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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기담-371화 (371/813)

〈 371화 〉 365 프라버로 가는 길

* * *

곤히 잠든 여자친구들의 근처에서 환인은 가슴의 문양에 대해 심사숙고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이 문양은 자신의 현재 지식과 상식으로 서투르게 다룰 게 아니라는 거였다.

일단 이 문양의 기능은 차원 이동과 관련된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 문양이 발동하게 되는 경위와 거기에 소비되는 에너지가 무엇인지 모른다.

쓰려 해도 그 에너지의 종류와 기본이 되는 성질을 알아야 안전하게 쓸 수 있을 텐데 무엇하나 아는 게 없다.

예시로 불을 들자면, 불이란 뜨거우며 고온이다. 섣불리 손대면 화상을 입을 수 있다. 연소하는 특징이 있어 주변을 불태울 수 있다.

이런 사용상 주의 사항이 있고 그 점을 염두에 두어야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문양은 뭘까. 어떤 에너지를 사용할까. 어떤 특징이 있고 어떤 성질이 있을까.

차원 이동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걸 제외하면 아무것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니 어떤 위험이 있는지도 알 수 없다.

불은 그 뜨거움으로 무언가를 가열한다는 특징이 있다. 사용법, 위험 요소도 그의 연장선이다. 그런 이치로 미루어보았을 때 문양은 차원 이동을 실현해주니 사고가 발생한다면 차원의 유리??라던가 차원의 격리나 차원의 미아 등이 벌어질 수 있으리라 짐작 가능하다.

무엇 하나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부류다.

“…….”

지구에서 니오네브레스로 넘어올 때처럼 문양이 빛나기 시작했지만, 환인은 이 문양을 쓸 생각이 없어졌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난 그의 여자들은 발가벗고 팬티만 입은 자신의 차림에 얼굴을 붉히며 얇은 이불을 들어 맨가슴을 가렸다.

누가 벗겼지? …아니, 말할 필요도 없겠네.

여자들은 커피를 올린 곁탁자를 옆에 두고 독서 중인 환인을 힐끔거리며 속옷과 의복을 챙겨입다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아직도 머리가 멍해…….=

=나도……. 이번에는 진짜 죽는 줄 알았어. 하늘 고래는 문헌으로만 봤는데 실제로 보니까 그냥…….=

치미는 오한에 으~ 몸을 부르르 떤 안느가 묻는다.

=이슬아. 전에 본 하늘 고래도 이랬어?=

=아니. 그땐 전신을 내보이지도 않았고…… 아주 가까이서 키만큼이나 큰 눈이 스쳐 지나가는 건 봤지만 안개 속이라서 잘 안 보였어.=

=…그것도 좀 무서운데? 안개 속에서 눈만 쓱 지나갔다니.=

괜히 무서워진 안느가 이실리테를 껴안으며 체온으로 안도감을 얻을 때 유르파는 환인 몰래 슬쩍 팬티 밑부분을 만지고 있었다.

산맥만 한 하늘 고래가 밀어닥칠 때 살짝 지린 줄 알았는데 그냥 기분 탓이었나보다. 다행히 뽀송뽀송하다.

=그 하늘 고래는 왜 그런 행동을 한 거지? 자기한테 뭔가 전달하고 싶은 게 있었던 걸까?=

재빨리 원피스 치맛자락을 내리고 옷차림을 정리하며 하는 말에 이실리테에게 밀려난 안느가 구부정하니 앉아 힘없이 대답한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도령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도령도 영성이 되었다는 뜻일 테니까.=

=하지만 주인님은 변한 게 없으신걸.=

“…….”

자신을 힐끔거리며 약간 나사 풀린 것처럼 대화를 나누는 여자친구들에게 다가간 환인은 그녀들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열은 없다. 그냥 좀 많이 놀라서 힘이 빠진 듯하다.

평온의 파동을 쏠까 했지만, 이런 사소한 쓰다간 나중에 금단 증상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진정시켜준다는 허브차를 타서 나누어주었다.

환인은 그녀들이 따뜻한 차를 마시며 긴장이 풀어지는 것을 보고 자신의 몸에 생긴 이변과 그에 대한 자기 생각을 말해주었다.

