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370화 (370/813)

〈 370화 〉 364 프라버로 가는 길

* * *

하늘로 물방울이 거슬러 올라가는 광경, 그리고 그 속에서 부드러운 곡선의 몸체를 드러내고 하늘을 유영하는 거대한 고래의 모습에 환인의 뒤에 서 있던 세 여자의 반응이 갈린다.

한 번 본 적이 있기에 조금은 침착하게 눈앞에 벌어지는 신비한 광경을 응시하는 이실리테.

자신에게 숨겨진 자식이 있었다는 말을 들은 숫처녀처럼 놀라는 안느.

그리고 영성 하늘 고래가 뭔지 몰라 의아해하면서도 신비로운 현상에 정신없이 고래를 살피는 유르파.

격한 반응은 안느에게서 나왔다.

=으, 응?! 저, 저거 설마 영성 하늘 고래야…?!=

=맞아. 저번에도 주인님이랑 한 번 봤었어.=

저번과는 다르게 전신을 드러낸 고래를 바라보며 신기해하던 이실리테는 홱, 자신을 향해 목이 부러질 듯이 고개를 돌리는 안느의 모습에 살짝 움츠러들었다.

얘가 왜 이러는 거지?

=이번이 두 번째야?! 처음에는 언제 만났었는데?!=

=너랑 성도에서 마주치기 나흘인가 닷새 전이었을 거야. 카턴 마을하고 파르히스트 사이 길을 따라 벌판을 이동하던 중에 마주쳤었어. 그땐 안개 속에 몸을 숨긴 상태였다는 게 다르지만……. 왜 그렇게 놀라?=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이실리테의 태도에 눈을 끔뻑인 안느는 저 먼 하늘에서 천천히 방향을 틀고 있는 하늘 고래를 응시하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 영성 하늘 고래가 나타나고 그 목격담이 전해지는 것은 아주 희귀한 일은 아니야. 물론 그 정체까지 아는 사람은 전 세계를 통틀어 수백 명도 안될 테지만, 각지에서 드물게 영성 하늘 고래의 신체 일부의 목격담이 전해져오고 있어.=

=그래서?=

=영성 하늘 고래의 출현은 두 가지 의미로 나누어져. 하나는 지상에 만연한 영혼을 거두어 올라가는 고래인데 일반인이 우연히 보게 되는 경우는 전부 이쪽이야. 짙은 안개의 바닷속에서 헤엄치는 거대한 지느러미, 거대한 꼬리를 보았다. 희끄무레한 형태가 짙은 안개 속 허공을 유영하더라 같은 거.=

확실히…… 주인님이랑 처음 만났을 때 그랬었지.

방향을 틀어 이쪽으로 오는듯한 영성 하늘 고래의 모습에 안느가 주먹을 꼭 쥐면서 침을 꼴깍 삼킨다.

=그리고 다른 쪽은 의미가 완전히 달라.=

=어, 어떻게?=

=영성 앞에만 모습을 드러낸다는 거야. 그때는 안개로 몸을 가린 모습이 아니라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 바로 지금처럼!=

=……응? 그럼 주인님이 영성이 됐다는 말이야?=

여자들의 시선이 하늘 고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는 환인을 향한다.

“…….”

환인은 그 시선을 느꼈지만 반응하지 않고 깊어진 눈빛으로 이쪽을 향해 머리를 돌린 고래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수면에 비친 달빛을 몸에 감은 듯한 검고 유려한 몸체가 물 흐르듯이 헤엄친다.

그 모습이 마치 세계라는 어항 속을 헤엄치는 관상어처럼 보이기도 해 신비한 기분이다.

꾸우우우웅——…….

“음.”

이전에 들어보았던 울음소리가 세상에 울려 퍼진다.

몸 안쪽에서부터 공명하는듯한 그 소리에 환인은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마치 꽉 막힌 명치에 차가운 물이 고이는 답답한 감각.

빛에 뒤덮인 왼팔이 저릿해지며 그곳에 모여있던 영혼 구슬이 모두 풀려난다.

꺄르르…….

