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375화 (375/813)

〈 375화 〉 369 항구 도시 프라버

* * *

홍수로 인해 범람한 로탄 산지를 나와 거울 평원을 지난 일행은 무난하게 니오네브레스 최대의 담수호, 알류겔이 보이는 평원 끝자락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괜히 우스갯소리로 바다라고 부르는 게 아니었구나?=

=진짜 바다나 다름없어. 수심이 가장 깊은 곳은 5km나 된다고 하니까.=

=굉장하네.=

지도로 확인한 알류겔 호수의 크기는 어림잡아 자신이 트립했던 삼림형 미궁의 바로 옆, 호수 미궁이 있는 올조트의 수백 배 크기.

만약 강이든 무엇이든 바다와 약간이라도 연결되어있다면 알류겔 해?로 불리는 게 당연한 수준이다.

=…….=

태어나서 한 번도 바다를 본 적 없던 이실리테에게 수평선이 아득히 펼쳐진 호수는 생소한 경험이었지만, 그녀에게는 그걸 제대로 감상할 상황이 아니었다.

어제 오전, 스리밀 상단주를 통해 알게 된 한 가지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르파와 알류겔 호수의 아름다운 경관을 구경하던 안느는 그런 이실리테를 힐끔거리다가 물었다.

=이슬아.=

=…응?=

=괜찮아?=

=뭐가?=

=어제 그 이야기를 들은 뒤로 뭔가 멍한 거 같아서……. 그 백려강이라는 아가씨가 죽은 게 그렇게 충격이었어?=

안느가 이럴 정도로 내가 이상했었나?

괜히 뺨을 매만진 이실리테는 쓴웃음을 작게 지었다. 웨이포드의 미궁을 그녀와 함께 탐사했다는 건 안느도 알고 있다. 그래서 걱정을 드러낸 거겠지.

=그 정도는 아니야. 사람 목숨이라는 게 덧없다는 건 나도 잘 아니까. 그냥, 조금 신경이 쓰이는 거뿐이야.=

그녀가 신경 쓰는 것은 당시 백려강 아가씨의 호위, 장래 희망이 일류 모험가였던 레심이었다.

=그분한테는 기초 검술이라고 해도 호족 가문의 정식 검술을 배웠어. 나한테는 검술 선생 같은 분이라고 할까…… 그분이 아가씨를 연모하던 게 기억나서 괜찮을까 잠깐 생각했던 거뿐이야.=

=아… 그랬구나. 설마 가문의 검술 기초를 알려주다니, 확실히 은인이라고 할만하네.=

=응. 말 그대로 검을 휘두르는 법, 검을 잡는 법, 검에 힘을 싣는 법, 발동작에 무게를 분산하는 법 정도였지만 그 정도도 크게 도움 됐거든.=

그때 배운 것의 형?은 거의 남지 않았지만, 현재 자신이 쓰는 검술의 토대가 그것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그래도 뭔가 기분이 조금 이상하긴 해. 내 삶이 바뀐 뒤로 처음 인연을 맺었던 사람이어서 그런가, 호족 가문의 차녀인데도 죽었다는 게 이해가 잘 안 되기도 하고.=

=이해 안되는 게 정상이야. 5급 이상 되는 가문의 인원이 그런 식으로 죽으면 도시라도 발칵 뒤집히는 게 상식이니까.=

“…….”

환인은 마차의 창가에서 여자친구들의 대화를 들으며 프라버를 생각했다.

생각이라고 해도 딱히 편집증적으로 돌발 상황을 계산하고 대처하기 위한 사고는 아니다. 그저 백려강의 죽음에 묘한 부분이 있다고 느꼈기에 하는 생각일 뿐.

‘휴베이아는 백려강이 모종의 사고로 죽었다고 했지만…….’

죽음에는 자살과 타살 두 종류가 있다.

자신이 파악한 백려강의 성격, 그리고 그녀와 헤어질 때 보여주었던 모습을 생각하면 자살은 가능성이 5%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타살인데 누가 5급이 넘어가는 호족의 자제를 살해한단 말인가.

같은 호족이?

