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5화 〉 379 항구 도시 프라버
* * *
딸칵, 문고리를 당기자마자 반대쪽에서 강한 힘과 함께 문이 벌컥 열리려는 것을 감지한 환인은 슬쩍 뒤로 물러나며 거칠게 열리는 문을 피했다.
쾅!
=땅을 기는 지렁이보다 더 굼뜬 년들 같으니! 감히 날 이렇게 기다리게 하……?!=
그리고 천칭을 꺼내 버럭 고함을 지르면서 들어오는 까마귀머리 조인족 남자의 목줄기를 가볍게 찔렀다.
=?!=
평범한 사람이라면 목을 움켜쥐고 기침을 내뱉었을 힘이었지만, 까마귀머리의 조인족은 3급 투사. 충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흠칫, 명백히 놀라는 기색으로 멈추어 섰다.
환인은 천칭으로 남자의 목줄기를 찌른 채 스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침입이군. 프라버 영주성 산하 직할대는 원래 이런가.”
목줄기를 지그시 누르고 있는 목창의 끝. 나지막하지만 귀에 또렷이 들리는 서늘한 목소리.
나일렛=필테는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얼어붙었다.
뭐, 뭐지? 집행관이라고 했는데도 이 자식은 왜 위축되지 않는 거냐?
프라버에서 집행관이란 영주의 직속 무력 부대로 그야말로 살아있는 규율 그 자체다. 호족 계급 이상에게는 통하지 않지만 고족 이하 계급에게는 사신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는 위축되긴커녕 은은하지만 살기까지 뿌리고 있다.
여기까지만이라면 ‘감히 누구에게 무기를 겨누는 거냐!!’ 고함치며 당장 머리통을 날려 버렸을 테지만…….
3급 투사이자 21 집행대의 2급 집행관 나일렛=필테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눈알만 데굴데굴 굴렸다.
창이었다면 깨닫지도 못한 채 목이 꿰뚫려 죽었을 일격.
동체 시력만큼은 자신 있었는데 지금 자기 목을 찌르고 있는 봉을 언제 꺼냈는지는 물론 자기 목을 찌를 때까지 눈치도 채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살 떨리게 예리한 창술과 태도에서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상급자의 기백은 어느 고위층 호족 가문의 호위나 관계자가 아니고서야 나올 수 없는 조합이다.
이놈의 정체는 대체 뭐지? 내가 잘못 찾아왔나? 호프엔 호텔 5401호가 아니라 비 오란 호텔 5401호였다거나?
나일렛=필테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정체를 유추하려 했지만 이어서 들려온 살기 어린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말귀가 먹은 건가. 혹시 목에 구멍이 나야 말을 할 수 있다면 말해라. 손수 바람구멍을 내어줄 테니.”
=……!=
목줄기가 좀 더 압박당하는 느낌에 나일렛=필테는 당황하면서 겨우 부리를 열었다.
=아, 아니…….=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 거실 안쪽의 문이 벌컥 열리며 튀어나오는 여자 두 명의 갑옷 차림에 나일렛=필테의 두 눈이 왕방울처럼 커졌다.
척 봐도 으악 소리가 절로 나올 초고가의 방어구.
저 둘도 아우라가 없는 무직자지만 그냥 보아도 갑옷에 익숙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무직자로서 고위 괴수나 마수, 마물과 싸울 만큼 장비 수준과 실력이 받쳐준다는 뜻.
‘상위 탐험가 파티?’
처적, 살벌한 기세를 피우는 두 여자가 남자의 뒤에 서는 것으로 깃털에 전해지는 위압감이 몇 배나 상승했다.
마치 미궁 심층의 이형종과 마주한 것같이 깃털 끝이 떨릴 정도의 긴장감에 나일렛=필테는 침을 꼴깍 삼키며 더듬더듬 말했다.
=우, 우리는 공무 집행 중인…… 프라버의 보안집행위원회 치안유지 부서의 제21 집행대다. 지, 지금 이 행위는 명백한, 프라버를 적대하는 행위…라는 걸, 알고 있나.=
자신의 이야기에 부하들이 뒤에서 하는 행동을 목격하곤 재차 눈을 부릅떴다.
