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379화 (379/813)

〈 379화 〉 373 항구 도시 프라버

* * *

레심은 그 후 환인을 모시고 집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집사에게 그 이름을 들을 때만 해도 설마 했는데 정말로 환인 님이었을 줄이야.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크라빈의 미궁을 돌파하다 실종되셨다고 들었는데 무사하셨던 건가?

어찌 되었든 레심은 정말 오랜만에 기쁨을 드러내며 웃었다.

=정말 잘 찾아오셨습니다. 부모님과 형님, 누님들이 환인 님을 얼마나 만나고 싶어 하셨는지 모릅니다. 환인 님이 이렇게 직접 방문해주셨으니 틀림없이 기뻐하실 겁니다.=

“지나가는 길에 잠깐 여유가 생겨 들렀을 뿐입니다. 영도를 향해 다시 떠나야 하는 만큼 긴 시간 머무르지 못하는 것을 양해해주시길.”

=아…….=

금방 떠날 거라는 이야기에 레심의 표정이 쓸쓸함에 파묻혔다.

적잖은 심적 고통을 겪었음이 드러나는 얼굴이다.

=…아쉬운 일이지만 가야 할 길이 먼 분을 억지로 붙잡는 것만큼 예의 없는 짓은 없겠지요. 하지만 차 한잔하실 여유는 있다고 생각해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어떤 차가 나올지 기대되는군요.”

=하하하.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요르하, 환인 님 일행의 쿠에를 안뜰에 옮기고 야곱더러 극진히 보살피라 전해주게.=

=네, 도련님.=

비상과 쿠르티를 보내놓은 환인은 레심과 함께 저택으로 향하며 소소한 근황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대화에서 백려강이 언급되는 일은 없었다.

환인은 레심이 의식적으로 백려강이 언급될만한 이야기를 피하는 모습에 백려강의 머리카락 색만큼이나 푸른 장미가 흐드러지게 핀 덤불을 잠시 바라보다가…… 레심이 대답을 피하거나 주제를 돌릴 여지를 주지 않는 질문을 던졌다.

“오면서 무수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혹시 그 일, 저로 인해 벌어진 겁니까.”

=……환인 님….=

“솔직히 레심 씨가 무사하지 못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드린제 가문을 찾을 때는 영주님의 병력이 들이닥칠 각오까지 했지만 레심 씨는 무사하고 절 잡으려는 병력도 없군요.”

걸음을 멈춘 레심은 상심에 찬 남자의 얼굴로 생기가 넘치는 푸른 장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힘겨워하는 기색으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환인 님께서 비자룩스의 녹색 성자가 되지 않으셨고, 검희의 주인이 되지 않으셨다면 말씀대로 되었을 겁니다…….=

=…….=

=환인 님이, 몇 달만 일찍 오셨다면…….=

“……?”

저 문장에 함축된 뜻을 읽은 환인은 미간을 작게 찌푸렸다. 저 이야기대로라면 백중익도 자신을 우량주로 보고 있다는 말 아닌가.

그렇다면 백려강은 왜 죽은 거지?

눈을 감은 환인이 기감과 감각 확장을 펼쳐 주위에 듣는 귀가 없음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레심 씨. 아가씨는 왜 죽은 겁니까.”

=…….=

환인의 직설적인 질문에 괴로운 듯 눈을 질끈 감고 주먹을 쥔 레심이 부르르 떨었다.

호흡이 조금 거칠어지고 어깨도 오르내리며 격정을 참아내는 모습.

=알려지기로는…… 자살이었습니다. 구금되어있던 첨탑에서 뛰어내리신 것이지요.=

눈이 커진 이실리테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경악을 감춘다.

환인은 감정이 동요되지 않은 모습으로 재차 질문했다.

“조인족이 떨어져 죽었단 말입니까.”

=예. 아가씨의 시체가 발견된 곳도, 그 흔적도 전부 자살이라고 알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아가씨가 왜 자살한단 말입니까…!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레심이 울분의 눈물을 글썽이며 토해내듯 이야기를 쏟아낸다.

약간 두서없는 이야기를 환인은 적당히 쳐내고 걸러 들으며 시간순을 맞춰보았다.

백려강이 자살한 날짜는 환인이 크라빈 마을에 도착해 마악 산란못 미궁 공략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웨이포드에서 복귀한 날로부터 약 반년 후.

=아가씨는 웨이포드에서 돌아오신 뒤 호되게 꾸지람을 들으셨지만 기죽지 않으셨습니다. 의욕에 찬 모습으로 자기 자신을 가꾸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핑계 삼아 술법서를 모으고 고명한 고등급 바람 술사를 초빙해 실력 향상에도 힘쓰는 한편 여자가 쓸데없는 짓을 한다는 지적을 피하기 위해 몸가짐과 사교회 교육도 빠짐없이 열심히 공부하셨습니다.=

백중익은 그때까지만 해도 흡족해했다고 한다.

