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2화 〉 366 프라버로 가는 길
* * *
자신이 종족 연합 국가 메리아놀로 향하는 이유는 지금도 자신의 주머니 한쪽에 고이 모셔져 있는 종족 연합 국가 주화를 단서로 삼아 자신을 이 세계에 소환한 놈을 찾기 위해서다.
지금껏 니오네브레스를 여행하며 그 목적을 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리고 그에 대한 언급은 딱 한 번, 임세희를 만났을 당시 아주 짧게 흘리고 지나갔다.
여자친구들도 이상하다거나 하는 점을 못 느끼고 지나간 상태이며 주화를 그녀들에게 보여준 적도 없다.
임세희에게 안전히 살기 위한 주의사항을 단단히 가르쳤고 에사르트 또한 그녀를 지키겠다 자신에게 맹세한 상황.
주화와 관련된 사항이 외부로 흘러나갈 건덕지가 없는 상태인데 예상 밖의 인물에게서 차원 이동에 대한 언급이 나왔다.
‘결론은 미궁에 대한 자료 및 내 정보를 확보하고 있다는 말이 되겠지.’
잠깐 생각해보면 그녀가 차원 이동을 언급하게 된 이유는 명확하다.
자신은 이계인이다. 거기에 소멸한 산란못 미궁. 4개월간 실종상태였던 자신들.
그녀는 심핵을 파괴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는 거겠지. 그것과 자신이 이계인이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낸 추론의 결과가 차원 이동일 것이다.
머리를 조금만 쓸 수 있다면 간단히 낼 수 있는 결론이다.
그리고 그 결과에서 자신도 일부 역으로 추론해 심핵은 역시 소원석이라는 확신을 뒀다.
여기까지 3초.
“…….”
환인은 대답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침묵이란 대체로 상대가 자의적인 해석을 하게 만드는 수단이다.
상대가 적대적이라면 대화에서 침묵이라는 카드를 쓰는 것은 상황을 나쁘게 만들 수 있는 대표적인 방법 중 하나이지만, 르아웬처럼 이쪽에 명백한 호감과 호의를 가진 상대라면 쓰기 괜찮은 카드가 된다.
그리고 예상대로 자신의 침묵을 다르게 해석한 르아웬이 진정하라는 듯이 상록수처럼 싱그러운 미소를 보이며 말한다.
[우리 종족 연합 국가가 이계인, 차원 방랑자분들을 모으고 있는 것은 성자님도 알고 계시리라 생각해요. 그에 관해서는 갖은 뜬소문이 퍼져있는 상황이라,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셨다면 경계하시는 것이 당연하죠.]
“…….”
환인은 저 발언에서 르아웬=아기오시스는 강제 소환과 관련이 없다는 것까지 눈치챘다.
아니, 관련이 없는 게 아니라 그러한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다.
그녀는 종족 연합 국가에서 국교인 땅신 교단의 다섯 명뿐인 추기경 중 한 명이다. 그런 그녀가 이계인을 소환하고 있다는 걸 모를 수가 있는 건가?
게다가 중요한 단서가 하나 더 있다.
이 땅에는 자신을 이 땅으로 소환한 인간들처럼 인위적인 소환 외에 자연 발생한 소환도 있다는 것.
환인은 어쩌면 자신을 소환한 놈들은 그리 유능한 집단이 아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엉뚱한 곳에 떨어트리다니. 아니면 애초에 소환 자체가 다른 목적의 부산물 같은 건가?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도 못 한 얼굴로 르아웬이 말을 잇는 것을 귀담아듣는다.
[제가 방금 그런 질문을 한 까닭은, 성자님이 이번에 겪은 일이 이 세계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진지하게 생각하셔야 한다는 의미였어요.]
“저에게 차원 이동이란 절대 가벼이 다룰 수 없는 주제입니다. 제 출신을 알고 계실 테니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네. 여기서 아까 제가 안느에게 한 이야기와 연결이 돼요. 그 일에 관해서 드릴 이야기가 많으니 될 수 있으면 최대한 빠르게 성도 카이르 시아리오로 와주시면 좋겠어요.]
환인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싶지 않군요.”
이렇게까지 이야기했는데 승낙도 아니고 완곡한 사양도 아닌, 거절이 나올 줄 예상 못 한 르아웬이 당황을 약간 드러내며 반문한다.
