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380화 (380/813)

〈 380화 〉 374 항구 도시 프라버

* * *

「아아…! 환인 님, 보고 싶었어요. 만나고 싶어 쭉 기다렸어요…….」

백려강의 미모에 몇 초 정도 굳어있던 환인은 아지랑이처럼 증발해 사라지는 눈물을 보곤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아니, 정신을 차렸더니 그녀의 미모가 새삼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자각했다.

반투명한 영혼 상태이기에 흐릿하게 보임에도 불구하고 자그마한 흠도 없는 백옥같은 피부.

그저 눈코입이 붙어있을 뿐이지만 시야에 과부하가 걸리는 것처럼 똑바로 직시하기 어려운 미모의 얼굴.

길고 풍성하면서도 매끄럽게 윤기 나는 머리카락은 허공을 아름답게 너울거린다.

그와 함께 백 오픈 타입의 엠파이어 드레스 치마가 북극의 오로라처럼 하늘거리는데 그때마다 쭉 뻗은 허벅지와 다리, 작고 앙증맞은 발가락이 언뜻언뜻 모습을 드러냈다가 감추길 반복한다.

등허리에 난 한 쌍의 우아한 날개는 바람에 순응하듯 느릿하게 펄럭이며 저 하늘의 구름처럼 폭신하고 몽실한 느낌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지니 미모만큼은 이실리테와 안느도 한 수 접어야 할 수준으로 환인에게 다가왔다.

‘…웨이포드에서 헤어질 때보다 몇 배는 더 아름다워진 것 같은데.’

순간적으로 자신이 감정을 느끼기 시작해 여자의 외적인 미모를 받아들이는 주관이 바뀐 건가 의심했을 정도다.

환인은 자신을 향해 눈물을 글썽이는 백려강을 바라보다 감응을 시도했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그녀의 죽음을 통해 진실을 알아보려 한 것.

기쁨, 약간의 서글픔, 행복과 처연함, 홀가분한 감정들이 먼저 다가오고 이어서 가슴의 문양이 살짝 달아오르며 시야가 멀어진다.

그리고 그녀가 죽기 직전의 기억이 쏟아지듯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휘영청 뜬 보름달이 비추는 첨탑 꼭대기. 부엉이 머리의 조인족과 마주 서 있는 백려강.

조인족이 말한다. 당신이 누굴 사모하는지 알고 있다고. 그가 안전하길 바란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좋을 거라고.

환인은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지만, 기억을 끊지 않고 계속 열람한다.

백려강은 환인의 안위를 두고 협박하는 조인족에게 으름장을 놓는다.

감히 상급 영혼사이자 성자로 불리는 그에게 해코지할 생각인가. 알소프는 영도와 모든 영혼사하고 전쟁이라도 치를 생각인 건가!

하지만 조인족은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흉계가 가득한 미소로 백려강을 구슬렸다.

이쪽의 지시대로만 한다면 네가 녹색 성자와 함께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겠다.

결혼을 하는 척만 하고 자유롭게 풀어줄 테니 그와 함께 떠나는 것도 가능하다.

이쪽의 지시는 하나, 프라버 본성 지하, 영주 직계 혈족만이 들어갈 수 있는 심원의 방에서 프라버의 방어구축술법진을 유지하는 위상력 결정핵에 오염된 피를 뿌리는 것.

저주받은 이형종에 수십 종의 저주를 수십 일간 뿌려 만들어내는 오염된 피.

그것이 결정핵에 닿을 경우 결정핵은 급속도로 부식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게 된다.

결정핵이 사라지면 프라버를 보호하는 장막이 거두어지며 외부 공격에 매우 취약해진다.

침입자의 요구는 프라버의 심장을 제 손으로 부수라는 것과 진배없는 이야기다. 프라버의 호족 가문 일원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던 백려강에게 그것은 어마어마한 모욕.

백려강은 분노하며 날이 밝는 즉시 이 일을 부친께 알리겠노라 이야기했지만, 몰래 자신의 침소에 침입한 조인족은 비웃음을 지었다.

모욕이라니. 알소프와 프라버가 이 지경이 된 것은 너로 인해서인데, 프라버의 목줄을 쥐고 비틀어버린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알소프와 프라버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사리사욕을 위해 결혼을 거부한 너로 인해서!

