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8화 〉 382 항구 도시 프라버
* * *
환연은 밖으로 나간 지 10분도 걸리지 않아 60명의 하급 정령을 종류 가리지 않고 잔뜩 데리고 객실로 돌아왔다.
「여기 좋은 냄새 나는 인간들 많아~!」
「어?! 저기 투명한 애도 있네!」
「와와! 여기 그 인간 있어! 재밌게 놀아준다는 인간!!」
「어디 어디!?」
「진짜다!」
「놀아줘! 놀아줘!」
「휭— 날아가는 거 해줘! 휭—!」
넓은 거실이 삽시간에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가지 색으로 물들며 고막을 지나 뇌를 마구 찌르는듯한 소음이 발생한다.
마치 유치원 원아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자기 할 말만 하며 와글거리는 것처럼, 자신을 둘러싼 하급 정령들의 소란에 머리가 지끈거린 환인은 정령들을 단숨에 영혼 구슬로 바꾸어 왼팔에 안착시켰다.
그러자 뇌에 직접 떠드는 듯한 소음이 가라앉고,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 같은 것이 아스라이 이어지다 조용해진다.
“후우…….”
질색 해하는 그의 모습에 환연이 웃으면서 놀렸다.
「천하의 환인도 정령한테는 약하네.」
“정령들이 떠드는 소리는 어지간히도 익숙해지질 않는군.”
방금 그 소란이 얼마나 끔찍했는지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정령의 모습과 소리를 알 수 있는 안느가 식겁한 얼굴로 저 멀리 피신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야 그건…….」
그런 고통의 이유를 알고 있던 환연은 말하다 말고 얼버무렸다.
‘고막으로 듣는 게 아니라 영적으로 들어야 한다는 걸 알려줘도 환인은 정령 친화력이 없으니까 무의미한 조언이야.’
차라리 자신이 정령들을 조금씩 데려와서 영혼 구슬로 만들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좋지만.
‘그러면 환인의 저런 드문 모습을 더 못 보는걸.’
다음에도 부탁하면 그땐 더 많은 정령을 데리고 오리라 다짐하는 환연이었다.
환연의 작은 흉계를 눈치 못 챈 환인은 그녀에게 고생했다고 칭찬해준 뒤 창가에서 호텔 주변을 둘러본 다음 여자친구들에게 말했다.
“준비가 끝났으면 나가지.”
날이 완전히 밝았지만 프라버의 기사단이 호텔을 급습한다거나 주둔 병력이 호텔을 포위한다거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특이점이라면 호텔 총지배인이 파래진 얼굴로 웃음을 띤 채 고객의 정보를 함부로 누출한 배상금이라며 10금화에 이르는 거금을 내놓았다는 것.
=비자룩스의 녹색 성자님께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쾌감을 안겨드린 것에 저희 호프엔 호텔 일동, 머리 숙여 깊이 사죄드립니다……!=
“…슬픈 일이군요. 제 정체가 부득이 드러나지 않았다면 이러한 사과조차 하지 않았을 거란 뜻이니까요.”
=아,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펄쩍 뛰어오를 만큼 놀라는 총지배인에게 환인은 웃는 얼굴로 압박하며 몇 가지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이 요구를 받아들인다면 호프엔 호텔에 있었던 ‘나쁜 일’은 잊고 떠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어, 어떤 것입니까……?=
환인이 내놓은 요구사항은 두 가지였다.
“이 일로 인해 호텔에 종사 중인 노동자가 부당한 해고나 탄압을 받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물론입니다! 성자님께서 오시기 전과 오신 후에는 절대 고용 인력의 차이가 발생하지 않을 것임을 맹세하겠습니다!=
“그리고 낙후된 촌락과 마을의 영혼 성불행을 하는데 필요한 후원을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호프엔 호텔은 프라버에서도 손꼽히는 특급 관광호텔인 만큼 금전적으로 고통받는 유가족을 위해 선뜻 후원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물…론입니다…! 성자님의 성불행에 금전으로나마 도움을 드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10금화가 추가되어 물경 20금화에 이르는 거액의 배상금과 후원금을 갈취한 환인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는 총지배인을 뒤로하고 호텔을 빠져나왔다.
