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9화 〉 363 프라버로 가는 길
* * *
마지막에 야생의 허약한 강도들을 만나긴 했지만 별다른 문제 없이 동 로아팅스 정글과 연결된 크라빈 숲을 빠져나온 환인 일행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프라버를 향해 북상했다.
휘오오오! 쏴아아악 촤아악!
=어푸푸!=
=으응!=
와중에 가장 큰 애로사항이라면 역시 사흘째 쉬지 않고 내리는 비일까.
정말 장마 기간에 들어섰는지 크라빈 마을을 나온 이후 비가 쉬지 않고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다.
비뿐만 아니라 강풍도 동반된 비바람이 몰아치니 우비를 쓰고 방수 망토를 둘러도 10분이면 물에 빠졌다 나온 것처럼 쫄딱 젖을 정도.
후오오옹!
=꺄아!=
=으~!=
아래에서 위로 솟구쳐올랐다는 비바람에 얻어맞아 우비가 훌렁 젖혀진 여자들이 작게 비명을 지른다.
원래는 지금쯤 프라버에 도착해야 했을 시간이지만, 상황이 이러다 보니 비바람이 앞길을 막아 시간이 극심하게 지체되고 있었다.
줄곧 비만 내려도 일정에 지장이 생기기 마련이다.
지구에서도 호우가 내리면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엉뚱한 길로 빠진다거나 노면의 사정이 나빠져 속도가 느려지기도 하고 강수량이 많아지면 길이 사라지기도 한다.
니오네브레스는 그런 면에서 더 심하다.
며칠째 내리는 비 탓에 길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작은 호수가 생기거나, 언덕길 같은 경우에는 토사로 길 자체가 사라진 예도 있었고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사방팔방에서 몰아치는 비바람 탓에 쿠에들이 제대로 방향을 못 잡고 엉뚱한 곳으로 향한다거나…….
하여튼 여러 사정으로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들고 있었다.
특히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은 두 산 사이에 큰 강이 생긴 것을 봤을 때는 환인도 조금 어이가 없었다.
우기 때만 생기는 강이 아프리카 쪽에 있다고는 들었지만 설마 초원에서 그런 광경을 목격할 줄이야.
쿠우~.
쿠엣쿠엥!
강풍에 우비가 유명무실해지고 눈에 물이 들어갔다며 칭얼거리는 쿠에들의 모습에 환인은 가슴 포켓을 톡톡 건드려 환연을 불렀다.
“바람의 막을 만들어 마차와 쿠에들을 보호할 수는 없나.”
「그만한 크기의 보호막을 만들 수는 있는데 하루종일 유지하지는 못해. 지금 신나서 날뛰는 중급 정령을 불러도 1시간 정도가 한계인 느낌?」
“정령을 교대로 불러 펼치는 건 불가능한가.”
「그러면 애들이 진짜 싫어할 거야. 어디까지나 정령에게 명령을 내리는 식이라 정령의 의욕에 따라 지시의 효율이 달라지는데 심각하면 애들이 불러도 안 올 수 있어.」
환연은 유르파가 만들어준 정령석 조각 나무 스틱을 흔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지시를 내리면 정령이 스스로 힘을 쓰는 식이기에 그런 재미없는 일을 시키면 10분도 안 돼서 다 도망가버릴 거라고.
“…….”
환인은 표고 50~100m 정도 되는 산 중턱 길에서 비바람이 몰아치느라 잘 보이지도 않는 주위를 잠깐 둘러본 뒤 한숨을 내쉬며 여자친구들에게 말했다.
“여기서 비가 그치길 기다려야겠다.”
=어어? 마차가 있다지만 이렇게 탁 트인 곳에서 머무르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거 같은데!=
“그 점은 땅의 정령의 도움을 받으면 해결할 수 있겠지. 환연.”
「응?」
“흙과 땅의 정령을 불러 주변에서 바위와 자갈을 끌어와 흙과 섞어 바닥을 평평하게 만들어라. 그 뒤에는 마차 주변으로 땅을 일으켜서 이런 모양으로 마차를 감싸면 된다.”