[…예?]
뒤에서 안느도 =어? 도, 도령?= 당황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환인은 시선을 돌리지 않고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제 발언이 추기경 예하께 얼마만 한 모욕이 될지 짐작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말씀드릴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제가 이 세상에서 믿고 신뢰하는 사람은 여기 있는 동료이자 제 여자들 뿐입니다. 예하의 그 이야기만 듣고 찾아가는 것은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대답해드리고 싶습니다.”
[…….]
르아웬은 환인이 지금 자신에게 신호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지금 저 반응은 단순히 차원 방랑자들을 모아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이 와전되고 왜곡되어 그들을 강제 수용해서 비인륜적인 행위를 가하고 있다는 이유로 나온 반응이 아니다.
자신들을 잠재적인 악의 축으로 여기고 있지 않은 한 나올 수 없는 발언.
‘뭐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시선을 들어 그의 뒤에 서 있는 안느를 보았지만, 그녀도 아는 게 없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르아웬은 고심해서 할 말을 골랐다.
그에게 믿음을 주는 게 우선인데 지금 저 반응을 보아서는 어지간한 것으론 믿음을 주긴커녕 불신이 생겨날 흐름이다.
가장 확실한 믿음을 줄 수 있는 수단이 있지만, 이것은 추기경인 자신이 독단으로 쓸 수 없다. 최소 2명의 추기경에게 동의를 받아야 할 수 있다.
그런 제약을 걷어내고 그것을 쓴다면 그로 인해 교단이 입을 손해는? 그리고 메리아놀이 얻을 이득은?
사고가 빠르게 회전하지만 좀처럼 적법한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
환인은 그녀가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에 약간의 시간을 주기 위해(안느의 자매가 아니었다면 이런 배려도 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움막 밖으로 향하며 말했다.
“일단 갈지 안 갈지 그 여부는 잠시 젖혀두고 지금 상황부터 말씀드리자면……. 현재 움직이기 극히 곤란한 상황입니다. 한 달 내에 종족 연합 국가에 도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어째서인가요?]
“보시죠.”
그 말과 함께 화면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보이는 것은 조금 좁지만 정갈한 실내.
‘어느 마을의 귀인 숙소인가?’
르아웬은 그리 생각했지만 잠시 후에 자신의 예상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문을 열고 나가자 움막 같은 내부 환경과 함께 쿠에 네 마리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게 화면에 담겼던 것이다.
쿠우?
쿠엣.
고개를 서로의 등에 올리고 자던 쿠에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고개를 들어 보는 모습이 귀엽다.
깃털도 매끄럽고 윤기가 흐르고 눈망울은 또렷하고 초롱초롱하다.
르아웬은 저 모습에서 환인 일행이 선량함과 배려심을 가진 집단임을 눈치챘다.
쿠에는 분위기에 예민하며 기질이 순하고 여린 동물이다.
가족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나쁜 짓을 일삼는다면 그걸 느낀 쿠에들은 조금 무겁고 탁한 기운을 띈다.
결코 저런 순하고 맑은 기질이 흘러나오지 않는 것이다.
쏴아아아아…….
르아웬은 수정구를 통해 흘러들어오는 짙은 빗소리에 짧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라드세아 중부… 로아팅스 정글 인근이라고 했었지. 이제 우기가 시작될 때니까 빗속에 갇혔구나.
안느는 손재주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니 성자님이 움막을 직접 지었나? 손재주가 제법이시네.
이런 생각을 하던 중에도 화면은 계속 움직여 움막 밖으로 나갔고, 이어서 드러난 것은 황토색의 대하大?가 와류를 일으키며 장엄하게 흐르는 광경이었다.
수해가 일어나서 호수가 범람한 건가?
르아웬은 뭔가 그런 게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고운 녹색 눈썹을 찡그리며 화면을 응시했다.
쿠르르르—…… 희미하게 들려오는 굉음, 그리고 이쑤시개처럼 작아 보이는 강 건너편 산자락의 나무.
나무의 크기와 위치, 물이 흐르는 형태를 보자면 저 대하의 폭은 1km가 넘으며 자연적인 강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 말은…….
‘홍수가 일어났구나.’
