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8화 〉 362 프라버로 가는 길
* * *
크라빈 마을을 나오고 하루, 장마가 시작되는지 한 번 내리기 시작한 비는 빗방울이 굵어졌다가 가늘어졌다가를 반복하며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내렸다.
그래서일까.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한 지 반나절 뒤에는 물안개까지 끼기 시작했다.
비가 오는 중인데도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은 적지 않았다.
프라버를 지나 어디론가 향하는 중인지 모험가와 탐험가로 보이는 파티도 있었고 크고 작은 행상인들이나 보통의 여행자들도 눈에 띠었다.
그들 대부분은 마차를 모는 이실리테의 화려한 아우라에 슬쩍 시선을 주었을 뿐, 환인 일행의 정체는 한 명도 눈치채지 못했었다.
비상은 깃털색 조절 마도구를 통해 녹색 쿠에에서 흑색 쿠에로 변신했고 마차 또한 무광의 미래지향적 유선형 몸체에서 조금 크지만 흔한 형태의 카라반이 되어있었기 때문.
다그닥다그닥다그닥—
히히힝
푸르르륵
=마차 모양이랑 비상의 색만 바꿨을 뿐인데 사람들이 정말 못 알아보네요.=
꽤나 큰 상단 행렬이 이전과 다르게 무심하게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본 이실리테가 신기해하며 힐끔 뒤를 돌아본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알아볼 때는 보통 특징으로 구분하기 마련이다. 우리 일행의 경우에는 이실리테 너의 아우라와 마차의 형태 및 비상의 색이겠지.”
그런데 지금은 마차의 형태도 변했고 이실리테의 아우라도 우비와 내리는 비 때문에 형태가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
비상은 숲의 수호자의 도움 덕분에 완전히 성체가 된 이후 부쩍 체격이 커졌는데 이게 아무리 봐도 밀짚 쿠에 수준을 뛰어넘었기에 깃털 색을 (녹색이나 노을색에 비해) 그나마 흔한 검은색으로 조절했다.
그리고 그게 비상을 마차에서 떼어 놓고 돌아다니게 한 개연성이 되어주었다.
대도시나 주도의 근위 기사들이 타는 흑색 쿠에를 카라반에 묶어 끌게 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상단이 지나가자 마부석 뒤쪽의 쪽창문이 열리며 안느의 얼굴이 나타났다.
=이슬아, 안 피곤해?=
=난 괜찮아.=
=괜찮긴. 빗속에서 몇 시간이나 마차 모는 것도 못 할 짓인데. 교대해줄 테니까 마차 안에 들어와서 몸 좀 닦고 쉬어.=
=응.=
=도령도 같이 들어가.=
“그러지.”
마차를 세우고 안느에게 고삐를 넘겨준 이실리테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고 환인은 비가 와서 신난 아이처럼 싸돌아다니는 비상을 불러 비뚤어진 우비를 고쳐준 뒤 마차로 들어갔다.
=주인님.=
먼저 들어와 옷을 벗고 있던 이실리테는 환인이 들어온 것을 보고 물방울 모양의 예쁜 젖무덤을 가리는 것 없이 드러낸 모습으로 다가가 그의 우비와 외투를 차례대로 벗긴 뒤 벽에 걸어둔다.
환인은 자신의 앞에서 보기 좋게 흔들리는 한 쌍의 젖가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건 만져달라는 무언의 표현인가.
그녀의 가슴은 극상의 감촉을 자랑하는 만큼 아무 때나 만져도 즐겁겠지만…….
환인은 마차 안을 잠시 둘러보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데다 먹구름이 태양을 가려 음침한 바깥과 다르게 고급 호텔 객실처럼 쾌적하고 환한 내부 환경.
습도도 50% 정도로 적당하고 공기도 맑은 날 숲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산뜻하다.
이런 환경을 갖춰놓은 유르파는 스스로 만든 마도구 제작대 앞에 앉아 마도 조명등을 켜놓고 위상력 반발 마도구 제작의 마지막 단계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저 상태라면 이쪽에 신경 쓸 여력은 없겠지.
환인은 장갑을 벗고 이실리테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앗, 주인님……?=
손을 올려 두 팔로 젖가슴을 감싸듯 끌어안으니 품에 쏙 들어오는 날씬한 체구가 부끄러운 듯 움츠러든다.