대치 상태가 벌어지자 부하들이 살기등등한 얼굴로 허리춤의 무기에 손을 올리는 것을 목격한 것.
자신의 목에 무기가 겨눠졌다지만 봉?이나 다름없는 나무창이니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겠지.
‘……는 씨발 개뿔이?! 날 죽일 셈이냐, 이 잡것들아!!’
이 상황에 전투가 벌어지면 자신이 가장 먼저 죽을 거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은 나일렛=필테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하며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어 부하들을 제지했다.
그리고 떨리려는 목소리를 필사적으로 다잡고 눈앞의 남자에게 눈을 부라리며 부리를 열었다.
=현재 프라버의 고급 병력 전체가 네놈들을 잡기 위해 전개되고 있다. 쓸데없는 저항은 관두고 얌전히 오랏줄을 받는 것이 좋을 거다.=
…….
…….
나일렛=필테는 피가 마르는 듯한 수 초간의 정적이 지난 후 자신의 목을 짓누르던 목창이 물러나는 것을 보며 황급히 두 발자국 정도 후퇴해 자기 목줄기를 쓰다듬었다.
멀쩡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만져서 확인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의 긴장감이었다.
‘하지만 됐다.’
이쪽의 신분이 먹혀들었으니 이제 저 연놈들을 무장을 해제한 다음 집행청으로 끌고 가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거기에 계실 백치령 기사단장님께 넘겨드리면 그분께 눈도장을 확실히 찍을 수 있겠지. 잘되면 영주 혈족에게 줄을 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본청의 한 자릿수 1급 집행관도 꿈이 아니야!’
나일렛=필테는 쪼그라들었던 간이 급격하게 부풀어 오르는 느낌에 눈앞의 연놈들을 깔보며 썩은 미소를 지었다.
운 좋게 위로 올라가는 이 연놈들의 위치 보고를 자신이 중간에 가로챈 것이 정답이었다.
정확한 원인은 모르지만 오늘 하루 저것들을 찾는다고 보안청이 무척이나 시끄러웠었다.
장비 상태를 보자면 실력자인 것은 확실하니 뭔가 다른 지역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쳤다거나 문제를 일으키고 흘러들어온 놈들이겠지.
그 때문에 백치령 기사단장님까지 나선 거고.
=자, 얌전히 포박당해…….=
출세의 달콤한 꿈에 젖은 나일렛=필테는 허리춤에서 마수 힘줄로 만든 포승줄을 꺼내 다가가며 말했고.
콰직!
부리가 박살 나는 고통과 함께 의식이 끊어졌다.
“…….”
환인은 산산이 조각난 검은 부리 파편이 핏물, 살점과 함께 흩날리는 틈바구니에서 쓰러지는 나일렛=필테를 무심히 쳐다보았다.
나일렛=필테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독심술을 쓸 수 없는 환인은 모른다.
그러나 사람의 목소리, 억양, 눈빛, 안면 근육의 움직임, 호흡을 읽으면 평범한 사람이라도 상대의 기분이 어떠한지 대강 아는 법이다.
환인은 그러한 조건이 있다면 상대가 대충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생각은 그러한 감정에 따라가는 법.
굳어있다가 한발 늦게 정신을 차린 집행 대원들이 경악한다.
=이 자식이!=
=프라버에서 집행관님을 공격하다니?!=
=네놈! 프라버의 군이 두렵지도 않나!!=
“그 말, 잠시 후에 똑같이 돌려줄 테니 네놈들도 상관과 함께 잠깐 기절해있어라.”
=뭐라고!?=
집행 대원은 직업자를 중심으로 좁은 복도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상정, 즉각 전투 진형을 잡으려 했지만 어느샌가 자신들의 사이에 끼어든 불한당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움직이는 것도 못 봤는데 어느 틈에?!
=죽어……!=
반사적으로 반월검을 휘두르려던 2급 전사는 갑자기 눈앞이 흐릿해지며 풀썩 쓰러졌고, 동료가 정수리를 맞아 쓰레기처럼 무너지는 모습에 즉발형 불과 바람탄을 쏘려던 2급 술사 두 명도 아랫배와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에 케흑,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직업자를 먼저 제압한 환인은 얼타고 있는 나머지 무직자 셋의 머리, 명치를 후려쳤다.
