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374화 (374/813)

〈 374화 〉 368 프라버 남쪽 평원

* * *

다음 날 아침.

조금 이른 시간에 하루를 시작한 일행은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에서 아침을 간단히 챙겨 먹고 유르파의 앞에 모였다.

=이게 어젯밤에 완성한 거야.=

그녀의 앞에 놓여있는 것은 똑같은 오륜기 디자인의 초커 세 개.

환연이 신기해하면서 쪼그려 앉아 초커를 콕콕 건드려본다.

「이게 뭔데? 아, 이실리테가 낀 거랑 같은 거야?」

=응. 아우라를 차단해주는 목걸이야. 아가씨들 요청대로 동일한 디자인으로 완성했고……. 사용법은 지금 이슬이 아가씨가 쓰는 거랑 같아. 한번 써볼래?=

=응.=

=네.=

유르파가 내미는 오륜기 모양의 초커를 받아든 안느는 곧장 목에 걸고 초커를 작동시켰고, 이실리테도 기존에 쓰고 있던 초커를 벗은 뒤 새것으로 갈아꼈다.

그러자 순식간이라고 할 만큼 그녀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아우라가 사라졌다.

=볼 때마다 신기하네 이건.=

그러며 목걸이를 몇 차례 벗었다 낀 안느는 아우라가 나타나고 사라지는 느낌이 신기했다.

꼭 물에 들어갔다 나오고 하는 묘한 느낌. 이게 위상류 체질을 가진 느낌인가?

유르파도 초커를 목에 걸면서 이전에 만든 것과 새로 만든 것의 차이점을 설명한다.

=시제품과 완제품의 차이점은 하나뿐이야. 마도구를 착용해도 위상력이 회복되는 거.=

=회복량은 어느 정돈데?=

=평소의 10%야.=

=적다…….=

=이게 최대라서 어쩔 수 없어. 이 이상 늘리면 아우라가 드러나거든.=

“지구에서 겪었던 점을 반영한 거군요.”

그녀들의 하얗고 투명한 살결을 살짝 짓누르는 목 띠를 살피던 환인의 요점 파악에 유르파가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말대로 지구에서는 위상력의 회복이 1/10까지 줄잖니. 거기에 착안해서 5%, 10%, 15%, 20%, 이렇게 4단계로 검사해봤는데 대충 13%? 그 이상으로 위상력의 접촉을 허용하면 아우라가 발현되고 13% 미만이면 아우라가 차단되는 걸 확인했어. 13%도 그때그때 신체 컨디션에 따라 달라지는 거 같아서 안전권 삼아 10%로 일괄 조정한 거야.=

시제품은 몸에 닿을 수 있는 모든 위상력을 밀어내며 차단하는 식으로 아우라의 발현을 막는다.

이렇게 되면 목걸이를 착용 중에는 소비한 위상력을 다시 회복하지 못한다.

그런데 직업자는 신체 능력의 유지를 위해 적게나마 위상력을 매초 소비한다. 시제품을 착용하면 계속 위상력을 소비만 하다가 위상력이 바닥나면 신체 능력이 무직자 일반인과 다름없어지는 거다.

완제품은 그 점을 픽스한 거고.

유르파의 설명을 듣던 환인은 그 점에 착안해 하나 떠올린 것을 이야기해주었다.

“이걸 응용한다면 직업자 전용 구속구도 만들 수 있겠군요.”

=……응?=

“완력만으로는 부수기 어려운 소재로 수갑을 만든 뒤 위상력 반발을 100%로 조절한 다음 부가 기능으로 착용자의 위상력을 뽑아내는 기능을 탑재하는 거지요.”

환인의 이야기에 직감적으로 옹도를 깨달은 안느가 우와, 작게 탄성을 흘렸다.

=그거 수요가 엄청날 거 같은데?=

=그런 게?=

딱히 신기해할 것 없이 초커를 끼고 있던 이실리테의 의문에 유르파가 혹한 모습으로 말한다.