‘그러면…….’
과연 외성벽의 성문에 군대와 기사단이 진형을 전개하고 있을까.
쿠에~.
쿠우웃!
정문에서 잠시 기다리자 쿠핀과 쿠라 둘이 이끄는 마차가 오랜만에 연예인 밴과 흡사한 외형을 드러내며 가까이 다가온다.
전투를 상정해 이실리테는 쿠르티의 등에 탑승 중이었고 마차는 안느가 몰고 있다.
환인도 가까이 다가온 비상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등에 올라타려 했을 때였다.
=어? 야, 저기 봐. ……맞지?=
=헉, 진짜네. 저분이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시지?=
갑자기 길을 오가던 사람이 웅성거리며 한쪽으로 시선을 주기 시작한다.
환인과 그의 여자들도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는 쪽으로 시선을 주었고, 일행은 일단의 무리가 정확히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예식용 의장복인 화려한 스커트 차림의 아리따운 여자 서른 명이 순백과 순금색 호박 마차를 호위하며 척척척 퍼레이드를 하듯 일사불란한 동작으로 움직인다.
아침 출근을 위해 주변을 오가던 마차와 수레 등이 기겁하며 길을 비켜주느라 빚어지는 소란, 그리고 자기애 넘치는 행진에 안느가 기막혀하며 중얼거렸다.
=저 사람은 또 누구야…….=
「중강 오라버니…….」
자신의 옆에서 이제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하는 백려강을 힐끔 본 환인이 말했다.
“백려강이 백중강이라는군.”
=아, 프라버 백씨 가문 장남? 어휴, 남매가 차례대로…….=
=…그래도 차선도 잘 지키고 있고 도로 규정 속도도 준수하고 있어. 저 혼잡은 사람들이 지레 겁먹고 피하느라 생기는 소란이야.=
=그러네? …그래도 영주 장남의 행차잖아. 사람들이 놀라는 건 당연한데 좀 조용히 움직이면 안 됐나.=
=조용히 움직였다면 지금 우리도 이렇게 구경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바로 출발해버렸을 거야. 그런 의미에서라면 저 사람은 목적을 달성한 거네.=
=……설마 그걸 노리고?=
“아니겠지.”
환인의 단답형에 여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식의 머리 회전이 가능하다면 저런…… 조금 우습기 그지없는 행진보다 스마트하고 깔끔하면서 호감을 살만한 방법으로 찾아왔을 테니까.
그러나 백중강은 환인에게 다른 의미에서 관심을 끌어당기는 데 성공했다.
호족 가문의 장남, 저만한 행진이 가능하다면 높은 권력을 쥐고 있을 테고 그건 틀림없는 차기 가주 정도의 가문 내 위치일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는 게 환인의 눈에 보였다.
시민들이 기겁하고 놀라는 것은 자신들의 운전, 그리고 쿠에나 말, 기승룡이 마차 주변을 지키는 사람들과 부딪칠까 싶어 스스로 길을 피해 주는 것이다.
그 증거로 그럭저럭 간격에 여유가 있는 반대선 차로의 마차들은 크게 피하지 않는다. 인도에서는 시민들이 호기심과 귀중한 구경거리에 걸음을 멈추고 지켜보는 중이다.
=이슬아. 왠지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거 같지 않아?=
=응…. 내 눈에도 그렇게 보여. 장남은 사람이 나쁘지 않은 걸까.=
호족을 향한 시민들의 반응은 평소 호족의 태도가 어떤가에 따라 변하기 마련.
지금 사람들이 보여주는 우호적이고 호감 넘치는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이실리테와 안느의 대화를 옆에서 들은 백려강은 이유를 설명해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태여서 아쉬워하다 환인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에게 설명해주었다.