으악, 꺾, 케엑.
다양하고 다채로운 비명과 함께 머리와 명치를 두들겨 맞은 셋이 고꾸라지는 걸 본 안느는 역시 자신이 나설 기회는 없었다고 생각하며 천벌의 망치를 꺼내 집행 대원들의 팔다리를 분지르기 시작했다.
=도령도 참. 무력화시킬 거면 완벽하게 해야지. 정신을 잃은 척 하고 있다가 습격하면 어쩌려구.=
“…….”
기절에서 깨어났는지 아니면 기절한 척하고 있는지는 기감 덕분에 놓칠 수가 없다. 그래서 내버려 두었던 건데…….
상관없겠지.
우직, 뚜둑!
=끄악?! …끄르륵.=
빠드득, 터엉.
=꺄…! 켁.=
팔다리가 부러지는 고통에 정신을 차렸다가 안느의 망치에 골통을 얻어맞고 재차 기절하는 것들을 바라보던 환인은 부리가 완전히 박살 나 선홍색 속살을 비추며 혼절한 나일렛=필테를 응시하며 미간을 좁혔다.
뭔가, 직업자가 맞긴 한 건가. 일반인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은데.
‘백려강. 이 작자들의 무력 수준은 프라버에서 어느 정도지.’
「지, 집행청의 집행부대와 집행관은…… 성의 창공 기사단과 하늘 기사단을 제외하면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변변찮은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목각인형처럼 나뒹구는 모습에 백려강은 적지 않게 놀란 상태였다.
빛이 닿지 않는 미궁에서 조직폭력배들의 목을 짚단처럼 베어버리는 걸 보며 그가 강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집행대도 어쩌지 못할 정도였다니.
“…….”
백려강의 설명에 환인은 뭔가 자신의 인지와 조금 어긋남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약해도 너무 약한데…….
이실리테와 함께 나일렛=필테가 꺼냈던 포승줄로 집행 대원을 굴비 묶듯 엮고 있던 안느가 묻는다.
=도령. 정체를 드러낼 거야?=
“…그래. 이 집행관은 강약약강의 전형적인 소인배였으니 내가 영혼사라는 걸 밝혔다면 큰 문제로 비화하지 않았겠지만…….”
그러기에는 프라버에 짜증 나는 일이 너무 많이 쌓였다.
통신 수정관리부서의 병신 짓거리에 백치령이라는 영주 혈족의 월권, 백려강의 사망 건에 지금 이 인간의 시비까지.
원래는 귀찮은 일을 피하고자 일찍 떠나려 했지만, 지금은 귀찮음보다 짜증이 더 쌓여버렸다.
“슬슬 우리가 힘이 없어서 얌전히 지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릴 때가 되긴 했지.”
=그러게. 우리 명성도 늘었고 슬슬 이용하려 드는 것들도 나올 테니까 이 기회에 제대로 들이받아 버리는 게 좋겠어.=
“겸사겸사해서 크라빈 마을에서 있었던 트러블도 함께 처리하지.”
정체를 감추고 다니는 것과 호구처럼 여겨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호구는 수많은 사람의 터치를 받는다. ‘어쩌면 나도?’라는 생각에 너도나도 툭툭 건드려보게 된다.
환인은 병신들의 입맛대로 다뤄지는 것은 사양이었다. 이쪽을 이용하려다간 그보다 훨씬 큰 손해를 본다는 사실이 필요한 시점이니 이놈이 저지른 일은 좋은 기회가 되어주겠지.
줄줄이 묶인 집행 대원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던 환인은혹시 전투가 벌어질까봐 구석의 꽃병 뒤에 숨어있던 환연을 불렀다.
“주변에 병사나 군대가 있나.”
「아까 저 까마귀머리가 찾아왔을 때부터 주위를 살펴봤는데 군대는커녕 순찰대도 없어.」
“실적을 독점하기 위해서 독단적으로 찾아왔나 보군.”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문 뒤에 숨어 이쪽을 지켜보던 유르파에게도 손짓했다.
