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7화 〉 371 항구 도시 프라버
* * *
이마에 올려진 물수건을 내려 이실리테에게 돌려준 환인이 반쯤 누워있던 자세를 바로 한다.
“……어쨌든, 이 문양이 단순히 차원 이동에만 쓰이는 게 아니라 영혼술의 위력과 효력 증가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걸 알았다. 정확한 건 도시를 나간 뒤에 실험을 해봐야 알 수 있겠지만, 확정이라고 봐도 되겠지.”
=어? 효과도 늘었어?=
환인의 가슴에 살짝 손을 얹어 열기가 있는지 확인해보던 안느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모아둔 정령의 구슬이 모두 사라졌다. 오누이의 영혼도 챙겨뒀는데 성불했는지 없어졌군. 방금 쓰러질 때 확인 한 거지만, 광장의 혼재 예비군들도 전원 성불했다. 평온의 파동이 강해졌다는 뜻이겠지.”
여자들은 입을 살짝 벌리며 놀라워했다.
그저 평온의 파동으로만 영혼을 성불시키다니?
“이번에는 예측하지 못한 일로 약간의 낭패를 겪었지만, 오히려 이럴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나쁜 일은 아니다. 앞으로 여행이 좀 더 순조로워지겠지.”
다만 영도에 도착했을 때가 문제인데…….
‘그때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영혼사의 상위 희귀직업이라고 우겨볼까.’
=응, 그런 거라면 다행이고.=
=자기, 몸은 어떠니? 어지럽다거나 이명, 난청 같은 게 생긴다거나 그러진 않아?=
“지혜열이 오른 것처럼 두통과 함께 머리가 좀 뜨겁습니다만 이 정도는 씻고 한숨 자고 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이야기를 들은 유르파는 환인의 이마에 손을 올려 열을 재보곤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자기는 쉬도록 해. 나는 나가서 소문 좀 수집해볼게. 휴베이아 상단주가 말한 정보의 진위도 알아보고 아까 빛기둥에 대한 소문이 어떻게 퍼지는지도 알아보고 만들어둔 마도구랑 중핵 가죽을 팔 곳도 알아보고.=
=나도 같이 가. 언니 혼자 보내는 건 좀 불안하니까. 이슬이는 도령 씻는 거 도와주면 되겠다.=
=응. 조심해서 다녀와.=
환인이 무사함을 확인해 마음의 여유를 되찾은 여자들은 알아서 해야 할 일을 찾아 움직였다.
역사상 (예상대로라면) 한 번도 알려지지 않은 현상이 벌어졌다.
일반 시민들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기더라도 영주성이나 행정관 같은 기관에서는 틀림없이 연유를 알아내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소지품을 챙겨서 외출하는 유르파와 안느를 배웅한 이실리테는 곧장 환인의 목욕 준비를 시작했다.
객실은 방 다섯 개에 욕실은 세 개였는데, 하나는 대욕실로 자신에게도 익숙한 다인용 욕실이지만 나머지 두 개는 뭔가 1명이 들어가면 딱 맞을 듯한 돛단배 비슷한 생김새의 욕조가 설치되어있었다.
수위 조절과 온도조절 방식도 조금 특이했지만, 하녀 기술원에서 배운 것은 이런 욕조의 구조와 응용 원리도 있었기에 손쉽게 사용법을 알아내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수온을 맞춘다.
=주인님, 발밑이 미끄러우니까 조심하세요.=
“그래.”
그리고 환인을 부축해 욕실로 들어온 이실리테는 그가 욕조에 들어갈 수 있도록 몸을 지탱해준 뒤 재빨리 목욕용품을 챙겼다.
지구에서 사 온 바디 워시를 분석한 유르파가 약초 등 몸에 좋은 것으로 최대한 비슷하게 만든 세정제와 샴푸, 트리트먼트에 바디오일과 바디로션, 목욕스펀지 등이다.
=물 온도는 어떠세요?=
“좋군…….”
온몸을 지지는 듯한 뜨거운 물에 어깨까지 담그니 5kg의 무게추를 달아놓은 것처럼 묵직하던 뒷머리에 열기가 올라오며 머리가 한결 가벼워진다.
환인이 몸을 담그는 사이 이실리테는 습기를 먹어 눅눅해지고 몸에 달라붙는 웃옷을 벗고 축축해진 바지도 벗어 셔츠에 팬티 차림이 된다.
움직이기 편해진 이실리테는 바로 목욕 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주인님, 뒤로 누우시고 머리를 이쪽으로…… 잠시만요, 목에 수건 받쳐드릴게요.=
본격적으로 시중을 들기 시작하자 이 욕조가 어째서 이런 형태인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말 그대로 편히 시중받기 위한 형태의 욕조다.