「중강 오라버니는 시민들에게 인기가 많으세요. 다른 형제, 남매들과 다르게 시찰을 자주 하며 곤란에 빠진 시민들을 돕는다거나 시민들을 위한 개발 안건을 내놓고 소통을 많이 하시거든요.」
‘가족에게는 데면데면하고 타인인 시민에게는 친절하고 자상하다는 건가.’
「네…….」
“…….”
환인은 깊어진 눈빛으로 영주의 장남이 행차하는 것을 지켜보다 근처에서 그 행차를 구경 중인 여성에게 다가가 백중강이 왜 이렇게 환호를 받는 거냐고 질문을 던졌다.
질문을 한 환인이 녹색 성자인 줄 모르는 여자는 환인의 외모에 얼굴을 붉히며 어버버 거리다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백려강의 이야기와 큰 줄기에서는 대동소이했다.
=거기다 백중강 님은 영주님을 설득해서 경계령과 계엄령을 풀어주시고 죄없이 잡혀간 사람들도 놓아주셨어요. 백중강 님이 차기 영주님이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그랬군요.”
차이점이라면 백려강의 죽음으로 발생한 영주의 폭정을 백중강이 설득으로 풀어냈다는 것.
백중강의 인기 이유를 알게 된 환인의 눈빛이 재차 깊어질 무렵 안느가 물었다.
=도령, 어떻게 해? 출발할까?=
전투를 대비 중인 이실리테 대신 마차의 고삐를 쥐고 있던 안느가 묻는다.
“아무래도 날 찾아오고 있는듯하군. 조금이지만 관심이 생기니 기다려보지.”
환인의 이야기에 안느는 일단 호텔 앞 임시 주차 구역으로 마차를 이동시켰고, 잠시 후 도착한 호박 마차 행렬이 정확하게 호텔 정문 앞에 정차한다.
그리고 복잡하고 아름다운 무늬의 마차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펭귄?’
황제펭귄의 새끼와 비슷한 두상의 조인족 남자였다.
하얗고 검은 색의 모피가 뚜렷한 경계선을 그리는 오밀조밀하고 귀여운 머리.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검은색 부리와 맑고 초롱초롱한 눈동자.
그리고 130cm는 될까 싶은 작은 키.
귀엽다고 할만한 외모의 펭귄 남자가 마차에서 내리자 주변에서 꺅 여자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귀여워~!=
=백중강 님~! 이쪽을 한 번만 봐주세요~!=
=꺄아~!=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백중강이 씩 웃으면서 손을 들어 흔들어주니 함성이 한층 더 커진다.
어딜 보나 유명세를 날리는 셀러브리티의 모습 그 자체다.
환인은 그를 태우고 온 화려한 순백순금의 호박 마차와 서른의 의장대가 임시 주차 구역으로 이동하는 것과, 호위 기사로 보이는 6급 여전사 와 5급 여자 성술사와 함께 다가오는 백중강의 차림을 빠르게 훑었다.
어디 흠 하나 없는 비싸고 화려한 마차. 그런 마차를 끄는 관리 잘 받은 티가 나는 주황색 쿠에 두 마리.
서른 명의 의장대 여자들이 입고 있는 통일된 옷차림은 주름 하나 없이 빳빳하고 반짝거린다.
백중강을 호위하고 있는 여기사들도 마찬가지다. 그녀들이 착용 중인 로브 드레스와 갑옷도 마수 가죽과 특수한 소재로 짠 듯한 고급 맞춤복에 검과 지팡이도 고가의 마도기로 보인다.
하지만 백중강은 아니다.
그냥 봐서는 화려하고 귀티 넘치는 귀족 복장이지만, 옷깃은 닳아서 수선한 흔적이 아주 희미하게 보였고 소매도 마찬가지. 소매 아래쪽에는 아주 희미한 잉크의 흔적까지 있다.
보여주기식으로 입고 온 것이 아니다. 정말로 저 복장이 생활복이다.
“…….”
우르르 다가온 의장대 서른 명이 시민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일종의 통제선을 형성하고, 그 사이로 백중강이 다가와 환인과 마주 선다.