“저 흙탕물이 흐르는 곳은 원래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늘 고래가 나타났다 사라진 이후 근방 50여 킬로미터 이내는 전부 이런 상태가 되었습니다. 저 물이 모두 빠지길 기다리는 것만 해도 적지 않은 시간이 들 겁니다.”
르아웬은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는 설명보다 다른 사실에 주목했다.
[고래가 등장했다고요? 설마 영성경인가요?]
“영성 하늘 고래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예. 맞습니다.”
르아웬의 표정이 매우 심각해졌다.
장마 중에 영성경??과 마주쳤다면 저 상황이 벌어진 게 이해는 된다.
영성경은 대량의 안개와 함께 등장한다. 그리고 안개도 일종의 수분.
막대한 안개와 장마가 마주치면 시간당 10m는 가뿐하게 넘는 물의 재앙이 펼쳐지기도 하며, 실제로 그런 일이 몇 번 벌어져 촌락이나 마을이 물에 잠기기도 했다는 문헌이 대서고에 남아있다.
하지만 저 정도 수해가 벌어질 정도라면 영성경이 몸을 완전히 드러내는 수준이어야 한다.
영성경이 안개 속에서 실루엣을 드러내는 것은 근처에 많은 영혼이 지상을 배회할 때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런 영성경이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영성이 근처에 존재하며, 영성경이 그 영성에게 이끌렸을 때…….
‘말도 안 돼. 벌써 영성이 되었다고?’
정보국은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그는 상급 영혼사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영성의 위?에 올라설 가능성도 존재한다고 명시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영성이 될 가능성이 있는 자’와 ‘영성’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격차가 존재한다.
‘교단의 방침을 다시 설정해야 해. 역시 성자와는 극우호의 태도를 고수하는 게 맞아.’
오울링 이전의 행적에서 평온의 파동은 확인하지 못했다. 오울링에서, 혹은 파르히스트에서 상급 영혼사가 되었다 치면 1년도 안 되는 사이 영혼사의 상위직인 영성으로 성장했다는 뜻.
말도 안 되는 성장치다.
자신을 포함해 다섯 추기경 중 세 명, 다른 성술 계파의 추기경들은 이계인인 성자와 관계성을 소극적으로 맺길 주장했었다.
왕성과 세계수의 탑이 주장하는 견해를 대입해보면 차원 방랑자인 성자와 가까이 지낸다는 것은 자칫 그들과 분쟁, 마찰이 벌어질 수 있는 건수였으니까.
기본적으로 종교와 정치의 입장과 격은 동등하다지만 땅신님을 섬기며 그분의 신언을 받드는 교단의 발언력이 조금 더 강한 편이다.
그러나 그것도 그분을 존중하고 존경하며 흠모하고 경외하기에 나오는 것.
왕성과 탑의 방침은 ‘차원 방랑자? 니오네브레스에 위험한 지식과 사상을 퍼트릴 수 있는 사람들이잖아. 무한한 자유는 곤란하지만 우리가 모아서 관리할 필요는 있다고 봐.’ 정도로 설명된다.
그런 방침을 함부로 건드렸다간 서로 간에 앙금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 점을 걱정하는 추기경들을 설득해 성자와 친해져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자신이었다.
안느를 챙기고자 하는 사심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걸 제외하고도 뛰어난 영적 자질을 지닌 성자라면 언제고 상급 영혼사를 뛰어넘어 영성이 될 거라 생각했고, 신과 연결된다는 영성의 직업성을 고려해 미리 인맥을 쌓아두면 절대 손해 보지 않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
물론 생각 없이 마음 가는대로 추천한 것은 아니다. 전설적인 영성이라 불리는 영도의 수장 닌실=아나그가 그를 영도로 직접 초대했다는 것이 그의 자질을 증명한다.
그러한 설득 덕분에 다른 추기경들의 입장이 반대에서 부분적인 찬성으로 돌아섰다.
백분율로 치자면 믿음은 40%도 안 되는 수준.
자신이 이때까지 수행해낸 성과와 쌓아온 실적이 있기에 자신의 견해를 일단은 믿겠다는 제스쳐였다.
하지만 이 사실을 추가해서 다시 설득하면 이번에야말로 적극적인 우호 자세를 견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보다 다양한 지원과 혜택을 줄 수 있게 돼. 그러면 그와 친분을 쉽게 쌓을 수 있을 거야. 겸사겸사 안느에게도 지원의 수준을 높일 수 있겠지.’