두 손으로 컵을 잡고 진지한 얼굴로 듣던 안느가 물었다.

=도령은 그 문양의 사용법이 영기인걸 확신하는 거야?=

“확신하지 않는다.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할 뿐이지.”

=으응…… 그럴 만도 해. 자기가 영혼사인 거랑 관계성이 느껴지는 요소가 많으니까.=

유르파가 생각에 잠기는 모습에 이실리테가 빈 잔을 내리며 입을 열었다.

=저, 주인님?=

“음.”

=진짜 영성이 되신 거예요?=

환인도 아까 밖에서 안느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았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좀 전에 내렸다.

“알 수 없다.”

현재 자신이 확보 가능한 영혼 구슬 개수는 84개.

또 하나의 분기점이 되지 않을까 생각 중인 96개까지는 아직 12개나 남은 상황이며, 산란못 미궁에서 여자 직업자 영혼을 성불시켜주고 늘어난 3개 이후로 그 어떤 변동도 없었다.

있다면 심핵을 깬 뒤에 생긴 가슴의 문양뿐.

“더군다나 나는 순수한 영혼사가 아니지 않나. 이블팩션이라는 집단의 강혼사와 이쪽의 영혼사가 섞인 직업인 것으로 보고 있는데 영혼사의 상위직이라는 영성이 될 수 있는 건가 의문이 든다.”

=…….=

=…….=

“하지만… 영혼사의 특징이 없는 것은 아니니 영성의 특징도 나타날 수 있겠지.”

=그럼……?=

“그렇다고 해도 근래에 내 능력적인 면에서의 변화는 없었다. 유일한 변화라면 이 문양뿐.”

셔츠 앞 단추를 열어 드러낸 문양을 가리키자 유르파가 고양이처럼 기어서 환인의 무릎에 가슴을 올리고 문양을 빤히 들여다본다.

그러다 자기 가방으로 뛰어가더니 노트를 가져와 문양을 세세하게 그리기 시작했다.

거의 본뜨다시피 하는 수준으로 옮겨 그리던 유르파가 그림을 그리며 말한다.

=영성 하늘 고래가… 여기에 이유 없이 나타난 건 아니라고 봐. 자기의 능력이랑 틀림없이 연관이 있을 거야.=

=문양이랑 연관이 있을까?=

안느도 환인의 무릎 쪽으로 다가와 그녀가 노트에 그리는 그림과 환인의 가슴을 번갈아 보며 묻는다.

=문양을 발동하는데 영기가 방아쇠 역할을 했잖니. 우리 눈에는 안 보이지만 자기의 왼팔을 뒤덮은 영기가 문양의 색과 똑같다고도 했고 마지막으로…….=

=하늘 고래가 지나간 뒤에 문양에 다시 빛이 돌아왔지.=

=응. 그걸 생각하면 관계가 없다고 치부하기도 그래.=

그렇게 유르파가 결론을 내놨지만, 유르파 본인은 물론 이실리테와 안느도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을 느꼈다.

속 시원해지지 않는다고 할까.

팔짱을 끼고 고민하던 안느는 탁, 자기 무릎을 때리며 말했다.

=좋아. 르아한테 미궁 심핵에 대해서 물어봐야지.=

=본단에 있다는 그 추기경님?=

=응. 안 그래도 슬슬 생존 연락을 넣을 때가 됐으니까. 하는 김에 심핵하고 그런 거까지 다 물어볼래. 도령, 산란못 미궁에서 있었던 일 말해도 돼?=

“그 추기경은 얼마나 믿을 수 있지.”

=자매의 연을 맺어서 진짜 자매나 다름없어. 내가 버린 이름도 알고 있고.=

안느와 첫 경험을 할 때 들었던 그녀의 신분을 떠올린 환인은 여친룩처럼 입고 자신의 무릎 앞에 앉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종족 연합 국가의 공주…일지도 모르는 여자친구.

그런 신분을 알고 있는 데다 저번 통신 때 그녀와 추기경의 대화를 보면 막역한 사이라는 건 쉽게 알 수 있다.

환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안느에게 무엇을 물어볼 것인지 확인했고, 거기에 몇몇 대도시의 상황과 근황 정도의 질문도 더할 것을 요구했다.