그런 주제에 이제 와서 명예를 찾는 거냐!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반박할 여지가 많은 말이었지만, 스스로 책임감을 느껴 첨탑에 구금을 자처한 백려강의 정신상태는 그 말에 제대로 된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침입자의 호통과 조롱, 악의는 충격받은 백려강에게 계속해서 쏟아졌다.

이 일을 거부한다면 네 아비와 네 가족만 고통받는 것이 아니다. 환인이라는 이름의 성자도 함께 지옥 불에 구르는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 위협했다.

알소프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녹색 성자를 사실에 기반하여 음해하는 소문을 줄곧 뿌릴 것이며, 알소프 5급 호족의 이름으로 영도에도 녹색 성자의 무자비함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뿌릴 것이다.

비자룩스에서 고위 호족의 딸을 격살한 일은 물론이며 이때까지의 행적을 낱낱이 파헤쳐 티끌만 한 흠이라도 크게 부풀려 세상에 뿌릴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너의 이기적인 욕심으로 인해 벌어질 것이라며 백려강을 쉴 새 없이 매도했다.

백려강은 몰아치는 침입자의 폭언 속에서 큰 충격과 함께 고뇌에 빠졌다.

저 간악한 알소프의 돼지라면 틀림없이 그러고도 남겠지.

안된다. 나로 인해 가족이, 나아가 그분이 고통받아서는 안 될 일이다.

찾아온 침입자는 창백해진 백려강에게 내일까지 시간을 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털썩, 주저앉은 백려강은 고개를 푹 숙였다.

영주성의 삼엄한 감시와 방어벽을 뚫고 들어온 것만 봐도 뛰어난 잠입 실력을 갖춘 자다. 침입자의 존재를 알리더라도 차후에 다시 찾아오는 것은 쉬운 일이겠지.

이 침입 사실을 알려도 문제다. 침입을 알렸다가 그자의 심기가 나빠져 환인 님에게 해코지라도 하면…….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하지?

모든 것은 자기 잘못이다. 자신이 환인 님에게 연모의 감정을 드러내지만 않았다면 그분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없었을 텐데.

그분이 아무리 뛰어난 영혼사라 할지라도 도시를 다스리는 호족의 중상모략과 음해를 버틸 수는 없을 것이다.

아아, 환인 님. 환인 님,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떻게 하면 좋은가요…….

백려강은 눈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분과 함께 하고 싶다는 것이 이렇게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가.

백려강은 울먹였다. 환인 님은 이룰 수 없는 일보다 이룰 수 있는 일이 더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었다.

자신이 환인 님과 함께한다는 미래는 이룰 수 없는 일이었던 거였나.

슬프다. 괴롭다. 거부할 수 없는 선택을 강요를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렵다.

그 강요에 따른다 하여도 끝이 아닐 거라는 사실과 환인이 겪을 고난의 상상이 백려강의 이성을 좀먹어간다.

자신이 살아있는 한 알소프는 계속 자신을 이용하려 들 것이다. 환인 님을 인질로 삼아 위협할 것이다.

…나는, 나는…….

백려강은 밤하늘에 뜬 노란 보름달을 올려다보았다.

웨이포드 영주성에서 만났던 엘위드리스 가문의 영혼사, 이엘카타 님의 황금빛 눈동자가 보름달에 겹쳐진다.

그분은 자신에게 두 가지 운명이 있다고 했었다.

하나는 자신으로서도, 가문으로서도 평탄하고 무난한 삶을 이어갈 운명. 이것은 알소프의 역겨운 돼지 영주와 결혼하는 것을 말씀하신 거겠지.

다른 운명은 멀고 괴로우며 춥고 아프며 힘들고 지치는 고난과 가시밭길. 그 끝에 있는 것이 당신이 바라는 행복인지도 알 수 없는 운명.

백려강은 이엘카타의 황금빛 눈동자 같은 보름달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그런가요. 그랬던 거군요. 제가 환인 님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이 길밖에 없다는 거였어요.

자리에서 일어난 백려강은 홀린 듯 높이 40여 미터의 첨탑 난간에 올라섰고…….

휘이잉——

알류겔 호수의 습기를 머금은 밤바람이 한차례 난간을 스치고 지나갔을 때,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온다. 가슴 쪽 문양의 열기도 사그라들었지만, 백려강의 강렬한 감정에 동화되어 버린 듯, 울렁거리는 심장은 좀처럼 진정하질 못한다.

