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3화 〉 367 프라버 남쪽 평원
* * *
덜컹덜컹
=비가 그치니까 물이 빠지긴 빠지네.=
=우기가 완전히 끝난 건 아니니까 이때 빨리 지나가야 해. 얘들아, 조금만 더 힘내자.=
쿠엣~!
하늘 고래를 만난 산 중턱 고지대에서 사흘을 더 보낸 환인 일행은 초목의 싱그러움을 잃고 진흙색으로 온통 덧칠되어버린 산길과 계곡 길을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이동은 힘들었다.
사방이 질퍽한 뻘투성이라 마차 바퀴가 종종 진창에 빠져 멈춘다.
물비린내가 심하게 나는 데다 곳곳에 가스가 가득 차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짐승, 괴물의 익사체가 악취를 풍기고 있어 머리를 아프게 한다.
쿠엣.
쿠우우… 핏, 퓨힉.
쿠에~!
=응응, 냄새가 심하지? 조금만 더 힘내서 빨리 지나가자~.=
쿠에들도 지독한 냄새에 눈을 찡그리며 힘들어했지만, 이것들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악취는 코를 막거나 정 심하면 환연을 통해 하늘의 신선한 공기를 가져와 환기해도 되는 일이었으니까.
진짜 문제는 길을 막는 온갖 장해물이었다.
“저 앞에는 바위와 나무가 쌓여 길이 막혔으니 너희가 힘을 써야겠다.”
=맡겨줘.=
대규모로 수해가 일어난 탓에 격류가 바위 및 자갈을 운반해와 사방에 뿌린데다, 부러진 나무가 곳곳에 쌓여 길을 막았던 것.
“이실리테. 저 앞에서는 왼쪽으로 가야 한다. 오른쪽은 산사태로 길이 사라졌다.”
=네, 주인님.=
그뿐만 아니라 산사태가 일어나 계곡 자체가 매몰된 곳도 있어 환인과 비상이 하늘에서 길을 찾아 주어야 했고.
「자, 얼른 지나가.」
지형 탓에 물이 호수처럼 고여 길을 침범한 곳에서는 환연이 땅의 정령을 불러 임시 흙다리를 만들어 그 위를 지나가야 했다.
덜컹!
쿠엣!
쿠우으~
=아, 진짜. 또 바퀴가 진창에 박혔네.=
=안느 넌 기다려. 내가 내려서 밀어줄게.=
=응.=
그러는 와중에 마차 바퀴가 진창에 박혀 이실리테와 안느가 힘을 써서 밀어야 하는 것은 다반사였고
「히익? 벌레 엄청나게 커!」
=징그러워!!=
주먹만 한 온갖 벌레가 득실거리거나 날아다니며 일행을 덮치는 것도 예사였다.
그런 고행의 행군 중에 찾아온 밤의 시간.
해가 지고 달과 무수한 별이 떠올랐지만 수 미터 높이까지 흙탕물이 범람했던 흔적은 어둠 속에서 사라지긴커녕 달빛에 이질적으로 선명하게 다가와 모두의 신경이 쓰이게 했다.
거기다…….
=도령, 어쩌지? 근처에 쉴만한 장소가 안 보여. 그렇다고 산 위로 올라가자니 주변은 전부 경사가 심한 잡목림이야.=
꾸으.
쿠에…….
쿠으엣.
=아이들도 이런 데서는 쉬고 싶지 않은가 봐요, 주인님.=
조금만 걸어도 발이 푹푹 빠지는 진흙탕. 거기다 악취도 심하고 벌레의 성화도 극심하다. 자신들이야 마차 안에 들어가 버리면 그만이라지만 쿠에들은 그렇지 않다.
잠자리만큼은 깨끗하고 청결한 걸 좋아하는 쿠에들에게 이곳은 그야말로 똥통이나 다름없는 장소.
환연이 땅의 정령을 불러 근처를 청소해본답시고 땅을 헤집었지만, 똥오줌과 생활 폐수를 같이 넣고 몇 년은 썩힌 듯한 끔찍한 냄새가 피어오르자 여자들의 비명이 날아들었다.
=하, 하지 마!=
=꺅!=
괴물보다 무서운 냄새라니.
환인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지. 힘들겠지만 오늘은 밤을 지새워 이동한다. 그러면 내일 오후 정도에 이 지역을 벗어날 수 있을 거다. 안느는 아이들에게 체력회복을 걸어주고 유르파는 빛의 구슬을 만들어주십시오. 이실리테는 마차를 계속 몰아라.”