환인은 자신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는 백중강과 시선을 마주했다.
2초 정도 시선을 교환하자 백중강이 먼저 귀족식 정중한 인사를 올린다.
=우선, 녹색 성자님께 오늘 새벽 여동생이 저지른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외모는 미성년인데 목소리는 미청년이다. 여기에서 오는 갭에 여자친구들이 당황하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백중강 님이십니까.”
=예. 프라버의 영주이신 백 중 자, 익 자를 쓰시는 분의 첫째 아들, 백중강입니다.=
“…….”
환인이 입을 다문 채 가라앉은 눈빛을 드러내자 백중강이 난처하면서도 씁쓸해하는 얼굴로 말했다.
=먼저 지난밤에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지 사정을 성자님께 설명해 드리고 싶습니다만…… 혹시 프라버를 떠날 예정이셨습니까?=
“좋은 기억이라고는 없는 눈 씻고 돌아봐도 없는 도시니까요. 일정을 앞당겨 떠나려던 참이었습니다.”
도시에 나쁜 이미지뿐이라는 대답에 일순간, 그야말로 찰나의 시간에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가 되돌린 백중강이 ‘그런 일이 있었으니 어쩔 수 없지….’하는 얼굴로 말했다.
=긴 시간을 잡지 않겠습니다. 짧게…… 1분 정도만 시간을 내어주실 수 없겠습니까? 부탁드립니다.=
“이 자리에서라도 괜찮으시다면.”
그의 인품을 확인해보기 위해 꺼낸 말이었지만 백중강은 그저 다행이라며 곧장 설명을 시작한다.
=21 집행 부대가 성자님을 급습하게 된 것은 제가 내린 지시가 계기였습니다.=
백치령은 하늘 기사단의 단장으로 프라버의 치안과 외부의 산하 마을의 관리를 맡고 있다.
그 때문에 어제 발생한 빛기둥 현상에 부친인 백중익이 광증을 일으켜 ‘저것은 알소프 첩자의 테러다.’라고 고함지르며 백중강과 백치령을 소환, 빛의 근원을 추적하란 명령을 내렸고…….
=그 빛기둥이 테러가 아닌 성자님께서 일으킨 기적이라고 확신한 저는 휘하 순찰대를 움직여 성자님의 흔적을 추적했습니다. 성자님께서 머물고 계신 곳을 찾아내면 제가 직접 방문해 성자님께 자초지종과 함께 연유를 설명해 드리려 하였지요. 그리고 해가 질 즈음 16 순찰조가 성자님께서 이곳 호프엔 호텔에 머무르시는 걸 알아냈지만…….=
“21 집행 대대가 순찰대의 보고를 중간에 속여 편취한 거군요.”
=예.=
외적 세력의 침투 방비는 창천 기사단장인 백중강의 업무이고 하늘 기사단의 단장인 백치령은 도시의 치안과 프라버에 복속된 마을의 분쟁 및 문제 해결이 본 업무.
도심 내에 펼쳐진 이상 현상과 기현상에 대한 조사 및 대처는 창천과 하늘 기사단의 업무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업무서열이 있는 만큼 원래대로라면 창천 기사단의 단장인 백중강이 이 사건을 맡아야 했다.
그러나 신경쇠약과 알소프를 향한 신경증으로 제대로 된 사고 판단이 어려워진 백중익은 백중강과 백치령을 불러 함께 명령을 내리고 말았고, 지휘권에 혼선이 생기자 21 집행 부대가 중간에 보고를 가로채버린 것.
=새벽에 여동생이 성자님께 어떤 행동을 했는지 보고를 받았습니다. 성자님께서 분노하시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요. 불합리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았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성자님께 위해를 끼치고자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은 제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
=여동생도 둘째가 죽게 된 사건으로 아버님의 큰 질책을 받은 뒤 신경질이 부쩍 늘었습니다. 강박증이라 해도 될 겁니다. 저를 향한 분노도 적지 않을 테고요. 이 소란의 원인이 성자님이라는 것도 확신하지 못했을 겁니다.=
환인은 변명에 가까운 설명을 들으며 다소곳이 옆에 서 있는 백려강에게 시선을 주었다.