환인은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사랑, 사모하는 감정.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자신과 헤어진 이후 근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그녀는 어떻게 그 마음을 키워온 것일까.

그 사실이, 그 과정이 어땠든 간에 그녀는 타인인 자신의 안위를 위해 자기 목숨마저 버렸다. 그 사실은 어떠한 왜곡이나 호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로 인해 환인은 생각했다.

‘감응의 조절 방법을 찾아야겠군.’

상대의 강한 감정을 차단하고 객관적인 사실만 볼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다. 영혼과 감응할 때마다 매번 이런 강렬한 감정에 씐다면 정신이 버티질 못한다.

앞으로도 나 자신으로 있기 위해서는 감정을 걸러낼 수단이 필요하다.

환인은 기억을 들여다본 시간이 고작 2초도 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눈을 감은 채 감정을 정리한다.

어지럽게 흩어진 그녀의 강렬한 감정에 동화한 흔적, 찌꺼기를 모아 버린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그만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눌어붙어 마음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알소프.’

환인은 죽죽 그어진 알드헬름의 이름 옆에 알소프의 호족을 적어놓았다.

자신을 두고 협박했다는 사실, 그게 단순히 백려강을 위협하기 위한 공갈이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귀에 들어온 이상 내버려 둘 수 없다.

속으로 살기를 갈무리하며 눈을 뜬 환인은 순진무구한 아가씨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백려강의 시선에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할 뻔했다.

‘말도 안 되는 미모로군.’

마음을 단단히 먹지 않으면 저 미모에 휘둘리고 말 것이다.

환인은 자신이 말하길 기다리는 백려강에게 일부러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바보 같은 선택을 하셨군요.”

시작부터 날아든 매도에 죽었다는 서글픔과 죽어서라도 환인을 다시 만났다는 기쁨을 함께 느끼던 백려강의 얼굴이 흐려진다.

「…하지만 제 머리로는 다른 선택지를 고를 수 없었어요. 제가 살아있으면, 환인 님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테니까…….」

‘그렇다고 무턱대고 목숨을 버리는 게 말이 됩니까.’

속으로 전한 의사에 마냥 기다리다간 상황이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될거라 생각했다고 말하는 백려강이다.

환인도 그 점은 인정했다. 백려강이 선택을 강요받던 그때, 자신은 지구에서 쉬고 있을 때였으니까.

한숨을 길게 내쉰 환인은 옆에서 꽂히는 듯한 시선에 고개를 돌려 레심을 돌아보았다.

그는 이보다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부릅뜬 눈으로 환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지?

그건 혼잣말이 아니었다. 분명 누군가에게 건넨 말. 설마?

레심은 그가 영혼을 볼 수 있으며 영혼을 실체화할 수도 있는 영혼사, 녹색 성자라는 사실을 재차 떠올리곤 하나의 결과에 도달했다.

=환인 님, 이쪽입니다.=

굳은 얼굴로 주위를 살핀 레심은 환인과 이실리테에게 자신이 검술 수련을 할 때 사용하는 훈련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40평 남짓한 훈련실로 들어오자마자 곧장 문을 잠그고 창문도 닫고 내부를 샅샅이 살펴 엿듣는 귀가 없는지 조사한다.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한 레심은 바짝 마른 장작 같은 얼굴에 불꽃 같은 열망을 드러내며 물었다.

=환인 님. 혹시, 혹시 옆에 아가씨의 영혼이…… 계십니까?=

환인은 말없이 자신의 뒤를 따라온 영체 상태의 백려강을 돌아보았다.

방금 자신의 힐난에 슬퍼하듯 눈썹과 눈꼬리가 처진 것이 주인에게 혼난 강아지 같은 상이지만, 그마저도 남자의 마음을 진탕 시키는 매력이 스며 나오고 있다.

그리고 레심을 돌아본다.

누가 보아도 한 여성에게 순정을 바친 남자의 모습. 그 여자는 당연히 백려강이겠지.

“예.”

=……!=

두 손으로 얼굴을 덮는 레심의 행동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심경을 표현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몸과 마음이 흔들리는 모습.

레심은 한동안 어깨를 떨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가 흐느낌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묻는다.

=화, 환인 님. 아가씨를, 아가씨를 볼 수 있게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발, 부탁드립니다…….=

환인이 보기에 백려강도 레심의 순정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확고하다.