완만한 곡선의 등받이 쪽에 등을 대면 뒤에서 어깨와 팔의 안마는 물론 머리 감기기도 쉬웠고 욕조 외부에는 물 온도를 확인하기 쉽도록 열이 전달되는 금속판도 있었던 것.
손가락에 힘 조절을 세심하게 하며 그의 머리를 감겨주던 이실리테는 욕조에 작은 통을 띄우고 그 속에서 온천욕을 즐기던 환연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거렸다.
「환인. 가슴에 그림의 빛이 좀 약해진 거 같은데 그 가슴 문양의 빛은 에너지 남은 양을 표시하는 거 맞지?」
“그래.”
「지금은 얼마나 남은 거야?」
“이실리테, 거울을 건네주겠나.”
=네, 주인님.=
그의 어깨를 안마하던 이실리테는 재빨리 손거울을 건네준 뒤 지압혈을 꾹꾹 누르며 안마를 이어나간다.
손거울을 건네받은 환인은 자신의 가슴을 비춰보았다.
오늘 아침까지는 환한 빛을 내뿜던 문양의 빛이 조금 감소했다. 니오네브레스로 돌아왔을 때의 밝기를 0이라고 하고 하늘 고래를 만난 직후를 100이라고 한다면 지금은 60정도.
「아까 그 평온의 빛기둥을 펼치는데 40%나 썼다는 거야?」
“그래.”
「에너지를 엄청나게 많이 쓰네. 효율 꽝인 거 아냐?」
“그땐 힘의 가감 없이 전력으로 펼쳤으니까…….”
「음. 차원 이동을 해주는 에너지를 절반이나 써서 나한테도 찌릿찌릿 영향이 왔나 보네.」
“…정령이 모두 사라졌을 정도니까……. 너도 반은 정령인 만큼 그 영향을 받은 거겠지…….”
자신에게서 가장 가까이 있어 그 파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탓도 있을 테고.
「반반이라서 다행이라고 봐야 하나? 온전한 정령이었다면 타격을 받았을 거 같으니까. 아, 이실리테 나도 입욕제 넣어줘.」
=어떤 거로 넣어줄까?=
「장미 향이 좋아.」
=자, 여기.=
「…으음~ 스멜……? 아푸푸!」
자연스럽게 한국식 어휘를 입에 담는 환연의 머리 위로 목욕물을 뿌려준 환인이 지적한다.
“니오네브레스에서 한글 특유의 유행어는 될 수 있으면 쓰지 마라….”
「왜? 이제 환인이 차원 방랑자라는 거 알려져도 크게 지장 없지 않아?」
물 온도를 다시 맞추느라 조작판을 만지던 이실리테의 손이 일순간 멈췄다가 다시 움직인다.
“…지장이 없는 것은 홀로 나라와 싸울 수 있을 때라야 지장이 없다고 하는 거다…….”
「알았어. 앞으로 조심할게.」
“……아무튼, 유르파와 안느가 가져오는 정보에 따라 바로 프라버를 뜰지 결정하면 되겠지…. 그러니 그동안 이 주변을 수상하게 맴도는 사람은 없는지, 환연 네가 감시해라…….”
「지금도 애들을 통해 지켜보고는 있어.」
“그래…….”
39도 목욕물 온도에 체온이 오르고 어깨와 머리에 마사지와 지압을 받고 있으니 몸이 노곤해지며 기분이 좋은 나른함이 밀려온다.
환연이 뭐라고 말을 거는 게 느껴졌지만, 대답하기 귀찮아진 환인은 적당히 손을 흔들어준 뒤 눈을 감고 몸에 힘을 뺐다.
=…인님, 주인님.=
“……음.”
=욕조에 너무 오래 들어가 계세요.=
눈을 뜬 환인은 그새 40분 정도 지났음을 깨달았다.
환연은 이미 나갔는지 없고 이실리테만 욕조 옆에 바짝 붙어 자신을 걱정스레 올려다보고 있다.
손을 들어보자 물을 먹은 피부가 심하게 쭈글쭈글해진 게 보인다.
팔을 뻗은 환인은 이실리테의 턱을 잡고 그녀의 입술에 키스해준 뒤 욕조에서 빠져나왔다.
“고맙다. 덕분에 머리가 가벼워졌군.”
=녜, 네엣…!=
빈말이 아니라 그 40분 사이 머리가 가벼워지며 사고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옷을 챙겨입고 넓은 거실을 걸으며 생각을 정리한 환인은 이어 간단히 몸을 씻고 나온 이실리테를 끌어안고 카우치에 눕는다.
