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6화 〉 370 항구 도시 프라버
* * *
이실리테와 안느, 그리고 마차의 쪽문을 통해 밖을 보고 있던 유르파는 심장이 떨어지는 것처럼 놀랐다.
한 걸음 내디딘 순간 2초 정도 움직임을 멈췄던 환인이 갑자기 어마어마한 빛의 파동을 내뿜으며 가슴께를 움켜쥐고 쓰러졌던 것이다.
=주인님!!=
=도령?!!=
세상이 회백색 빛으로 물들어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검희로 각성해 거리감이 타인과 비교해 몇 배나 발달된 이실리테가 가장 먼저 뛰쳐나가 쓰러지기 직전의 환인을 받쳤다.
이어 간격 조절이 누구보다 중요한 전열 탱커로써 십몇 년을 싸워온 안느도 도착해 그녀와 환인을 동시에 끌어안는다.
=이슬아, 마차 안으로! 지금 당장 여길 벗어나야 해!=
=응!=
회백색 빛. 이게 평온의 파동이 맞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멀리서도 보였다면 도시 방위 병력이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 위해 즉각 들이닥칠 거다.
오해든 뭐든 안 사려면 그전에 자리를 피해야 한다.
곧장 마차로 돌아온 이실리테는 바로 환인을 마차 안으로 옮겼고 안느는 마부석으로 뛰어올라 이 와중에도 혼란스러워하지 않고 쿠? 꾸우. 우는 쿠에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돌아가자! 비상아! 어디 있어?!=
쀼엑!
=앞장서서 애들 좀 이끌어줘! 아까 하얀 새 동상 있지?! 거기로 가면 돼!=
큐웃!
처음에는 바로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회백색 빛이 짙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밝기가 천천히 옅어지며 주위 사물의 윤곽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기에 이동에 지장은 없는 상태.
비상과 쿠에들에게 이동을 맡긴 안느도 재빨리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이슬아, 율이 언니. 도령은 어떻게 됐어?=
=정신을 잃은 상태야. 안느 아가씨, 성술로 자기 상태 검진 좀 해주렴. 위상류 때문에 잘 안 통할 테니까 될 때까지 여러 번 써야 할 거야.=
=으응.=
가장 먼저 환인을 마차로 데리고 들어온 이실리테는 더 이상 자신이 할 게 없어 안느에게 자리를 비켜준 뒤 유르파와 안느의 응급처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싸우고 밥하는 거 말곤 못 하니 이럴 때면 아무런 손도 못 쓰는 무기력한 자신이 너무 싫다.
=…….=
이실리테가 뒤에서 초조하고 불안해하는 것도 모를 만큼 교단의 징표를 쥐고 정신을 집중한 안느는 그의 손목을 통해 성술 생명력 감지를 펼쳤다.
……아잇, 진짜 이놈의 위상류!
안느는 속으로 왈칵 짜증을 부리면서 세 번, 네 번 연달아 펼치고서야 간신히 성술의 발동을 성공시켰다.
만약 산란못 미궁을 돌파한 뒤 신체 강화 성술을 연구하고 시엘라의 생명력 탐지를 분석하며 기량을 올리지 않았다면 열 번도 넘게 써야 했을 거다.
발동한 성술로 환인의 몸 안을 빠르게 살폈지만 부조화가 일어난 곳이 없다.
다시 한번 처음부터 차분히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폈지만 마찬가지다. 사정을 몰랐다면 그냥 잠든 거구나 싶을 정도.
=일단 몸 상태는 멀쩡해. 아무런 이상이 없어. 맥박이랑 숨결도 고르고 몸이 굳은 곳도 없고.=
=그, 그런데 주인님이 왜 쓰러지신 거야?=
자신도 모르게 끼어든 이실리테의 질문에 안느가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가능성은 하나뿐이야. 도령이 거기서 뭔가 영혼이랑 접촉한 거. 도령은 영혼들과 만나면 감응부터 한다고 했잖아. 아마 그 공터에 영혼이 많았을 테고 감응이 과부하를 일으켰을 가능성이…….=
=잠깐, 잠깐만. 자기는 지금까지 수십 명의 영혼을 동시에 감응했어도 괜찮지 않았니?=
주머니에서 온갖 약초와 약병을 꺼내던 유르파의 참견에 이실리테가 눈을 번쩍이며 소리쳤다.