=네, 주인님.=
=응.=
“힘들겠지만 기운 내라.”
쿠엣!
그렇게 무박 2일의 강행군 끝에 해가 중천에 떴을 무렵, 일행은 끔찍한 산간 지역을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찰랑…….
사아아아—
산간 지역을 빠져나온 일행은 눈 앞에 펼쳐진 환상적인 광경에 입을 살짝 벌었다.
발목께에서 희미하게 이는 투명한 파문. 내리는 부슬비를 머금고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물에 잠긴 평원이 마치 거울처럼 시야 끝까지 푸른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이제부터 시작되는 평원의 지대가 약간 낮다 보니 산간 지역에서 내린 비가 모두 이쪽 평원으로 흘러온 듯, 평원 전체가 물에 잠긴 모습이다.
=와…… 수해가 극심하긴 했나 봐요. 온통 물바다네요.=
“못해도 6일간 수십 미터의 강우량을 보였으니 이러는 것도 이해되는군.”
그렇다고 비가 그친 것도 아니며 지금도 부슬비와 장대비를 오가며 뿌리는 중이다.
다만 다행인 점은 수심이 발목이 잠기는 정도였고, 깊은 곳이라고 해봤자 종아리 정도였기에 이동에 지장은 없었다.
환인은 마차 위에 서서 시야 끝까지 물이 찰랑이며 햇빛을 반사하고 있는 것을 구경했다.
지구에서 가장 큰 거울이라 불리는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사막처럼, 하늘이 땅에 내려온 것처럼 반사하는 수면이 대자연의 장엄함을 체감케 한다.
잠시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던 환인은 비상을 불러 등에 타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사이 마차 밖으로 나온 안느와 이실리테가 잔뜩 풀어진 얼굴로 흐읍 심호흡을 한다.
=공기가 맑은 게 너무 행복해…….=
=나도…….=
안느와 유르파는 그저 공기가 맑아진 것이 행복했다. 오죽했으면 진흙탕이 된 지역에 진입하자마자 괴로워하다가 정화포 마스크를 썼을까.
쿠우? 쿠웃.
쿠에~
쿠흐흥.
참방거리며 물에 발을 씻는 쿠에들을 바라보던 이실리테는 자리에서 일어나 온통 물투성이인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기가 동쪽인가?=
=아냐. 저쪽이 동쪽이야. 아침 해가 저쪽에서 떴잖아.=
=그럼 저쪽으로 가면 되려나.=
=뭐, 도령이 하늘로 올라갔으니까 곧 가야 할 방향을 알려줄 거야. 그전에 발 좀 씻어야겠네. 읏차.=
첨벙!
마차 위에서 뛰어내린 안느는 공기처럼 맑고 투명한 물에 진흙투성이인 부츠를 씻고 장갑도 씻어낸다.
이실리테도 마차에서 내려 갑옷과 망토에 묻은 흙을 씻어내다가 수면에 무수하게 생겨나는 파문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구름이 좀 많지만 사이사이 푸른 하늘이 보이는 날씨인데도 보슬비가 떨어지고 있다.
저 아득히 먼 하늘에 꾸무룩한 구름이 몰려오는 걸 보면 또 비를 뿌릴 셈인가보다.
휘이이잉—
비상을 타고 바람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온 환인이 말했다.
“저쪽으로 가다 보면 뭍이 나온다. 거기서 쉬도록 하지.”
=네. 안느, 빨리 올라와.=
=어어! 잠깐만!=
덥고 냄새나는 장소를 나와 탁 트인데다 아름답기까지 한 곳을 이동 중이라서일까.
쿠흥.
쿠에?
쿠웃.
쿠에들이 참방참방하며 발걸음도 가볍게 마차를 끌고 나아간다.
그렇게 20분가량 이동하자 작은 섬처럼 돌출되어 물에 젖지 않은 장소가 나왔고 환인 일행은 바로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시간은 정오를 지나 오후 3시에 가까운 시각.
잠자리를 준비하기에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어젯밤 잠시도 쉬지 않고 이동한걸 고려하면 그리 이른 것도 아니다.
「어휴 진흙뗏국물 좀 봐. 씻겨줄 테니까 다들 나 따라와.」
쿠엣?!
쿠에~!
환연은 몸 곳곳에 진흙이 묻은 쿠에들을 데리고 물가로 가서 물의 정령을 불러 하나씩 꼼꼼하게 씻겨주기 시작한다.
