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7화 〉 381 항구 도시 프라버
* * *
그의 여자들은 물론이고 반쯤 스크럼을 짜서 환인 일행을 막고 있던 직원들도 의아하단 눈으로 환인의 행동을 지켜본다.
=도령? …앗.=
=끄악!=
=으어억…….=
=흐컥! 끄어어….=
그리고 짐수레를 덮어놓은 천막을 치우고 사지가 부러진 21 집행 부대 일곱 명을 집행청 앞에 하나씩 내던지는 모습에 직원들은 말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
허름한 짐수레에 뭐가 실려있었나 했더니, 집행 부대였어?!
집행청 창문을 통해 이쪽을 몰래 구경하던 사람들과 입구를 지키던 경비들 사이에서 경악성이 튀어나오는 가운데 환인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담담하게 소리 높여 말했다.
“아무래도 프라버의 영주는 저와 제 기사들이 탐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영혼사로서의 제 권한과 권리를 침범하고도 이 자들을 머무는 숙소로 보내 강제 찍어누르며 강제 압송하려 들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헉…….=
=…???=
=이, 이게 무슨 이야기지? 집행 부대가 왜 성자님을……?=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기다려준 환인은 정문 뒤쪽에 있다는 호족이 좀 더 정확히 들을 수 있도록 복식호흡으로 목소리를 좀 더 키웠다.
“이에 대한 항의는 제 영혼 기사의 정식 후원자이신 헬루멘의 시하 사이지 위르트 영주님과 땅신 교단의 르아웬 아기오시스 추기경님을 통해 정식으로 항의할 것이며, 저 또한 영도에서 프라버가 저에게 한 행위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증언하겠습니다.”
쿵.
이 상황을 지켜본 사람들은 심장에 바위가 떨어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적게나마 프라버가 돌아가는 상황을 알고 있는 이들이다.
그렇기에 환인이 한 말의 심각성을 알 수 있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프라버의 앞날은 말 그대로 먹구름이 낀 상태를 넘어 폭풍에 휩쓸린 것과 다를 바 없어진다.
알소프가 프라버를 집어삼키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헬루멘과 니오네브레스 사대 교단 중 한 곳도 끼어들어 프라버를 압박해온다?
녹색 성자가 프라버에 비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게 알려지고 성자가 알소프의 편만 들어도 프라버의 미래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을 만큼 심연의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질 텐데……!
“지금 이야기를 이 자리에 있는 당신들 중 아무나 윗사람에게 보고해주면 고맙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환인은 쿠라가 등에 짊어지고 있는 짐수레의 멍에를 풀어주고 약간 당황하고 있는 여자친구들에게 말했다.
“돌아간다. 날이 밝아오고 있으니 바로 프라버를 뜨면 되겠군.”
그리고 비상의 등에 올라타 몸을 돌렸을 때, 대리석 건물 정문을 통해 여자 하나와 남자 둘이 걸어 나왔다.
그중 4급 엽사 계통 여자 쪽은 화려한 적색금색청색의 깃털 날개와 은은한 녹색의 머리카락을 지닌 무지개 앵무 계통의 조인족이었는데, 외모가 백려강과 닮은 점이 많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백려강이 그녀를 보며 안타까워한다.
「치령 언니…….」
‘저 여자가 백치령인가.’
백치령. 하늘 기사단의 기사단장이자 크라빈 마을에서 자신의 권한을 침범해 월권을 행사한 여자.
그 여자가 조금 굳은 얼굴로 나서며 사과한다. 그런데 그 사과가 가관이다.
=아무래도 오래 기다리게 했던 것 같군. 좀 더 일찍 나오지 못해 미안하오.=
“…….”
환인은 백치령을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무시하고 비상을 재촉해 걸음을 옮겼다.
그 행동에 당황한 것은 백치령이었다.
자신이 나왔으니 다시 돌아와 이야기를 이어가야지, 무시하고 그대로 간다고?
이것이 신경전의 일환인가 의심했던 백치령은 곧 그게 아님을 깨달았다.
저 남자는 정말로 자신과 대화를 거절하고 가려 하는 것이다.