=아! 그, 카턴 마을에서 알드헬름한테 살해당한 아가씨, 악령이 되어가던 아가씨랑 감응하셨을 때요! 그때 얼굴을 찌푸리시면서 조금이지만 거부반응을 보이셨었어요!=
=거부반응? 혹시 아까 그 작은 광장에 혼재가 엄청 많았다거나 그런 걸까?=
=……바닥에 핏자국이 넓었던 걸 보면 처형장이었거나 비슷한 용도로 사용된 장소였을 거야. 말도 안 되는 일로 억울하게 살해당했으면 혼재가 됐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겠지.=
=그러네. 휴베이아 상단 주인이 한 말에 따르면 그런 일이 몇 개월 전부터 계속 벌어지고 있었다고 했으니까. 4개월도 전부터 계속 그런 일이 이어졌다면 혼재가 만들어져도 이상하지 않아.=
유르파와 안느의 문답에 이실리테가 혼잣말처럼 말한다.
=그럼 감응을 너무 심하게 하셔서… 충격에 평온의 파동을 쓰시고 기절하신 건가…….=
=응? 이슬이 아가씨, 평온의 파동이라니?=
=네? 지금 밖에 저 빛 말이에요. 평온의 파동의 빛……이 아닌 거예요…?=
유르파는 잠시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러고 보니 밖을 아직도 채우고 있는 저 빛은 뭐지? 저게 평온의 파동 맞나? 평온의 파동은 이름 그대로 파동을 일으켰다가 사라지는 건데?
몇 초 정도 바깥을 바라보던 여자들은 저것보다 환인의 상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서로에게 묻는다.
=그런 거보다, 주인님을 어떻게 해? 안느, 정신 치료 성술을 쓰면 안 돼?=
=평온의 파동이 가장 뛰어난 정신 안정제잖아. 그거보다 뛰어난 게 어디 있다고…….=
=그럼 어떡해? 유리 언니, 언니가 만들 수 있는 약 중에 각성제 같은 건 없나요?=
=정신 쪽 약품은 되게 민감해서 진짜 조심해서 써야 해. 환자의 정확한 상태를 알아야 하는 거라구. 이럴 때 아니면 쓰지 말라고 지침까지 잡혀있는데……!=
=각성제! 율이 언니, 각성제는?=
=각성제는 인위적인 정신적 쇠약이나 미약 상태를 깨우는 거지 지금 자기 상태에 통할지 알 수 없어. 아, 어쩌지……!=
각성초를 말린 뒤에 태워서 연기라도 쬐어줘야 하나? 정신 공격에 쓰러진 사람을 깨우는 데 쓰이는 방식이니까 어느 정도 통하는 면이 있긴 한데…….
유르파가 지금 환인의 상태에 쓸 수 있는 제약을 고민할 때 안느도 잠에서 깨우는 성술이나 기절을 치료하는 성술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극심하게 고민했다.
그때 환인의 가슴 포켓이 들썩거리기 시작한다.
그걸 본 이실리테가 닫혀버린 포켓 입구를 열어주자 그 속에서 환연이 엉금엉금 기어 나오며 죽는 것처럼 앓는 소리를 낸다.
「으아이고…… 이,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래….」
강력한 영적 파동을 가장 가까이서 쬔 바람에 덜컥, 기절했던 환연이 머리를 감싸 쥐고 끙끙거렸다.
머리도 지끈거리고 뭔가 두들겨 맞은 것처럼 온몸도 아프다. 요즘 잠자리가 좀 험한데 자리를 바꿔야 하나?
그러다가 주위를 둘러보곤 미간을 잔뜩 좁혔다.
안절부절, 조바심에 초조해하는 세 명도 그렇고 마차 창밖은 또 왜 저렇게 환해?
「무슨 일이야?」
=아, 환연아…….=
적절한 치료법을 생각해내느라 바쁜 안느와 유르파 대신 이실리테가 상황이 이렇게 된 자초지종을 설명해준다.
그걸 전부 들은 환연의 선택은 간단했다.
「쏟아져라, 물!」
촤아아악!
=힉? 야아!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연이 너!=
환인의 얼굴로 쏟아진 물벼락에 10대 소녀들처럼 꺅꺅거리는 여자들을 잠시 한심스럽게 바라본 환연은 바닥에 쏟아진 물을 창밖으로 휙 던져버리며 말했다.
「너희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해. 환인이 기절해서 놀라고 당황한 건 이해하지만 말이야.」
그러면서 척, 젖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몸을 일으키는 환인을 가리킨다.
「사람은 튼튼해서 어지간해서는 안 망가진다고 환인이 그랬거든?」
=주인님!=
=도령!=
정신을 차린 환인에게 덥석 안겨드는 여자들을 보며 환연은 흥, 콧방귀를 꼈다.
걱정할 사람을 걱정해야지.
갑자기 터져 나온 빛의 폭발이 도시를 뒤덮을 정도였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도로 교통이 마비되어 좀 시간이 걸리고 시민들이 우왕좌왕하며 길을 막는 등 약간의 헤프닝이 있었지만.
=방 번호가... 5401, 여기야.=
일행은 어찌어찌 안느가 예전에 머물렀던 호텔을 찾아 체크인을 할 수 있었다.