=일반 대중에는 의미가 크지 않겠지만 마을이나 도시를 관리하는 지배자 처지에서는 유용하겠네.=

=응. 직업을 가진 범죄자의 처우는 어딜 가도 문제가 돼. 직업자를 제압할 수 있는 건 직업자 정도뿐이니까. 그래서 대부분의 직업 범죄자는 이블팩션 지역에 보내는 거야. 그냥 뭉뚱그려서 관리할 수 있도록, 관리에 큰 힘을 들이지 않게 말이야. 하지만 그런 구속구가 완성되면…….=

=겁먹은 범죄자의 수는 더욱 줄어들겠지! 만들 수 있으면 혁명이겠는데?!=

환한 안색으로 좋아하는 안느를 보며 환인은 역시 사람이 좋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이런 구속구가 활성화되더라도 세상이 별로 바뀌지 않으리라 예측했다.

사람의 욕심은 이따위 구속구 정도로 자제될 만큼 약하지 않으니까.

단편적으로 영혼사와 영혼의 존재, 혼재와 신의 정원이 실존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고 실제로도 사람들이 믿고 있는 세상이다.

평범한 사람은 사후가 두려워서라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생각하겠지만 현실은 어떤가.

범죄의 종류나 빈도는 지구나 니오네브레스나 다를 바 없다.

=언니언니, 이거 돈 될 거야. 아니면 제작법을 팔아도 되고!=

=으음~.=

안느는 유르파의 허리를 끌어안고 구속억제기(임시)를 만들어서 팔거나 아니면 믿을만한 집단에게 제조판매를 위탁하는 게 어떻겠냐고 묻는다.

=그러면 나쁜 짓을 하려는 놈들이 많이 줄어들거라니까?=

=그래도…….=

무엇을 고민하는지 알 것 같은 유르파. 그리고 그 고민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 안느.

환인은 그런 안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착한 사람은 착하게 있을 수 있도록 주변에서 도와주어야 한다.’

‘착한 사람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주변에 평화와 평온을 뿌리니까.’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정신적인 치유를 쫓게 된다. 늦든 빠르든 간에.’

‘그리고 착한 사람은 그런 정신적인 치유를 자연스레 도와준다.’

“…….”

누가 한 이야기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환인은 안느와 함께 있으며 그 이야기에 차츰 공감하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안느는 자신의 신체 콤플렉스에 정신적으로 무척 힘들어하면서도 그런 기질을 드러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상대방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고 할까.

신체 콤플렉스가 완전히 해소된 지금은 상대를 부담스럽지 않게 하는 인싸 중의 인싸가 되었다.

안느는 스킨십을 좋아한다. 예쁜 걸 좋아한다. 이 두 가지 취향으로 이실리테와 하는 스킨십을 매우 좋아한다.

처음에는 안느의 신체 접촉을 질색해 하던 이실리테도 지금은 다소 과격한 터치(젖가슴)까지는 무언의 허락을 해줄 정도.

이실리테 외에도 다들 비슷했다.

오울링의 말빈과 헬리사는 환인이나 이실리테는 어려워해도 안느에게는 마음을 터놓을 정도였다.

비자룩스의 트립 피해자인 임세희도 안느에게는 경계심을 풀고 금방 마음을 열었고 헬루멘에서도 영웅 기사단의 기사들과 순식간에 인맥 및 친분을 형성했다.

‘추기경과 자매결연까지 맺을 정도이니 말해서 무얼 할까.’

=생각해봐. 나쁜 짓 하다가 붙잡혀서 구속억제기가 끼워지면 능력을 다 잃고 일반인이 되어버리는 거잖아. 힘이 없어지는 거랑 다름없으니까 당연히 겁먹고 나쁜 짓을 안 하게 될 거야. 구속억제기가 유명해질수록 범죄는 줄어들게 틀림없어! 도령도 그렇게 생각 안 해?=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묻는 안느에게 환인은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한다.”

=거봐!=

“하지만 세상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지. 반대급부도 생각해야 한다.”

=어응? 반대급부?=

안느가 생각도 못 했다는 얼굴을 하고, 반대로 유르파는 ‘역시.’라고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악당이 몰래 구속억제기를 손에 넣어 악용할 때 말이지.”

=…응, 확실히 그건 문제가 되겠네…….=

“그리고 지배자들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 무기는 주인을 가리지 않으니까. 그리되면 널리 퍼트리는 것도 힘들어지겠지.”