“유르파.따로 남아있다가 낭패를 볼지도 모르니 같이 갑시다.”
=응.=
“이실리테,안느.이것들을 아래로 옮기지.”
=내가 옮길게.읏차.=
굴비처럼 묶여있는 일곱을 멍석처럼 돌돌 말아서 번쩍 짊어진 안느가 먼저1층으로 내려가고,환인이 그 뒤를 따르니 환연이 포르릉 날아와 그의 어깨 위에 앉으며 물었다.
「그런데 환인.공격은 이놈들이 먼저 했지만,집행청을 찾아가면 우리도 신분 위조 같은 죄에 걸리는 거 아냐?」
“우리가 언제 신분을 위조했지.”
「프라버에 들어올 때…….아.」
말하던 환연은 하나의 사실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가 씩 웃었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유르파의 신분으로 입장한 거구나?」
“이런 일이 발생할 거라고 확신하지는 않았다.”
신분을 위조한다면 훗날 그 사실이 알려질 경우 발목을 잡힐까 유르파의 일행으로 위장해서 들어왔을 뿐.
“이실리테,안느.초커를 벗어라.”
=엉.=
=네.=
계단을 내려가던 중 그녀들의 아우라를 봉인 중인 목걸이를 벗으라고 주문한 환인은 아까부터 느껴지는 미묘한 위화감을 생각했다.
2급 집행관,도시의 상급 무력 기관이 고작3급 직업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환인에게 잘 이해되지 않았던 것.
그 점을 언급하자 안느가 별거 아닌 듯이 대답한다.
=이것들이 약하게 느껴지는 건 도령의 기술이 어마어마해서 그런 거고.이런 정규군3급 직업자는 보통 바깥의 일반적인 용병이나 모험가3급하고는 격이 달라.=
“다르다는 게 무술과 위상력 제어 이야기인가.”
=응.비전으로 전해져오는 위상력 제어랑 오랜 시간 다듬어져 오고 발전되어온 무술,이 두 가지의 유무는 같은 급이라 해도 큰 차이를 주니까.=
무예의 초식과 연속 동작인 투로의 차이인가.
확실히 파르히스트 마스터 토너먼트에 출전한 자들은 익스퍼트 출전자들과 다르게 기술과 기예가 있었지.
안느의 설명에 미묘한 위화감이 어느 정도 해소되는 걸 느끼며 호텔 로비1층에 도착한 환인은 밤늦게까지 운영 중인 플로어를 보게 되었다.
근처에 고급 유흥가가 있어서인지 직원과 손님들도 다수 남아있는데,집행부가 찾아와서인지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헉?야,야.저기 봐.=
=…미쳤나?집행부대를 때려눕혔잖아.=
=으힉.저거 집행관 아냐?=
=……나가자.괜히 있다가 불똥 튀겠어.=
그러다 환인 일행이 집행부대를 짐짝처럼 들고 내려오는 모습에 급기야 식겁하며 모습을 감추기 시작한다.
그러나 호텔 직원들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얼어붙어 버렸다.
여기는 직장이다.이탈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특히 호텔 리셉션은 악몽이 현실로 변한 사람처럼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집행부대의 악명이 예상 이상이군.’
이실리테와 안느의 아우라는 특유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어딜 가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껏 끌어당긴다.
그랬는데 지금은 그녀들의 아우라보다 집행부대를 더 신경 쓰고 두려워하고 있다.
이들의 성질이 더럽고 개 같지 않다면 나올 수 없는 반응이다.
이러면 집행부대를 함부로 다뤄도 영혼사의 명성에 흠이 되진 않겠다고 생각하며 집행부대를 바닥에 내려놓으라고 지시한 뒤 이실리테에게 말했다.
“가서 비상과 아이들을 모두 데려와라.비상의 색은 원래대로 돌려도 된다.그리고 거기,당신.”
=네,네?=
지목받은 리셉션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도망가고 싶다고 생각했지만,몸에 새겨진 리셉셔니스트의 습관이 그녀를 반사적으로 움직이게 했다.
