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1화 〉 375 항구 도시 프라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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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인은 정문에서 마구간지기가 비상과 쿠르티를 데려오길 기다리며 레심과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역시, 몇 시간 전의 회백색 짙은 빛이 도시를 채운 것은 환인 님의 행적이었군요.=
“예. 마을 곳곳에 참담한 상태의 영혼이 다수였고 일부는 혼재로 변하기 직전이었습니다. 곤란한 상황에 직면한 터라.”
물경 아홉에 이르는 혼재 예비군을 만나 쓸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자 흐릿하게 웃는 레심의 표정이 의미심장하다.
백려강이 죽게 된 정확한 원인을 알게 된 탓일까. 프라버를 비롯해 자신의 가문과 영주 가문에 정나미가 떨어진 사람의 얼굴이다.
레심이 죽은 눈동자로 도시의 중심부에 우뚝 선 하얀 영주성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리듯 말한다.
=전부 영주님이 자초한 일이라고 생각하니 심경이 복잡합니다.=
“…….”
=그 점에 대해서 저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처지이니 입을 다물겠습니다. 죽은 아가씨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나서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본 저도 공범이니까요.=
백려강이 스스로 첨탑에서 뛰어내린 그 날, 정체불명의 침입자가 있었으며 회색 부엉이 머리의 조인족 남자였다고 환인은 알려주었었다.
그에 관한 인상착의도.
=하지만…… 아가씨를 죽음으로 몰아간 놈들만큼은 가만둘 수 없습니다. 제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제 인생의 전부를 걸고서라도 추적해서 찾아내 죽일 겁니다. 죽이고 말 겁니다.=
회색 부엉이남의 인상착의가 그려진 종이를 넣어둔 주머니에 손을 올리고 스산하게 멸살을 선언하는 레심.
분노가 1g도 느껴지지 않는 차분한 목소리에서 그 결심의 단단함이 느껴진다.
환인은 시무룩한 얼굴의 백려강을 바라보았다.
백려강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의 충격, 그녀의 혼과 감응했을 때 느낀 격렬한 감정, 그리고 혼란에 잠시 사고가 마비되었던 환인이었다.
그 때문에 그녀의 기억 곳곳에 보이는 의미심장한 사실을 놓쳤었고, 마음을 진정시킨 지금에 와서야 의문을 곱씹는 중이었다.
의문은 여러 가지였다.
딸이 죽고 4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영주는 뭘 한 건가.
전쟁이 왜 벌어지지 않았는가.
주도의 성궁에서 개입해 전쟁을 치르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하더라도 다른 수작질은 괜찮은 건가.
그 침입자가 첨탑까지 도달하게 된 경위는?
르아웬은 왜 이걸 알려주지 않았지?
영주가 자신을 내버려 둔 이유는 뭐고?
백려강은 어째서 죽음을 선택했지?
알소프는 영도를 신경 쓰지 않는 건가?
“…….”
환인은 침입자를 떠올렸다.
기억에서 본 부엉이 머리의 침입자는 아우라가 없었다. 그 말은 일반인이라는 뜻인데 백려강이 있는 첨탑 꼭대기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날개로 날아서라 해도…….
‘내부에 배신자가 있는 건가.’
도시급의 영주성을 그렇게 제집 드나드는 것처럼 할 수 있다는 것은 내부에 끄나풀이 있지 않은 이상 불가능하다.
아니, 프라버의 영주성 방어 체계가 허벌이거나 그 침입자의 능력이 출중할 수도 있겠지.
4개월간 영주의 드러난 행적만을 놓고 보면 영주가 무능하다는 가설을 추가할 수 있겠지만…….
‘알소프가 프라버를 먹기 위해 작업하고 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백려강을 자살로 몰고 간 것도 정말로 도시의 중추 시설을 마비시키거나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백려강을 죽게 만들어 프라버에 충격을 주고 백중익의 속을 흔들기 위한 계략이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일이 잘 풀려 백려강이 결정핵을 부숴도 좋고, 회유를 거절하더라도 좋다. 딸이 침입자와 접촉했단 사실을 퍼트리기만 해도 백중익은 충격받을 테니까.
딸이 적과 내통했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발생하면 호족의 자존심은 그 사실을 절대 용납하지 못할 테니.