땅에 그림을 그려 C자 모양 포대 진지를 그려주자 흠흠 고개를 끄덕인 환연이 땅의 정령을 불러들여 작업을 시작한다.
“높이는 마차 지붕 위로 조금 더 올라올 정도면 충분하다.”
「그다음에는?」
“이런 식으로 물길을 만들어야지. 깊이는 깊게 팔수록 좋다.”
「알았어. 얘들아~.」
환연에게 할 일을 지시한 환인은 마차의 멍에에서 쿠에들을 풀어준 뒤 혼자 바람의 막을 둘러 비바람 속에서 멀쩡한 비상에게 쿠르티와 쿠핀, 쿠라도 챙기라고 지시했다.
“이실리테, 안느. 우리는 가서 나무를 해와야겠다.”
=엉!=
=네!=
마침 산 중턱이기도 해서 주변에 키 3~5m 정도 되는 낮고 나뭇가지가 넓게 퍼진 나무가 많다.
셋은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나무를 닥치는 대로 벌목해 통나무로 다듬는다.
=유르파는 나뭇가지만 치면 됩니다. 친 나뭇가지는 지붕으로 삼을 생각이니 나무 몸통 쪽으로 잘라놓으십시오.=
=맡겨줘!=
이실리테와 안느가 나무 밑동을 통째로 잘라 가져 오면 환인과 유르파가 위상력으로 절삭력을 늘린 단검이나 도끼로 손질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통나무는 마차 주위에 세워 기둥으로 삼고, 잘라둔 기다란 나뭇가지는 움막 지붕처럼 엮어 천장을 덮을 수 있도록 만들어낸다.
환연은 환인이 세운 나무 기둥을 따라 땅을 일으켜 참호처럼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돌과 자갈까지 섞어 단단하게 다진다.
그 후 서까래처럼 만든 것을 먼저 올리고 이실리테가 사둔 천막용 방수포를 그 위에 덮은 뒤 마지막으로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천장을 포개 지붕을 만들었다.
이러고 보니 흙벽을 세운 허술한 움막처럼 보이는 데다 산 중턱에 있어 흘러내리는 물에 쓸려나갈 위험도 없진 않지만…….
「환인, 땅 다 팠어.」
지붕 만들기 막바지 작업 중 환연이 몸에 물구슬을 두르고 휭하니 날아와 보고한다.
가서 확인해본 결과 폭 1미터, 깊이 1미터의 해자가 움막 주변을 따라 파여져 있었다.
강한 물살에 흙이 깎여나가는 것도 대비해 흙을 단단히 뭉치고 자갈까지 깔아놓은 덕에 위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이 해자 쪽을 타고 흐르다가 움막을 지나 아래로 빠르게 흘러간다.
“수고했다.”
꼼꼼한 마무리를 칭찬해준 환인은 마지막 작업을 진행했다.
지붕의 꼭짓점 부분을 짚단 엮듯이 묶은 나뭇가지를 덮는 것으로 완성.
내려와 확인해보니 임시 지붕을 따라 흘러내린 물이 물길에 떨어져 경사를 따라 흐르다 산비탈 아래로 내려간다.
임시 지붕을 삼중 구조로 만들어놓은 덕분에 안정성이 늘어 꽤 훌륭하게 물을 흘려보내고 있다.
여기에 서까래방수천막나뭇잎 이엉의 삼중 구조가 무게까지 책임져 강풍이 불어도 날아가지 않고 굳건히 버텨주고 있다.
=완성했다아아.=
=안느, 밖에 애들 안으로 들여야 해.=
=응. ……오? 안쪽에 물기가 하나도 없잖아?=
「내가 애들 시켜서 말려놨어.」
=잘했어! 자자, 쿠라, 쿠핀. 얼른 들어와. 쿠르티 너도.=
꾸우~
쿠엣.
다만 구조의 한계상 확보한 공간은 10평이 최대였기에, 마차에 네 마리의 쿠에가 더해지니 용적의 80%가 차버렸다.
그러나 나쁜 느낌은 아니다. 오히려 옹기종기 모인 덕에 추위도 느껴지지 않고 훈훈해졌던 것.