만약 누군가의 음모로 암살당했다면 이쪽도 유구한 전통의 도시를 나름 잘 이끌어나가고 있는 호족인 만큼 진작에 흉수를 밝혀냈을 것이다.

하지만 수개월이 지나도록 아직도 범인이 밝혀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 말은 흉수가 말도 못할 만큼 주도면밀하고 철저했다던가. 아니면…….

‘흉수가 없던가.’

휴베이아는 말했다. 관련된 자를 색출해 무고한 시민까지 잡아 죽이고 있다고.

이게 의미심장하게 들린 것은 단지 기분 탓일까.

자살과 타살 양쪽 모두 자신이 가진 단서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정략결혼을 해야 하는 것이 싫어서 가문에서 도망쳤다는 쪽이 더 그럴싸하다.

영주는 도망친 딸에게 분노해서 딸이 도망칠 수 있게끔 도움을 준 자들을 색출해 처단하고 있다는 게 더 설득력이 높은 것이다.

그렇다면 웨이포드에서 인연이 닿은 자신에게도 프라버 영주의 화살이 향하고 있지 않을까.

쿠에~!

쿠쿠웃!

두두두두­

오른쪽으로는 수평선이 펼쳐진 광대한 바다, 왼쪽으로는 하늘과 땅이 직선으로 맞닿은 광활한 초원. 그리고 앞으로 곧게 난 평탄한 길.

쿠에들의 흥분을 자극하는 세 가지 요소가 어우러져 마차는 프라버로 향하는 길을 질주했고.

=안느, 저기가 프라버야?=

=…어, 맞아! 도령~! 프라버가 보여~!=

그림으로 그린 듯한 지중해 연안의 도시 느낌인 프라버가 지척까지 다가왔다.

“…….”

하얀 고래가 수면 위로 몸을 드러낸 듯한 하얀 도시를 바라보는 환인의 눈빛이 깊어진다.

그런 프라버의 상공에 맺혀있는 회색의 장마 구름이 파란의 징조처럼 느껴지는 것은…… 착각이 아니겠지.

프라버는 니오네브레스에서 가장 큰 호수로 알려진 알류겔의 항구 도시다.

육지와 붙어있는 본토에 인구 70만이 거주하고 있고 본토 인근의 크고 작은 섬에 있는 위성 어촌을 다 합치면 74만이 넘는 중형 도시.

알류겔과 접해있는 도시는 북부의 호반?? 도시 알소프, 남부의 주도 라수비탄, 서부의 항구 도시 프라버 총 세 곳.

니오네브레스 환경 특성상 왕래가 잦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지리적 특징으로 인해 하루 유동 인구가 총인구의 20%에 이를 정도로 상인이나 여행객이 많이 왕래한다.

그들 대부분은 호수와 인접한 어촌과 마을의 교두보로 사용하고 있으며, 북부 도시 알소프와 주도 라수비탄의 삼각 교역지로도 종종 이용되고 있다.

낮에는 에메랄드빛, 밤에는 블루 사파이어 빛의 알류겔 호수가 지닌 뛰어난 자연경관 덕에 관광 도시 역할도 하면서 어족 자원을 이용한 라드세아 수산물의 유통 중 60%를 차지하고 있으며, 도시 인근의 넓고 비옥한 곡창지대 덕분에 육해공 식량의 자급자족률은 라드세아 최대.

이런 부유한 환경에 더해 알류겔 호수는 삼대 국가, 라드세아­헤뷜트­히스론드와 닿아있다 보니 타 종족의 왕래도 잦고, 그로 인해 타국 특산품은 물론 문화까지 흘러들어와 종족 연합 국가 다음가는 인종의 용광로로 불리고 있다…….

‘……는 게 휴베이아의 설명이었지.’

그 말대로 눈부시게 하얀 성벽과 늑대의 머리를 형상화한 듯한 프라버의 성문 입장 대기 줄에서 볼 수 있는 종족은 매우 다양했다.

‘저 어린아이 같은 외형의 종족은 기플라, 풀줄기와 이파리 같은 것으로 몸을 휘감은 숲의 종족 같은 사람은 암드룩스.’

얼마 전 지구로 돌아갔을 때 환인은 판타지 종족에 대해서 짧게나마 공부했었다.