=아…….=

마냥 좋은 일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그제야 눈치챈 안느의 표정이 시무룩해진다. 아쉬움이 역력한 표정이다.

환인은 더 해줄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녀의 동심을 지켜주기 위해 뒷말은 잘라냈다.

‘이미 그러한 기술이 개발되었지만, 지배자들의 이익에 그리 도움 되지 않아서 사장되었을 수도 있지.’

인류사에 범죄는 반드시 따라붙는다. 거기에는 구금 수단의 발전도 포함되기 마련.

이렇게나 문명을 쌓아 올린 세상에 제대로 된 구속 수단이 개발되거나 발명되지 않을 리 없다.

만들어졌지만 모종의 이유로 실용화되지 못했다고 봐야겠지.

환인은 주제를 전환했다.

“잠시 생각해봤는데, 네 명 전부 일반인인 것처럼 활동하는 건 다소 문제가 발생하리라 본다.”

환인은 말하다가 창밖으로 쏟아지는 햇빛에 그쪽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그의 여자친구들은 숨을 멈췄다.

빛이나 바람 등의 요소가 기적적으로 조화를 이뤄 무대 조명 효과처럼 그를 비췄던 것.

한 폭의 명화 같은 자태의 남자친구를 정신없이 쳐다보는 여자들.

홀린 듯이 환인을 바라보다 퍼뜩 정신을 차린 이실리테가 되물었다.

=무, 문제인가요?=

“그래. 특히 이실리테와 안느, 너희 둘은 자기 외모에는 무감각하면서 서로의 외모는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더군. 옆에서 보면 너희 둘로 인해 주변 남자들의 시선이 죄다 모일 정도인데 말이다.”

=어…….=

=에엥? 그, 그랬어?=

분쟁 억제기가 되던 찬란한 아우라가 없어지면 남자로 인해 틀림없이 문제가 생길 거란 말을 두 여자는 칭찬으로 받아들여 얼굴이 붉어졌다.

고개를 연신 끄덕이던 유르파가 응, 하고 손가락을 튕긴다.

=이슬이 아가씨랑 안느 아가씨의 외모는 확실히 눈에 띄니까 파티에 직업자가 한 명도 없다면 자기 말대로 남자에게 엄청난 대시가 들어올 거야. 특히 직업자 남자들.=

=웩. 그거 엄청 기분 나쁜데.=

=…….=

홍조가 어렸던 얼굴이 금세 싸늘하게 식는다.

안느는 단지 기분 나쁨을 표시할 뿐이었지만 이실리테의 표정은 그 남자가 앞에 있다면 단숨에 베어 죽일 것처럼 냉기를 풀풀 풍겼다.

=그러니까 나는 아우라 차단 마도구를 쓰지 않는 게 좋겠다는 거지? 마침 겉보기에는 나도 6급이니까.=

“예. 유르파의 능력은 전투보다 제조에 특화된 능력이니 호위를 고용했다는 식으로 설득이 될 테니까요. 비상의 깃털 색도 회색이나 흑색으로 바꾼다면 돈 많은 직업자의 유랑 정도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겁니다.”

=하지만…… 아우라가 없어지면 직업자로 안 보이잖아? 일반인이 직업자를 호위하는 걸 이상하게 볼 거 같은데?=

누구나가 할 법한 생각을 꺼낸 안느에게 유르파가 손가락을 저으며 부정을 표시했다.

=아냐아냐. 의외로 비술사들이 무직자 무인이나 법사를 고용하는 일은 많아. 고용 비용이 저렴하면서도 강화 술법을 걸어 대신 싸우게 만든 뒤에 뒤에서 공격하는 방식도 적지 않게 쓰거든.=

“그리고 직업자로 안 보인다 해도 전투 능력이 어디 가는 건 아니지. 눈에 띄는 기술 발현만 하지 않으면 된다.”

=아.=

=앗. 그런가.=

=그럼 나는 초커를 벗고 있을게.=

환인은 목걸이를 벗고 아우라를 드러내는 유르파를 바라보다 속으로 중얼거렸다.