구슬화되어있던 정령이 모두 자기 모습을 되찾고 꿈속처럼 흐릿한 웃음소리와 함께 빛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광경.

한 번 경험해봤기에 환인은 당황하지 않고 정령들이 영성 하늘 고래를 향해 날아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을 때, 목덜미를 누군가가 꽉 잡는 느낌에 심장이 철렁했던 환인은 그게 누군지 뒤늦게 깨닫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

피부를 통해 환연이 바들바들 떠는 게 느껴진다. 반은 정령이어서 방금 소리에 영향을 받은 건가.

환인이 손을 들어 환연의 작은 몸뚱이를 덮어주는 사이 영성 하늘 고래가 점차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작은 주먹만 하던 고래의 모습이 시시각각 거대해져 간다.

머리가 명백히 이쪽을 향하고 있다.

=어…….=

=아앗…!=

인지를 초월한, 태산처럼 거대해진 영성 하늘 고래가 마치 격돌을 위해 쇄도해오는 모습에 환인의 여자들은 다리가 풀려 풀썩, 털썩 주저앉았다.

수천 톤을 넘어 수만 톤은 되어 보이는 초거대 질량이 대지에 바짝 붙어 날아오는 광경.

태산이 파도처럼 덮쳐드는 듯 인지를 초월하는 광경이다.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

콰과과과과……

공기가 떨리는 굉음이 진동으로 변해 몸을 두들기자 이실리테와 안느가 겁에 질려 서로를 끌어안고 눈을 질끈 감았다.

유르파는 그사이에 끼어 덜덜 떨다가 마비되어가는 정신을 필사적으로 붙들어 공간 도약의 술식을 떠올렸다.

비록 쓰면 수명이 1년씩 증발하는 비술이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쓴단 말인가.

유르파는 덜덜 떨리는 팔을 들어 환인에게 뻗으려다…….

=…….=

약간도 위축되지 않고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처럼 굳건히 서 있는 그의 뒷모습에 손을 내렸다.

꾸우우우웅——

=아악!=

=끄윽…!=

고막이 터질듯한 울음소리에 여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유르파도 기껏 준비해놓은 술식이 깨지는 것을 느끼고 쿨럭, 기침을 토해냈다.

틀렸다. 이제 도망칠 수도 없어.

유르파가 여기서 이렇게 죽는구나, 체념하고 있을 때도 환인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검은색처럼 보이는 짙은 감색의 고래를 응시했다.

이토록 가까워지자 저 거대한 생명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닫게 되었다.

잿빛 세상에서 홀로 별빛 가득한 밤하늘을 뒤집어쓴 듯한 가죽과, 강가에서 수십 년을 구르며 매끈하게 변한 조약돌 같은 유선형의 몸체.

저 거대한 몸 일부만이라도 스치거나 하면 자신들은 갈려 나가 한 줌의 핏물이 될 테지만, 환인은 불가사의하게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 같다고 느꼈다.

그리고…….

콰아아아아——

광풍과 함께 머리 바로 위로 족히 수백 미터의 고래가 순식간에 스치고 지나갔다.

“역시.”

환인은 미친 듯이 나부끼는 망토를 움켜쥐고 자신들을 지나쳐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고래의 뒤로 시선을 던졌다.

정상적인, 제대로 된 물리법칙이 적용되었다면 방금 그 비행으로 대지는 쑥대밭이 돼야 했다.

무게 수만 톤, 길이 수백 미터의 질량이 시속 수백 킬로미터로 지상 가까이에서 스쳐 지나가면 그 후풍와류로 대지가 한 꺼풀 벗겨지며 미사일 수백 발이 동시에 폭발한 것처럼 모두 터져나가야 하는 거다.

그런데 하늘 고래가 지나갈 때 허리케인처럼 강풍이 한차례 밀어닥쳤을 뿐 모든 게 멀쩡하다.

눈으로 하늘 고래를 쫓던 환인은 문득 하늘 고래의 까만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지끈.

“……!”

심장이 욱신거리는 고통에 미간을 찌푸린 환인이 가슴에 손을 올렸다.

갑자기 웬 흉통이란 말인가. 집안에 유전성 심장병은 없으니 심인성이라도 되는 건가.