레심의 마음은 결코 받아줄 수 없다는 표정. 그가 불쌍하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잘 대해주는 모습을 보여 환인에게 불필요한 의심은 사고 싶지 않은 듯한 표정.

“…예.”

환인은 백려강의 손에 자기 손을 올리고 대강 5분 정도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만큼의 영기를 흘려 넣어주었다.

혹시 가슴의 문양이 이것에도 특이한 영향을 끼치는 건 아닐까 했지만, 워낙 작은 양의 영기를 넣어주어서일까 가슴의 문양도 반응하지 않았고 백려강의 푸른 영체에 희미한 색이 입혀지는 것으로 끝났다.

백려강의 유령 같은 모습에 색이 덧입혀지자 레심의 얼굴이 괴로움에 일그러진다.

=아가씨…….=

「레심…….」

=왜, 왜 그런 결정을 하신 겁니까…?! 어째서 죽음을 선택하신 겁니까, 아가씨…! 제게 말씀하셨다면, 제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환인 님께 안내해드렸을 텐데 어째서……!=

「…레심, 내 말 들려? 너한테는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어…….」

=그럴 수밖에 없었다니요! 아가씨는 영주님의 차녀이십니다! 누가 아가씨에게 죽음을 강요한단 말입니까! 차라리, 차라리 저에게 말씀하셨으면……!=

안타까움에 흐려졌던 백려강의 표정이 한순간 굳더니 잠시 후에는 일견 냉정하다 할 정도로 정색한다.

「그렇기 때문이야.」

고막을 상냥하게 감싸는 듯한 목소리와 다른, 호의를 차갑게 거절하는듯한 말투에 레심이 움찔하고 멈춘다.

「그날 일어났던 일은 내가 죽는 것이 가장 적은 피해로 사태를 봉합하는 길이었어. 내가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면 아버님도, 내가 탈출하는데 도운 레심도, 그리고 환인 님께도 피해가 갔을 거야.」

=그렇다고 죽음을 선택하실 필요는……!=

「레심. 네가 소꿉친구로 오랜 시간 날 좋아했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나는 당신을 그렇게 볼 수 없었어. 한 번도 그렇게 보지 않았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주제에 어찌 당신의 곁을 넘보겠습니까!? 저는,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소꿉친구인 당신이 그저 살아서 행복한 모습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단 말입니다……!=

자신을 보며 격정을 드러내던 것과 다르게 담담한 백려강, 그리고 백려강을 보며 격렬한 감정을 드러내는 레심.

두 사람의 묵은 감정을 무감각한 얼굴로 바라보던 환인은 자신을 바라보는 이실리테에게 입구에 가서 앞을 지키라고 지시한 뒤 가슴 포켓을 열었다.

그리고 아침 K­드라마에 열중하는 한국의 어머니들처럼 흥미진진해 하는 환연에게 말했다.

“환연, 몰래 나가서 유르파와 안느를 찾아라. 찾아서 이곳 상황을 전해준 뒤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전해다오.”

「알았어. 와, 대박. 영혼사와 호족 가문 영애와 기사 가문의 서자 사이 삼각관계라니.」

“그런 게 아니다.”

「응응.」

“…둘에게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알았다니까~.」

연신 감탄을 흘리며 천장의 작은 창문을 통해 바깥을 살핀 뒤 빠르게 날아가 버리는 환연.

환인은 작게 고개를 젓고는 백려강과 레심에게 다가갔다.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불같은 감정을 한바탕 토해낸 레심은 타다남은 장작처럼 초연한 모습이 되어있었다.

그것은 백려강도 마찬가지였다.

화톳불처럼 강하게 타오르는 감정과 마주한 덕에 자신의 어지러운 감정도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었던 것.

환인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한 백려강이 기운 없는 모습으로 말을 걸었다.

「환인 님…….」

“정확한 자초지종을 알아봐야겠지만, 그것을 고려해 반영한다 해도 백려강 당신은 너무 섣부른 결정을 내렸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도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초조해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예언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거기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면 시야가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 당신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사로잡혀있었던데다 알소프와 프라버 사이의 전쟁에 시발점이 되었다는 자책감, 침입자의 협박에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렸을 테니 충동적인 행동을 더욱 하기 쉬웠겠지요.”