“이놈들을 끌고 갈만한 수레가 필요합니다.준비해주십시오.대금은 치르겠습니다.”
=어……그게…….=
“…귀가 먹었습니까.지금 수레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히익?!다,당장 가지고 올게요!=
호텔 측이 자신의 정보를 누출하지 않았다면 객실까지 찾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자연히 좋은 말이 나오지 않았고,리셉션은 환인의 살기에 지릴 것 같은 표정으로 어디론가 뛰어갔다.
잠시 후 준비된 허름한 짐수레에 집행 대원 일곱을 대충 처박은 뒤 쿠라에게 짐수레를 끌도록 한 환인이 비상의 등에 오르자 안느도 쿠핀의 등에 오르며 묻는다.
=도령.가야 할 곳은 알아?=
“집행청.위치는 백려강이 알고 있다는군.유르파는 이실리테와 함께 쿠르티를 타십시오.”
=응.그전에 자기,이거 가지고 있어.=
유르파가 내어준 주머니에는 공간 진동 폭탄 구슬이 여러 개 들어있었다.
“이 정도면 집행위원회 건물을 폭삭 주저앉힐 수도 있겠군요.”
=만약 위험해지면 눈치 보지 말고 막 던져도 돼.여분을 많이 만들어놨거든.=
“그러겠습니다.백려강,출발하지.”
「네.집행위원회 본청은 이쪽이에요.」
영기를 주입하지 않아 푸른 영혼 상태의 백려강을 따라가던 환인은 옆에서 안느가 조금 긴장한 투로 중얼거리는 소리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적지에 돌입하는 기분인걸.=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될 거다.정신이 똑바로 박혀있다면 상급 영혼사를 적대하지 않을 테니까.”
=똑바로 박혀있지 않으면 싸움 나겠네.=
피식 웃으며 하는 대꾸에 환인도 후,웃었다.
“우리가 파르히스트를 떠날 때와 지금은 명성의 차이가 비교도 못 할 정도다.이런 우리를 공격한다면 애초에 프라버를 지나가는 것 자체가 잘못된 선택이지.하지만 르아웬은 우리에게 프라버를 지나치라던가 우회하라는 정보를 주지 않았었다.”
그 말은 이쪽이 제대로 된 신분을 밝혔다면 트러블이 생길 여지 자체가 없었다는 뜻.
=참,더러워.상대가 신분을 숨기든 안 숨기든 같은 행동을 해야 제대로 된 사람일 텐데…….=
“그런 사람은 성인이라고 불러야겠지.”
자신의 대꾸에 여자친구들이 쓴웃음을 짓는 걸 보며 만약을 대비한 지침을 내려준다.
“혹시 정신이 똑바로 박혀있지 않을 경우에 이실리테는 술사들부터 먼저 죽여라.이실리테 너의 기동 능력이라면 군집한 병력을 상대로도 자유롭게 기동할 수 있을 거다.환연은 이실리테가 곤란한 상황에 부닥치면 재량껏 돕고,안느는…….”
6급, 7급 직업자는 어지간해서는 환인에게 적수가 되지 않는다.
이실리테도7급까지는 무난하게 싸울 수 있고 안느도5급 이하 적에게는 철벽이라고 할 수 있다.
환연은5급 법술사에 맞먹는 속성 공격을 노 쿨 노 딜레이로 난사할 수 있고 비상도 중상급 이형종을 능가하는 신체 스펙에5급 풍술사와 흡사한 바람 공격을 가할 수 있다.
집행청으로 향하는 길에 백려강을 통해 들은 정보를 그녀들에게 들려준다.
“백려강의 설명에 따르면1급 집행관이라 해도5급 직업자 정도이며 부대별로 인원은10명 미만.모든 집행관과 집행부대가 모이더라도 수백 명밖에 안 된다고 한다.전원 직업자인 것도 아니고 무직자도 섞여 있다는군.”
그 집행대가 모두 모이더라도 산란못 미궁에 비하면 숫자도 적고 강함도 훨씬 못 미친다.
인간종이니 특유의 지성과 협력을 장점으로 꼽을 수 있겠지만,그러한 것들은 은 때때로 독이 되기도 하는 법.