하지만 어쩐지 그런 것과 다르다는 예감이 환인의 머릿속에 떠올랐을 무렵, 하늘 고래는 다시 한번 기나긴 울음소리와 함께 하늘을 뒤덮은 회색 먹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하늘로 역류하던 물방울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

역류하던 빗방울이 한 지점에 모여들어 거대한 막처럼 형성된 것이 한발 늦게 환인의 눈에 담겼다.

광범위하게 하늘을 뒤덮고 파도치는 바다처럼 일렁이는 물의 막.

강수량이 시간당 30m는 되는 것처럼 억수같이 쏟아지던 비가 거의 몇 분 동안 하늘에 모인 상황이다.

환인은 진짜 위기가 찾아올 거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아직 자신의 목에 매달려 덜덜 떠는 환연을 붙잡았다.

“환연. 지금 바로 물을 흘려보내는 보호막을 쳐라.”

「아, 으으. 으으……!」

대답도 못 하고 발발 떠는 환연. 좀전의 충격에 아직 헤어나오지 못한 모습이다.

구르르르륵—

환인은 하늘의 막이 낙하하기 시작하는 소리에 소름이 일었다.

당장 머리 위 반경 5km의 수량만 해도 족히 수십억 톤의 물이다. 저게 일시에 떨어졌다간 쓰나미가 지나간 것은 애교처럼 보일만 한 일이 벌어질 거다.

수십억 톤의 물벼락이 매초 다가오는 모습에 환인은 앞뒤 가리지 않고 평온의 파동을 연달아 파파팍 쏘아냈다.

“환연! 물의 보호막이다! 당장 펼쳐라!”

「아, 아? 으, 응!!」

평온의 파동 효과에 겨우 정신을 차린 환연은 일단 생각을 멈추고 그가 지시한 대로 중급 물의 정령을 불러 물의 막을 펼쳤다.

그리고 마치 하늘이 물로 변해 떨어지고 있는 듯한 미친 광경에 기겁해서 물의 정령을 있는대로 끌어모으려 했지만, 그 많던 애들이 다 사라지고 고작 셋 뿐.

애들 다 어디 간 거야?!

환연은 이를 악물고 중급 물의 정령 셋과 정신을 동기화하며 물의 장막을 펼쳤다.

그리고 막대한 물의 재앙이 떨어져 내렸다.

콰과과과과……!

쿠르르르르…….

쏴아아아—

=…….=

=…….=

「…….」

환인의 여자들과 환연은 산 중턱에서 거대한 강으로 변해버린 산자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니, 거대한 강이 아니라 저 밑이 바다로 변했고 산은 섬이 된 듯한 불가사의한 광경이다

골짜기마다 맹렬하게 몰아치며 발생하는 와류, 그리고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처럼 난폭하게 파도치는 황토색의 대하大?.

여자들은 굉음과 함께 흘러가는 대량의 물줄기에 머리끝이 삐죽거렸다.

다행히 여기가 산 중턱이어서 망정이지, 산 아래였다면 저 격렬히 소용돌이치는 물길에 휘말려 그대로 죽어버렸을 거다.

아니, 환연이 물의 보호막을 펼쳐 물을 전부 흘려보내지 않았다면 처음 물벼락이 떨어졌을 때 그대로 떠밀려 내려갔겠지. 아니면 그 막대한 낙하의 충격에 그대로 짜부라졌거나.

그 증거로 주변에는 나무가 뿌리째 뽑혀 나갔거나 부러지거나 해서 엉망진창이 된 숲밖에 안 보인다.

환인은 힘이 다 빠진 듯 자신의 손바닥에 퍼질러 주저앉은 환연을 쓰다듬어주었다.

“잘했다.”

「어? 어어… 응…….」

=진짜 굉장했어. 그만한 물이 수 킬로미터 하늘에서 떨어진 거라 충격만 해도 어마어마했을 텐데 어떻게 피해 하나 없이 막아낸 거야?=

환인의 손 위에서 얼떨떨해하던 환연은 안느의 질문에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래봤자 물이잖아. 물을 지배하는 애들이니까, 물에 맞서는 게 아니고 비껴서 흘려낸 거야. 그래서 충격도 안 심했고.」

=오. 역시 대형 정령석에서 태어난 정령 요정이네. 그 짧은 시간에 거기까지 생각하고.=

「흫흥.」

“마차로 들어가자.”