=환연. 애들 깃털에 묻은 물기를 모두 말려줄래? 유리 언니는 뒤쪽 짐칸에서 애들용 수건 좀 가져다주세요.=
「응.」
=알았어~.=
1차로 환연이 물기를 제거해주고 2차로 이실리테가 수건으로 고생한 쿠에들의 깃털을 마저 닦아준다.
3차는 안느와 유르파가 쿠에 전용 깃털솔로 깃털을 빗질해 주는 것으로 끝.
“빗속에서 마차를 끈다고 고생했다.”
쿠에~
쿠흐흥.
쿠엣!
뽀송뽀송 잘 마른 쿠에들에게 간식으로 생과일을 잔뜩 먹여주고 은근슬쩍 부대껴오는 비상에게도 간식을 준 환인은 혹시 몰라 챙겨둔 자잘한 나뭇가지와 이파리를 가져와 수분을 제거한 뒤 한쪽 바닥에 가뜩 쌓아주었다.
그러자 쿠에들이 쿠쿠 울면서 부리와 다리로 이파리를 둥지처럼 만들어놓고 그 위에 만족스러운 양 자리 잡는다.
환인은 온도계로 내부 온도를 확인한다. 기온이 22도 정도니까…….
“환연, 생각날 때마다 이 안쪽의 습기를 50% 정도로 맞춰다오. 입구에 바람의 막을 설치해놓으면 수분이 안쪽으로 들어오지 않아 오래 유지될 거다.”
「그럴게.」
환연이 몇 번 손짓하니 축축한 느낌의 움막 안쪽이 금세 포근해진다. 그와 함께 쿠에들의 표정도 편안해졌다.
쏴아아—
밖에서 쏟아지는 청명한 빗소리. 그에 비해 뽀송뽀송한 움막 안쪽.
쿠에들의 깃털은 잘 말라 보송보송하고 땅에도 나뭇잎이 잔뜩 깔려 폭신폭신하다.
좀 전에 맛있는 과일로 배까지 채웠으니 만족스럽지 않을 수 없겠지.
=도령, 우리 먼저 들어갈게! 도령도 빨리 들어와!=
“그래.”
여자친구들을 먼저 들여보낸 환인은 입구 근처에서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우비를 벗어 털고 방수 망토였음에도 흠뻑 젖은 후드 망토를 마차 옆에 걸어둔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젖은 검은 조끼와 셔츠도 벗으니 물에 젖은 상체가 드러나며 바람과 함께 시원한 감각이 밀려들었다.
“…….”
길게 늘어진 앞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다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세포가 물을 잔뜩 머금어 지문이 퉁퉁 불어있는 게 보인다.
손이 이렇게 된 게 얼마 만인가.
‘아니, 초등학생 이후로 비에 머리가 젖은 적도 처음이군.’
비박도 날씨를 봐가면서 했었고 비박 도중 불시에 비를 만나더라도 미니 타프가 있어 비를 맞은 적은 없었다.
쏴아아아아—
“…….”
쏟아지는 빗줄기에 조그만 감상을 털어버린 환인은 젖은 조끼와 셔츠도 옆에 널어두고 개인용 아공간 주머니에서 수건을 꺼내 몸을 닦았다.
환인의 손수건으로 몸을 감싼 채 마차의 돌출부 모서리에 앉아있던 환연이 묻는다.
「물기 말려줄까?」
“아니. 그것도 자주 받으면 피부가 갈라지고 찢어진다고 유르파가 말하더군.”
피부의 수분이 날아가며 유분까지 모두 가져 가버려 그렇다던가.
대충 몸의 물기를 닦고 잠시 비 내리는 고갯길을 구경하던 환인은 엣취, 환연의 작은 재채기 소리에 그녀를 손에 들고 마차로 들어갔다.
안에는, 이른바 남자의 천국이 펼쳐져 있었다.