그러한 연장선상으로 생각해본다면 그 침입자가 말한 협박, 알소프가 자신의 신변을 공격하겠다 언급한 것도 공갈일 것이다.
영혼사를 공격한다는 것은 영도와 적대하겠다는 행위이며, 영도와 적대하게 되면 영혼사의 성불 서비스도 받을 수 없게 된다.
영혼이 현세에 오래 머무를수록 혼재가 될 가능성이 커진다. 이실리테의 여동생인 아베트만 봐도 그렇다. 이실리테에게 원한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10년이 넘게 그녀에게 붙어있다가 결국 혼재가 되지 않았던가.
그 점을 생각하면 영혼사와 적대하는 것만큼 머저리 같은 짓은 없다.
만약 백려강이 침입자의 발언을 공론화한다 하더라도 알소프 쪽에서는 ‘아비의 뜻을 꺾는 괘씸한 딸년의 말을 믿느냐. 나는 억울하다.’는 식으로 잡아떼면 그만이라 생각하겠지.
그만큼 라드세아는 남존여비 사상이 극심한 국가니까. 여자의 발언, 그것도 이런 분쟁을 촉발시킨 여자의 이야기는 관심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프라버와 알소프를 이간질하기 위해 끼어든 3자의 가능성이군.’
작게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 싸움을 부추기거나, 크게는 프라버와 알소프의 역할을 자신들이 이어받기 위해 수작을 부리는 다른 도시들의 존재.
어쩌면 프라버를 잡아먹기 위해 알소프가 다른 지역과 연합했을 가능성도 있다.
환인은 연합 쪽의 존재에 무게추를 올렸다.
첫 번째 경우를 확신하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한 가지 있다. 백려강을 탐냈다는 알소프의 영주가 침입자를 보냈다면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그녀를 탐냈으면서 나중에는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간다고?
백려강의 미모라면 집착은 쉽게 이해되지만, 그런 집착남의 부류는 보통 소유욕으로 이어지지 ‘내가 못 가지면 네놈들도 가질 수 없다!’라는 식으로 죽여 없애려 하지 않을 거다.
침입자의 존재만 두고 가능성을 꼽자면 3번이 가장 높은데…….
생각의 가지가 뻗어나가며 계획의 단계가 복잡하게 전개되려 하는 것을 깨달은 환인은 적당한 선에서 접고 치웠다.
길고 복잡하게 타당성과 정합성을 따져가며 생각하고 계획을 내놓아도 시간이 지나면 정보의 변화로 과정을 갈아엎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더욱이 이 세계는 지구가 아닌 만큼 정보의 변질 가능성이 크니 지금은 그저 ‘침입자는 알소프의 관계자. 알소프의 호족은 가만두지 않는다.’ 정도로만 생각하고 움직이는 게 좋을 것이다.
환인의 생각이 드물게 길어져서일까, 레심이 조용히 묻는다.
=…환인 님은 이 도시에 구원을 내려줄 생각이 없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제 예상이 틀렸다면 지적해주십시오.=
“틀릴 리가 있겠습니까. 레심 씨와 마찬가지로 저도 정나미가 떨어졌습니다.”
=그렇습니까. 환인 님도 그리 생각한다니 왜인지 마음이 든든합니다.=
“같은 인간으로서도, 영혼사로서도 영주의 행태는 납득할 수 없는 행위의 연속입니다. 제가 알지 못하는 사정이 있다 하더라도 이 의구심은 사라지지 않겠지요.”
=……동감입니다.=
「아아. 환인 님과 레심이 흑화해버려…….」
두 남자의 대화에 백려강이 울상을 지으며 아름다운 날개를 곤란한 듯이 작게 펄럭인다.
감정을 대부분 정리한 덕분에 객관적으로 그녀를 볼 수 있게 된 환인이었지만, 그 작은 몸짓마저도 무척이나 사랑스러워 보여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알소프의 그자가 백려강과 결혼을 조건으로 혈맹을 구성하려 한 것도, 프라버의 영주가 딸을 팔아 안정을 도모하려 한 것도 이해가 간다. 경국지색이라는 건 지금의 백려강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싶으니까.
속내와 다르게 환인은 비웃음을 지으며 백려강에게 대답했다.