가출했다 돌아왔지만 시든 꽃처럼 의욕 없이, 기운 없이 지내던 딸이 생생해져서는 정략결혼을 대비하는 것처럼 규중처녀로서 배워야 할 많은 것을 열심히 공부했으니까.

물론 쓸데없이 직업자 능력을 단련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건강하고 오래오래, 잘 지내기 위해서라는 이유에 백중익이 직접 바람 술사 선생을 구해주었다고.

그렇게 몇 달이 지나 자신감에 자존감까지 갖춘 백려강은 더더욱 아름다워져 니오네브레스 제일의 미녀라 할 정도가 되었고, 그런 백려강을 그림으로 접한 알소프의 영주는 혼담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했다.

문제가 될 일은 아니었다. 정략결혼은 10년 전부터 오가던 이야기였으니.

그 무렵 비자룩스의 녹색 성자 이야기가 프라버를 강타했다.

단순히 혼재를 물리친 성자였다면 큰 이슈가 되지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건에 라수비탄 중부 도시 두 곳이 연관되어있었고 그 두 도시 사이에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형성되니 사안의 중요성이 대폭 늘었고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기 시작한 것.

=문제는 그때부터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아가씨가 정략결혼에 약간씩, 조금씩 회의감을 비추기 시작한 겁니다.=

당연히 대놓고 정략결혼을 거부하지 않았다.

고작 두어 달 사이 3급에서 4급 녹술사가 된 백려강은 결혼이 아닌 자신의 능력으로 가문에 이바지하면 안 되겠느냐는 어필을 조금씩, 약간씩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

“제 소식을 들은 직후부터 그러기 시작하셨다면…….”

=…예. 아가씨도 시류를 읽은 겁니다. 잘하면…… 환인 님과, 이뤄질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요.=

“…….”

물론 백려강은 환인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자신의 직업자 능력과 효율성을 무기로 부친을 설득했지만, 백중익은 허튼소리라며 일축했다.

백중익이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신경 쓰고 있는 것은 해양 무역의 안전성.

프라버의 위치는 알류겔 호수의 내륙 연안이라고 할 수 있는 장소에 붙어있다.

알소프가 악독한 마음을 품고 입구를 차단해버리면 프라버는 해양 무역이 완전히 막히게 된다.

이러한 위험성 때문에 프라버의 역대 영주들은 이 점을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신경을 써왔었고, 당대에 이르러 백중익은 니오네브레스 제일의 미녀라고 불리우게 된 딸을 알소프의 영주에게 시집보내 혈맹으로서 안전을 확보하려 한 것이었다.

고위 등급이 될지도 안 될지도 모르는 딸을 데리고 돈을 투자해가며 키우는 것보다 알소프에 보내 혈맹을 구축하는 것이 리스크 및 리턴 면에서 몇 배나 우월했던 것.

그러나 백려강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의 요청과 바람은 날로 강해졌고 그녀가 준비하는 자료 및 그녀가 보여주는 훈련량은 날로 늘어갔다.

그러던 와중에 또 하나의 소문이 프라버를 강타했다.

라드세아 남부의 패자, 위르트 8급 호족 가문에 대영웅 이실리테의 환생이라 여겨지는 검희 이실리테가 출현했고 그녀의 주인이 다름 아닌 녹색 성자라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소문이 퍼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비천하고 보잘것없던 도적 출신의 여전사가 녹색 성자를 만나 개과천선, 갱생을 통해 파르히스트 토너먼트에 출전하여 붉은 대검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5~6급 출전자들 사이에서 4급이라는 등급으로 출전해 당당히 준우승을 거머쥐었고 급기야 전설의 직업이라 불리는 검희로 각성, 헬루멘의 이름까지 등에 짊어진 인생 역전 스토리의 주인공이었기 때문.

시민들은 그러한 영웅의 출현에 열광했고 추종했다.

=그 소식이 프라버에 파다하게 알려졌을 때 아가씨는 영주님께 재차 강하게 요청하셨습니다.=

실은 웨이포드의 미궁에서 만난 분이 녹색 성자이시자 검희 이실리테의 주인인 영혼사님이며, 자신은 그분을 연모하게 되었다는 것.

거기다 종족 연합 국가의 엘위드리스 가문 영혼사 영애에게 예언을 들었으며 그 예언이란 자신이 원한 운명은 반드시 이뤄진다는 것.

백중익은 고민했다고 한다.

종족 연합 국가 메리아놀의 예언자 가문 장녀가 당시 웨이포드에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고, 엘위드리스 영애가 영혼사로 각성하며 미래예지시 능력까지 개화했다는 것도 사실이며, 딸과 친하게 지냈다는 것도 웨이포드의 사촌, 알드진=베레에게 들은 사실이다.

통신 수정구로 직접 확인까지 한 사항이다.

그러한 인맥을 형성했다는 사실 때문에 가출했지만 딸을 크게 혼내지 않고 꾸중만 하고 넘어갔던 거였는데 설마…….