=율이 언니, 이 브래지어 진짜 이쁘다. 지구에서 가져온 거 맞지?=
=응응. 프론트 후크라는 방식인데 무늬가 되게 환상적이지 않니? 이걸 여기서 묶으면…… 봐, 이게 또 장식이랑 합쳐져서…… 이렇게 예쁜데 D컵 이상은 구할 수가 없더라…….=
=그러게요……. 지구에는 가슴 큰 사람들의 속옷이 별로 없는 거 같았어요…….=
=그래도 팬티는 사이즈에 크게 영향 안 받잖아.=
=와! 안느 아가씨, 지금 위아래랑 색이 다른 속옷을 입고 자기 앞에 서라고 하는 거니?=
=위아래 색이 다른 속옷이 있긴 하지만 그건 좀…….=
호박색, 은색, 백색 머리카락 미녀들의 전라.
하얀 살결이 천장의 밝은 조명등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니 눈이 부셔서 크게 눈을 못 뜰 정도다.
여기에 출렁 흔들거리는 세 쌍의 젖무덤과 연분홍색 젖꼭지, 최고급 복숭아처럼 먹음직스러운 세 개의 엉덩이가 적나라하니 시선이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간다.
잠시 홀린 것처럼 그녀들의 알몸을 바라보던 환인은 작게 고개를 저으며 마차의 옵션 패널을 조작해 소음 억제 기능을 최저한으로 낮추고 창문도 활짝 열었다.
쏴아아아—
창문을 통해 비바람 소리와 신선한 물과 흙내음이 밀려드니 그제야 환인이 들어온 것을 눈치챈 여자들이 그의 앞에 우르르 모여들었다.
환인은 가까이 다가온 그녀들의 살 내음 가득한 알몸에 순간 멈칫했고 그것은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환인은 여자들의 가슴에, 여자들은 환인의 가슴에.
서로 상대의 맨살에 시선이 닿고 있는 것을 깨달은 순간 분위기가 살짝 미묘해졌지만, 안느가 특유의 인싸 기질로 서너 벌의 속옷을 환인에게 들어 보이며 묻는다.
=도령, 도령은 이 속옷이 누구한테 가장 어울리는 거 같아?=
“……어려운 문제군. 너희 모두 매력적이라서 말이다.”
셋 중 누가 가장 뛰어나냐는 것과 같은 질문에 누구 한 명만 찍을 수는 없었던 환인은 대충 다들 예뻐서 다 잘 어울릴 것 같다고 대답해주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대답은 자연스러웠다. 그걸 깨달은 유르파가 재빨리 질문을 바꿔 묻는다.
=자기, 그럼 우리한테 제일 잘 어울릴 것 같은 속옷은 어떤 거 같아?=
그 질문에 환인은 깊어진 눈으로 안느의 팔에 걸려있는 네 벌의 여성용 란제리를 응시했다.
오른팔에는 회색과 빨간색 기조의 손바닥만 한 팬티가 걸려있고 왼팔에는 파란색과 자주색이 걸려있다.
단일 색상이 아니라 두 가지 이상의 색상으로 이루어져 있어 싸구려 합성 섬유 느낌은 없다.
한 벌에 몇만 원에서 몇십만 원씩 하는 수준의 속옷들.
거기다 전부 시스루 스타일로 꽤나 선정적이며, 천의 면적이 작아질수록 비싸지는 여자 속옷의 특성을 고스란히 띤 것들이다.
=일단 나부터!=
환인은 잠시 자신의 앞에 알몸으로 두 팔을 벌린 채 선 안느의 몸매를 보고 망설임 없이 하얀색 바탕에 회색의 꽃무늬 망사 팬티를 픽업했다.
은색흰색회색의 삼중주는 누가 보아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지.
=오……. 도령은 이런 대비 색을 좋아하는 건가…?=
환인이 골라준 팬티를 들고 중얼거리며 뒤로 빠지자 그 자리에 조금 얼굴이 붉어진 이실리테가 들어왔다.
=주인님? 그, 그럼 다음에는 저를…….=
“너에게는 이게 가장 어울리겠군.”
이실리테에게 골라준 것은 폭이 매우 짧은 흑색과 백색의 숏팬츠풍 속옷이었는데 특이하게도 좌우로 완전히 나뉘어 있어 매듭을 따로 묶어야 하나의 팬티로 완성되는 형태였다.
매듭도 둔덕 쪽에 둘, 아래쪽에 하나, 엉덩이 쪽에 둘 뿐이라 갈라 팬티처럼 밑이 훤히 노출되는 식.