당혹과 분노를 느낀 백치령이 소리쳤다.
=잠깐!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지?! 본인이 나왔음에도 무시하다니, 예의를 익힌 자가 할 행동이 아니지 않나!=
그 고함에 잠깐 비상을 세운 환인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
“어쭙잖은 기 싸움으로 대화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상대를 기만하려는 자와 나눌 이야기는 없습니다. 용무가 있다면 나중에 따로 찾아오시길.”
=……!=
돌아온 대답에 백치령은 속으로 당황했다. 일부러 기다리게 했다는 걸 알고 있다고? 그 목적도 눈치채고 있었고?
저 행동과 대응은 정치를 모르는 인간이 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쪽과 저쪽의 입장 차이를 확실하게 인지하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반응.
백치령은 정치와 협잡에 무식한 영혼사라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땅에 널브러진 집행 부대, 독단으로 행동해 영혼사에게 당위성을 준 머저리들을 노려본 백치령은 으득, 어금니를 깨물고 치욕을 억누르며 소리쳤다.
=오해라고 하고 싶지만! 그리 말해보았자 심기가 상한 그대의 마음은 돌리지 못하겠지! 사과드리겠소!=
“…….”
=본인은 대 프라버의 영주이시자 이 땅의 지배자이신 백중익 6급 호족의 장녀, 하늘 기사단을 이끄는 백치령이라하오! 녹색 성자께서는 부디 노여움을 풀고 대화에 응해주시길 바라오!!=
교묘하다.
일부러 기다리게 해 기선을 제압하고 심리적으로 흔들려 했다는 사실과 이쪽을 잠시 기다리는 것도 참지 못할 만큼 옹졸한 사람으로 만드는 화법.
하지만 사회의 정점에 있는 호족, 그것도 영주 가문의 자녀가 하는 사과여서인지 모두가 백치령의 사과에 놀라기만 한다.
놀란 것은 이실리테와 안느도 마찬가지였다. 영주의 딸이 공개적으로 사과했다는 이유가 아니다. 그와 오랜 시간 살을 섞어온 덕분에 여자의 섬세한 특유의 감성으로 환인의 심기가 매우 상했다는 것을 읽은 것이다.
주인님/도령/자기가 이 정도로 화를 내는 건 처음 보는 거 같은데 어떡하지?
이쪽이 힘을 써서 본때를 보여주자는 것은 찬성했지만, 일반 병력과 푸닥거리를 하는 거와 영주 혈족 직계와 얼굴을 붉히는 일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하나의 도시를 지배하는 호족 가문은 언터처블이나 마찬가지. 프라버와 알소프 간의 현재진행형인 다툼의 발단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그걸 모를 그가 아니고 그가 화를 낸다면 이유가 있어서 화를 내는 걸 테니…….
분위기가 험악해져 가고 있음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느꼈을 때, 백치령의 뒤에 서 있던 5급의 뱀잡이수리 머리 조인족 남자가 하얗고 까만 날개를 펼쳐 우아하게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환인의 앞에 내려서며 중저음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자님, 부디 노여움을 푸시고 주인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야기를 듣는다면 이럴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못 믿겠습니다.”
환인의 즉답에 주변이 급격히 얼어붙으며 소름 끼치는 침묵이 밀려왔다.
다들 숨을 죽이고 길거리에 울려 퍼지는 환인의 스산한 목소리에 집중한다.
“그녀는 내게서 신뢰를 두 번이나 잃었습니다. 프라버의 행정 또한 내게 실망을 주었으며 저 무뢰배들이 객실을 찾아와 나의 기사들과 내게 오랏줄을 내밀며 포승을 받으라 했을 때 나와 프라버 사이의 믿음에는 심각한 균열이 발생했습니다.”
=…….=
“방금 총 20분의 대기 시간은 나와 그대의 주인 사이의 관계를 호전시킬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그러한 기회를 고작 기선제압과 신경전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날려버리고서는 나와서 하는 말이 이쪽의 옹졸함을 부각하는 화법이군요.”