이 정도만 알아둬도 4개월의 공백은 그럭저럭 메꿀 수 있겠지.

* * * *

르아웬은 작성해야 할 서류를 앞에 둔 채 멍하니 그것만 바라보고 있었다.

흡사 지우개로 지워버린 것처럼 머릿속이 텅 비어 아무 생각도 안 난다.

=…….=

지난 4개월은 땅신 교단 본단의 다섯 추기경 중 1인인 르아웬=아기오시스에게 있어 가슴 시린 상실의 시간이었다.

태어난 시간은 다르지만 자매의 연을 맺은 자신의 반쪽이 사라진 것에서 오는 상실감.

천생연분이라고 할지, 잘 어울리는 남자를 만나 이제부터 행복을 찾아갈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르아웬은 안느와 그녀의 파티가 미궁 소멸에 휘말려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한동안 아무런 생각도,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영혼의 반쪽이 사라진다면 이것과 비슷한 고통일까.

결혼은커녕 교제 중인 남자도 없는 르아웬이지만, 그만큼 안느의 소실은 그녀의 가슴에 큰 상처를 남겼다.

그 때문에…….

[르아, 안녕?]

=…….=

천연덕스럽게 통신 수정구로 연락해온 안느의 얼굴이 영상으로 앞에 펼쳐졌을 때, 르아웬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떨궜다.

[어…….]

당황이 한껏 농축된 한마디.

안느의 성격이 모두 깃들어있는 그 외마디에 겨우 정신을 추스른 르아웬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너 어떻게 된 거야……. 살아 있었어?=

[아, 맞다. 여긴 4개월이나 지났었지.]

=……시간의 흐름이 달라 연락도 안 되는 장소에 다녀오기라도 한 거야?=

[어. 거기서 4일 정도 보냈는데 돌아오니까 4개월이 지났더라.]

안느의 이야기에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자초지종이 그녀의 머릿속에 일목요연하게 짜 맞춰졌다.

심핵을 부순 것은 안느를 가져가 버린 그 남자였겠지. 그 남자의 가장 큰 목표는 자신의 세계로 귀환이었을 테고……. 이 세계의 시간 흐름은 저쪽의 약 30배인가.

생각을 정리하느라 말을 하지 않았더니 안느가 쩔쩔매는 얼굴로 조심스레 물어온다.

[마, 많이 걱정했어?]

=걱정 같은 건 안 했어. 그냥 마음의 절반을 잃어버린 것 같은 시간이었지.=

[윽.]

당황해버린 안느의 표정에 르아웬도 겨우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정말, 정말로 안느가 살아 돌아왔구나.

요동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으니 안느의 변명이 귀에 들어왔다.

[내 잘못은 아니다? 나도 그렇고 도령도 몰랐던 거야.]

=알아. 그러니까 이렇게 있지, 아니었으면 너 찾아가서 가만 안 뒀어.=

[아하하.]

해맑게 웃는 안느를 보고 있자니 가슴에 형용 못 할 감정이 소용돌이친다.

그걸 다스리는 데만도 벅차다. 직접 얼굴을 봤다면 곧장 그녀를 끌어안고 꼴사납게 펑펑 울었겠지.

속마음은 감춘 채 르아웬은 자신의 반협박에 헤헤 웃는 안느를 보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언제 돌아온 거야?=

[어, 이제 6일 정도 됐어. 마침 두 달 정도 됐으니 연락할 때도 됐고 겸사겸사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해서 연락 넣은 거야.]

=…….=

르아웬은 안느의 태연자약한 모습에 울분과 함께 체념의 감정이 치솟아 머리가 아파졌다.

누군 밤에 제대로 잠도 못 자고 날밤을 새우고 그랬는데 저건 사람 마음도 모르고.

이때 입을 열어봤자 좋은 말은 안 나오기 마련.

=잠깐만.=

손을 들어 안느에게 잠시 기다려달라고 한 르아웬은 의자에서 일어나 화면이 보이지 않는 쪽으로 나와 손수건으로 얼굴을 감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숨결에 울분이 흘러나가고, 남은 눈물도 따라 조금 더 흘러내린다.