‘백중강의 지금 이야기에 진실이 어느 정도입니까.’
「전부 사실이에요. 그러니까, 작년쯤부터 치령 언니가 실수를 연이어 저질러 아버님께 혼이 많이 나셨거든요. 게다가 제 죽음이 첩자와 연관되어있다고 하면 언니의 책임이 크기 때문에…… 제가 죽고 나서 기사단장직을 박탈하겠다는 말까지 나왔을 거예요.」
환인은 대충 이해했다.
결국 백치령의 그 어처구니없는 행동은 호족으로서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한 결과라는 거겠지.
크라빈 마을의 지원이 늦어진 것은 프라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커다란 사건들 때문에 상대적으로 관심을 못 받아 묻혔을 것이다.
프라버와 알소프 사이에 전쟁이 날지도 모르는데 시골구석의 마을 하나가 사라지느냐 마느냐의 일은 중요한 게 아니었겠지.
그 후 백치령이 크라빈 마을을 찾게 된 것은 하늘 기사단의 업무이기도 했을 테고, 자신이 크라빈 마을에 있다는 보고를 받아 직접 행차한 것일 터.
하지만 도착해보니 성자는 미궁의 소멸과 함께 실종되었고 한 달의 수색을 진행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은 죽었다고 여겼을 것이니 어제의 그 빛기둥 현상을 내 일과 연관 짓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유미안이 프라버에 통신 수정구로 보고를 올리지 않은 건가.’
백중강은 고개를 돌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바라보는 환인의 행동에 신경 쓰며 말을 끝맺었다.
=여동생은 제 말이면 색안경부터 쓰고 보는 터라 정보를 확보한 뒤 적당히 흘려 주려 했지만, 21 집행 부대의 과한 실적 욕심과 출세욕, 빠른 행동으로 일이 이렇게 꼬여버렸던 것입니다.=
21 집행 부대가 없었다면 지금 자신과 성자님이 마주하고 있는 이 상황은 거리가 아니라 성자님의 객실이었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불쾌한 경험을 하신 것을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1분은 진작에 지났지만, 백중강의 성의 있고 진정성 있는 설명 때문에 끝까지 들어준 환인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다 눈을 감고 한숨을 작게 내쉰 뒤 물었다.
“고작 이 정도로 크라빈 마을에서부터 겪은 제 불쾌감을 버리길 바라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염치없이 어떻게 그러길 바라겠습니까. 그저 성자님께서 일말의 자비를 베풀어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크라빈 마을에서 보고가 올라갔군. 백중강도 그 보고서를 읽었고.
“…….”
환인은 백중강이 단지 사과만 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님을 그의 눈빛에서 알아차렸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백중강의 이야기 일부.
백중익이 광증에 휩싸여있다고 했나. 그렇다면…….
“백중강 단장께서는 백려강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백중강은 여기서 이 질문을 받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잠깐 멈칫했다가 대답했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성자님께서 둘째와 인연이 있으시다고 말입니다.=
그리 말을 꺼낸 백중강은 약간 시름에 잠긴 숨을 내쉬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첩자에게 어떤 말을 들었는지 모르나, 호족이라면 어떤 일이 벌어지든 살아서 대응하고 대처해야 합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책임에서 회피한 것은 가문의 이름에 먹칠한 것과 다름없는 행동입니다.=
백중강의 이야기에 고개를 푹 숙이는 백려강.
=성자님이시니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4급 이상, 도시를 다스리는 고위 호족 가문의 집안에서 가족애란 허울 좋은 이야기일 뿐입니다. 자기 것은 자기가 스스로 쟁취해야 하는 법, 심약하고 허약하면 도태될 따름이지요.=
환인은 이 대답에서 대충 백중강이라는 남자가 어떠한 사람인지 파악했다.
