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7화 〉 361 프라버로 가는 길
* * *
아직 사방이 어두컴컴한 새벽 4시.
평소보다 훨씬 일찍 일어난 환인 일행은 조용히 크라빈 마을을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마차를 마구간 밖으로 꺼내고 마차를 덮고 있는 천을 치운다. 잘 마른 짚을 깔고 한데 모여 자고 있던 쿠르티와 쿠핀, 쿠라도 깨운 뒤 데리고 나와 마차에 묶는다.
쿠에?
쿠엣!
쿠우우~
잘 자다가 일어났음에도 불평이나 투정 없는 쿠에들을 데리고 이실리테가 멍에를 하나씩 씌울 때, 안느와 유르파는 짐가방을 가지고 나와 마차에 싣기 시작했다.
비상과 환연은 그 근처를 돌아다니며 구경하다가 이내 자기들끼리 떠든다.
쿠우~ 큐삣!
「으응? 진짜? 오늘은 바람이 강하게 불 거라고? 난 모르겠는데…….」
큐삐삐삐~
「……뭐래. 바람밖에 못 쓰는 주제에.」
……삐흥.
「난 불물바람땅빛어둠번개풀쇠얼음 다~ 쓸 수 있거든!」
삐삣! 뿌잇!
「크고 힘세서 좋겠네! 대신 나는 환인의 옷주머니 속에 들어갈 수 있지롱! 거기가 얼마나 따뜻하고 기분 좋은지 넌 모르지?!」
꽥! 꾸엑!
꺅꺅!
둘이 아웅다웅하며 시끄럽게 구니 양팔 가득 짐을 가지고 지나가던 안느가 툭, 말을 던진다.
=왜 다투고 그래. 싸우지들 말고 놀아.=
「안 싸우는 거거든!」
쀼삐삣!
「안느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삐에엣!
한 마리와 한 명의 귀따가운 항의에도 불구하고 안느는 여동생 같은 귀여움을 느끼며 웃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저렇게 떠들게 두면 아직 밤인만큼 소리가 멀리 퍼져나가 본채의 사람들을 깨울 수 있다.
가지고 나온 짐을 근처에 내려놓은 안느는 환연과 비상이 절대 따르지 않고는 못 배길 만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아직 한밤중인데 그렇게 떠들다간 도령이 이놈~ 할지도 모른다?=
「…….」
…….
이놈~은 또 뭐야. 우리가 어린애들인 줄 아나?
자신들을 어린아이 취급하는 안느를 째려보는 둘이지만, 부리와 입술은 꽉 다문 채 벌어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 버릇없거나 예의 없는 짓을 하면 환인이 팔짱을 끼고 지그시 바라보는데 그 시선을 받고 있으면 굉장히 무서우니까.
안느는 얌전해진 둘의 모습에 키득 웃으며 마지막 짐을 챙기러 별채 거실로 들어갔다.
마침 환인이 장비를 다 챙겨 입고 방에서 나오고 있었기에 거실의 마지막 짐가방을 들며 물었다.
=도령. 이것만 가지고 나가면 짐은 끝이야. 더 챙길 건 없어?=
“없다. 짐을 가져다 놓거든 본채에 가서 아무나 붙잡고 떠난다고 말만 전하고 와라.”
=응? 유미랑 라비한테 말 안 하고 떠나게?=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아마 정오는 되어야 깨겠지.”
환인의 여상한 대답에 안느가 야한 걸 좋아하는 아줌마처럼 히히 웃으며 옆에 붙어 속삭인다.
=어제 꽤 즐거웠나 봐? 겨우 2시간 만에 둘을 그렇게 쓰러트릴 정도로 말이야.=
“평소와 비슷했다. 하지만 라비올라는 처녀였기도 했고, 유미안의 몸 상태가 완벽하게 예전으로 돌아가진 않았더군.”
=응? 그게 무슨 뜻이야?=
별채의 마당으로 걸어 나가며 어젯밤 유미안을 안으며 일어났던 이야기를 들려주니 안느가 미간을 작게 찌푸렸다.