실소를 흘리는 환연을 어깨에 올린 환인은 다리가 풀린 건지 허리에 힘이 빠진 건지 제대로 서지 못하는 유르파를 안아 들고 마차로 돌아갔다.

환연의 보호막은 움막까지 전부 뒤덮었기에 그 막대한 물의 재앙 속에서도 움막은 형태 하나 변하지 않고 멀쩡했다.

움막 안의 마차로 돌아온 여자들은 환인이 다시 밖으로 나가 비상의 등에 올라타는 것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인님, 어디 가세요……?=

“잠깐 주변을 돌아보고 올 테니 쉬고 있어라. 방금 일어난 일에 동물이든 짐승이든 괴물이든 전부 쓸려 내려갔을 테지만, 환연은 주변으로 적이 접근하지 않는지 잘 지켜보고.”

「어응.」

“다녀오지.”

비상의 옆구리를 발꿈치로 툭 건드리자 쿠으! 울며 날개를 활짝 펼쳐 단숨에 하늘로 날아오르는 비상.

몸 주변에 바람의 막을 둘렀기에 빗방울이 쏟아지지 않는다.

덕분에 한결 편하게 고고도에서 주변을 살펴본 환인은 작게 침음을 흘렸다.

“곤란하군.”

방금까지 억수같이 퍼부어서일까. 빗줄기가 어느 정도 가늘어졌기에 비교적 멀리까지 볼 수 있게 되었는데 풍경이 참 가관이다.

하늘에서 일시에 쏟아진 물 폭탄 탓에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산은 섬이 되었고 골짜기는 해안선처럼 변해버렸다.

산 곳곳에는 물안개가 껴 아래쪽에서 보자면 시야가 불분명할 상황이고 길이 끊어져 더는 나아가는 것도 불가능한 상태.

‘다행인 것은 물이 계속 빠질 거란 점인가.’

하늘 고래가 나타난 순간에는 시간당 강우량이 mm가 아니라 m 단위로 쏟아졌던 듯했지만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현재는 부슬비 수준으로 빗줄기가 가늘어진 만큼 이 상태만 유지된다면 조만간 저 물은 모두 빠질 것이다.

만약 비가 계속 이어진다 해도 식량이 30일분은 비축되어있으니 문제가 될 일은 없을 테지. 뭣하면 환연과 함께 사냥을 나서도 되는 일이고.

지상 상태를 살펴본 환인은 움막을 설치한 곳에 산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을 점검해본 뒤 문제없음을 파악하자마자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이 장마가 하늘 고래의 영향일 가능성은…… 없겠지.’

안개와 함께 출몰하는 듯하니 강수량에 영향을 줄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아니 출몰하자마자 하늘에 무지막지한 양의 물이 모여든 것을 보면 강수량에 큰 영향을 주는 게 확실할 테지만 비 자체만 봐서는 원래 내릴 비로 보였다.

문제는 하늘 고래가 왜 뜬금없이 나타나서 자신 주변을 맴돌다 사라졌냐는 것이다.

고래가 처음부터 자신을 찾아온 것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그 가죽에 맺혀있던 하얀 빛…….’

전에 본 것이 맞았다면 그 무수한 빛은 전부 영혼이다.

근처에서 사람이 대량으로 죽어 나가기라도 한 건가.

게다가 안느의 말에 따르면 그 고래가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영성의 앞에서만이라 했는데 그 말뜻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영성이 되었나.’

언제? 능력의 변화는 없었는데. 영혼 구슬 개수도 변하지 않았고.

의구심을 품자면 산란못 미궁의 심핵을 깨트린 일이 있지만, 그건 지구로 돌아가기 위한 현상을 일으킨 것으로 끝이 아니었나?

환인은 하늘 고래가 사라진 먹구름을 뚫어지게 노려보다가 비상에게 물었다.