그 상태로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코를 묻고 약간 뜨거운 우유와 비슷한 체향을 잠시 맡다가…….
‘그런 거였나…….’
어렸을 때의 기억 중 하나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밤늦게 퇴근하실 때면 언제나 마중 나온 어머니를 현관에서 끌어안으시곤 했었다. 그러면 어머니도 아버지의 등에 팔을 두르고 가족을 위해 고생했다며 아버지의 등을 두드려드렸었다.
그 후에 아버지는 언제 지쳤냐는 듯이 활기찬 모습으로 자신도 안아주셨었지.
환인은 자신의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이실리테의 움직임에서 그때 아버지가 느끼셨을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잠깐이지만 이러고 있으니 뭔가 가슴 속에 훈훈한 봄바람이 부는 느낌이었던 거다.
‘단순한 지방 덩어리일 뿐인데도 이렇게 마음이 충족되는 이유는 뭐지.’
마음 가는 대로 그녀의 젖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온기와 체취를 실감하던 환인은 만족할 만큼 만진 뒤 품에서 풀어주었고, 짧은 시간의 포옹에 얼굴이 분홍빛으로 물든 이실리테는 두 팔로 딱딱해진 젖꼭지를 가린 채 머뭇머뭇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주인님? 하고 싶으시면 제가 몸으로 풀어드릴게요…….=
“괜찮다. 방금은 그저 안아주고 싶어서 그런 거였으니.”
=…네? 네, 넵!=
그냥, 그냥 안아주고 싶으셨다고?
우와. 우와!
섹스가 목적이 아닌 애정의 스킨십이 목적이었다는 이야기에 얼굴이 더욱 빨개진 이실리테는 재빨리 자신의 가방에서 속옷과 가벼운 웃옷을 꺼내입고 비에 젖은 천상의 장막을 손질하기 시작한다.
도저히 환인과 눈을 마주치지 못할 것 같아 반쯤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환인은 그녀의 호박색 머리카락 사이로 귀 끝이 붉게 물든 걸 바라보다가 자신의 뺨을 매만졌다.
‘…또.’
뭔가 내 얼굴이 내 얼굴 같지 않은 이상한 느낌.
얼굴 근육이 멋대로 풀어지는 이상한 감각에 자기 얼굴을 만지작거리던 환인은 가슴 포켓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환연을 내려다보았다.
「어휴. 둘 사이에 끼어서 납짝쿵되는 줄 알았지만 분위기가 좋아서 참았는데 이러면 참은 이유가 없잖아.」
“글쎄…… 하고 싶다고 장소와 상황과 시간도 구분하지 않고 본능에 따라 해대면 그게 과연 사람일까.”
「분위기 환기 같은 이유로 가끔 일탈하는 건 괜찮지 않아? 방금은 이실리테도 약간 기대하는 모습이었잖아.」
“…….”
솔직히 말하면 아주 약간이긴 했지만 이실리테를 안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당장 섹스할 이유도, 당위성도 없고 해서 관둔 거였는데…….
‘일탈이라.’
끄으응 가슴 포켓에서 빠져나온 환연은 기지개를 한껏 켜고는 생각에 잠긴 환인을 두고 「잠이 확 달아났네.」 중얼거리며 마부석 쪽 작은 창문을 통해 안느에게 가버렸다.
환인은 깊게 생각하는 것을 관두었다.
이런 건 남의 의견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당사자의 의지가 중요하다. 이실리테와 자신의 의지가 일치되면 몸을 섞는 거고, 아니면 방금처럼 무위로 돌아가는 거지.
꼼꼼하게 천상의 장막을 손질하는 이실리테의 머리를 다독여준 환인은 유르파의 뒤로 다가가 조용히 그녀의 작업을 지켜보았다.
바늘만큼 뾰족한 핀으로 심혈을 기울여 직사각형의 귀금속에 회로도를 그려 넣는 유르파.
작업이 마무리 단계인지 길이 17cm, 폭 2cm의 직사각형 금속판에 복잡한 선이 빼곡히 차 있다.
=……됐다.=
마지막 위치에 방점을 찍은 유르파는 가장 어려운 관문을 통과했단 생각에 긴장이 풀릴 것 같았지만.
