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378화 (378/813)

〈 378화 〉 372 항구 도시 프라버

* * *

레심의 가문인 드린제 저택을 찾아가기 전, 환인은 수상하게 안 보일 정도로만 정보를 수집한 결과 백려강은 정말로 사망했음을 알게 되었다.

프라버의 엽사 조합에 들러 알소프까지 가는 육로 지도를 구매하며 슬쩍 지나가는 말로 프라버에 이상한 분위기가 감돈다는 걸 어필했고, 어물쩍거리는 정보 담당자에게 1은화를 쥐여준 결과 내막을 들을 수 있었던 것.

=네에? 아가씨께서 도망을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어디서 들었어요?=

=밖으로 이야기는 돌지 않았지만 영주님의 성을 출입하는 분들 복장에서 모를 수가 없는 거죠. 그…… 일을요.=

=어느 날부터 상복을 입고 출입하는 분들이 늘어난데다 그 아가씨의 대외 활동이 완전히 중단되었으니까요.=

=어느 쪽이든 그런 일이 벌어진 것 자체가 불명예스러우니까 장례식은 당연히 치러지지 않았지만요.=

=……이런 이야기, 밖에서는 절대 하지 마세요. 손님도 어디 먼 나라의 귀한 집 자제이신 거 같아서 조심하시라는 의미에서 알려드린 거니까요.=

그리고 담당자가 해준 이야기를 통해 환인이 도달한 가설, 그건 어쩌면 백려강이 부친에게 살해당했을 수도 있겠다는 것이었다.

이실리테는 크게 충격받았다.

=마, 말도 안 돼요…. 어떻게 부모가 자식을…….=

“맹신하지 마라. 나도 확신하지 못하는 추측이니까. 가능성을 퍼센트로 나타내자면 20% 미만이다.”

「우음. 왜 그런 가설이 나왔는데?」

“…….”

당시 백려강은 자신의 처지에 우울해하다 미궁의 정신침해에 걸리고 말았고, 환인의 도움으로 정신을 차리며 삶의 의욕까지 되찾았었다.

정략결혼에 순응하기보단 자신의 미래는 자신이 거머쥔다는 느낌으로 기운을 차린 거다.

그런 여자가 자살한다고? 말이 안 된다.

오히려 그러한 마인드를 가지고 성에 돌아와 능력을 쌓다 보니 자아가 강해지는 것과 함께 자립심도 덩달아 커졌고, 정략결혼을 거부하며 자신도 가문에 도움이 될 거라 주장하다 분노한 부친의 손에 살해당했다는 쪽이 더 설득력이 높다.

그리고 백중익은 딸에게 그런 사상을 심은 놈들과 그런 놈들을 지원한 인간들까지 찾아 모조리 죽이고 있는 거고.

이야기를 들은 환연은 고개를 주억였다.

「루크랑 호족 남자의 괴물처럼 비대해진 자의식을 생각하면 그럴싸해. 하지만 뭔가 걸리는 부분이 있다는 거지?」

“그래. 이 경우 백중익은 날 찾아 죽이려고 벼르는 상태가 정상이다. 이렇게 편히 돌아다닐 수 없는 거지.”

=으음…….=

너무 비약적인 내용이 아닌가 생각하던 이실리테는 이어진 환인의 이야기에 몸을 떨며 삽시간에 공감해버리고 말았다.

“차녀의 정략결혼 대상인 호반 도시 알소프의 영주는 중년을 넘어 노년에 다다른 남자라더군. 조인족이지만 살이 너무 쪄서 날 수도 없는 노인 말이다.”

=윽.=

그런 뚱뚱한 돼지와 결혼해야 한다니, 너무 싫어서 두드러기가 날 지경이다.

그 외에도 사소하게 걸리는 점이 다수 있지만 하나같이 톱니바퀴 아귀가 맞지 않는 느낌이다.

만약 이 가설이 진짜라고 가정해보자.

가출하기 전만 해도 순순히 정략결혼에 응하려던 딸년이 가출한 뒤 돌아오자마자 사람이 바뀐 것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그럼 어떤 일을 먼저 할까.

뒷조사부터 할 것이다.

백려강이 자신을 향한 연정을 드러내지 않았더라도 부모라면 자식의 생각은 어느 정도 짚을 수 있는 법.

어떤 놈팽이에게 물들었는지 조사부터 할 것이고, 그 조사 시기가 언제인가에 따라 웨이포드에서 딸과 접촉한 영혼사가 녹색 성자이자 검희의 주인과 동일인이라는 걸 알게 되기도 하겠지.

자신의 정체를 대강 알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라면 죽인다.’

딸에게 나쁜 물을 들인데다 여러 손해를 끼치는데 영혼사가 대수인가.