“저 구름 위까지 올라갈 수 있겠나.”

…꾸으. 큣, 쿠엣.

“그래…….”

억지로 힘을 쓰면 올라갈 수야 있지만 지금은 왠지 올라가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에 환인은 생각을 접었다.

저런 난층운, 비구름은 보통 고도 2~7km 높이에서 형성된다. 7km까지 올라가야 한다는 뜻인데 그 정도면 에베레스트나 k2보다 조금 낮다.

산소도 희박한 고고도에 맨몸으로 아무 대비 없이 올라가는 것은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인데, 저 비구름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다.

환인은 아릿한 감각이 남은 가슴을 매만지며 먹구름이 낀 하늘을 바라보다가 비상에게 말했다.

“움막으로 돌아가자.”

꾸우~.

알 도리가 없는 현상에 머리를 쥐어 짜내봤자 제대로 된 가설은 나오지 않는다.

좀 더 자료를 수집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자면 영도라던가, 안느가 소속된 땅신 교단 본단이라던가.

마차로 돌아온 환인은 여자친구들이 갑옷도 제대로 벗지 못한 상태로 기절한 것처럼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살펴보니 그냥 잠든 것뿐이다. 아마도 영성 하늘 고래와 접촉에 정신적 피로를 크게 느꼈던 거겠지.

파르히스트의 감옥 미궁에서 헤츨링 좀비나 유령 계통의 이형종을 만났을 때도, 폭군룡의 미궁에서 6급의 아룡들과 마주쳤을 때도, 산란못 미궁에서 여자들이 당한 끔찍한 모습에도 표정이 살짝 흐려지는 정도로 끝났을 만큼 정신이 강한 여자들이다.

그런 그녀들이 소녀처럼 비명을 지를 정도였으니 받은 정신적 충격이 어느 정도인지 익히 짐작 간다.

“…….”

사정을 알아보는 것은 급한 것이 아닌만큼 여자친구들이 일어난 뒤에 하기로 하고.

환인은 갑옷을 벗다 말고 잠든 이실리테를 바라보다가 일단 바닥에 아무렇게나 늘어져 자칫 밟을 위험이 있는 환연을 천장에 매 놓은 바구니 침대에 넣어주었다.

그리고 이때까지 봐왔던 그녀들의 장비 장착과 탈착을 떠올리며 갑옷을 벗겨주기 시작했다.

먼저 이실리테의 갑옷인 천상의 장막 흉갑을 벗기자 머리보다 더 큰 젖가슴 한 쌍이 푸릉거리며 모습을 드러낸다.

젖가슴이 닿아있던 갑주 안쪽이 묘하게 따뜻하다.

잠시 손이 멈췄던 환인은 무심하게 나머지 파츠도 모두 벗긴 뒤 이부자리를 편 다음 자신이 골라주었던 섹시 팬티만 입은 모습의 그녀를 자리에 눕혀주었다.

마찬가지로 안느도 갑옷을 벗긴 뒤 팬티만 입은 상태의 그녀를 이실리테 옆에 눕히고 유르파도 로브가 아니라 물주머니가 된 옷을 다 벗긴 다음 나란히 눕혀놓는다.

그리고 환인은…….

“……도촬범의 심정이 이런 건가.”

스마트폰을 가져와 무방비하게 잠든 여자친구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여러 방향에서 여러 필터로, 여러 밝기를 써가며 찍은 1억 화소의 고화질 사진 수백 장.

현실로 돌아가면 와이파이 기능이 없는 디지털카메라에 옮겨 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사진과 실물을 번갈아 보던 환인은 사진과 실물 둘 다 매력이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에 작게 감탄했다.

인터넷에 유포되기라도 했다간 난리 나겠군.

여자친구들의 나신을 감상하며 시간을 보낸 환인도 젖은 옷에서 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것을 깨닫고 젖은 옷을 벗다가…….

“……음.”

가슴의 문양을 본 순간 침음을 흘렸다.

심핵을 부수면서 가슴에 새겨진 문양, 지구에서 니오네브레스로 돌아온 뒤 회백색으로 변했던 문양이 다시금 찬란한 금빛을 내뿜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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