥을 조금이나마 쌓기로 결정을 내렸다.

자신의 평온의 파동이 영주에게 효과가 있을지는 미뤄두고, 영주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미리 백중강에게 이야기해주어 영주와 접견 전에 이야기를 맞춰두는 것이 좋으리라 여겼기 때문.

“백중강 단장님도 예측하셨겠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침입자에 대해서는 두 가지 가설을 내릴 수 있습니다.”

어제 생각을 정리했던 내용, 침입자는 프라버와 알소프가 싸워 둘 다 망하길 기도하는 쪽에서 온 것일 가능성과 아니면 알소프가 제삼자와 손을 맞잡았을 경우를 이야기해주자 백중강의 얼굴이 짐짓 심각해진다.

=저 역시도 그쪽으로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 그 가설을 채택할만한 물증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심증도 막연한 수준이라…….=

환인은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에서 노트를 꺼내 자신이 본 부엉이 머리의 침입자 그림을 상세히 그리며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단장님은 영혼사가 영혼과 감을 통해 영혼의 과거와 기억을 볼 수 있다는 것, 아십니까.”

=예…… 상급 영혼사 분 중에서도 숙달된 분들만 가능하시다 들었습니다.=

그랬군.

“저는 그녀와 재회했을 때 그녀와 감응하며 그녀의 기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제 기준에서는 그리 좋은 상태가 아니었더군요.”

모친은 일찍이 돌아가시고 부친은 정략결혼의 도구로밖에 보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남매들이나 다른 어머니들을 통해 가족애를 느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삶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백중강 단장님이 말한 대로 그녀도 호족 자녀의 삶이 어떤지, 그리고 그러한 삶을 감내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으음.=

갑자기 무슨 이야기인 걸까. 그리고 저 책자는 뭐길래 종이가 저렇게 깨끗하고 깔끔하지? 그리고 저 길쭉한 막대기는 뭐길래 종이 위에 선이 그려지는 건가.

백중강은 환인이 쓰고 있는 도구를 신기해하다가 노트에 인상착의가 그려지고 있다는 것에 눈을 빛내고는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저와 만난 뒤로 마음가짐이 바뀌었다고 했습니다.”

=예. 이전에는 언제나 자신감 없이 바닥만 보고 다니던 여동생이었습니다만, 가출하고 돌아온 뒤에는 고개를 들고 자기 자신을 본격적으로 가꾸기 시작했습니다. 짧은 수련으로 4급 풍술사가 되었으니 자질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백중강도 몇 번 그 모습을 보고 호족으로서 올바른 자세가 되었다며 칭찬해준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런 그녀가 어느 순간 절 사모하고 있음을 깨달았다고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림을 절반쯤 완성하고 고개를 든 환인은 백려강이 몸 둘 바를 몰라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백중강에게 자신의 생전 감정을 모두 폭로 당하는 당혹스러움과, 혹시 백중강이 이 일로 자신을 비난하고 환인을 나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시선을 내린 환인은 계속 그림을 그려나가며 말했다.

“그녀는 마음고생을 심하게 앓았습니다. 그 일로 부친께 몰래 상담을 드렸는데…….”

=…저도 들었습니다. 정략결혼이 아닌, 첫째 여동생처럼 자신의 능력으로 프라버에 이바지하면 안 되겠냐는 이야기였지요.=

“그 이야기가 알소프로 흘러 들어가 분쟁의 발단이 되었다고 괴로워했습니다. 스스로 첨탑에 갇히길 자처했을 정도로.”

=…….=

“침입자는 그런 그녀의 약해진 마음을 찌르더군요.”

환인은 마저 침입자의 인상착의를 완성해 백중강에게 전해주었고, 백중강은 무거워진 눈빛으로 종이 위에 그려진 부엉이 머리의 남자를 응시하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멍청한 녀석. 걱정해도 자기 자신을 걱정할 것이지…….=

“그 침입자의 인상착의입니다. 그 정도면 단장님의 능력으로 능히 추적하실 수 있으시겠지요.”

=예. 신뢰할 수 있는 부하를 통해 은밀히 뒤를 캐내겠습니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성자님.=

“감사라면 백려강에게 하십시오. 그녀의 실추된 명예를 위해서니까요.”

환인의 겸양 없는 적나라한 발언을 들은 백중강은 새끼 펭귄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쓴웃음을 지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치기 어린 시절, 자신의 앞에서도 할 말 다 하며 마음을 터놓고 의리와 우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하고 꿈을 꿨었다.

눈앞의 성자님이라면 그런 친구 관계를 바랄 수도 있겠지만…….

‘첫인상과 첫 만남이 너무도 안 좋았어.’

환인이 통신 수정관리부서와 빚은 마찰도 알고 있고 백치령이 그의 권한을 침범한 것도 알고 있다.

프라버의 지인이라 할 수 있는 여동생은 자신들로 인해 자살한 것과 다를 바 없고 집행 부대는 그에게 큰 결례를 끼친데다 여동생도 판단을 잘못 내려 민폐를 끼쳤다.