그리모암의 완륜에 하급 정령 강령, 파르히스트 우승 상품인 신체 강화 목걸이의 힘까지 끌어 올린다.
일순간 거인과 같은 힘이 환인의 몸을 몰아치고, 환인은 그 힘으로 흑창을 꺼내 바닥을 내려찍었다.
쾅!!
굉음과 함께 찍힌 지점을 중심으로 거미줄 같은 금이 쫙 간다.
“이러한 마당에 귀를 기울이란 말이 나옵니까. 이해할 수 있을 거라 말하는 겁니까.”
뱀잡이수리 머리의 남자, 백치령의 부관은 흡사 미궁의 이형종이 내뿜는 듯한 살기의 격류에 자신도 모르게 허리춤의 검을 뽑을 뻔했다.
하지만 금색으로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에 일순 몸이 굳어 검을 뽑는 추태는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깃털 밑으로 식은땀이 흐르는 가운데 그의 귓가를 차가운 목소리가 파고든다.
“이 자리에서 무례한 자들과 나눌 이야기는 없습니다. 비키십시오. 비키지 않는다면 당신은 주인을 대신해 개죽음당할 뿐이라는 걸 경고하겠습니다.”
움직이기 시작한 환인. 그 앞에서 움직이지 않는 부관.
일촉즉발의 상황에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백치령이었다.
줄곧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백치령은 이대로 뒀다간 사달이 벌어져도 큰 사달이 벌어진다는 걸 깨달은 것.
으득, 주사관을 살기 어린 시선으로 노려보아 바깥을 구경 중인 직원을 모조리 치운 백치령은 적색청색금색의 아름다운 날개를 펼쳐 날아올라 부관의 옆에 사뿐, 내려선다.
흑창을 쥔 환인은 무표정으로 백치령을 응시했고 부관은 긴장감을 몸에 두르며 백치령의 옆에 붙는다.
이실리테와 안느도 각자 아공간 속에 손을 넣어 무기를 움켜쥐면서 환인의 뒤에 바짝 붙었다.
환인의 서슬 퍼런 눈빛을 받아내던 백치령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처음 기선제압의 의도로 성자 공을 기다리게 한 것은 시인하겠소. 허나 그 후의 일은 맹세하건대 의도하지 않은 일이오.=
“…….”
=약간의 틈만 보여도 물어뜯는 정치판에 몸을 담그고 있다 보니 되어버린 버릇이라 변명하겠소. 어리석은 여자라 욕해도 좋소. 그것이 사실이니.=
환인은 부관의 뚫어질 듯한 시선을 무시하며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어가는 백치령의 뒤통수를 주시했다.
=그리고 사죄하겠소. 이야기가 끝난 뒤 무릎 꿇고 머리도 조아리지. 그러니 모쪼록 시간을 내어 본인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간곡히 부탁드리오.=
“…….”
=…….=
=…….=
환인이 말을 하지 않으니 침묵이 이어진다. 백치령의 부관은 계속 허리를 숙이고 있는 백치령을 보곤 음울한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성자님이 하신 말씀대로라며는 알소프란 적을 두고 있는 현 프라버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될 겁니다. 프라버 50만 시민의 터전이 망가지며 수많은 사람이 죽어갈 겁니다. 그들의 딱한 사정을 불쌍히 여신다면 기회를…….=
“그 상황이 찾아온다면 망하는 것은 프라버가 아닌 백씨 가문과 그를 따르는 호족 및 고족 가문이겠지요. 프라버는 알소프에 병합되어 하위 도시가 될 것이며 시민은 그저 머리 위에 앉아있는 주인만 바뀔 뿐. 무엇보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걱정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웃기지도 않는 신파극은 짜증을 돋울 뿐이니 집어치우면 좋겠습니다.”
=…….=
적의와 살기가 풀풀 풍기는 정론을 찌르는 대답에 부관은 고개를 숙였고 백치령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백중강과 백중익을 속으로 물어뜯었다.
두 명의 심정을 드러나는 분위기로 읽은 환인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나름 합리적인 방법으로 매듭을 지어볼까요. 이실리테.”