‘아직 마무리가 남았어. 간단한 절차지만 마지막까지 심혈을 기울여야 명품이 태어나는 법이야.’
긴장을 바짝 세우며 금속판의 좌우 끝을 잡고 정신을 집중해 위상력을 끌어올린다.
영혼 시야를 열고 뒤에서 지켜보던 환인은 그녀의 비술사 아우라 속에서 은은한 청색의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것을 발견했다.
그 위상력의 아지랑이는 하얗고 가느다란 팔을 따라 흘러 손끝에 맺히더니, 그 손이 쥐고 있는 금속판으로 스며든다.
금속판에 음각으로 새겨진, 0.05mm가 될까 싶은 얇은 선을 따라 흐르는 푸른 위상력.
그 움직임이 조용히 흐르는 강물처럼 보여 환인도 숨을 죽이고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손이 닿은 금속 좌우 끝에서 시작된 위상력이 금속판의 중앙으로 밀려들어 간다. 잠시 후 두 기운이 중심에서 만났을 때 판에 새겨진 회로는 빠짐없이 푸른빛을 담은 채 일렁이고 있었고…….
끼기기기…….
아주 희미한 금속음과 함께 금속판이 세로로 길쭉하게 말리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 빨대처럼 변해버렸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이어서 가로로 둥그렇게 휘기 시작하더니 끝이 빈틈없이 맞물려 완벽한 고리 형태로 변화한다. 이음매조차 보이지 않는 완벽한 링이다.
=휴…….=
“완성한 겁니까.”
=응꺅?!=
긴장을 완전히 놓은 순간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유르파는 쿵, 작업대 밑판을 무릎으로 찍고 뒤로 발랑 넘어져 끙끙 앓았다.
눈가에 눈물까지 맺힌 것을 본 환인이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앉혀주며 사과했다.
“이렇게나 놀랄 줄 몰랐습니다. 괜찮습니까.”
=아으으……. 아니 괜찮아. 응. 괜찮아…….=
아픈 것보다 이렇게 요란하게 놀란 게 더 창피했던 유르파는 자기 뺨을 찰싹찰싹 두드리곤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어으, 아까 완성했냐고 물었지? 맞아, 이게 위상력 반발 마도구야. 일단 구동 확인부터 하기 위해 투박한 형태지만 가장 효과가 큰 고리 형으로 만들어봤는데, 잠깐만…….=
작업용 주머니를 뒤져서 목걸이 체인을 꺼낸 유르파는 금방 마도구와 체결해 초커 타입 목걸이로 완성해낸다.
=됐어. 이게 위상력 반발 목걸이야.=
“훌륭하군요. 심플한 디자인이 오히려 센서빌리티한 느낌입니다.”
=에헤헤……. 아, 아무튼 만드는데 꽤 재미있었어. 덕분에 위상력의 흐름에 조금이지만 눈을 뜬 느낌? 실력이 더 늘어난 기분이야.=
“축하합니다.”
=으응? 아냐, 전부 자기 덕분인걸!=
환인의 축하에 유르파는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설렜다.
축하를 받을 게 아니라 오히려 내가 자기한테 감사의 큰 인사를 올려야 하는데…….
그가 없었다면 자신은 카턴 마을에서 시간과 세월을 낭비하다가 죽었을 것이다.
이런 재미있는 마도구는 만들어볼 생각도 못 했을 것이고 자신의 꿈인 전이 마도기 제작은 말 그대로 꿈으로 끝났을 테지.
‘……읏.’
마음이 흘러넘쳐 그곳이 젖는 것을 느낀 유르파는 고개를 붕붕 흔들어 잡생각을 털어내고 환인에게 목걸이를 건네주며 말했다.
=이건 위상석을 쓴 게 아니라 마도 회로에 술식을 접목해서 새겨놓았거든? 위상력을 반발해 밀어내는 동시에 일부 위상력을 흡수해 술식의 유지에 사용하는 거라서, 마도기가 파괴되거나 안쪽 회로에 상처가 생기지 않는 한 계속 쓸 수 있게 설계했어. 하지만 시험작이라서 이게 제대로 작동하는 걸 확인하면 제대로 부가 효과까지 부여해서 만들 생각이니까, 누구한테 먼저 시험해보겠니?=
“발동은 어떤 식입니까.”