솔직하게 고개 숙이고 사죄를 표시한 덕분에 그나마 마이너스 이미지의 일부 만회해 성에 초대하는 데 성공했지, 아니었다면…….

백중강의 머릿속에 알소프와 헬루멘, 땅신 교단이 전방위 포격을 가하는 장면이 그려졌다.

끔찍한 상상에 몰래 숨을 내뱉은 백중강은 환인이 그려준 침입자의 인상착의를 챙겨 품 안에 집어넣으며 생각했다.

‘이 이상 바라는 것은 무리야.’

성자님의 요구 사항을 보면 자신이 제안한 보상은 그야말로 아슬아슬했다는 느낌이었다.

보물창고 개방과 안에서 2개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준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재량권을 넘어가는 행동이었다. 프라버 가문이 개인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보상인 거다.

그런데도 성자님은 몇 가지 요구 사항을 더 붙였다. 그 뜻은…….

‘물질적인 보상은 성자님에게 중요하지 않은 거겠지.’

아깝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보상까지 내놓았기에 성자님이 제안을 들어줄 마음을 굳힐 수 있었을 테니까.

거기다 내 마음을 충족시켜보라는 까다롭기 짝이 없는 요구 사항도 아니고 정확하고 목표가 있는 요구 사항이었다.

그걸 들어주는 것으로 헬루멘과 땅신 교단의 개입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이니 프라버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는 일.

요구 사항도 사심이나 사리사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환인이 백중강에게 요구한 것 중 첫 번째는 도시에 퍼진 백려강의 오명을 벗길 것.

현재 도시에서 백려강의 이미지는 최악이었다. 호족 가문의 차녀로 태어나 온갖 부귀영화는 다 누려놓고 정략결혼이 싫어 난장판을 만들어놓고 자살해버린 희대의 병신.

이러한 이미지를 알소프의 협잡질에서 도시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영웅으로 바꾸길 원했다.

두 번째는 백치령에게 체벌을 가할 수 있는 권한을 줄 것.

“제가 드릴 부탁 세 번째와 네 번째입니다. 이자를 추적해 얻어낸 정보를 저와 드린제 가문의 레심 경에게도 공유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레심 경을 단장님께서 개인적으로든 어떤 식으로든 후원해주시면 좋겠군요.”

여기에 두 가지가 더 추가되었지만, 환인이 해줄 수 있는 것과 두 거대한 집단의 개입을 막을 수 있는 것에 비교하면 보잘것없을 정도.

‘이래야 성자로 불릴 수 있는 건가?’

수천 장 값어치의 금화나 그만한 물질적인 배상을 요구해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게 이쪽의 입장인데 설마 금전적인 요구를 하나도 하지 않을 줄이야.

덜컹. 쿠에엣~

쿠에에.

환인과 백중강은 마차 창문 너머로 도개교가 지나는 것을 보며 침묵을 이어갔다.

푸른 호수와 매우 잘 어울리는 하얀 고성. 그곳에서도 가장 좋은 객실을 배정받은 환인 일행은 가장 먼저 객실 내부의 도청과 감시 마도구의 탐색을 시행했다.

=율이 언니, 이쪽에는 없어.=

=이쪽에도 없어요.=

“거실에도 없습니다.”

=응. 그러면 각 방에 이것들을 설치해줄래? 방 가운데에 내려놓으면 돼.=

이실리테와 안느는 유르파가 내미는 스노우볼 같은 물건을 보며 고개를 기우뚱했다.

=이건 뭔데?=

=일정 반경 내에 위상력의 작용을 차단함으로써 마도구가 발생시키는 원거리 파동을 격리해서 외부로 방출되지 못하게 만드는 마도구야. 같은 위상력 파장으로 연결된 두 마도구의 연결을 강제로 끊는—=

=그러니까 도청 같은 거 못하게 막아주는 마도구라는 거네?=

=……응.=

혹시 모를 도청과 감청에 대한 방비를 마친 일행은 이때까지 투숙했던 어떤 호텔보다 훌륭한 인테리어의 객실을 둘러보았다.

=욕실이 딸린 큰 방이 하나에 시종이 머무를 거 같은 방이 두 개하고 거실 화장실…….=

=주방이 없네요.=

=식사는 영주성의 총 주방에서 운반해주나 보네. 씻는 건 주인만 씻으면 되니까 욕실도 하나뿐이고.=

=안느가 먹을 건 어떡하지…….=

=플뢰 채식 식단으로 요청하면 될 거야. 항구 도시니까 플뢰 손님도 당연히 찾아올 텐데 거기에 대비하지 않는다는 게 이상한 거니까.=

거실을 둘러보는 여자친구들의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좀체 진정하지 못하는 모습.

이럴 때면 일 이야기를 하는 데 가장 좋다.

환인은 여자친구들을 불러 마차를 타고 오며 안에서 나눴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백중강에게 받은 요청, 그리고 백중강에게 요구한 사항들.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은 안느가 고개를 기울였다.