=심각한 문제는 이때부터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도 알소프의 영주와 혼담이 차곡차곡 진행되고 있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알소프 측에서 백려강의 파혼 의지를 접했다며 불같이 항의해왔던 것.

이쪽을 우습게 여기고 업신여기지 않고서야 이럴 수 없다며 강하게 반발한 것이다.

자칫 프라버 ­ 알소프 ­ 라수비탄의 삼각 교역은 물론 왕래까지 끊어질 수도 있는 일.

그저 무역만 끊어진다면 큰 피해라곤 할 수 없다.

역대 영주들이 걱정해왔던 해상 봉쇄가 시작되면 프라버의 수입은 절반 이하로 떨어지게 된다. 사람들도 주도와 왕래하기 어려워져 고사할 판.

레심은 말하는 것도 힘겨운 듯 기운 빠진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영주님은…… 환인 님의 의사는 무시한 채 아가씨의 말씀만 듣고 진지하게 고민하셨습니다. 파르히스트, 헬루멘과 인맥을 맺게 된 환인 님과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묶이게 된다면 알소프와 한 번 해볼 만하지 않겠냐는 것이었지요.=

“…….”

환인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호족들과 거리를 두려 했던 거였는데 내가 없는 곳에서 멋대로 일이 진행되는군.

“그때가 4개월 전이었다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당연히 정략결혼은 없던 일이 되었고 프라버와 알소프 사이는 날로 악화되어갔다.

파르히스트와 크라버리처럼 프라버와 알소프도 전면전을 벌이는 게 아닐까 싶은 만큼 분위기가 흉흉해진 거다.

=알소프 측에서 이를 갈며 본격적인 보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들려올 무렵이었습니다. 환인 님께서 4개월 넘게 모습을 감추셨고…… 알소프는 기세가 등등해져서 프라버를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영주님도 격노해서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 알소프를 박살을 내버리겠다며 군을 모으기 시작하셨습니다.=

프라버와 알소프가 전쟁을 벌이면 알류겔 호수 자체가 위험 지역으로 변모한다.

사태의 심각성에 급기야 주도에서 중재를 나섰고 덕분에 전쟁이라는 최악의 사태까지 가진 않았지만…….

=소강상태가 되어가던 상황에 기름을 끼얹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일련의 사태에 책임감을 느낀 아가씨가 스스로 첨탑에 들어가 구금 상태가 되셨는데…….=

며칠 후 백려강이 그 첨탑에서 추락해 죽은 것이 발견된 것.

뒤에서 이실리테가 안타까움의 신음을 흘린다.

‘내가 몇 달만 일찍 왔었다면, 이라고 말했었지. 그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군.’

환인은 아까 백려강이 죽었다는 대목에서 떠올렸던 의문을 질문할 기회라고 생각하며 물었다.

“고명한 영혼사를 불러 아가씨의 영혼과 대화는 해보지 않았습니까.”

=다음날 영혼사님이 성에 초청되었다고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 후 결과는 제가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날을 기점으로 영주님의 분노가 극에 달해 조금이라도 수상한 인간은 곧장 사로잡아 고문하시는 것을 보면…….=

백려강의 영혼은 이미 성불해버려 만날 수 없었다는 거겠지.

‘이제야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느낌이군.’

르아웬이 말한 프라버의 험악한 분위기도 이걸 말한 거겠지. 따로 경고해주지 않은 것은 크게 위험할 일이 없을 거라 예상했기 때문일 테고.

알소프와 영도는 무척이나 가까운 편이다. 아무리 호족이라 해도 영도 바로 앞마당에서 영혼사에게 해코지할 수는 없겠지.

환인은 레심의 이야기에서 대강의 타임라인을 짜 맞춰보곤 르아웬이 해준 이야기까지 정리해 상황을 결론지었다.

‘내일 바로 프라버를 나가야겠군.’

백려강이 자살했는지 자살 당했는지는 이제 와 알 바 아니다.

그녀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며 이미 죽어 성불해버렸다면 혼도 현세에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

오래 머물러봤자 알소프에 자신의 행적이 알려질 경우 불편만 가중될 뿐이니 그냥 빠르게 뜨는 게 정답이다.

도시에 혼재가 쌓이고 있는 마당에 영주라는 자는 도시를 안정화하긴커녕 불안을 가속하는 이 상황에 자신이 뭘 한단 말인가.

자신이 평온의 파동을 빛기둥 형태로 발현시켰다고 해도 사태가 악화하면 악화했지 호전되지는 않을……?

——…….

생각을 정리하던 환인은 별안간 눈앞이 환해지며 하늘에서 천사처럼 내려오는 영혼을 볼 수 있었다.

눈물을 글썽이며 아름다운 한 쌍의 날개를 펼쳐 천천히 하강하는 푸른색의 여자 영혼.

정말로 순간 ‘천사인가?’라고 생각했을만큼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모습에 잠시 굳었던 환인은.

「환인 님……!」

“……아가씨?”

그 영혼이 백려강이라는 사실에 표정이 굳어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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