그녀와 감응을 통해 본 침입자도 그 점을 노렸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 그걸 어떻게…….」

“저는 영혼사입니다.”

「…….」

세상의 아름다움을 집대성한 듯한 백려강의 얼굴에 재차 슬픔이 깃든다.

그가 영혼이 된 자신을 반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자신을 매도하는 것도 생각하지 못했던 백려강이었기에 지금은 그저 침울할 뿐이었다.

환인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 물었다.

“어떻게 지금까지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겁니까. 당신을 찾기 위해 영주가 영혼사까지 불렀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분들의 눈에 띄면 성불 당할까 봐 성의 꼭대기나 첨탑 끝, 지붕 구석에 숨어있었어요…….」

“절 다시 볼 기회가 오길 바라면서 말입니까.”

「네…….」

환인은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이 아가씨가 이렇게 막무가내의 성격이었던가?

흘려 넣어준 영기가 다 소모되었는지 백려강의 혼이 재차 푸른색으로 돌아간다.

그녀의 영혼의 색이 환인의 이목을 잡아당겼다.

‘푸른색이라니.’

보통의 영혼은 회백색이다. 악령은 검은색이며 혼재는 빨간색이다.

푸른색 영혼은 이때까지 단 한 번밖에 보지 못했었다. 혼재가 되어서까지 10년 넘게 이실리테에게 붙어있던 그녀의 자매, 아베트.

그때 일을 생각해보면 푸른색 영혼 그 자체가 무언가 강한 힘이나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백려강이 있는 자리를 훑던 레심의 시선이 두서없이 흔들리다가 아래로 향했다.

고개 숙인 레심을 잠깐 바라본 환인은 우물쭈물하듯 손가락을 꼼질 거리는 백려강에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누굴 탓하겠습니까. 일단 당신을 이렇게 둘 수는 없겠군요. 저와 함께 갑시다.”

「……! 네, 환인 님을 따라갈게요!」

자신이 백려강을 신경 써야 할 이유는 억지로 꼽자면 하나 정도뿐이다.

말 잘 듣는 영혼 척후병의 용도.

그러나 그것도 환연이 파티에 들어오기 이전의 이야기다. 환연이 파티에 합류하며 정령을 부릴 수 있게 된 지금에는 그 의미마저도 퇴색된 상태.

자신이 백려강의 영혼을 신경 써주어야 할 하등의 이유도 없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쓰이는 걸까.

역시 그 감응 때문인 건가.

환인은 자신을 간절히 바라보는 레심에게 말했다.

“부득이하게 예정을 바꾸어야겠습니다.”

=예…? 아, 확실히 이 상황에서 저희 저택에 머무는 건 곤란하겠군요. 나가시지요. 사람들에게 시켜 쿠에를 데려오라 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환인이 문을 열고 나가자 레심이 뒤를 따르며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한다.

=아가씨께서는 환인 님을 정말로 사모하셨습니다…….=

“…….”

=죽어서나마 새장을 벗어나 바라시는 것을 이루게 되었으니…… 부디, 아가씨께서 미련 없이 신님의 정원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잘 부탁드립니다, 환인 님…….=

“…….”

환인은 고개를 돌려 조금 신난 듯한 백려강을 쳐다보았다.

주먹을 꼭 쥐고 가슴에 당겨 들떠있던 백려강은 창피함이 올라왔는지 두 주먹으로 가려지는 얼굴을 숨기고 부끄러워한다.

죽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저 대범함이라니.

……대범함 맞겠지?

“저도 저를 위해 하나뿐인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여자를 내칠 정도로 못돼먹은 인간은 아닙니다.”

무려 4개월을 성불하지 않고 버틴 아가씨다.

언제까지 세상에 있을지도 모르고, 아베트의 경우를 생각해본다면 혼재가 되어버릴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 생각해보면 푸른색 영혼인 만큼 그녀의 미련을 풀어줄 때 아베트 때처럼 무언가 능력을 줄 수 있다.

아니면 그녀도 직업자인 만큼 산란못 미궁에서 성불한 직업자처럼 한 번에 몇 개의 영혼 구슬이 늘어날 정도의 영기 조각을 남겨줄 수도 있는 일.

이렇게 된 이상 그녀가 뭘 바라는지를 듣고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성불할 수 있도록 방도를 찾아주어야겠다고 속으로 결심하는 환인이었다.

* *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