니오네브레스와 지구 사이에 무언가의 연결고리가 있으며, 현실의 판타지 소설 요소가 거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음을 은연중에 느꼈기 때문이었다.

환인이 중점적으로 찾아본 것은 생물 쪽.

거기서 본 종족들이 지금 입장 대기열에 상당수 눈에 띄고 있었다.

대부분은 루크랑 족이지만 라드세아는 루크랑 족의 국가이니 수인 같은 사람이 많은 것은, 하플링과 비슷한 종족도 있었고 숲에서만 산다는 드라이어드 같은 종족도 눈에 띄었다.

그중에는 아드섹트라 불리는 충인족만큼이나 환인의 시선을 잡은 종족이 있었으니.

‘정말 리저드맨이군.’

도마뱀의 팔다리를 사람처럼 길쭉하게 만들고 두 다리로 일으켜 세운 듯한 종족. 니오네브레스 주류 종족 중 하나인 벨티칼의 사비족이었다.

키도 2.5m에 가깝고 근육도 보디빌더처럼 불거진데다 머리와 어깨, 가슴에 그려진 기이한 문신과 야만족 같은 옷가지가 바바리안을 연상케 한다.

그 외에도 조인족도 있고 특이하게 학처럼 하얀 날개가 세 쌍인 사람도 보이고 귀에 지느러미 같은 게 난, 맨발이면서 몸에 때때로 물을 뿌리는 특이한 여자도 있다.

환인이 회색으로 깃털색을 바꾼 비상의 등에서 검문소 대기열의 사람들을 살펴보고 있을 때, 마부석에 앉아있는 이실리테와 안느는 분위기를 살펴보고 있었다.

=음……. 도시에 문제가 있는 거 맞아? 사람들 표정도 그렇고 분위기는 전혀 그렇게 안 느껴지는데.=

이실리테의 중얼거림에 안느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게. 저번에 왔을 때랑 다른 점이 안 느껴져. 날 선 기운은 전혀 없는걸. 아, 병사들 표정은 조금 굳어있긴 하네.=

=저번? 언제?=

=니오네브레스 기준으로 대충 1년 전쯤?=

=우리가 처음 만나기 몇 달 전이네.=

이러는 사이 대기열은 순조롭게 줄어들었고 얼마 안 가 환인 일행의 검문 차례가 되었다.

=음…….=

흰 배 바다 독수리 머리의 병사가 성큼성큼 걸어와 마차 및 마부석에 앉아있는 이실리테와 안느, 비상을 탄 환인을 차례대로 살펴본다.

=누가 책임자요?=

그 질문에 환인은 마차의 문을 쿵쿵 두드렸고, 후드를 옅게 눌러 쓴 유르파가 문을 열고 마차에서 내렸다.

=제가 책임자예요.=

6급 비술사의 아우라를 힐끔 본 병사가 명부 판과 휴대용 소형 수정구를 꺼내 들며 물었다.

=신분패를 제출해주시고 이름과 방문 목적을 말해주시오.=

=유르파 익스티나. 영도 순례를 위해 카턴 마을에서 왔어요. 이들 셋은 제가 개인적으로 고용한 용병이에요.=

=……확인했소. 그쪽은 신분패가 없나? 없다고……. 익스티나 씨는 신분패가 있지만 권역 통행 미등록자여서 출입 추가 비용이 발생해 40동화, 저 세 명은 신분패가 없으니 신분 보증 비용에 통행세를 더해서 세 명 7은화, 쿠에 네 마리 각 25동화씩 1은화, 합해서 17은화에 마차 도로 이용료 60동화해서 9은화요.=

모험가 대상에 불분명한 신분 확인 및 보증금. 거기다 책임 비용까지 붙어 말도 안 되는 통행세가 나왔지만, 유르파는 아무 말 없이 1열은화 한 닢을 꺼내 병사의 손에 툭 올려주곤 마차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팁이 무려 1은화다.

월급의 1/5을 한순간에 챙긴 병사는 불만 없이 어깨를 으쓱하곤 비켜서며 통과를 외쳤다.

어디를 가든 뇌물은 자유입장 수단.