이야기를 듣기만 했는데도 자신의 자궁이 열리고 도령의 자지가 그 안쪽까지 밀려 들어오는 기분이다.
=회복의 성술이 거기까지 적용되지 않았나 보네. 시엘라가 빼먹은 걸까?=
“빼먹었다기보다 이때까지는 신경 쓸 일이 없었던 거겠지. 루크랑 족 남자의 성기는 동물 형태에 가까운데다 보통은 여성기의 안쪽 깊은 곳에 닿을 일이 없으니까.”
=그건 그런데…… 그렇게 자궁 입구가 쉽게 열리면 임신에 문제가 생기는 거 아냐?=
“그 정도는 아닐 것 같더군.”
처음 삽입 때 닿았던 감각은 개인차로 치부할 만큼 다른 자궁경부와 비슷했다.
그걸 계속해서 자극한데다 당사자도 크게 흥분해서 그런 결과가 나온 거라고 생각하는 환인이었다.
게다가 유미안은 지금까지 쭉 혼자 살아왔다. 앞으로 다른 남자를 만나는 일이 있을까.
큰 문제는 없을 거라 장담하는 환인의 이야기에 안느는 조금 의문이 들긴 했지만, 환인의 이야기가 틀린 적은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여자친구들을 도와 출발 준비에 박차를 가하던 환인은 방금까지 자다가 깬 것처럼 옷차림이 약간 흐트러진 하녀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원래는 별채에 같이 상주하며 손님을 대접하고 일이 있으면 소식을 전달하는 역할의 하녀인데 환인의 여자들이 기타 이유로 상주를 거절했기에 밤에는 본채로 돌아가는 아가씨였다.
=오, 야시나잖아.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안느 님! 그게, 화장실을 다녀오다가 우연히 목격해서……! 그, 그런데 지금 출발하시려는 건가요?!=
=응. 그렇게 됐어. 마침 잘됐네, 본채를 찾아가서 알리려고 했었는데 네가 나중에 대신 전해주면 되겠다.=
안 돼요! 그랬다간 제가 유미안 님이랑 라비 아가씨한테 혼난다고요!
이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간신히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억누를 수 있었다.
자신을 큰언니처럼 편하고 상냥하게 대해주시는 안느 님이지만, 이분은 본래 성자님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는 영혼 기사님이자 땅신 교단의 성투사님이다.
원래는 자신이 함부로 말도 걸 수 없는 구름 위의 존재이신데 어떻게 나무라고 반항하는듯한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하나.
=죄, 죄, 죄송해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옷!=
생각해보면 마을의 구원자이신 성자님이 떠나려 하시는 일이다. 본채의 모두를, 유미안 님까지 깨우는 한이 있더라도 알려야 한다.
야시나의 판단은 올바른 것이었고 본채는 5분도 지나지 않아 불이 훤히 밝혀지며 본채의 모두가 잠에서 깨어났다.
=어…….=
금세 시끄러워지는 본채의 모습에 안느가 당황해서 환인을 돌아보았다.
“왜 그렇게 보지.”
=……조용히 떠나려고 나한테 가서 말하라는 거 아니었어? 그런데 본채 사람들이 다 깼잖아.=
“떠나려는 건 맞지만 조용히 떠날 생각이었다면 더 이른 시간에 나왔겠지.”
그, 그런가? 그럼 다행인데.
안느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을 때 무릎까지 내려오는 호박색 케이프 코트로 몸을 가린 이실리테와 평범한 로브를 입은 유르파가 불 꺼진 별채에서 걸어 나왔다.
=주인님, 불도 다 껐고 짐도 다 챙겼어요.=
=자기, 나도 아우라 억제기 제작도 마차 안에서 할 수 있게 해놨어.=
준비가 다 끝났다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여준 환인이 비상의 등에 오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다들 마차에 오르도록.”
그의 지시에 유르파는 마차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고 이실리테와 안느도 마부석에 올랐다.
=……?=
이실리테는 마차의 고삐를 쥐었다가 구세의 빛 풀 플레이트 아머 중 흉갑 부분만 백색 가죽 갑옷으로 바꿔 입은 안느의 차림에 고개를 갸웃했다.