안느는 유르파와 함께 혹시 모를 비를 피하기 위한 천막을 쳤고.
=우왓, 이슬이 너 뭐 해?!=
이실리테는 대담하게도 갑옷과 속옷까지 벗어 알몸으로 환연의 도움을 받아 가며 몸을 씻었다.
=우리가 지나온 곳에는 눈에 안 보이는 괴물이 있어서, 그게 입 안으로 들어가거나 음식에 들어가면 배탈이나 복통을 일으킨다고 주인님이 말씀하셨어. 그게 몸에 달라붙은 채로 음식을 만들면 위험하잖아.=
=……그렇게 씻으면 안전해진대?=
=응. 환연, 물 좀 더 부어줘.=
「이렇게?」
촤아아악—
=물줄기 조금 더 강하게 해줄 수 있어? 두 배 정도 더 쏟아지면 좋겠는데. 아, 이 정도면 됐어. 고마워.=
물의 정령이 뿌려주는 물줄기로 시원하게 샤워하는 이실리테의 모습.
천막을 다 친 안느와 유르파는 말없이 서로를 쳐다본 뒤 자기 몸을 내려다보았다.
=…율이 언니, 우리도 씻을까?=
=…씻자.=
이렇게 사방이 탁 트인 장소에서 알몸이 되는 것에 조금 거부감이 들긴 하지만,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은커녕 생물도 안 보이는 장소다.
둘은 살짝 꾸물거리며 옷을 벗은 후 이실리테의 곁에서 같이 몸을 씻기 시작했다.
왠지 창피하지만 자기만 벗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창피함이 약간 옅어지는 느낌이다.
“…….”
환인은 쿠에들의 옆에서 몸을 씻는 그녀들을 보며 턱을 잠시 매만졌다.
그녀들에게 세균의 위험성을 각인시키기에 괴물의 비유만 한 게 없다고 생각한 환인이었다. 때문에 자기 말이라면 철석같이 믿는 이실리테에게 먼저 그것을 이야기해 주었던 건데 저렇게 효과가 좋을 줄이야.
환인은 물방울과 함께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대한 거울이 땅 박힌 것처럼 하늘과의 경계선이 안 보일 정도로 아름다운 장소.
조금 낡았지만 중후한 멋이 느껴지는 대형 마차와 그 옆에 쳐진 천막, 그리고 여신처럼 아름다운 여자들이 부슬비가 내리는 따사로운 햇볕 아래 알몸으로 몸을 씻는 광경은 환인에게 비현실적인 광경처럼 다가왔다.
살면서 이런 풍경을 몇 번이나 볼 수 있을까.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으로 그녀들의 목욕 장면을 남긴 환인도 성수포로 몸을 깨끗하게 닦고 옷을 갈아입는다.
그 후 이실리테가 준비한 늦은 점심이자 이른 저녁을 푸짐하게 먹은 뒤 일행에게 이른 휴식을 지시했다.
“저녁때까지 내가 불침번을 설 테니 먼저 쉬도록 해라.”
=알았어. 피곤하면 나부터 깨워줘.=
=주인님, 먼저 쉴게요…….=
여자들은 마차의 문이란 문은 전부 연 다음 얇은 이부자리만 깐 뒤 편한 차림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열린 창문과 마차 문을 통해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그리고 간간이 들려오는 작은 물결 소리가 그녀들에게 깊은 수면으로 이끈다.
인지를 초월한 존재와 마주하며 쌓인 정신적인 피로, 그리고 끔찍한 환경을 밤새가며 돌파한 데서 밀려온 육체적 피로는 6시간 정도의 숙면으로 모두 해소되었다.
그녀들이 잠자리에 든 뒤 6시간 동안 환인 홀로 불침번을 섰던 것.
식사까지 마친 뒤 잠자리에 든 시간이 오후 5시. 그로부터 6시간 뒤에 일어난 여자들은 환인에게 자리를 비켜준 뒤 각자 알아서 휴식과 불침번 교대를 진행했다.
아침까지 남은 시간은 길지만, 충분히 잠을 자고 난 뒤에 다시 억지로 자는 것도 피로를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유르파는 이실리테와 안느가 착용할 위상력 반발 마도구의 최종 작업을 진행했고, 이실리테와 안느는 교대하고 잠든 환인을 옆에서 구경하며 함께 불침번과 휴식을 취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아가씨들…… 마도구 다 완성했으니까 나도 다시 좀 잘게…?=
=잘자.=
=아침에 깨워줄게요.=
=응…….=
엉금엉금 환인이 누워 자는 곳으로 기어와 그의 옆에 몸을 누인 유르파는 금세 고롱거리며 고른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
=…….=
둘은 소리 없이 시간을 보내다 점차 어둠이 물러가며 붉고 푸른 기운이 번져오는 동쪽 하늘을 구경했다.