일행은 1은화로 구질구질해질 수 있는 신분 확인 절차를 건너뛰고 높이 10m의 웅장한 성문을 지나 도시에 진입할 수 있었다.

두꺼운 성벽을 지나 도시에 들어선 순간 확­ 밀어닥치는 번잡하고 왁자한 생활 소음들.

넓은 대로를 오가는 수많은 마차와 짐차의 소음에 각양각색의 복장을 한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도심의 분주함.

그와 함께 불어오는 물 냄새와 대도시의 혼잡스러운 냄새까지.

활기찬 분위기의 도시 속으로 진입한 이실리테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 소음 탓에 목소리를 조금 높여 환인을 불렀다.

=주인님, 어디로 갈까요? 저쪽에 도시를 안내하는 아이들이 있는데 한 명 데려올까요?=

“아니. 안느, 전에 프라버를 들렀었다고 했었지. 그때 머무른 숙박 시설 위치 기억하고 있나.”

=어. 마구간도 컸고 마차 수용시설도 있었어. 시설은 헬루멘에서 우리가 잠깐 머물렀던 호텔보다 조금 못한 수준이라고 보면 될 거야. 그리로 갈까?=

“그래.”

=알았어. 이슬아, 일단 이 길 저 끝에 하얀 석상 보이지?=

=저기 작게 보이는 조인족 석상?=

=응. 저기까지 가서 우회전하면 돼. 우회전하면 길이 여러 개 나오는데 그중 제일 큰길 따라가면 상업지구가 나오거든? 거기서…….=

환인은 이실리테가 모는 마차를 따라가며 주변을 예리한 눈으로 살폈다.

바람에 호수의 습기가 섞여 날아오고 있지만 염분이 없는 바람이어서일까, 건물이 하나같이 밝고 화사하다.

‘대부분 흰색 도료를 발랐군.’

여러 번 덧칠한 흔적도 보이는데 그게 흉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도시의 분위기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화 때문인가.

하지만 사람 취향이 모두 다를 텐데 전부 흰색을 칠하는 것은 타인의 의지가 개입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그 타인은 영주의 취미, 혹은 취향일 가능성이 크겠지.

“…….”

자신의 취향을 도시에 강요하는 사람이라면 성격도 필시 좋지 못할 것이다.

레심이나 백려강의 일이야 어쨌든, 통신 수정관리부서의 부정과 하늘 기사단의 패악질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엿을 먹이고 싶지만…….

‘상처 입은 개새끼를 건드리는 건 현명하지 못한 일이지.’

영도를 방문해 그곳의 반응을 보고 프라버 영주의 추태를 퍼트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영도에서 추태가 퍼지는 것만으로도 영주 처지에서는 끔찍할 정도로 명예가 실추될 테니까.

프라버에서의 행동 방침에 대해 생각하며 무의미하게 거리를 훑던 환인의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되었다.

그늘져 어두운 골목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헐벗은 여자아이와 남자아이.

남매의 영혼이다.

“……!”

환인은 습관적으로 영혼과 감응을 시도했다가 시야가 확 당겨지며 가장자리가 안개처럼 뿌옇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더욱이 눈에 보이는 광경도 변해간다.

남매가 부모로 보이는 남녀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던 일상.

그 일상은 들이닥친 병사들에게 부모가 끌려가며 끝난다.

아비는 목이 잘려 광장에 효수되었고 어미는 온몸에 고문의 흔적을 안고 돌아와 아이들 앞에서 숨을 거두었다.

남매는 누군가에게 집에서 쫓겨났으며, 며칠간 뒷골목을 헤매다 허기를 이기지 못해 누나 쪽이 도둑질을 시도, 어른에게 잡혀 몰매를 맞는다.

수십 분간 이어진 폭행에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절뚝거리며 동생에게 돌아간 누이는 밤새 고열을 앓다 사망.

뭣도 모르는 다섯 살 동생도 차가워진 누나의 품에 안겨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추위와 배고픔에 떨다 동사.

화악­ 시야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환인은 미간을 한가득 찌푸렸다.

이건 뭘까. 왜 대상의 기억이 읽어진 거지.

영혼에게 손이 닿지도 않았고 영기를 흘려 넣지도 않았다. 대상의 생전 기억이 강렬해 영혼에 새겨진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나 선명하게 보이다니.