=가죽 갑옷이네. 판금 흉갑은 왜 벗은 거야?=
=요즘 구세의 빛이 조금, 나한테 안 맞기 시작하는 거 같아서…… 프라버에 도착하면 본단에 등대의 빛을 주문할까 생각 중이야.=
=등대의 빛은 뭔데?=
=지금 네가 입고 있는 천상의 장막과 비슷한 경장갑인데 그보다 방어적인 측면을 조금 더 끌어올린 거야. 중장갑과 경장갑 사이라고 할까?=
=전투 방식을 바꾸려는 거야? 네 실력에 갑자기 그러면 안 좋을 거 같은데…….=
=한 번에 확 변하면 안 좋지. 전투 시 협동이나 연대에도 문제가 생기기 쉬우니까.=
그동안 이실리테와 함께 손발을 맞춰온 만큼 갑작스러운 변화는 자신뿐만 아니라 파티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도 문제가 되기는 마찬가지야.’
발단은 이실리테의 2차 각성이었다.
그녀가 검희로 재각성하며 기동 영역과 공격 범위가 거의 술법사 수준으로 넓어지고 공격 방식도 다채로워지다 보니 그 공격 범위에 자신이 포함되는 경우가 증가하기 시작한 거다.
이실리테의 공격은 대검과 다중 검기를 활용한 광범위 공격이 주를 이룬다.
즉 그녀가 제힘을 내기 위해서는 공격 범위에 동료가 없어야 한다.
당연한 일이다. 종베기 휩쓸기 공격을 하려는데 그 범위에 동료가 있다면 동료까지 공격하게 되니까.
이게 왜 갑자기 문제가 됐느냐면, 안느는 이전까지 적의 이목을 끌어 한데 몰아놓는 한편 이실리테의 공격 범위를 파악, 자리를 이탈해주는 방식으로 파티의 전투에 기여했었다.
그랬는데…….
=네가 다중 검기를 2자루째 쓰기 시작했잖아. 아직 실전은 거치지 않았지만 네 전투 방식을 보면 이전보다 더 넓어지고 강하고 억세질 게 틀림없어. 그리되면 지금 내 기동력으로는 더 이상 지금 전투 방식을 유지하기 어려워져.=
=그, 그랬어?=
안느의 설명에 이실리테는 살짝 당황했다.
지금까지 안느가 적을 몰아놓는다거나 하는 기색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그저 싸우다 보면 적이 예쁘게 모여있어서 다중 검기를 휘둘러 단숨에 쓸어버리거나 적이 하나씩 나뉘어 있어 각개격파하기 좋다고만 생각했었는데 그게 전부 안느가 만들어준 상황이었다니.
“이실리테, 출발하지”
수첩을 통해 몇 가지 확인 사항을 점검한 환인이 출발을 지시하자 이실리테가 고삐를 휘둘러 찰싹, 소리를 낸다.
쿠에들이 출발 신호에 쿠쿠 울면서 마차를 끌기 시작하고, 시트를 통해 미약하게 전달되는 진동을 느끼며 안느는 팔짱을 끼고 고민에 잠겨 들었다.
이때까지 파티에서 역량 부족을 느낀 적은 없었다. 지금 파티는 물론 이전의 파티에서도 말이다.
그랬는데 도령도 그렇고 이슬이도 비범하다 보니 점점 기량이 달리는 느낌이다.
당장 해결 방법은 몇 가지 있다.
이실리테도 힘과 체력 위주의 전사 타입이니까 혼자 싸우라고 하면 충분히 제 역할을 할 수 있겠지.
환인에게 최고급 방어술을 가르침 받은 지도 1년이 훌쩍 넘어가는 그녀다. 회피 능력도 압도적으로 뛰어나니까 회피탱 개념으로 전투를 이끌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안느는 입이 찢어져도 그런 말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 말은 곧 자신의 가치가 없다고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으며, 난 노력 하기 싫으니 네가 노력하라는 말과 똑같은 이야기니까.
이슬이와 도령에게 뒤처지지 않으려면…….