“사기는 전투에 중요한 요소다.동료들이 썩은 짚단처럼 죽어 나가면 사기가 저하되어 이형종이 아니라 겁먹은 동물처럼 허약해지겠지.우리라면 수백 정도 군대는 여유롭게 상대할 수 있다.”
환인의 담담한 이야기에 막연히 군대를 상대할지도 모른다며 긴장하고 있던 그녀들은‘할만하겠는데?’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주인님의 강해진 축복도 있고,상식적으로 헬루멘의 영웅기사단 기사들처럼 강한 기사가 막 수십 명씩 몰려있을 리 없으니까요.=
=그러게.요즘 싸워댄 게 전부 말도 안 되게 강하거나 말도 안 되게 많은 것들이라서 자연스럽게 기준이 그쪽으로 잡혔나 봐.=
라드세아에서는 기사의 정점이라 불리는 영웅기사단과 대결했다.폭군룡의 미궁에서는 단일 개체로 최강급에 분류되는 아룡종6급과 싸웠으며 크라빈 숲에 등장한 산란못 미궁에서는 평균4급의 수백 마리 양서류 이형종 군단과 피 터지게 싸웠다.
보편적인 적의 강함 기준이 그쪽에 맞춰지는 것은 필연이다.
=여차하면 긴급 공간 이동을 펼쳐서 탈출할 테니까 너무 걱정들 하지 마.=
=엥?그러면 우리 마차랑 짐을 전부 버려야 하잖아.=
=목숨을 버리는 것보단 낫지 않니?=
생각할 필요도 없는 교환비에 안느가 뻘쭘해 하며 입을 다물자 이실리테와 유르파가 피식 웃는다.
그렇게 다들 제 실력을 발휘할 최적의 상태가 되었을 때.
「환인 님,저기가 보안집행청이에요.」
백려강이 도착을 알렸다.
그녀가 가리킨 건물은 프라버의 고급 주택 거리 근처 대로변,사람에게 위압감을 주는 회백색 대리석 외관의 육중한5층 건물.
환인은 새벽이 다가오고 있는 시간임에도 불이 켜져 있고 건물 출입구를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을 응시했다.
이곳 세계의 공무원은 대체로 일반 시민에게 불친절하며 선민의식과 권위주의가 강한 자들이다.
그런 자들이 밤늦게,새벽까지 일하고 있다고?
‘어쩐지.집행관이 밤중에 찾아온 이유가 있었군.’
환인은 자신들을 발견했는지 직원 차림의 일부 사람이 이쪽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귀를 기울이자 희미하게=주사관님!녹색 쿠에를 탄 분이……!=, =녹색 성자!녹색 성자님 같아요……!=소리치는 게 들려온다.
그걸 안느도 듣고 눈썹을 찌푸렸다.
=도령이 도시에 있단 걸 알고 있었나 보네.그런데 이 자식은 뭔데 우리를 잡아가려고 한 거야?=
=우리 객실을 찾아올 때는 몰랐던 게 아닐까?주인님을 보고도 몰라봤잖아.=
=평범하게 생각해보면 그런 빛기둥을 일반적인 영혼사가 쓸 수 있을 리 없잖아.그리고 우리가 영도로 향하고 있다는 건 다 알려진 마당이니 그 빛기둥을 도령이 썼다는 것도 추측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관리들이 유능한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무능한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잖니.아마 우리 자기가 녹색 성자라는 것은 짐작도 못 했고,뭔가 중대한 일이 도시에 벌어지긴 했고,그 일을 추적하다 보니 우리가 머물던 호텔에 닿은 거로 생각해.그리고….=
=그리고?=
=아까 자기가 말한 대로 저 나일렛 필테라는 집행관은 실적이랑 성과를 독점할 생각에 위로 올라갈 보고서를 가로채서 독단으로 찾아왔다가 자기한테 얻어터진 거야.이쪽이 더 그럴듯하지?=
=그러네요.=
=응.=
환인은 여자친구들의 대화를 듣다가 우르르,건물에서 사람들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 후드를 눌러 쓰라고 지시를 내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