머리에 피가 쏠려 눈이 돌아간 상태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행동이다. 눈이 돌아가 버렸는데 후환을 생각할 여유가 어디 있겠나.

‘영식을 생각한다면 영내에서는 어쩌지 못하겠지만, 프라버 권역 밖에서 죽여버리면 피해는 전혀 없으니…….’

자신을 추적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지. 조인족 부하도 많으니 하늘에서 쫓아오면 피할 도리가 없다.

여기까지 생각한 환인은 역시 말이 안 된다고 중얼거렸다.

비자룩스의 녹색 성자 이야기는 빠르게 라드세아 전역으로 퍼지고 있다고 알고 있다.

헬루멘에서 자신의 영혼 기사가 검희로 각성하며 영웅 기사단 친선 시합에서 우승까지 거머쥔 이야기도 함께 퍼지는 중이다.

자신을 공격한다는 것은 검희인 영혼 기사까지 공격한다는 뜻이고, 검희를 공격한다는 건 곧 헬루멘을 공격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자신을 적대한다는 것은 헬루멘과 전쟁을 벌이겠다는 말과 동일하다. 프라버의 영주씩이나 되는 자가 그런 멍청한 행동을 저지를까.

‘음…….’

생각의 곁가지가 레심의 존재에 닿는다.

레심의 행동은 백려강을 웨이포드까지 끌고 갔다는, 이른바 납치의 혐의를 씌울 수 있는 행동이었다.

영주 가문 일족도 아니고 흔한 하급 호족의 자제라면 홧김에 목을 쳐날려도 이상하지 않겠지.

그의 사지가 제대로 붙어있는지 궁금하다.

이 때문에 환인은 백중익이 자신을 적대하는지, 그리고 레심의 목이 잘 붙어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정보 수집을 중단, 레심의 가문인 드린제 저택으로 향했다.

어느 도시든 호족 거주지는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한다. 거리의 품위와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게 그 명목이다.

그렇기에 호족 거주지의 거리는 도시의 치안을 담당하는 병사들이 종종 거리를 따라 순찰한다.

저벅저벅.

환인도 비상을 타고 잘 닦인 포장도로를 따라 이동하며 3인 1조의 정규군 순찰조와 종종 마주쳤지만, 그들은 환인에게 잠깐 시선만 주었을 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태도로 스쳐 지나갔다.

전부 환인의 차림새 때문이었다.

환인이 입고 있는 후드 망토는 4급 마수의 가죽을 유르파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 재단한 것으로 그냥 보아도 고가의 마도기였으며 의복은 이실리테가 헬루멘 백화점에서 신경 써서 준비한 옷들이다.

한마디로 비싼 티가 드러나는 의류라는 뜻.

여기에 큰 키와 우월한 신체 비율, 그리고 깃털 색을 회색으로 바꾼 비상을 타고 있다.

그냥 보아도 잠시 외유를 나온 호족으로 보이는 수준인데 그런 환인을 고가의 활동성 강한 바지 타입 하녀복을 입고 범상치 않은 기사검을 허리에 찬 여자가 밀짚색 쿠에를 타고 수행 중이다.

호족은 겉치레를 무척이나 신경 쓴다는 게 정설로 굳어져 있는 만큼 병사들의 눈에 환인은 영락없는 호족이었던 것.

덕분에 환인은 구역을 순찰 중인 병사들의 제지를 받지 않고 한산하기 짝이 없는 거리를 걸으며 거리를 꾸미고 있는 호화롭고 커다란 저택을 여유롭게 살필 수 있었다.

“호족 거리는 어느 도시를 가든 똑같군.”

=그러네요. 시가지랑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크고 화려하고…….=

웨이포드, 파르히스트, 헬루멘.

지금까지 들렀던 도시의 호족 거리는 건축 양식만 약간씩 다를 뿐, 대부분 건물이 최소 3층 이상에 마구간과 별채는 반드시 붙어있고 큰 곳은 넓고 잘 가꿔진 정원도 있었다.

프라버의 호족 거리도 마찬가지다. 마치 호족이라면 이래야 한다는 기준점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환인은 입구마다 근무를 서고 있는 개인 사병들의 차림으로 눈을 돌렸다.

스컬캡 형태의 번쩍번쩍한 철투구, 햇빛을 반사하는 사슬 갑옷에 서코트, 가죽 부츠와 헬버드를 세우고 등에는 타워실드를 맨 경비병들.

어딘가에서 경비병 패키지라도 판매하는지 각 저택 경비병들의 차림이 전원 똑같다. 다른 것은 서코트의 무늬뿐.

“…….”

쇠창살로 이루어진 담장 너머로 정원을 손질하는 정원사나 밖에 나와 무언가 작업 중인 하녀들의 표정을 유심히 살핀 환인은 생각 외로 표정이 밝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고용인의 표정은 고용주의 그 날 성격에 따라 바뀌는 게 정설이다.