‘나도 능력을 계발해야 해.’
다행히 계발의 단서는 이미 손에 넣은 상황이다.
환인과 함께 지구로 넘어갔을 때 확보한 인체의 구조와 기능, 인체 생리학, 인체 구조학 서적에 그 실마리가 있었다.
신체 강화의 성술 개발.
치료를 위한 성술의 투시 술법을 응용해 인종人?과 플뢰족의 차이를 확인하고 그것을 통해 성술의 신체 강화 술법을 보다 효율적으로 설계하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아질 게 틀림없다.
안느의 구상을 들은 이실리테가 입을 살짝 벌리며 물었다.
=그, 그게 가능한 거야?=
지금 성술을 만들어낼 거라고 말하고 있는 거 맞지?
=응. 실현 가능성은 꽤 커. 솔직히 말해서 우리 파티, 성술이 거의 의미가 없잖아? 위상력을 쌓아만 두고 있으니 낭비하는 거나 다름없는데 그걸 신체 강화에 돌리면 꽤 효과가 나올 거라고 믿어.=
=…….=
=물론 신체 강화 성술을 만들어내더라도 강화 부여 계파의 비술사가 걸어주는 강화술에는 못 미칠 테지만, 강화 주문은 자기 전용으로 설정하면 효율이 1.3배 정도로 더 높아져. 거기다 위상력의 소모율 또한 감소하니까 전투 시에만 사용한다면…… 자기 설정 방식은 술법 영창도 생략 가능…….=
이실리테는 안느가 하는 말을 전부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성공률이 높은 구상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성술을 완성하면 안느가 적어도 지금의 1.5배? 2배는 강해질 거라는 것도.
별채를 나와 본채 건물을 끼고 돌며 이실리테는 속으로 안느를 살짝 우러러보았다.
‘역시 안느는 대단해.’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종족이라는 플뢰답게 외모는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전투 능력도 훌륭해서 혼자 6급 성투사에 도달할 정도였고 머리도 좋다.
이제야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겨우 외운 자신에 비해 안느는 벌써 사전을 옆에 끼고 전문적인 책을 읽는 수준이니까.
그냥 읽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성술을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지식까지 손에 넣을 정도다.
거기다 주인님께 큰 도움이 되는 수목화 체질로 몸을 바꾸기도 했고 성격도 밝고 친화적이고…….
=…….=
검희로 각성했다고 우쭐해 하거나 긴장을 푼 적은 없었지만, 안느가 좀 더 강해지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을 보니 자신도 좀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가슴 속에서 부풀어 오른다.
그렇게 마차가 본채 앞을 지나가려 할 때 저택의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은인님!=
=성자님!=
누가 봐도 섹스한 이후로 보이는 머리 상태와 얼굴에 하얀 목욕가운으로 몸을 가린 모녀가 뛰쳐나왔다.
비상을 타고 떠나려 하는 환인의 모습에 당황하고 울먹이는 얼굴이, 누가 보면 말없이 떠나는 남편을 목격한 아내들이라고 생각할 모습이다.
그녀들의 뒤를 따라 저택의 집사와 하인, 하녀들까지 우르르 달려 나와 환인과 비상을 둘러싸는 모습에 이실리테가 마차를 세우자 안느가 이실리테의 어깨에 몸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프라버 괜찮으려나.=
=뭐가?=
=하늘 기사단이라는 사람들이 왔다 갔잖아. 여기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다 보고 들었을 거고, 돌아가서 보고를 올렸을 테니까 도령에 대해 관심이 엄청나게 높아졌을걸?=
=그 사람들은 아직 주인님이랑 우리가 죽은 줄로 알고 있을 텐데?=
=우리가 떠나면 유미하고 라비가 프라버에 연락을 보낼걸?=
그냥 지나가는 영혼사였다면 굳이 연락이나 보고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산란못 미궁을 단독으로 돌파한 성자 일행이다. 하늘 기사단이 찾아와 조사까지 하고 돌아갔는데 성자 일행이 생환한 것을 알리지 않는다?