자못 환상적인 일출을 감상하던 중 안느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슬아, 르아가 했던 말 어떻게 생각해?=
=……파르히스트하고 헬루멘에 평범한 일상이 이어지고 있다는 거?=
당시 환인과 르아웬의 대화가 끝난 뒤 안느는 피곤해하는 르아웬을 붙잡고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물었었다.
원래 물으려 했던 심핵의 정체와 문양의 의미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환인이 확인해보라 했던 세 곳 도시 근황과 영도의 상황이 어떤지 확인하려 했던 것.
=응. 르아는 내가 죽은 줄 알고 슬퍼했었잖아. 그 정도면 헬루멘의 그 영주 언니랑 파르히스트의 성주님은 뭔가 반응을 보였을 거로 생각했거든.=
미궁의 심핵에 대해 정보를 쥐고 있는 르아웬은 자신을 죽은 것처럼 취급했었다.
그렇다면 파르히스트와 헬루멘의 주인도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 성자가 죽었다고?! 믿을 수 없다! 기사단을 파견해 확인해라!! 음모가 있었던 건 아닌지 낱낱이 파헤치란 말이다!!’ 이렇게 말이다.
이실리테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자신이 봐도 헬루멘의 시하 영주님은 주인님한테 푹 빠져있었으니까.
아마 죽었다는 소식이 거기까지 닿았다면 무슨 행동이든 했을 것이다.
=영주가 그렇게 날뛰면 아랫것들도 덩달아 부산스러워질 수밖에 없잖아. 조용하다는 게 믿기지 않는데.=
=하지만 촌락이나 마을처럼 작은 곳도 아닌 도시잖아. 도시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큼 주인님이 이름을 알리고 다니진 않으셨으니까…….=
그러니 일상 풍경이 이어져도 이상하지는 않다. 만약 비자룩스가 그랬다면 이상했겠지만 말이다.
=또 시하 영주님이라면 시끄럽게 굴기 이전에 사람을 보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부터 했을 거라고 봐. 파르히스트 성주님은 본 적이 없으니까 모르겠네.=
=……도령이 궁금해한 게 이쪽이 아닌 건가?=
=그럴지도…….=
도령의 생각은 자신들과는 다르다.
하나의 주제에 대해 자신들이 111(이해가 안 돼서 여러 번 생각한다)23345566 이런 식으로 생각을 이어간다면 도령은 13469 이런 식으로 사고가 비약적으로 뛰어넘는다고 할까.
그러다 보니 가끔은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게 맞는 건가 싶은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
=…….=
마치 죽은 것처럼 미동도 없이 조용히 숨을 쉬는 환인을 바라보던 이실리테는 살짝, 아주 사아알짝 그의 앞머리를 옆으로 넘겨보았다.
그렇게 환인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가슴 속에 행복이란 감정이 뭉글뭉글 솟아나기 시작했다.
다른 일이야 아무래도 좋은 것처럼.
=…라드세아 중부는 난리가 났겠네…….=
=응……. 그 두 곳이 붙었으니까 불똥은 다른 도시에도 튀었을 거야.=
=크라버리는 주변 유망한 마을하고 몇몇 도시의 주인들이랑 혈연을 맺었으니까 말이지. 반대로 파르히스트는 너무 빨리 성장한다고 주변을 소홀히 한 감이 없지 않고.=
파르히스트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던 웨이포드도 움직일지 모른다. 그러면 프라버도 행동에 나설 수 있으니 파르히스트가 극히 불리해지는 형세지만.
‘따지고 보면 크라버리웨이포드프라버는 반 성자파고 영웅의 도시 주인은 친 성자파니까, 헬루멘은 파르히스트 쪽에 손을 들 수 있어. 전쟁의 명분도 파르히스트에 있기도 하고.’
어쨌든 전쟁의 불길이 라드세아 서부를 뒤덮었으니 빨리 라드세아를 벗어나 영도로 향하고 싶다.
문제는 프라버인가.
르아웬은 프라버의 현재 분위기가 매우 험악하다고 했다.
영주의 차녀의 죽음을 둘러싸고 자살이니 타살이니 이야기가 나오는 마당이라 시민들도 위축되어있고 거리에는 병사들이 살기를 풀풀 날리며 돌아다닌다고.