“…….”
환인은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고 있는 르아웬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진지해진 것을 본다면 해가 될 생각은 아닌 듯하지만, 영성이라는 사실에 집중해 이전에 자신이 보낸 신호를 소홀히 하고 있는 게 훤히 보인다.
이래서야…… 종족 연합 국가가 이계인을 소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까지 얼마나 걸릴까.
그 사실을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건 피하고 싶은데.
이때까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일단 종족 연합 국가의 플뢰들은 선량한 종족인 건 맞다.
그렇다고 마냥 선하지는 않다. 자신들의 주관에 따라 얼마든지 이기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걸 안느를 통해 알아낸 상황.
현재 메리아놀 내부는 두 부류가 존재한다.
차원 방랑자를 모아서 (일종의 위험 방지 대책의 의미로)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는 쪽.
차원 방랑자를 남몰래 소환해 무언가를 해보려는 개자식들.
르아웬과 안느는 명백히 전자지만 후자가 존재하는 한 설렁설렁 놀러 가듯 메리아놀로 향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 사실을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하는 것은 자신을 후자에게 직접 노출하는 것과 다름없는 위험한 행위다.
안느는 르아웬을 믿을 수 있다고 했지만, 자신까지 그걸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잠재적인 적이 될 여지를 남겨두고 활동해야 한다.
생각이 끝났는지 르아웬의 한층 강렬해진 눈빛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성자님의 상황은 이해했어요.]
잠깐 시선을 내린 르아웬은 무언가를 빠르게 적어 바람의 시종마에게 들려 보냈다.
그리고 환인을 돌아보며 말한다.
[성자님의 불안을 이해한다고 하면 기만이겠지요. 하지만…… 약속드리겠습니다. 성자님이 아무런 불안과 걱정 없이 저희 메리아놀로 오실 수 있도록 교단이 갖은 수단을 다 써서 성자님의 안전을 확보하겠다고요.]
‘텄군.’
환인은 속으로 혀를 찼다.
방금 영성 하늘 고래를 언급했기 때문일까. 그 임팩트에 가려져 자신이 했던 말의 숨겨진 뜻을 읽지 못하고 표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말았다.
[말로만 믿어달라 하지 않겠습니다. 임시 추기경 회합을 열어 그에 관해 진지한 토의를 거쳐 불편함 없고 안전히 모실 수 있도록 노력하겠으니, 이후에 다시 연락을 주시길 부탁드려도 될까요?]
“추기경 예하께서 그렇게까지 해주시니 차마 거절할 수 없군요. 영도에서 볼일이 끝날 무렵 다시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텄다고 해도 이후에 개선될 여지가 있으니 대화 창구는 남겨놓아야겠지.
환인의 비교적 우호적인 성향을 본 르아웬이 한결 안도한 얼굴로 이야기의 끝을 입에 담는다.
[그때는 그런 딱딱한 호칭보다 친근하게 이름을 불러주시면 기쁠 거예요. 안느의 남편이 될 사람은 저에게도 소중한 분이니까요.]
“…그러겠습니다, 르아웬.”
얼핏 안느와 닮은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인 르아웬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돌려서 말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주의사항을 드리고자 해요. 부디 흘려듣지 마시길 바래요.]
“심핵과 접촉했으니 다른 지배계층들이 접촉해올 거란 이야기입니까.”
그걸 말하려던 르아웬은 순간 살짝 당황하며 말을 받았다.
[…네. 또는 그것의 작용이 널리 퍼지길 원치 않은 작자들이 성자님을 해하려 할 수도 있는 노릇이고요. 다만 영혼사님들의 특성상 도시에서 해를 당할 일은 없겠네요.]
‘영혼사가 살해당하면 벌어지는 영식을 말하는 거겠군.’
환인과 르아웬의 말 없는 시선이 오간다.
‘성자님…… 생각보다 더 대단한 분이시네.’
‘대화에서 사소한 편린을 잡아 정보로 가공하는 실력도 있고 정보를 취합해 상황을 파악하는 직관도 있다. 다만 사고가 깊지 못해 의중을 파악하는 점이 미흡하군.’