당연히 프라버에서 제재가 들어올 것이다. 성자 일행이 살아 돌아왔는데 어째서 알리지 않았느냐고.
=그걸 도령도 아니까 유미하고 라비한테 우리가 돌아온 걸 비밀로 해달라고 말 안 한 거고.=
=음…….=
머리가 복잡하다.
환인이 유명세 때문에 정체를 숨기고 다니려 하는 것은 유별난 일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마차 외관 변경 마도구도 만들었고 비상의 깃털색 변환 마도구도 만들었으며 이제는 아우라를 감추는 마도구까지 만들고 있으니까.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프라버 영주의 관심을 기쁘게 받아들였을 텐데 주인님은 절대 평범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돌아왔단 소식이 알려지면 프라버의 영주님이 주인님을 성대하게 맞이하려 하실 텐데, 주인님은 어떻게 하시려나.=
=모르겠어. 일이 좋게 흘러갈지 아니면 나쁘게 흘러갈지……. 도령은 이미 다 추측해놓고 대응을 정해놨을 거 같은데.=
=나중에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지 물어보자. 우리가 엉뚱한 행동으로 문제를 일으킬 수 있으니까.=
작게 고개를 끄덕인 그녀들은 문득 웃는 얼굴의 환인과 작별 인사를 나누는 유미안과 라비올라를 보다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뺨에 묻은 저거, 주인님/도령의 정액 같은데……. 가운 안에 아무것도 안 입…… 와? 뭐야 저거. 방금 다리를 타고 흘러내린 거 정액 아냐?
“그럼 작별입니다.”
=성자님의 앞날에 짐승신님의 축복이 가득하길 기도할게요!=
=조심해서 가세요, 은인님…!=
이실리테는 환인의 손짓을 보고 다시 마차를 출발시키며 눈물을 글썽이는 유미안을 흘겨보았다.
주인님의 정액을 보지에 제대로 담지도 못하면서 주인님한테 봉사한다고 한 거야?
시간만 있었으면 붙잡고 제대로 된 봉사란 무엇인지 한바탕 설교를 늘어놓았을 텐데, 그게 무척 아쉬운 이실리테였다.
사위가 어두울 때 크라빈 마을을 나선 일행은 유르파가 띄운 광구光?의 빛에 의지해 새까만 숲을 가로질러 나아갔다.
아열대 느낌의 숲 사이로 사람들이 오가며 생겨난 폭 4m의 흙길이 이어진다.
수많은 사람의 발걸음에 만들어진 부드럽고 하얀 흙길이다.
그러다 폭이 천천히 좁아지며 자갈로 울퉁불퉁한 갈색 길이 나타나고,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니 황토색의 오르막길과 함께 활엽수림이 펼쳐진다.
이어 고운 흙길이 뻗어나가며 북방 수림 같은 뾰족하고 높게 자란 숲길이 일행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변화무쌍한 숲길을 따라 얼마나 나아갔을까.
째르르르
코옹 콩콩콩
삐로로로롱
점차 주위가 밝아지며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온다.
머리 위로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한 회색 하늘이 펼쳐지기 시작했고, 코에도 비가 당장 내릴 것 같은 습기 가득한 공기가 스쳐 지나간다.
안느가 고개를 젖혀 먹구름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왠지 비가 올 거 같은 하늘인데…… 이슬아. 마차 위에 방수포 덮어두는 게 좋지 않을까?=
=응……. 그래야겠네.=
마차에 방수 기름까지 칠해놨지만 그래도 마차의 핵심 틀이 비를 고스란히 맞는 것은 좋지 않다.
=쿠르티, 이 길을 따라 쭉 가면 돼.=
쿠에~
세모꼴 대형으로 앞에 선 쿠르티에게 방향을 지시해준 이실리테는 안느와 함께 지붕에 올라와 방수포를 꺼내 천장을 덮기 시작한다.
원래는 비 오는 날 야영하기 위해 구매해둔 방수 천막이지만.
=안느, 거기 고리 있지? 그걸 마차 귀퉁이 걸쇠에 걸고 밧줄로 묶어야 해.=
=엉.=
안느와 함께 네 귀퉁이의 걸쇠에 방수포의 귀퉁이 고리를 걸고 팽팽하게 당긴 뒤 밧줄로 묶어 바람에 날려가지 않게끔 단단히 조치한다.