5층 건물의 5층에 동쪽, 호수 방향으로 커다란 창문이 난 남국풍 인테리어의 객실.
관광 도시로도 이름을 날리고 있는 도시답게 훌륭한 시설의 입식 거실에 모인 여자들은 약간 피로한 안색의 환인에게 붙어 외투와 조끼를 벗기고 차갑고 시원한 물을 쥐여주고 소파에 앉힌 뒤 물에 적신 수건을 이마에 올려주는 등 환인을 지극 정성으로 챙겨주었다.
그렇게 다들 한숨을 돌렸을 때 안느가 환인의 조금 파리한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령,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왜 기절한 건데?=
“…너와 이실리테가 말했던 대로다. 그 광장에 혼재로 변해가는 중인 영혼이 아홉 있었는데 그들의 기억이 한 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그 충격에서 벗어나려고 평온의 파동을 발사한 거였고.”
=기억이?! 자기, 몸은 괜찮은 거니!? 빙의나 기억의 혼탁 같은 건 없어?!=
크게 놀라 가까이 붙는 유르파에게 환인은 괜찮다며 그녀의 하얀 정수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평온의 파동을 펼쳐 뿌리쳤습니다. 며칠 머리를 혹사한 것처럼 무겁긴 하지만 그 외에 문제는 없습니다.”
10년 감수했다는 얼굴로 가슴을 쓸어내리던 안느는 응? 하고는 환인에게 물었다.
=도령, 우리가 말했던 대로라니, 혹시 그때 의식을 유지하고 있었어?=
“그래. 갑자기 막대한 정보가 쏟아져 잠깐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을 뿐, 정신은 멀쩡했다. 환연이 물을 끼얹어준 충격에 원래대로 돌아온 느낌이군.”
여자들은 환인의 어깨에 앉아 ‘거봐.’하듯이 콧대를 세우는 환연을 바라본 뒤 다시 환인에게 물었다.
=그럼 주인님, 저 빛은 역시 평온의 파동인가요?=
환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들의 시선이 거실에 난 유리창 너머로 아직 빛이 군데군데 뭉쳐져 있는 느낌의 바깥으로 향한다.
그 일이 일어난 지 20분이 다 되어가는데도 아직 흔적이 남아있는 상태이며, 도시 전체가 이 현상으로 소란스러운 느낌이다.
잠깐 발코니로 나갈 수 있는 전면 유리창 너머 밖을 바라보던 안느가 조금 이해 안 된다며 중얼거린다.
=평온의 파동이 저렇게 변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영성이 쓰는 평온의 파동도 상급 영혼사와 크게 차이 없다고 들었고……. 이슬이나 율이 언니는 들은 적 있어?=
=아니.=
=나도 없어.=
=그럼 이건 도령의 직업적 특색인가?=
여자들의 작은 혼란에 환인은 셔츠 앞 단추를 풀어 가슴의 문양을 드러내 보였다.
=어? 문양의 빛이…….=
=좀 줄어들었네.=
“평온의 파동이 저런 형태가 된 것은 이 문양과 관계있다.”
=……진짜?=
=아! 그 문양의 빛은 영성경이랑 만났을 때 채워졌었지? 자기의 영기하고도 연결되어있다고 했었고.=
“예. 그때 이럴 수 있다는 걸 예측했어야 했는데 내 실착이라고밖에 할 수 없군요.”
=아무리 도령이라도 전부 다 알 수는 없는 거잖아. 그렇게까지 비하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안느의 위로에 환인은 작게 고개를 젓곤 단추를 다시 채웠다.
“이전까지 영혼의 기억을 볼 수 있는 것은 그 영혼이 강렬한 경험을 했던 것뿐이었다. 그마저도 접촉해서 영기를 흘려 넣어주어야 볼 수 있었지. 하지만 방금은 접촉하지도 않았고 감응도 시도하지 않았는데 기억이 모두 쏟아져 들어왔다. 동시에 이 문양이 타오르는 것처럼 뜨거워졌고.”
=…….=
=…….=
“좀 전뿐만이 아니다. 도로에 들어서며 골목길의 오누이 영혼을 발견했었는데 그때도 과거가 선명하게 보였었지.”
하늘 고래와 마주쳤었을 때도 문양이 달아올랐었다. 어쩌면 고래도 이 문양에 이끌려 온 것이 아니었을까.
=아, 갑자기 딴 데로 움직인 게 그 오누이 영혼의 기억을 보고 움직였던 거구나.=
“그래. 그 아이들의 부모는 영주에게 살해당했다. 혹시 부모의 영혼이 남아있다면 프라버를 둘러싼 소문의 진실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아서였지.”
시민을 분풀이 삼아 살해했다니…….
여자들의 표정이 안 좋아지는 것을 본 환인은 오누이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언급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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