르아웬은 이 정도라면 어느 정도 정보를 공개해도 괜찮다는 판단을 내렸다.
멍청한 사람에게 귀중한 정보가 쥐어지면 그건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재앙이 되는 법이니까. 성자님 정도라면 요긴하게 쓰실 수 있으시겠지.
[성자님. 심핵은 지금 전부 말씀드릴 수 없는 이 세계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예요. 산란못 미궁의 끝에 있었던 일은 이후 절대 입 밖으로 내지 않으시길 재차 권해드릴게요.]
“이해했습니다.”
미궁의 소원석인 심핵의 용도를 입에 담는 순간 가진 자들이 척결하러 모일 거란 뜻이겠지. 입에 담지만 않는다면 자신의 신분 특성상 함부로 터치는 못 할 것이고.
[그리고 영성경과 만난 것도 성자님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소문을 퍼트리는 게 좋아 보여요. 그만한 일이 벌어졌다면 다른 곳에서도 영성경의 일부가 관측되었을 것이고 성자님의 능력이라면 검증은 어렵지 않을 거예요.]
환인은 자신을 영성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여자에게 사실을 말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고민은 짧았다.
“잠깐 오해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어 보이는군요. 우리도 안느의 부분적인 지식을 토대로 그 하늘 고래가 영성 하늘 고래임을 알아보았고, 일부러 절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성자님이 영성이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그럴 리 없어요. 영성경이 전신을 드러내는 것은 오직 영성이 그 자리에 있을 때뿐이에요. 성자님이 계신 곳에 다른 영성님이 지나가고 있을 리 없으니 그 영성경의 출현 원인은 성자님이라고 확신합니다.]
“…….”
뭘 믿고 저리 확신한다는 건지 환인은 잘 이해되지 않았다.
[몇 주 전 파르히스트와 크라버리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어요. 일반 병력까지 동원되어 파르히스트 평원에서 대규모 회전이 일어났죠. 양측 피해를 합산한다면 사상자만 2만에 이를 정도로 대규모였어요.]
‘결국 전쟁이 났군.’
환인은 속으로 그걸 구경하지 못한 것을 약간 아쉬워했지만, 아쉬움은 금방 털어버리고 다른 사실에 집중했다.
“그 장소에 영혼사들이 모인 겁니까.”
[네. 대규모의 영도제가 필요한 상황이었으니까요. 영도의 영성님 두 분도 그곳에 계세요. 그러한 상황에 영성경이 다른 이유로 성자님이 계신 곳에 모습을 드러냈으리라곤 생각이 들지 않아요.]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믿음과 신뢰의 눈빛에 환인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영성에 대해서 뭐 아는 게 없다. 어쩌면 저쪽이 더 잘 알지도 모르는 일.
여기서 영성의 특징 등을 알려달라 말해봤자 자신만 우습게 될 테지.
확인은 영도에 도착한 뒤에 하기로 하고, 환인은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알겠습니다. 르아웬, 당신이 말해준 주의사항을 염두에 두고 활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안느, 받아라.”
=앗, 어엉.=
안느에게 수정구를 넘겨준 환인은 안느가 르아웬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는 것을 들으며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았다.
르아웬과 대화를 나누며 얻은 중요한 실마리는 세 가지.
미궁의 심핵은 소원석이며 그것이 이 세상의 비밀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신비라는 것.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니오네브레스의 지배자들이 정보를 통제하고 있다는 것.
종족 연합 국가에서 웃기지도 않는 실험 짓거리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커졌다는 것.
‘……힘이 부족해.’
크기가 작은, 등급이 낮은 미궁의 심핵은 소원석으로써 힘이 약하다는 걸 금방 추측했다.
영구히 차원을 넘기 위해서는 최소 산란못 미궁과 비슷한 급의 미궁을 여러 번 돌파해 힘을 쌓아야 한다는 뜻.
그러기 위해서는 미궁을 돌파할 강한 힘과, 그사이 개입해올 세력에게 저항할 무력이 필요하다.
지금의 힘만으로는 부족하기 짝이 없다.
“…….”
환인은 조용히 그리모암의 허리띠와 팔찌를 매만졌다.
전부 모아서 착용하면 7급 근접 직업자에 해당하는 힘을 준다는 그리모암의 유물.
우선 이것부터 전부 모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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