=평온의 파동이 정신병에도 효과가 있을까?=

=산란못 미궁에서 여자들이 입은 정신적인 상처도 치료했잖아.=

=그거랑 스트레스로 미쳐버린 거랑 다르잖아. ……같나? 율이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

=정신적인 안정의 측면에서 보자면 적어도 광증을 완화해주는 정도는 될 거라고 봐. 그보다 내 걱정은 백치령이 뭔가 일을 저지르는 건 아닐까 싶은 건데…….=

평온의 파동이 통하지 않았을 때 시비를 건다던가, 하는 이야기에 환인이 안심하라고 손을 잡아주었다.

“효과가 없을 수도 있다고 경고해주었고 그러면 사례도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무엇보다 백중강은 그렇게 어리숙하고 멍청해 보이지 않았다. 백치령이 그럴 상황을 예견하고 미리 손을 써두었을 테니 신경 쓸 것 없다고 하자 유르파의 안색이 한층 밝아진다.

잠깐 생각해본 환인은 이실리테가 까주는 파란 바나나를 냠냠 먹고 있는 환연에게 말했다.

“환연, 너는 당분간 유르파에게 붙어있어라. 그리고 안느, 유르파, 환연 셋은 무슨 일이 있어도 떨어지지 말고 같이 다니도록.”

「응? 왜? 싸움이 벌어질까봐?」

“만약의 경우다.”

=네.= =응.=

“그리고 이실리테 너는 나와 상시 붙어 다닌다. 혹시라도 문제가 불거져 떨어지거나 헤어지게 된다면 헬루멘으로 돌아가 시하에게 몸을 의탁해라. 혹시 헬루멘으로 갈 여력이 되지 않는다면 안전한 곳으로 피한 뒤 헬루멘으로 연락을 넣도록 하고.”

다양한 방면으로 능력이 있는 유르파와 공/방이 조화로운 안느, 거기에 공격 특화인 환연의 파티. 여러 방면으로 능력과 지식, 생존 기술이 있는 자신과 공격 특화인 이실리테.

이렇게 나누어두면 어지간한 상황은 전부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환인은 백중익의 광증 치료를 위해 떠난 백중강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6시간 뒤.

오전에는 잠깐 눈도 붙이며 푹 쉬고, 훌륭한 퀄리티의 생선, 육류, 채식 및 과일로 이루어진 식단으로 점심을 해결해 피로와 체력을 모두 회복했을 때 백중강이 다소 지친 얼굴로 환인을 찾아왔다.

백중익의 설득에 꽤 애를 먹은 얼굴이다.

=성자님, 지금 치료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예. 호위로는 이실리테를 데려가고자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다만 무기는 보이지 않는 곳에 두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침입자가 들어왔다는 게 알려진 이후 아버님의 강박신경증이 심해져서.=

“그러겠습니다.”

=그러면 이쪽으로.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환인은 몸을 돌린 백중강을 따라가기 전, 따라오고 싶은 듯 우물쭈물하는 백려강을 손짓해서 불렀다.

백중익의 광증이 치료되는 것을 본다면 백려강의 가슴에 얹힌 마음의 짐도 조금은 가벼워지겠지.

장엄하고 엄숙한 통로를 백중강의 뒤를 따라 걸어가며 기감으로 성내 곳곳을 살피던 환인은 강한 기척은 의외로 느껴지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헬루멘의 위르트 성에는 5급 이상 직업자 수준의 기세가 곳곳에서 느껴졌었는데.’

프라버 성은 강해봤자 3급 정도. 가끔 4급과 5급으로 느껴지는 기세가 감지될 뿐이다.

대체로 기세와 강함이 비례하는 만큼 최악의 상황에서도 자신들이라면 몸을 뺄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10분 정도 걸은 환인은 높이만 5m에 달하는 화려한 문 앞에 서게 되었다.

유령처럼 몸을 띄운 채 따라온 백려강이 속삭이듯 이야기해준다.

「이 문 너머가 아버님의 알현장이예요.」

“…….”

=그럼 성자님, 들어가시지요.=

미리 연락이 있었던 듯, 오직 앞만 쳐다보며 환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있던 경비병들이 백중강의 이야기에 각자 한쪽 맡고 밀기 시작한다.

그르르릉­

무거운 소리와 함께 두께가 1m나 되는 석문이 열리며 기다란 회랑 같은 공간이 천천히 드러난다.

회색 대리석 바닥에 하얀 상아 재질 느낌의 기둥이 줄지어 늘어선 직사각형의 공간.

빨간 융단이 회랑을 가로지르며 입구에서부터 금색과 적색의 옥좌까지 펼쳐져있고, 그 옥좌에는 초췌하고 야윈 넓적부리 황새 머리의 남자가 앉아있었다.

구부정하게 앉은 자세. 핏발선 눈동자. 탁해진 동공과 억세 보이는 회색 깃털이 군데군데 빠져 볼품없어 보이지만, 의복만큼은 왕처럼 화려하기 짝이 없는 조인족.

외모에서부터 광증을 드러내고 있는 프라버의 주인이자 영주, 백중익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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