“백려강. 당신이 제 앞에 나타났을 때 저는 당신에게 감응해 당신이 죽게 된 경위와 죽는 그 순간을 기억으로 직접 체험했습니다. 좋게 좋게 생각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
비상과 쿠르티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한 환인은 시무룩한 백려강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사람이 바뀐 듯 음침하고 흉흉한 분위기의 레심에게 말했다.
“복수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감정의 풍화라고들 합니다. 레심 씨가 오늘 느낀 심정을 글로 남겨 분노가 깎여나갈 때마다 보면서 담금질하는 것을 추천하고 싶군요.”
=환인 님의 조언, 가슴에 새겨두겠습니다.=
큐삣!
쿠에~
자신을 보고 달려온 비상의 부리를 쓰다듬어주고 등에 오르는 환인.
그에게 레심의 감사 인사가 전해졌다.
=감사합니다. 환인 님이 찾아와주지 않으셨다면…… 저는 사정도, 이유도 모르고 심적 고통에 괴로워하다 아마도 망가지거나 폐인이 되었을 겁니다.=
“…레심, 당신의 복수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길 기도하겠습니다.”
환인은 비상에 올라탄 뒤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고 떠나갔다. 이실리테는 그 뒤에서 줄곧 레심을 안타까워하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레심 씨, 당신에게는 꼭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어요. 그…… 검술 때문에…….=
=이실리테 양. 제가 해드린 것은 그야말로 보잘것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실리테 양이 그만한 성취를 이룬 것은 온전히 이실리테 양의 능력이니 저에게 감사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몸 건강하세요.=
희게 웃는 레심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이실리테도 쿠르티에 올라타 멀어져가는 환인을 쫓아갔다.
=예……. 이실리테 양도 환인 님 곁에서 늘 건강하시길.=
레심은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떠나가는듯한 두 사람의 모습이 없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가슴에 메꿀 수 없는 구멍이 난 것처럼 허하다.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지만 레심의 눈에는 회색 필터를 덧씌운 것처럼 잿빛이다.
=…….=
생각이 깊어진 얼굴로 저택에 들어선 레심은 중앙 계단을 통해 성큼성큼 걸어 내려오는 누나와 마주쳤다.
=야, 꾀돌이! 누나랑 이야기하다 갑자기 뛰쳐나가는 건 무슨 버르장머리야?! 그리고 손님이 왔으면 안내를 해야지 여태까지 뭘……?=
=…….=
=……뭐야, 왜 죽을상을 짓고 있어?=
=누님. 저는 집을 나가겠습니다.=
=응? 갑자기?=
=예.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생겨서 말입니다.=
차갑게 대꾸하고 자기 방으로 돌아가는 동생의 모습에 레티샤는 회색의 더벅머리를 긁적였다.
갑자기 돌변한 막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다가온다. 아까까지만 해도 기운이 없긴 했지만 평소와 다를 바 없었는데, 지금은 살기가 뭉클거리는 것이…….
드린제 가문 차기 가주로서 위치를 확립했기에 나름 프라버가 돌아가는 상황을 알고 있던 레티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설마 눈치챈 건가?’
저 착한 녀석이 저렇게 살기를 풀풀 풍길 정도라면 백려강의 죽음을 둘러싼 더러운 진실을 일부나마 알게 되었다는 것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녀석을 찾아왔었다는 손님은 누구였지? 무슨 이야기를 들었길래?
레티샤는 잠깐 막내가 불려갈 때 무슨 이야기가 나왔는지 떠올려보았다.
‘분명 찾아온 손님 이름이 환인……이라고 했던가? ……환인?’
그 이름은 비자룩스의 녹색 성자이자 헬루멘의 검희의 주인인 이름…….
=……아이씨.=
자신의 예상대로라면 폭탄이 품 안에 굴러들어온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다.
레티샤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다가 막내를 뒤쫓아 계단을 다시 올라갔다.
만약 방금 찾아온 손님이 진짜 그 영혼사이고, 막내가 백려강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에 접촉했다면 쓸데없는 짓을 못 하게 막 아야 한다.
지금은 바늘만 한 구멍이 생겨도 뻥, 하고 터질 만큼 프라버의 분위기가 안 좋으니까.
폭발의 시작점이 자신의 가문이 되는 것만큼은 막아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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