저 나쁜 년. 내가 미쳤지, 저런 곰 같은 년이 뭐가 좋아서 자매의 연까지 맺고…….

짜증과 분노가 일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잠깐이었다. 그 자리를 안느가 무사히 살아 돌아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채운다.

그러다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어째서 돌아온 거지? ……아니, 바보 같은 의문이야.’

무려 차원 이동이다. 산란못 미궁은 추정 5.7급이었고 프라버의 하늘 기사단 조사 결과 라이프 드레인 계통의 미궁으로 판명 났다.

백수십 명을 납치해 생명력을 빨아먹었으니 중핵과 심핵은 강화되어 추정 6급이 되었겠지.

일순간의 부스트로 6급 미궁이 되어 소원석이 발동했다 해도 차원 이동을 영구히 발생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성공적으로 ‘완벽한’ 차원 이동을 실행하려면 재앙급 미궁을 최소 둘 이상 돌파해서 소원력을 몸에 쌓아야 할 터.

생각이 여기까지 닿자 가슴 아려오는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그러네……. 안느는 언젠가 그 남자랑 함께 영원히 떠나는 거구나.’

뭐, 그때가 되면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게 되어 슬프겠지만 그건 고통과는 다를 것이다.

안느가 행복을 찾아 보금자리를 꾸미러 떠나는 거니까. 그건 슬퍼할 게 아니라 축하할 일이지.

르아웬은 어느샌가 멈춘 눈물의 흔적을 닦고 기초화장으로 운 흔적을 지운 뒤 자리로 돌아갔다.

* * * *

=아우, 진짜.=

르아웬이 화면 너머로 사라지자마자 안느는 은실처럼 반짝이는 은발이 헝클어질 정도로 벅벅 긁었다.

미안해 죽겠네. 르아 쟤 성격이면 내가 죽은 줄 알고 마음고생 엄청 했을 텐데.

본의 아니게 걱정을 많이 끼친 거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돌아오자마자 연락해서 안심시켰을 텐데 체감은 4~5일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던 터라 깊게 생각 못한 게 실착이다.

‘뭐라도 선물 하나 보내는 게 좋으려나?’

르아가 좋아하는 걸 선물로 보내면 좀 낫겠지. 겸사겸사 나도 마음이 조금은 편해질 거고.

뭐가 좋을까?

잠깐 생각하는 사이 화면에 르아웬이 돌아왔다.

[훗. 그 표정 뭐야. 오줌 마려워?]

=나 수목화 시작해서 생리 활동 같은 거 안 하거든?=

[……수목, 수목화? 누구한테…… 아니다, 네가 해줄 사람은 한 명뿐이지……. 하아, 안느 너 진짜…….]

=뭐, 왜, 뭐.=

미안함이 한가득하던 감정도 잠시.

자신을 말썽꾸러기 취급하는 르아웬의 반응에 안느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고 그걸 작게 웃으며 바라보던 르아웬은 눈빛을 바꾸며 말했다.

[안느?]

=으, 응?=

[추기경으로서 명령하겠어. 한 달 이내에 본단으로 돌아와.]

=…야! 여기가 어딘 줄 알아?! 쉬지 않고 이동해도 거기까지 한 달 넘게 걸려!=

[그랬어? 그래도 돌아와.]

장난치는구나 싶어 발끈했던 안느는 르아웬이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걸 깨닫고 자신도 진지하게 대답했다.

=수목화 때문에 화난 거야? 그래도 이건 내 권리야. 내 남편…될 사람이랑 천년 해로 행복하게 살기 위한 권리.=

자신은 어디까지나 교단의 성투사. 교단이 명령을 내리면 따라야 하는 처지다. 그리고 르아웬은 그런 교단에 명령서를 내리는 존재.

그렇다고 해도 불합리한 명령을 거절할 권한 정도는 있다.

안느의 표정이 다부지게 변하는 모습에 르아웬이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멍충아. 내가 사심에 그런 명령을 내린 줄 알아? 다른 이유가 있어서 오라는 거니까. 이상한 생각 하지 마. 물론 나랑 상의 한 마디 안 하고 수목화 한 거에 좀 화가 나긴 하지만.]

……그런 거였어? 아니, 얘는 사람 헷갈리게 하고 있어.