또한 외모적으로 괘씸한 가슴 크기를 제외하면 청순한 느낌이 강한 그녀였기에 이런 선정적인 팬티가 역설적으로 매력을 끌어올리는 느낌이다.
보지가 훤히 드러나는 형태의 속옷이 픽업되자 이실리테의 얼굴이 더더욱 빨개진다.
=자기, 나는 어떤 게 어울릴 것 같아?=
환인의 취향, 그것도 자신에게 어울리는 취향을 솔직하게 알아낼 수 있는 상황에 유르파도 기대감을 한껏 품었다.
그런 유르파에게는 살구색의 시스루 팬티가 주어졌다.
심리스, 망사, 안개 무늬.
입으면 순백의 보지털은 물론 입을 꽉 다문 대음순까지 모조리 보이는 야하기 짝이 없는 속옷의 형태에 유르파의 얼굴이 암컷처럼 변했다.
여자들은 젖가슴을 가리는 것 없이 드러낸 채 환인이 골라준 팬티만 입고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부끄러워하며 웃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젖은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으려 했었는데 일이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그러던 중 세 여자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파렴치한 자신의 차림과 언니와 친구의 야하기 짝이 없는 차림을 한 번씩 돌아본 뒤 서로의 눈치를 살피다 환인을 돌아본다.
“…….”
재미있다는 듯이 얼굴에 작은 미소를 띤 채 자신들을 구경하고 있는 남자.
여자들은 직감했다. 먼저 움직이는 쪽이 그의 품에 먼저 안길 수 있을 거라고.
=…….=
=…….=
뭐, 자신들의 관계성은 이제 거의 가족이나 다름없다. 이제 와서 우선순위로 질투하고 짜증 내고 화내기에는 서로가 서로의 대단한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도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먼저 안기면 기운 넘치는 그를 받아낼 수 있어 좋잖아. 내가 두 번째나 마지막이 되어도 상관없지만 그래도 처음이면 좋겠네.’
……이렇게 생각하고 만다.
그럼 누가 먼저 움직일 것인가?
눈치 게임이 시작된다.
환인은 그런 여자친구들의 모습에 과연 누가 먼저 움직일까 궁금해하면서 근처의 의자로 걸어가 앉았다.
자신의 예상으로는 안느가 먼저 움직일 것 같다.
유르파는 반쯤 암컷화한 상태지만, 늘 자신의 처지를 첩이라고 되뇐다. 그로 인해 우선순위가 필요한 곳에서는 언제나 자연스럽게 뒤에 서는 그녀다.
이실리테는…… 얌전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긴 하지만 자신의 앞에서는 절대라고 할 만큼 욕심부리지 않는다.
거기다 안느를 은연중에 자신의 롤모델로 삼기에 안느가 어떻게 움직일지 지켜볼 가능성이 크다.
안느는 거구의 근육질에서 지금의 호리호리한 아가씨로 변한 뒤 본격적인 친화력을 발휘하며 인싸 중의 인싸가 되었다.
이전에도 나름 좋은 성격이었지만 신체 변화 이후 더욱 성격이 좋게 변해 이런 경우에는 언제나 이실리테와 유르파를 이끌고 앞으로 나서는 편.
=으, 흐흐흥. 도려엉?=
아니나 다를까 이실리테와 유르파하고 시선을 나눈 안느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음흉한 웃음소리와 함께 배시시 웃으며 다가온다.
그랬는데 환인의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다.
안느가 이실리테와 유르파의 손까지 잡고 다가와 나란히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그렇군. 셋이서 함께 펠라를 하겠다는 건가.’
이러면 순위를 딱히 정할 필요는 없다. 시작은 셋이서 다 함께하고, 그 뒤에는 자신에게 선택을 양보하면 모두 해결되니까.
그러다 잠깐 바깥 상황에 생각이 미쳤다.
여기서 이렇게 경계심을 내려놓고 여자친구들과 뜨거운 시간을 보내도 괜찮은 건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경계를 세워야…….
그때 환연이 창문을 열어놓은 창틀에 앉아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것을 발견했다.
밖. 은. 내. 가. 보. 고. 있. 을. 게.