=네, 주인님.=
환인은 자신의 의도를 읽고 옆에 서는 이실리테를 가리키며 부관에게 말했다.
“그녀는 제 첫 번째 영혼 기사입니다. 기회를 바란다면 그녀와 싸워 이기십시오. 그러면 기회를 주겠습니다.”
=서, 성자 공. 그녀는 검희…….=
=하겠습니다.=
부관은 다부진 얼굴로 백치령의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자존심에 상처가 나 표정이 흐려진 주인에게 말했다.
=맡겨주십시오.=
=……그래.=
환인은 그 촌극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이실리테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실리테는 담담한 얼굴로 개량되어 그 성능을 산란못 미궁에서 여실히 증명한 레드릭 얼터를 꺼내 들었다.
각자의 주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행에서 떨어진 이실리테와 부관이 서로를 마주 보며 통성명을 나눈다.
=하늘 기사단의 단장이신 백치령 님의 필두 호위 보좌관, 이윈 자밍입니다. 5급 창검사입니다.=
=이실리테, 비자룩스의 녹색 성자이신 주인님의 첫 번째 기사입니다.=
=…한 수 배우겠습니다.=
직업을 말할 수준조차 안 된다는 건가. 이윈=자밍은 바람의 5급 위상석을 박아넣은 애창을 꺼내 움켜쥐며 온몸에 위상력을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이실리테는 무표정으로 응시한다.
도로에서 급히 이루어진 단기 대결.
당사자 외 관전자도 없으며 심판도 없었지만, 어느 결투에서도 보기 힘든 엄숙한 분위기가 두 사람을 뒤덮었고.
채재쟁, 서걱
=크억……!=
이윈=자밍은 간격을 젤 틈도 없이 세 번 무기를 부딪친 직후 오른쪽 어깨와 날개를 크게 베이며 전투력을 상실했다.
다중 검기조차 소환하지 않고 오직 검술로만 창을 쳐내고 자세를 무너트려 무력을 상실시키는 기술.
기량의 차이가 이렇게나 났단 말인가.
희귀 직업이라지만 5급이라고 들었기에 같은 5급이니 어느 정도 분투를 다짐했던 이윈=자밍은 참담한 심정에 피가 흥건한 상처를 지혈할 생각도 못 하고 무릎을 꿇었다.
서서히 도시를 비추기 시작하는 아침 햇살을 정면으로 받는 검희를 올려다보던 이윈=자밍은 고개를 푹, 떨궜고.
“…….”
환인은 넋이 나간 듯한 백치령과 큰 상처를 입은 이윈=자밍을 두고 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객실로 돌아온 환인은 여자친구들에게 즉시 일 대 다수의 전투를 상정한 준비를 하라 지시했고, 환연에게는 주변을 둘러보며 하급 정령을 있는 대로 데려와달라고 부탁했다.
「하급 정령을?」
“어제 평온의 빛기둥을 펼치는 바람에 영혼 구슬이 모두 증발했다. 오가면서 모으긴 했지만 아직 서른도 채우지 못했지. 최소 50은 더 있어야 한다.”
「알았어. 금방 다녀올게.」
환연의 정령 감응 범위가 반경 500m라지만 하급 정령의 분포는 그보다 더 띄엄띄엄하다.
50이 넘는 하급 정령을 모으려면 도시 전체를 돌아야겠지.
잠시 후 완벽한 전투 준비를 끝마치고 회색 후드 망토로 몸을 가린 안느가 객실의 짐을 챙기며 옆에서 짐을 확인 중인 이실리테와 유르파에게 물었다.
=백치령 그 아가씨가 정말 기사단을 끌고 올까? 호족 영애니까 영혼사를 공격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대충 알 텐데 말이야.=
=요점은 영혼사를 공격하지만 않으면 된다는 거잖아. 저런 호족이라면 도시 안에서는 주인님 말고 우리만 공격할지도 모르고, 도시 밖이라면 모두 죽여서 묻어버릴 생각도 할 거 같아.=
「…….」
이실리테의 이야기에 환인밖에 보지 못하는 영혼 상태의 백려강이 슬퍼하듯 눈꼬리를 늘어트린다.