‘귀찮군.’

자연스러운 이변에 의해 니오네브레스로 끌려왔다면 이런 귀찮은 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됐을 텐데.

새삼 귀찮음을 자각한 환인의 눈이 유리알처럼 무기질의 빛을 발했다.

주화나 보석을 미끼로 차원을 넘어 강제 납치를 시행한 놈들.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지금은 모습을 감추고 몸을 숙이고 있지만, 기회가 다가오면 단숨에 목을 따버릴 것이다.

환인 일행은 비가 내리는 몽환적인 풍경 속에서 물속에 흐릿하게 드러나는 길을 따라 나아갔다.

수해가 크게 벌어져서일까. 거울 호수로 변한 평원에는 일행을 공격할만한 짐승이나 괴물은 한 마리도 없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조류가 물에 둥둥 떠다니는 벌레를 잡아먹느라 분주한 모습만 보일 뿐.

아니, 한 마리는 있었다.

꾸와아아악—!!

작은 먹구름과 함께 날아온 대머리독수리를 닮은 4급 비행형 괴수가 일행을 공격해왔던 것.

큐삐이이잇——!!

하지만 일행이 반응할 새도 없이 참방참방 거리며 마차 주변을 돌아다니던 비상이 영역을 침범당한 고양이처럼 발끈해서는 즉시 날아올라 도그파이트를 벌였고.

꽈아악?! 쿠어어—!!

큐아앙­!

전투기의 현대전 양상처럼 초원의 시체 청소부라 불리는 괴물을 몰아붙인 끝에 난도질해버렸다.

녹색 바람이 폭풍처럼 몰아쳐 사방에 바람의 칼날을 퍼붓는데 거기 휘말린 시체 청소부가 프라이드 치킨으로 튀기기 전의 고기 마냥 조각나 피와 깃털을 흩뿌리며 떨어진 것.

그걸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안느가 중얼거렸다.

=역시 비상이는 녹색 쿠에 여왕의 핏줄인 거 같지?=

=그게 아니면 오히려 이상할 거 같아.=

그 일을 제외하면 일행은 산간 지역에서는 내지 못한 속도를 마음껏 내고 있었다.

발목 깊이 정도로 물이 차있긴 해도 평지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고 땅에도 어느 정도 길의 흔적이 남아있었기 때문.

그렇게 출발한 지 2시간.

물보라와 함께 길을 따라 나아가던 환인 일행은 얕은 구릉 같은 장소에 수백 명 규모의 집단이 야영지를 꾸린 것을 발견했다.

직업자도 다수 보이고 귀중한 짐인지 포장을 꼼꼼히 한 수레도 확인된다.

별로 좋지 못한 표정도.

=수해 때문에 행상이랑 상단이 저기 모여들었나 보네.=

=음~.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모인 거 같은데? 상단 문장이 다른 게 몇 개 보여.=

=주인님, 저쪽으로 가볼까요?=

“그럴 필요 없다. 지나친다.”

=네.=

여러 장소에서 모인 사람들인 만큼 저곳에 가면 넓은 지역의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프라버를 들른 후 바로 영도를 향할 생각인 환인에게 다른 지역의 소식은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거기다 여자친구들이 후드를 벗었다간 대번에 시비가 걸릴 테지.

현재 귀찮음에 시달려 조금 날이 서 있던 환인은 그냥 지나칠 것을 지시했지만.

=어? 저기 누군가 온다.=

구릉지 쪽에서 작은 소란이 일더니 몇 명이 말을 타고 물보라를 일으키며 두두두 달려왔다.

적의는 느껴지지 않고 혹시 이쪽을 놓칠세라 다급한 모습.

이실리테는 저들을 기다릴지 계속 나아갈지 잠깐 고민했지만 말 그대로 잠깐이었을 뿐, 환인이 지시한 대로 계속 마차를 몰았다.

“이실리테, 안느. 후드를 써라.”

네 명 중 직업자는 두 명뿐.

그럴 가능성은 작다고 보지만, 환인은 마찰이 빚어지면 이번에는 전부 죽여서 땅에 파묻어버려 후환을 두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척 봐도 여러 마을, 도시, 촌락으로 퍼져나가는 상단이다.