=착용하고 위상력을 고리에 흘려 넣기만 하면 돼. 해제는 벗어놓고 1시간 정도 지나면 되고.=
“간단하군요.”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링 초커를 신기한 듯이 바라보는 이실리테의 목을 바라보았다.
매끈한 원형의 고리가 오륜기처럼 반복되는 형태는 동양적인 미모에 가까운 이실리테에게 잘 어울릴 것이다.
“이실리테.”
=네.=
그녀를 불러 직접 가느다란 목에 채워주자 예상대로 이실리테의 머리카락과 피부색과 무척 잘 어울렸다.
=……?!?!=
환인은 갑자기 혼란에 빠진 눈동자가 된 이실리테를 보고 의아해하다가, 무의식중에 그녀의 입술을 매만지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손을 되돌리며 말했다.
“그럼 발동해 봐라.”
=…네, 넹.=
얼굴색은 멀쩡한데 귀만 빨개진 이실리테가 아까 들은 대로 고리에 손을 얹고 위상력을 흘려 넣는다.
그러자 고리에서 시작된 푸른 빛이 목걸이 전체로 퍼져나간 뒤 사라지더니…….
“성공이군요.”
이실리테의 몸 주변을 빛의 드레스처럼 수놓고 있던 아우라의 입자가 완전히 사라졌다.
신기한 듯 자기 몸을 살펴보는 이실리테의 몸과 그녀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외눈 안경으로 살펴본 유르파가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자기 말대로 아우라의 발현은 위상류와 연관이 있었네. 그러면 이 상태로는 위상력을 반발해서 위상력이 회복되지 않으니 위상력 반발 마도구를 착용한 채로도 위상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선택적으로 위상력을 투과할 수 있게 손보고 마도구의 내구성 증가도 고려해서…….=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드는 유르파에게서 시선을 돌려 아직도 귀만 빨간 이실리테를 바라본다.
이실리테도 아까부터 이상……한 건 아니지만 뭔가 자꾸만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환인을 우물거리며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꼼짝없이 ‘그것’을 하자는 신호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고 하셨다. 그럼 뭘까.
‘그러고 보면 젖꼭지도 만져주지 않으셨지…….’
섹스를 앞둔 포옹에는 언제나 가슴이 뜨거워질 정도로 자신의 젖꼭지를 괴롭히시는 주인님이다.
그럼 정말, 정말로 그냥 자신을 안아보고 싶어서 안으셨다는 걸까?
머리를 쓰다듬어주시거나 따스한 시선으로 입술을 만져주시거나…….
방금 기억을 떠올리자 얼굴이 다시 뜨거워진다. 심장도 너무 두근거려 멎을 것 같다.
두두두두두—
중얼중얼
천장의 방수포를 때리는 작은 빗소리와 유리 언니의 희미한 혼잣말이 마차 안을 메우는 가운데 주인님과 말없이 시선을 나누고 있으니 뭔가,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하는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이런 느낌에 익숙하지 않은 이실리테는 다시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봉사를 생각했을 무렵.
통통통
[도령~. 환연이 저쪽 숲에 노상강도가 숨어있다는데 어떻게 할까?]
작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안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가지.”
환인은 빨개진 만큼 체온이 높아진 이실리테의 귓불을 만져준 뒤 후드 망토와 우비를 차례대로 쓰고 마차를 나섰다.
=사, 살려주세요! 목숨만 살려주시면 뭐든지 할게요! 저, 저는 2급 청술사라서 노, 노예로도 쓸만하실 거예요!!=
쏴아아아—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숲길을 가로막으며 나타난 9명의 노상강도 여자들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환인의 방벽 패널에 차례대로 목이 찢어지고 머리가 박살 나 피와 뇌수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오직 가장 뒤에, 방벽 패널의 사정거리 밖에 있었다는 이유로 살아남은 법술사는 5초도 되지 않는 시간에 머리가 쪼개지고 목이 뜯겨나가 죽은 동료들의 모습에 오줌을 지리며 목숨을 구걸했다.
‘씨발! 엽사라는 병신년이 마부가 6급 직업자라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딱히 엽사의 잘못은 아니었다.
비가 너무 세차게 내려 물보라까지 발생한 와중이다. 거기에 안느의 성투사 아우라는 안개처럼 퍼져나오는 식이었기에 옅게 낀 안개에 섞여 눈에 잘 띄지 않았던 것.