“…….”
환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들에게 손을 뻗었다.
여자친구들과 쓰리썸은 커녕 포썸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경험해볼 수 있겠군.
그랬는데…….
쿠우! 쿠우웃, 큐삣!
밖에서 비상이 조금 겁먹은 듯이 시끄럽게 우는 소리에 굳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도령? 왜, 비상이 뭐라고 해?=
“뭐가 큰 게 다가오고 있다고 하는군. 비상이 저러는 것은 처음 본다.”
그녀들도 비상이 얼마나 대담하고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는지 알고 있다.
폭군룡의 미궁에서 아룡과 마주쳐도, 산란못 미궁에서 중핵과 마주쳤어도 겁먹긴커녕 호전성을 내뿜는 게 비상이다.
그런 비상이 파닥파닥 홰를 치며 두려움을 억지로 밀어내듯이 우는 소리라니?
좀 전까지만 해도 발그레하거나 수줍게 새초롬하던 여자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벌떡 일어나 서둘러 장비를 챙겨입는다.
미처 위에 덧옷을 입을 시간도 없어 팬티만 입은 알몸에 그대로 갑주를 장착하기 시작한 안느가 소리쳤다.
=이 비바람 속에서 다가오는 거대한 생물이면 최소 7급 이상의 성수나 악수일 가능성이 커! 마차의 기척 차단 기능이 발동 중이니까 일단 어떤 적인지부터 파악하고 행동을 결정하는 게 좋을 거야!=
“그래.”
짧게 대답한 환인도 마차를 나와 의복을 챙겨입고 후드 망토까지 뒤집어쓴 뒤 은밀 기술로 움막을 빠져나왔다.
그새 비는 더욱 강하게 쏟아지고 있어 온 세상이 회색 비의 커튼이 드리워진 것처럼 다가온다.
어느 쪽이지? 환인은 눈을 감고 기척 감지와 감각 확장을 크게 펼친다.
쏟아지는 빗방울의 기감 패턴을 빠르게 배제하고 주변 상황을 파악하지만, 그의 감각에 딱히 걸려드는 것은 없었다.
대체 뭐가 다가온다는 걸까. 아무것도 안 보이지만 긴장이 가라앉지 않는다.
뒤따라 나온 환연에게 물었다.
“뭔가 느껴지는 게 있…….”
그 순간 환인은 뒷골을 타고 거꾸로 솟아오르는 듯한 소름과, 가슴 부분에 기묘하다고 할 만큼 시원한 감각이 퍼져나가는 것을 느끼고 숨을 멈추었다.
그 감각 때문이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사방을 자욱한 안개가 뒤덮었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시야가 회색으로 변했다. 손을 들어봐도 자기 손이 안 보일 정도다.
물안개도 아닌 것에 시야가 모두 가려지고 머리와 어깨를 두드리는 비의 느낌, 그리고 빗소리만 그의 감각을 자극한다.
쏴아아아아—
=도, 도령?! 어디야!?=
=주인님?!=
=자기!!=
“여기다.”
환인이 목소리를 내고 몇 초 후, 여자들의 손이 그의 팔과 어깨에 올라왔다.
=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니?=
=안개가 너무 짙어서 아무것도 안 보여…….=
=율이 언니! 아니, 환연아 바람 좀 일으켜봐!=
환인을 따라 나온 여자들이 이 불가사의한 광경에 당황해하고 있을 때였다.
콰아아아아—!
느닷없는 광풍이 뒤에서 와락, 밀어닥쳐 하마터면 땅을 구를뻔한 환인이 재빨리 자세를 추슬렀다가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입을 작게 벌렸다.
강풍에 갈라진 것처럼 좌우로 크게 벌어진 안개.
안개밖에 보이지 않는 세상에 억수로 쏟아지던 비가 중력을 거스르는 것처럼 하늘로 천천히 역류하고 있었다.
바람에 베인 것처럼 갈라지듯 좌우로 빠르게 흩어져가는 안개.
그리고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천천히 하늘로 오르는 빗방울들.
그런 광경 속에서…….
“……영성 하늘 고래?”
도무지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고래가 이쪽에서 멀어져가며 저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