저들로 인해 일행의 특징이 어쭙잖게 고정되어 앞길에 지장이 생기는 것은 사양이다.

잠시 후 허겁지겁 달려온 네 명 중 악마의 그것처럼 멋지게 휜 소뿔의 법술사 여자가 마차 옆으로 붙으며 입을 열었다.

=잠시만요. 여러분들은 혹시 로탄 산지 쪽에서 오시는 길이십니까?=

=그런데?=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마부석에 앉아있는 두 사람 대신 마차 지붕에 앉아있던 사람에게서 태연한 대답이 돌아오자 법술사 여자의 얼굴에 순간 당혹이 스쳐 지나갔다.

직업자를 상대로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모습.

뭐지. 무직자면서 우리를 봐도 경계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네?

자연스러운 태도를 보면 겁이 없다기보다 그만한 실력이 있다는 거 같은데. 거기다 쿠에가 네 마리…….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상단을 쌓아 올린 눈썰미로 일행의 범상치 않음을 눈치챈 여자는 공손히 질문을 던졌다.

=그러셨군요. 갑자기 실례했습니다. 저는 프라버의 스리밀이라는 작은 상단을 책임지고 있는 휴베이아라고 합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로탄 산지가 어떤 상태인지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 사례는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질문을 하자마자 휴베이아는 마차의 보조석에 앉아있는 검은색 후드 로브를 입은 사람에게 시선이 쏠리는 것을 눈치챘다.

저 사람이 일행의 책임자인가? 아니야, 상식적으로 마차 안에 있는 사람이 고용주겠지.

마차는 얼핏 보면 허름하지만, 잘 살펴보면 소소한 부분이 고급스럽다. 마차의 재질이라던가 무늬, 꾸밈이라던가.

용병 호위로 보이는 사람들의 후드 로브도 유심히 보면 마수 가죽을 동일인이 제작한 수제품이다. 그런 걸 무직자 용병이 태연스레 입고 다닐 수 있을까?

더욱이 쿠에 세 마리로 마차를 끌고 있다. 옆에는 좀 특이하게 생긴 회색 쿠에가 활발히 돌아다니고 있다. 저 회색 쿠에는 마차 안에 타고 있는 고용주의 쿠에인 거겠지.

마지막으로 확신한 것은, 세 명 모두 무기가 안 보인다.

허리춤에 검도 드러나지 않고 마차 외관에 무기가 장식되어있지도 않다. 그 말은 즉…….

‘아공간 주머니에 무기를 수납하고 있다는 뜻. 그런 주머니를 쓰는 사람이 허접한 품질의 무기를 쓸 리 없어. 더해서 마차의 소유주가 부자이고 저들이 무인이라면 이 구성도 이해돼. 수준급 마도기를 쥔 무인은 직업자와 다름없는……. 아니, 오히려 하급 직업자보다 더 강한 편이니까.’

=음……. 정보라는 게 무척 중요하다는 건 댁도 알지? 아, 난 안느라고 해.=

안느의 자기소개에 휴베이아는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그녀의 뒤를 따라온 수행 종자는 아니었다.

자신의 말에 셋의 표정이 확 찌푸려지는 걸 본 안느는 곧 호통치겠다고 생각했고 그건 사실이 되었다.

=건방지다! 무직자가 어디 감히……!=

=로나! 입 다물어!=

=무례하게…… 예, 예?=

=지금 무슨 짓이지? 내가 저분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안 보여?=

=어… 휴, 휴베이아님. 저는…….=

=넌 돌아가 있어. 나중에 혼날 각오 하고!=

=읏, 예…….=

종자를 단호하게 꾸짖는 모습에 안느는 의외라는 듯이 휴베이아를 쳐다보았다.

4급 법술사에 작다지만 상단주 본인이다. 자신들은 무직자로밖에 안보일 테니 얕보는 마음을 가져도 이상할 게 없는데 저렇게 혼내다니.

선천 능력인 진실의 주시자로 보았을 때 종자를 나중에 혼낸다는 말도 진실이었다.