자칫 환인 일행과 헤어져야 할 수도 있는 지시에 긴장했던 안느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른 이유라면 무슨 이유?=

[너, 지금 통화 넣은 이유가 산란못 미궁의 심핵 때문이지?]

=어? 그렇긴 한데…… 어떻게 알았어?=

[네가 겪은 일은 보통 큰일이 아니야. 보통은 극비로 다뤄지는 부류인데다 아까 네가 말한 걸 듣고 대충 짐작한 거야.]

그뿐만 아니라 환인, 안느가 따라다니는 성자님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굉장히 사려가 깊은 사람이었다.

그만한 일을 경험했다면 어떻게든 원인과 경위를 알고 싶어 하겠지.

옆에 그런 의문을 해소해줄만한 인맥이 있으니 활용하지 않을 사람이 아니다.

[아무튼, 그건 통신구로 할만한 이야기가 아니어서 돌아오라고 명령을 내린 거야. 그러니까 영도에 들렀다가 볼일 끝나면 바로 돌아와. 성자님을 모실 수 있으면 성자님도 모시고.]

르아웬이 꺼낸 의미심장한 이야기에 안느의 표정이 삽시간에 무거워지고 진지해졌다.

=네가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것부터 먼저 말할게. 난 지금 도령의 파티 멤버야. 리더의 허락이 없으면 파티를 이탈할 수 없어.=

[음…….]

=그리고 네가 교단의 추기경이라고 해도 우리 도령…… 성자님이 그렇게 지나가듯 말해도 될만큼 편한 분이 아니야.=

[알아. 성자님의 뒤에는 헬루멘과 파르히스트의 호족이 버티고 있으니까. 성자님 당신도 사회적으로 대단한 분이시고.]

=알고 있어서 다행이야. 그러니 무슨 문제인지 말부터 해. 통신구로 할만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우리 도령…… 성자님이 여행 경로를 바꿀만한 자그마한 정보라도 제공하던가.=

자신보다 남자친구를 우선하는 모습에 르아웬은 약간이지만 심술이 났다.

내가 그토록 파티 만들라고, 아니면 믿을만한 파티라도 소개해준다고 해도 귓등으로 안 듣고 혼자가 좋다고 하더니.

물론 안느의 이야기는 흠잡을 데 없이 타당한 이야기지만, 자매처럼 지내던 안느가 저렇게 말하니 이상하게 심술이 난다고 할까.

르아웬은 상록수처럼 초록빛 머리카락을 어깨 너머로 살랑, 흘려넘기며 대답했다.

[알았어. 그럼 성자님한테 직접 말씀드릴게. 옆에 계셔?]

=응. 자리 바꿀게.=

르아웬은 안느가 비켜선 자리로 한 남자가 들어오는 것을 보곤 속으로 작게 탄성을 흘렸다.

보고서에 올라온 그림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잘생긴 남자다.

거기에 적당히 이타적이며 적당히 이기적이면서도 진중하고 능력도 있고 잘생기기까지…….

저러니까 안느가 홀랑 넘어가 버리지.

자신에게서 안느를 뺏어간 남자를 보니 마음이 조금 복잡했지만, 그보다는 안느에게 정상적인 삶을 안겨준 고마움이 훨씬 더 컸기에 르아웬은 자연스레 호감이 드러나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직접 대화하는 건 처음이죠? 화면 너머긴 하지만 인사드릴게요. 메리아놀 땅신 본단 남부의 성도 카이르 시아리오 교구를 맡은 르아웬 아기오시스 니플람이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반갑습니다. 비자룩스의 녹색 성자라는 과분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환인입니다. 안느의 남자친구이기도 하지요.”

[네. 통신 수정구의 에너지가 여유 있게 대화할 정도는 아니니까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겠어요. 양해 부탁드릴게요.]

“예.”

[성자님, 심핵을 부순 뒤 성자님의 세계로 차원 이동을 하셨지요?]

“…….”

자신을 이 땅으로 소환한 장본인들이 사는 땅.

그 땅의 국교인 땅신 교단의 추기경이 꺼낸 본론이 너무나도 본격적이라 환인의 눈매가 살짝 찌푸려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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