=나도 안느 아가씨 의견에 동감이야. 호족들은 의외로 힘의 격차에 민감해. 우리 자기의 배경에 뭐가 있는지 아까 깨달았을 테니까 그 아가씨라면…… 막무가내로 공격해올 것 같지는 않은걸.=
=하지만 주인님은 전투를 준비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렇지…….=
=그러게…….=
여자친구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환인은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전투는 공격받을 때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 우리가 도시를 떠나지 못하게 봉쇄한다는 가정도 있으니까. 그걸 뚫고 나가려면 싸움은 필수지.”
=아.=
=음…….=
“아무튼, 환연이 하급 정령들을 데리고 오면 영혼 구슬로 만든 뒤 바로 떠난다. 백려강은 멀리서 지켜보다 전투가 벌어지면 수백 미터는 떨어져라.”
「네? 어째서인가요?」
“넌 영체 상태이기에 평온의 파동에 강한 영향을 받는다. 자아의 유지 측면에서 보자면 평온의 파동이 좋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환인 님은 제가 밉고 귀찮지 않으신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제 가문이 환인 님을 귀찮게 하고 있으니까요…….」
“널 받아들이기 전부터 프라버는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리고 네가 귀찮았다면 보자마자 성불시켰지.”
「후후…. 그건 그러네요. 악의를 보인 피가죽 클랜을 용서 없이 처단한 분이시니까요.」
환인이 눈에 안 보이는 백려강에게 하는 말을 들은 유르파와 안느가 속닥거렸다.
=려강 아가씨 처지에서 성불은 나쁘지 않은 일 아닌가?=
=연이는 려강이가 우리 도령한테 미련이 많다고 했어. 가족도 갖고 싶다던가? 사랑하는 님까지 만난 마당에 바로 성불하고 싶진 않을 거야.=
=그건 그러겠네.=
으음, 작게 신음을 흘린 유르파가 못내 복잡한 심사로 중얼거린다.
=고귀한 집안의 아가씨가 영혼이 되어서도 자기를 따라다닌다고 하니까 뭔가 기분이 묘하네.=
=나도. 눈에 계속 보이면 챙겨주면서 친해져 보려 할 텐데 아예 보이질 않으니까.=
=안느 아가씬 려강 아가씨가 마음에 드니?=
=어? 언니는 싫어? 려강이는 도령을 보호하려고 목숨까지 버렸잖아. 난 그 이야기 듣자마자 엄청 마음에 들었는데.=
=아? 아아! 나도 그래! 응응.=
=게다가 아직 어린 나이에 죽었잖아. 이번 일도 따지고 보면 려강이한테 아무 잘못도 없고. 미워하지 말아.=
=안 그래~. 그냥 다른 일 생각하느라 려강 아가씨 일은 잠깐 잊고 있었던 거뿐이니까. 그도 그럴 게 안느 아가씨 말대로 눈에 안 보이니까 신경 쓸래야 쓸 수가 없잖아?=
두 여자친구의 속삭임을 듣고 있던 환인은 처연한 분위기로 옆에 서서 영주성을 바라보는 백려강에게 시선을 주었다.
죽어서 몸까지 잃은 상태로 어디까지, 언제까지 자신을 따라올까.
사실 환인 입장에서 자신을 따르는 영혼이 생긴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다.
영혼과 귀접으로 얻는 에너지의 종류도 확인하고 싶고 문양의 힘으로 강화한 영기를 그녀에게 흘려 넣어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알고 싶으니까.
게다가 그녀는 영혼이다. 여자친구들의 몸에 강령시키면 강화가 얼마나 이루어지는지도 확인하고 싶다.
‘이동 중에는 영기를 계속 흘려 넣어 그녀들과 친해질 수 있도록 조치를 해주어야겠군.’
눈에 줄곧 보이면 여자친구들도 백려강과 친분을 다질 수 있을 테고, 지금 느끼고 있는 어색함과 서먹함도 알아서 줄여나갈 것이다.
그렇게 호감도를 쌓고 인연을 쌓아나가면 위험부담 없이 영혼 강령을 시도해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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