업무 상대, 공적인 만남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사람이지만 가족관계에서는 소홀한 인물.
흔히 가정보다 회사가 우선이라고 하는 타입이다.
백중강이 진지하게 묻는다.
=성자님께서는 호족 가문의 자제로 태어난 자의 의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문의, 가문에 의한, 가문을 위한 삶이겠지요.”
게티스버그의 유명한 문구를 차용한 대답에 백중강의 똘망똘망한 두 눈이 크게 떠졌다.
=혹시 성자님도 고귀한 신분이십니까?=
“머나먼 조상을 보자면 왕의 핏줄이긴 합니다.”
=아아……. 알고 계시니 제가 굳이 말씀을 드리지 않아도 아시겠습니다.=
그리 말하는 백중강의 얼굴에 크나큰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백려강이 살아있었다면, 살아서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거겠지.
=그런데 혹시…… 성자님께서 굳이 그 아이의 이야기를 물으신 것에서 추측입니다만, 성자님의 곁에 그 아이가 있습니까?=
주어진 조건에서 정보를 유추는 능력이 없지는 않군.
“예. 그녀는 저를 따르길 바라고 있으며 저 또한 그녀와의 인연이라 생각해 그녀가 스스로 신님의 정원에 들기 전까지는 제가 책임질 생각입니다.”
「아……」
=어…….=
백중강의 두 눈에 의문과 의혹이 들어찬다.
영혼사이니까 영혼과 대화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겠지. 영성으로 추측되는 인물이니만큼 일반 영혼사가 보지 못한 영혼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가 백려강과 만났다고 해도 이상한 것은 없다.
하지만 백려강을 데려간다는 대목에서 백중강은 일말의 의구심을 느꼈다.
혹시 백려강의 영혼으로 뭔가를 하려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
환인은 그러한 의구심을 단칼에 자르고 들어갔다.
“제 파티는 평범하지 않습니다. 차후에는 그녀 또한 제 일행으로서 이실리테나 안느처럼 이름을 떨치게 되겠지요. 어쩌면 진정한 의미에서 영혼 기사가 될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제, 제가요?」
=예? 그, 그 아이는 죽어 영혼이 되었는데 어찌…….=
남매의 당혹스러워하는 반응에 환인은 그들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대답을 간단히 내놓았다.
“세간의 잣대로 저를 판단하지 마십시오. 제가 어제 어떤 일을 했는지 벌써 잊으셨습니까.”
「……!」
=……!=
“또한 제가 지금 이런 말을 하는 이유도 기억해두셔야 할 것입니다.”
백려강은 너희가 죽게 했다. 너희는 가족으로서 자격도 없으니 차후 백려강이 유명해지더라도 숟가락 얹을 생각 따윈 절대 하지 말라는 단호한 의사 표시.
그 뜻을 읽은 백중강은 의문과 혼란을 떨쳐낸 모습으로 대답했다.
=유념하겠습니다.=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
자, 내가 할 말은 끝이다. 이제 네 본론을 꺼내 봐라.
환인이 신호를 보내자 백중강이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를 꺼낸다.
=구차한 서론은 싫어하시는듯하니 바로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자님, 성자님께서는 크라빈 마을을 구해내시고 마을의 처자들도 구출한 뒤 그녀들의 정신까지 치료하셨다 들었습니다.=
“…….”
=짐승신님의 존함에 맹세코 제 목숨을 걸어 성자님의 안전을 보장해드리겠습니다. 부디 평온의 파동으로 아버님의 광증을 치료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사례로 차기 가주의 권한으로, 가문의 보고에서 원하시는 것을 두 가지 선택할 권리를 드리겠습니다.=
‘역시 이게 본래 목적이었군.’
신의 이름으로 맹세했으니 진정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신의 이름으로 한 맹세를 어겼다간 짐승신 교단의 무시무시한 추적과 보복을 받을테니까.
환인은 눈을 감고 2분 정도 생각을 이어간 끝에…….
“몇 가지 조건을 수용해주신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
부분적인 승낙의 뜻을 비추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