성자의 실종과 관련이 없는 쪽으로 민심도 그렇고 영주성에 흉흉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것이다.
=프라버는 최대한 빨리 지나치는 걸 추천한다고 했는데 도령은 어떻게 하려나.=
=문제없지 않을까? 주인님이 그런 걸 예견한 것처럼 위상력 반발 마도구를 준비시키셨잖아.=
안느는 이실리테를 돌아보았다.
오륜기 형태의 초커를 낀 그녀는 평소의 아름다운 빛 입자의 아우라가 없어 평범한 아가씨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능력도 사라졌냐 하면 아니다. 필요하면 얼마든지 힘을 쓸 수 있다.
나중에 자신도 그 목걸이를 끼고 마차도 평범한 캐러밴처럼 유지하고 비상의 깃털 색도 검은색이나 회색 정도로 바꿔놓으면 자신들이 시선을 받을 이유가 완전히 사라진다.
=그러면 누구도 성자님 일행이라고 알아보지 못할 거야.=
=응.=
=도령은 어떻게 이런 걸 딱딱 맞춰서 준비하는 걸까.=
안느가 사랑이 듬뿍 담긴 눈으로 환인의 콧날을 살짝 건드리다가 눈을 찌르는 빛을 느끼고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 시선을 주었다.
밤과 낮의 경계를 지나 점차 밝아져 오는 하늘과 함께 새벽 특유의 상쾌한 공기가 마차 안을 채운다.
오늘도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 * * *
르아웬은 환인 일행과 통신을 종료하고 그와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추기경 회합 때 올릴 보고서를 작성하며 확신했다.
‘이 자료를 제출하면 세 추기경도 성자와 교분 쌓기를 적극적으로 찬성할 수밖에 없겠지.’
현재 니오네브레스에는 이유 모를 기현상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차원 방랑자의 소환 가속화이며 그다음으로 빈번한 것이 영문을 알 수 없는 미궁의 변화로 인한 역류 현상이다.
각지의 성수나 악수의 강화 혹은 집단 형성도 목격되고 있고 바다가 불타거나 하늘이 쪼개지는 일도 일어났었다는 소식이 들어오는 중이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이 상황에 신님과 영혼을 매개로 이어질 수 있는 고위 영혼사와의 관계성은 반드시 확보해야 할 것이다.
‘겸사겸사 안느도 챙겨주고.’
보고서를 완성하고 펜을 잉크통에 꽂은 르아웬은 조용히 보고서를 다시 읽으며 하자는 없는지 검토한다.
하면서 안느의 옆에 서 있던 다른 여자를 떠올렸다.
이실리테. 도적 출신이라는 과거를 극복하고 파르히스트 토너먼트에 출전, 준우승을 거머쥐며 실력을 드러낸 여자.
이후 검희로 각성해 헬루멘의 영웅 기사단과 친선대전에서 기사들을 연속 격파, 결국 우승을 거머쥐며 루크랑 족의 영웅으로 주목받는 검사.
능력이 출중한데 그에 못지않게 외모 또한 아름답기 짝이 없다.
‘그 여자랑 사이좋아 보였었지…….’
장래에 심대한 경쟁자가 될지도 모르는 여자와 사이좋게 지내다니.
안느는 위기감이 없어도 너무 없는 게 탈이라며 르아웬은 속으로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마음만 맞으면 누구한테나 착하고 사람 좋은 안느. 그래서 더욱 고통받았던 내 여동생.
‘그래서 좋아하는 거지만.’
다음에 연락이 되면 그땐 남몰래 경고라도 해줘야겠다. 그리고 걔 성격에 꾸미는 것도 못할 테니 밤에 남자를 유혹할만한 속옷도 준비해서 보내주고…….
안느에게 도움 될만한 물건의 구매 목록을 작성하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던 르아웬은 문득 자기 몸에서 퀴퀴한 냄새가 난다는 걸 깨달았다.
팔을 들어 겨드랑이 냄새를 맡자 숙성이 과다해진 풋사과 같은 냄새가 맡아진다.
=……냄새나.=
지독한 수준은 아니지만 인식했더니 거슬린다.
내가 마지막으로 씻은 게 언제였더라?
…그래, 오늘은 일찍 돌아가서 뜨거운 물에 씻고 맥주 한잔하면서 쉬어야겠다.
내일 있을 추기경 모임에 신경 쓰려면 휴식도 필요하니까.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