그사이 비상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던 환인이 강한 바람과 함께 땅으로 내려왔다.
마부석으로 돌아온 안느가 마차에 가까이 붙는 환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도령, 길 어땠어?=
“이 길이 숲 바깥까지 이어져 있더군. 평탄하고 굴곡이 별로 없어 보였으니 이대로만 나아가다 보면 저녁 즈음에 숲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 같다.”
=그래? 이쪽 길은 무난하네. 반대쪽에서 크라빈 마을로 가는 길은 되게 얄구졌었는데.=
뒤에서 마차를 밀고 앞에서 마차를 끌어당기며 경사를 올라가거나 강을 건너기 위해 나무를 베어서 임시로 만든 다리를 건너는 등, 거의 없는 길을 만들어내 다시 피하며 이동하던 기억을 떠올린 안느의 이야기에 이실리테도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시했다.
“이 길은 도시로 나가거나 도시에서 들어오는 길이다. 촌락으로 가는 길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 거기다 우리가 이동할 때는 마을이 봉쇄된 지 한참 지나 통행이 완전히 끊겼을 때였으니.”
한 달이면 풀이 자라고 나무가 침범해 길이 망가지는데 충분한 시간이다.
그때 하늘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안느의 오뚝한 콧잔등을 때렸다.
=앗, 차가. 역시 물 떨어지기 시작하네. 왠지 본격적으로 쏟아질 거 같은걸.=
=주인님, 애들한테 우비 씌울까요?=
“그래.”
=네. 얘들아, 잠깐 멈춰봐.=
쿠에~.
쿠에엣.
쿠으?
마차를 세운 이실리테는 바로 짐칸에서 쿠에용 우비를 꺼내 쿠르티, 쿠핀, 쿠라에게 씌워주고 안느도 방수 망토를 꺼내 이실리테와 환인에게 나누어준다.
그러는 사이 비가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했기에 환인도 비상에게 우비를 씌워주려 했지만.
큐으!
비상은 온몸을 비틀고 흔들며 우비를 거절했다.
“비상, 빗속을 계속 나아갈 텐데 아무리 너라도 몇 시간씩 비를 맞으면 몸 상태가 나빠질 거다.”
쀼삣! 삐르릉!
“…….”
우비를 쓰는 게 싫어서가 아니라 우비를 쓰면 자신을 못 태워서 싫다는 소리에 환인은 피식 웃으며 비상의 부리를 쓰다듬었다.
“어차피 이렇게 비가 오면 널 타고 움직일 수 없다. 난 마부석에 앉아 갈 거니 우비를 써라.”
꾸으…….
그럼 어쩔 수 없지….
실망하며 우비를 몸에 둘렀던 비상은 시무룩한 것도 잠시, 빗줄기가 우비를 두드리는 소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금세 흥흥거리며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도령이 마부석에 앉을 거야? 그럼 난 들어가서 책 좀 봐도 돼?=
“그래. 환연 너도 따라 들어가라.”
「난 여기가 더 좋아. 여기 있을래.」
환인의 이야기에 그의 가슴 포켓에서 고개를 내밀었던 환연은 환인의 손수건을 모포처럼 몸에 감고 다시 속으로 들어간다.
“…….”
스마트폰 절반 정도 되는 무게와 크기의 환연이다.포켓에 들어가있다고 딱히 불편한 것은 아니지만…….
환연이 쉴 주머니를 따로 만드는 것도 고려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마부석에 오른 환인은 이실리테에게 출발 신호를 보냈다.
쏴아아아아!
하늘에 구멍이 난 것처럼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환인은 후드를 두드리는 빗소리에 귀가 먹먹해지는 것을 느끼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이면 출발하는 날 이렇게 비가 오다니. 어제까지만 해도 비가 올 것 같은 낌새는 없었는데.
환인은 쏟아지는 빗물에서 앞으로의 여행길이 순탄치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을 강하게 받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