고용주가 히스테릭해지면 고용인도 고달파져서 표정에 피로가 묻어나기 마련인데, 아무리 영주라고 해도 호족들은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 건가.

그때 도시 지도(3은화)를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이실리테가 환인을 불렀다.

=주인님, 저기가 드린제 가문 저택이에요.=

이실리테가 가리킨 곳은 근처의 다른 저택과 별반 차이 없는 무난한 고급 저택이었다.

700평가량 되는 정원. 그 절반 정도의 바로크 양식 3층 저택.

다만 원형 돔이 없고 약간 비례적인 느낌에 장식도 무난해서 바로크 양식에 건축가 개인 기호가 들어간 느낌이다.

=다 비슷비슷해서 찾기 어려웠어요……. 누구네 집이라고 적힌 것도 없구.=

“명패를 붙여놓으면 편리할 텐데 쓸데없는 곳에 품위를 고집하는군.”

애초에 품위라는 것 자체가 허울이지만.

비상의 목을 툭툭 쳐서 드린제 저택 정문으로 향하니 무료한 기색을 약간 드러내며 환인과 이실리테를 구경하던 경비병 둘의 안색이 변한다.

=멈추십시오. 이곳은 드린제 2급 호족 가문의 저택입니다. 어떻게 찾아오셨는지 용건을 말씀해주십시오.=

환인은 투구 때문에 어떤 종인지 알 수 없는 여자 경비병을 내려다보며 살짝 목소리를 깔고 루크랑 어로 대답했다.

=프라버를 지나가는 길에 레심 드린제, 그 친구와 한 약속이 생각나 만나러 왔소.=

=……레심 도련님을 말입니까?=

=프라버를 방문하면 꼭 드린제 가문을 찾아달라 했었지.=

나무랄 데 없는 호족적인 말투와 살짝 낮게 깔린 목소리, 그리고 밀짚 쿠에보다 족히 머리 두 개는 더 큰 거대한 쿠에를 탄 환인의 모습은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경비병 둘은 잔뜩 긴장한 태도로 이실리테의 옷차림과 허리춤의 기사검을 확인하곤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구라고 전해드리면 되겠습니까?=

=환인.=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정원을 제외해도 1,000평은 넘어 보이는 저택으로 들어가는 경비병을 보며 환인은 최악의 가정이 일어나지 않았음을 눈치챘다.

이 경비병들의 반응을 보면 레심은 살아있는 게 틀림없다. 사지도 멀쩡하겠지.

거기에 자신의 이름을 밝혔음에도 경비병들의 안색이 특별히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의 인상착의가 영주성으로부터 전해지지 않았으며 별도의 지시도 없었다는 뜻.

‘내가 백중익이었다면 딸의 사상을 뒤틀어버린 놈의 뒷조사는 물론 접촉한 레심의 가문에 따로 지시를 내렸을 텐데.’

몽타주나 인상착의를 배포해 눈에 띄는 대로 잡아들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지 않았다는 건…….

환인은 저택에서 주인을 만난 강아지처럼 달려오는 익숙한 회색 모피의 늑대 머리 인간을 발견하곤 작게 웃으며 비상의 등에서 내렸다.

=환인 님!=

그리고 그 야윈 몰골에 웃음을 지웠다가 빠르게 다시 짓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환인 님!=

“예, 오랜만입니다. 잘 지냈습니까.”

=저야 어제가 오늘 같은 훈련의 연속인 나날이었지요. 그러나 무료하지는 않았습니다. 환인 님의 명성이 날로 높아져 하루가 멀다 하고 소식이 전해졌거든요. 특히 비자룩스의 녹색 성자님이 환인 님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는 어찌나 가슴이 설레던지, 환인 님 같은 분과 아는 사이라는 사실에 잠을 못 이룰 정도였습니다.=

“덕분에 고생 좀 했습니다.”

=하하하하! …응?=

시름으로 야윈 듯한 얼굴의 레심은 그런 안색이 지워질 만큼 환한 미소로 환인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그리고 환인의 뒤에 서 있는 이실리테를 보곤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이실리테 양…… 맞으십니까? 어째서……?=

이실리테의 아우라가 없다는 것에 의문을 품었던 레심은 이실리테가 약간 곤란한 듯이 웃는 얼굴에 ‘아!’ 깨달음을 얻고 웃으며 숙녀에게 인사하듯 가슴에 손을 올리고 허리를 숙였다.

말없이 행동으로 표현하는 숙녀에 대한 경의.

이실리테도 그 점을 깨닫고 살짝 당황했지만, 여자가 아닌 무인으로써 그녀도 한쪽 가슴에 손을 올리고 예의를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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