품에 안긴 그녀의 목덜미와 가슴골에서 여자 특유의 좋은 향기가 올라오는 데다 따뜻한 체온까지 더해지니 이보다 만족스러울 수가 없다.
“이실리테. 레심 씨를 보러 가고 싶나.”
=보면 좋지만 안 보더라도 괜찮아요. 인연이 닿는다면 훗날 또 만날 기회가 올 테고 그때 고마움을 담아 인사하면 되니까요.=
“좋은 마음가짐이군. 그래도 솔직하게 고르라고 한다면 어느 쪽이지.”
=……사실은 조금, 만나보고 싶어요. 만나서 당신 덕분에 제가 이만큼 강해질 발판을 마련해주었다고 알려주고 싶거든요.=
환인은 대답 대신 솔직하게 말한 그녀의 뒷머리를 자상하게 쓰다듬어주었다. 그 손길이 기쁜지 환인의 팔 안쪽으로 조금 더 몸을 붙이는 이실리테다.
그런 그녀를 좀 더 강하게 안아주며 서늘한 눈빛으로 호텔의 천장을 가만히 응시했다.
요즘 들어 자신을 이 세계로 끌어들인 놈들을 향해 귀찮음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
이건 아무것도 하기 싫고 그냥 드러누워 있고만 싶은 귀찮음이 아니다. 짜증 나고 꼴 보기 싫고 근처에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성가셔서 발생하는 귀찮음이다.
“…….”
니오네브레스의 여행이 마음에 드는 것도, 자신의 성장이 체감되는 것도, 좋아하는 여자들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그로 인해 평범한 사람의 감정도 조금씩 알아가고 있고, 이것 때문에 감정의 기복과 낙차가 심해져 예전처럼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마냥 좋은 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닌 이세계 여행.
지구에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것들을 이세계로 끌려와 얻게 되었지만, 이게 그놈들을 향한 불쾌한 감정의 희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 여행에서 얻은 것들은 전부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거다. 그놈들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생각하면 할수록 기분이 나빠진다. 거기다 이런 불쾌한 감정의 연장선이 되려는 놈들이 자꾸만 출몰한다.
‘프라버의 영주…… 이름이 백중익이었지.’
백중익이 자신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려는 건지 아닌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예감이 말하고 있다.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간만에 잘 돌아가는 머리로 상황을 정리하고 해야 할 행동을 정하던 환인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외출하지.”
=네, 주인님.=
환연은 이실리테와 함께 밖에서 나름 정보 수집중인 환인의 가슴 포켓 안에서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만한 일이 벌어졌으니 환인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많아질 거야. 딱히 영주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말이야. 도시의 4대 교단 지부라던가. 거기에 대비는 되어있는 거야?」
그 질문에 환인은 비상의 등에서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살피며 대답한다.
“이쪽이 대비해야 할 이유가 있나.”
「……응?」
“오히려 평온의 파동을 빛기둥으로 펼친 영혼사를 찾아낸다면 어떻게든 초대해 인맥을 쌓고 좋은 이미지를 주기 위해 노력할 거다.”
「…….」
“거기다 영주는 물론이고 다른 자들도 알고 있겠지. 현재 도시 곳곳에 처형장이 있고 그런 처형장에 예비 혼재군이 성장하고 있을 거라는 걸.”
어디까지나 이쪽이 갑이다는 걸 담담한 설명으로 전하는 환인을 향해 환연이 눈을 깜빡였다.
크라빈 마을을 나올 때부터 의욕이 낮고 주변에 무관심하던 태도가 조금 변한 느낌이다. 뭔가, 무뎌졌던 날이 날카로워졌다고 할까.
=주인님. 아까 들렀던 광장의 혼재는 강제로 성불 당했다고 하셨잖아요. 다른 데는 평온의 빛기둥에 강제 성불 당하지 않은 거예요?=
“그건 빛기둥의 중심부에서 멀어질수록 효력이 떨어지나 보더군. 오히려 예비 혼재들의 정신을 일깨워 주변 영혼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상태다.”
「오. 개막장 예감.」
=…….=
쿠르티를 타고서 환인의 옆을 따라가던 이실리테는 환연을 잠깐 어이없어하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 약간의 긴장감이 깃든 프라버 주민들의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가 혼란에 휩싸이면 레심 씨네 가문도 힘들어질 텐데…….
‘……그런 걸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레심 씨는 가문을 나와 모험가가 되려고 하니까 이 기회에 가문을 나와도 괜찮겠고.’
이실리테는 레심을 만나면 어떤 말로 고마움을 표시할지 생각하며 허리춤의 기사검을 매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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