그 순간 환인은 가슴 쪽에서 미세한 열기가 발생한 것을 느꼈다.

“…….”

환인은 남매가 죽은 장면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며 정체 모를 감정을 일으키는 것에 인상을 쓰다가 남매의 영혼을 불러들였다.

‘이리 와라.’

그간 성장한 영혼술 덕에 거리가 수백 미터나 되었어도 강제력이 발휘되어 두 꼬마 영혼을 끌어당긴다.

「…….」

「…….」

자신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도 모르고, 죽었다는 사실에 분노하거나 화내거나 슬퍼하지도 않고, 그저 멍하니 존재하기만 하는 남매의 영혼.

보통 사람은 그 모습에 위협적이지 않다고 느꼈겠지만, 사고가 어딘가 누락된 환인은 텅 빈 그 눈동자에서 이 아이들이 혼재만큼이나 위험하다고 느꼈다.

충격받기 직전의 불안정한 니트로글리세린 같다고 할까.

두 아이의 영혼을 구슬로 만들어 회수한 환인은 옆을 지나가는 거리 풍경에 고개를 홱 돌렸다.

“이실리테, 저쪽으로 간다.”

=네? 네.=

“내가 앞장설 테니 따라와라.”

=넷.=

환인은 방금 아이들의 기억에서 읽은 거리 풍경을 따라 되짚어갔다.

그의 여자들은 갑자기 바뀐 환인의 분위기에 어리둥절했지만, 뭔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의 뒤를 따라 골목길 이동했다.

잠시 후 환인이 도착한 곳은 수평선이 보이는 거리 끝 난간 광장.

작은 공원 크기 정도의 광장 한복판에는 핏자국이 아직도 선명했고…….

“…….”

……광장 주변에는 아홉이나 되는 영혼이 여기저기 흩어져 주저앉아있었다. 농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전부 붉게 물든 채로.

혼재로 변하기 직전의 상태다.

속으로 개판이라고 짧게 생각한 환인은 가까이 오려는 여자친구들을 멈춰 세우고 비상의 등에서 내려 예비 혼재들을 향해 한 걸음 내디딘 순간.

세상이 기름 막처럼 일그러지며 혼재 아홉의 모든 기억과 감정이 일거에 쏟아져 들어왔다.

“……!”

분노, 절망, 후회, 원망, 증오, 격분, 원한, 공포, 불안.

온갖 마이너스의 감정이 뒤섞이며 아홉 명의 일생이 강제로 환인의 마음속을 비집고 들어온다.

위험하다. 가슴이 불타는 것처럼 뜨겁다. 감각이 혼란스러워져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래인지, 자신이 제대로 서 있는지도 모르게 되어간다.

=……인…님!=

=ㄷ… ……려……ㅇ…!!=

세상이 흔들리고 뒤집히는 가운데 자칫 인격이 표백되거나 오염될 수도 있는 상황임을 직감한 환인은 뜨거운 가슴께를 움켜쥐고 전력으로 평온의 파동을 발사했다.

꺼져라…!!

——……!!!

* * * *

그날 프라버에서 일상과 생업을 이어가던 사람들은 갑작스레 눈앞이 회색으로 변하는 것을 경험했다.

그것이 상냥하고 포근한 회백색의 빛이라는 걸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이게 자신에게만 일어난 현상이 아니라는 것에 얼떨떨해할 뿐이었지만 도시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는 난리가 났다.

회백색 빛의 기둥이 프라버 전체를 감싸 다 못해 하늘 끝까지 솟아오른 것을 목격한 것이다.

다시 장마가 오는 것처럼 꾸무룩한 세상을 부담스럽지 않고 따뜻하게 감싸주는 듯한 빛기둥.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딸의 상실로 미쳐버린 영주를 벌하기 위해, 혹은 꾸짖기 위해 신이 내린 빛의 기둥이라고 말이다.

「……환…인, 님…?」

그리고 그런 빛기둥 속, 도시에서 가장 높은 첨탑 꼭대기에서 천천히 눈을 뜨는 푸른 머릿결의 여자가 있었다.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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