잘못이라면 적당히 낡은 대형 캐러밴을 쿠에 세 마리가 끌고 있다는 점에서 수상한 걸 느끼지 못한 강도들 잘못이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법술사니까 범죄 노예로 팔면 돈이 되긴 하겠네요.=
이실리테가 진흙탕에 무릎 꿇고 두 손을 싹싹 비는 동물귀의 여자를 보며 하는 말에 안느가 눈썹을 살짝 들며 물었다.
=법술사가 더 비싸? 전에 헬루멘 앞에서 도령을 습격한 그 4급 엽사는 10금화 정도에 팔렸던 거 같은데.=
=그 엽사는 16금화였어. 하지만 저건 여자잖아. 새끼도 칠 수 있고 물을 다루는 법술사는 서부 사막 개척마을 같은 곳에서 괜찮은 돈을 주고 사 간다고 들었어. 전방의 이블팩션 접경 지역에서도 청술사는 꽤 많이 필요로 한다고도 하고.=
=네, 네! 절 죽이시는 것보다 가까운 마을에 파시는 게 귀한 분께 도움……?=
무시무시한 여자들의 이야기에 동아줄을 잡은 것처럼 반색하던 여자 강도는 갑자기 세상이 360도로 빙글빙글 도는 것을 느끼며 머릿속에 의문부호를 띄웠다.
뭐지? 세상이 왜 이래? 그리고 말은 또 왜 나오지 않고……?
그러다가 시야 한쪽에 들어온 머리 없는 몸뚱이가 절단면으로 피를 피슉피슛 뿜다가 풀썩 쓰러지는 것을 보곤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저거 내 몸이잖아….’
씨발…… 아침부터 재수가 없더라니 진짜 옴 붙은 날이네…….
풀썩, 터덩
진흙탕에 떨어져 구르는 여자의 머리와 무릎 꿇은 채 앞으로 꼬꾸라진 여자의 몸뚱이에 안느가 파리 한 마리 죽는 걸 본 것처럼 중얼거린다.
=엑. 그냥 죽여버렸네.=
“이런 도적을 생포해서 팔아넘기는 것은 앞으로도 지양하도록 하지.”
=왜? 직업자 도적들을 잡아다 팔면 꽤 돈이 될 텐데.=
“영혼사가 도적을 잡아서 팔아넘겨 돈벌이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나.”
=……어, 없지?=
“그런 거다. 영혼사가 사람 목숨을 가지고 팔아먹고 다닌다고 알려져서는 좋을 게 없다.”
헬루멘 앞에서 비상을 노리고 달려들었던 그 엽사는 당시 잘 몰라서, 그리고 대로 한복판에서 벌어진 일이라 보는 눈이 많아서 도시의 경비대에 넘겼던 거였다.
무엇보다 노예로 팔아먹으려면 도시까지 가야 하는데 여기서 가장 가까운 도시는 프라버다.
거기까지 살려서 데려가는 것도 귀찮은 일이고, 데려가더라도 도시 병사들에게 넘기면 행정관의 개인 계좌 인증을 위해 정체를 드러내야 하는데…….
“이래저래 성가신 일이 생길 거다.”
설명에 환인의 여자들은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팔면 20금화 정도는 받을 수 있을 테고 20금화가 큰돈이긴 하지만, 솔직히 이제는 돈이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런데 이슬이 너 위상력 반발 마도구를 낀 거야? 아우라가 갑자기 사라졌네.=
=응. 유리 언니가 방금 완성했어. 이 초커 목걸이야.=
=귀엽다. 나도 언니한테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어달라고 할까?=
=금색이니까 나보다 너한테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네. 아무튼 강도들 소지품부터 뒤져보자. 도와줘.=
=응.=
이실리테와 안느는 죽어 널브러진 시체를 길가로 치우고 소지품을 뒤져 돈만 따로 챙겼다.
아홉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은 총 21은화 15동화에 자잘한 회복제와 치료제 정도.
직업자가 세 명 섞여 있던 것을 보면 용병 겸 도적단이었나 본데…….
‘운이 나빴던 거지.’
하필 건드려도 우릴 건드려서.
적당히 챙길 것만 챙긴 여자들은 환연을 불러 시체를 통째로 땅에 파묻어버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