=실례했습니다. 아직 어린아이라 혈기를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책임자로서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알까. 현재 환인의 몸 주변에 영혼 화살이 장전되어 그녀의 심장과 목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1초라도 말하는 것이 늦었다면 그대로 목이 꿰뚫렸을 거라는 걸.

안느는 그녀의 진심이 가득 담긴 말에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다가 마부석 가장자리에서 몸을 숙여 환인에게 속삭였다.

그녀의 말은 전부 진심이라고.

자신이 알게 된 도령의 성격이라면 저렇게 예의범절이 확실한 사람은 외면하거나 무시하지 않을 거다.

그리고 역시나.

쿠엣~

쿠우웃.

이실리테의 허벅지를 가볍게 두드려 마차를 멈춰 세운 환인은 휴베이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로탄 산지의 상황이 어떤지 알고 싶다는 것은 어느 정도 안쪽 상황을 짐작하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아…… 예, 그렇습니다. 며칠 전 신성스럽게도 안개의 기둥이 로탄 산지를 뒤덮은 것을 보게 되었고 그 속에서 하늘 고래의 일부도 목격했습니다. 어마어마한 비가 내렸다는 것도 확인했고요.=

“그렇다면 상행은 포기하고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철수하는 게 좋다는 판단도 내렸을 거 같습니다만.”

휴베이아는 후드를 푹 눌러쓴 남자 목소리가 참 듣기 좋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법도 귀족처럼 훌륭하고 앉아있는 자세도 반듯하다. 아마 마차 안에 있는 고용주의 대변인이나 집사 같은 사람이겠지.

=이런 말씀 드리기 부끄럽지만, 제 상단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더욱이 근래에 프라버에서 벌어진 일 탓에 이런저런 손해가 누적되어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 되었지요. 이번 상행에 상단의 명운을 걸었습니다. 어떻게든 성사시켜야 합니다.=

“…….”

환인은 시종일 정중함을 잃지 않는 휴베이아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정보에는 정보로 셈을 치르는 것이 맞겠지요. 크라빈 마을에서 로탄 산지를 가로질러 왔으니 휴베이아 상단주께서 궁금한 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해 드릴 수 있을 겁니다. 대신 상단주께서는 프라버의 상황을 알려주시면 좋겠군요. 우리도 비슷한 입장인지라.”

역시!

여기사처럼 다부지지만 온화하게도 느껴지는 미모의 얼굴에 화색이 깃들었다.

그런 거라면 자신 있다.

=감사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도 상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로탄 산지에 대한 설명은 짧게 끝냈다.

상태에 대한 약간의 설명, 그리고 하늘에서 본 지형 상황을 그림으로 표시.

물론 상세하게 그려주진 않았다. 일행이 지나쳐온 길목만 대략적으로 그려준 것.

그것만으로도 휴베이아 상단주는 크게 감격했다.

“아까 보니 조인족 쟁자수도 있으신듯한데, 정보의 정확성은 사람을 보내 초입의 상태만 보아도 알 수 있을 겁니다.”

=예, 감사합니다. 설마 이런 지도까지 제공해주실 줄이야…….=

무척이나 고마워한 휴베이아는 이어서 프라버의 상황을 거의 30분에 걸쳐 상세히 알려주었다.

작은 상단이기에 여러 분야에 걸쳐 상행해서일까, 아는 것이 적지 않았는데 그중 중요한 것을 추리자면…….

=프라버 영주님은 호수 북쪽의 중급 도시 알소프와 정략결혼을 통해 혈맹을 맺으려 하셨습니다.=

=프라버 영주님의 차녀와 알소프 영주님의 혼약이 예정되어있었지요.=

=사고는 다섯 달 전에 벌어졌습니다. 차녀께서 의문의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은 거죠.=

=막바지에 접어들었던 혈맹 구성은 무산되었고 프라버 영주님의 분노는 머리끝까지 솟았습니다.=

=관련자를 색출한다고 무고한 사람까지 잡아 모진 고문을 가해 죽였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프라버 시민들은 자신들에게 불길이 쏟아질까 죽은 듯이 지내고 있고 상거래도 매우 위축된 상태입니다.=

=저희가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이번 상행을 성사시키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차녀분의 이름이요? 백려강이십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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