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2화 〉 356 숲 옆 마을 크라빈
* * *
“유미안. 힘들고 지쳤다고 모두 내려놓고 도망치는 것은 허락할 수 없습니다.”
많은 걸 비롯해 목숨까지 내려놓은 듯한 유미안의 얼굴에 희미하지만 동요가 스쳐 지나갔다.
유미안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죽은 누군가는 그토록 바란 생명, 삶이겠지만……. 저는 지쳤습니다. 이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편히 쉬고 싶어요…….=
“제가 남자라지만 당신이 겪은 일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제게 살아가라고 하시는 건가요…?=
희미하지만 원망이 드러나는 얼굴에 환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희미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방금 제게 당신을 바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미 수령한 이상 반품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니 저는 이제 당신의 주인이고, 주인이 멋대로 하겠다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
순간 말문이 막힌 유미안이 입을 살짝 벌렸을 때 환인은 평온의 파동을 발사했다.
회백색 빛의 파문이 유미안의 저택을 통채로 뒤덮다 못해 근처 주택을 감싸다가 천천히 옅어져 간다.
유미안은 회백색 빛의 파문 속에서 정말 오랜만에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다.
약간 창백하던 피부에 혈색이 돌며 발그레해지고 탁하던 사파이어색 눈동자에 다시 빛이 스며든다.
느릿하게 뛰던 심장이 점차 빨라지며 힘없이 누워있던 세모꼴의 고양이 귀가 쫑긋, 위로 솟아올랐다.
=아…….=
머릿속에 각인된 것처럼 자신의 뱃속을 파고들고 목 안쪽 깊은 곳까지 들어와 속을 헤집던 그 기억이, 감각이 흡사 수십 년은 지난 것처럼 흐릿해진다.
시도 때도 없이 비명처럼 울려 퍼지던 귓가의 쇳소리 대신 바람 소리와 새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피부에 닿는 따스한 햇살, 초여름의 싱그러운 숲 냄새, 마을에서 전해져오는 활기가 정말로 오랜만에 그녀의 감각을 자극한다.
눈물이 다시 왈칵 흘러내렸다.
환인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소리 없이 흐느껴 우는 그녀에게 자상한 어조로 말했다.
“도망친 곳에 행복은 없는 법입니다. 더군다나 세상을 떠돌며 위험 속에 몸을 던지는 저에게 몸을 의탁하려 하시다니,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셈이군요.”
=은인님…….=
“사십시오. 살아가십시오. 당신이 이 마을에서 평온과 안락함을 느끼며 주어진 수명이 다 하길 바랍니다.”
=흑…….=
손수건을 꺼낸 환인이 유미안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당신처럼 곧고 강한 마음을 가진 여자도 이처럼 무기력해지는데 다른 여자들은 보지 않아도 어떤 상태인지 짐작이 가는군요. 그만 울음을 그치고 그날 중핵의 산란장에 잡혀있던 분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아주십시오.”
=네, 은인 주인님.=
환인 일행이 기생촉수 두꺼비의 뱃속에서 구출한 55명은 어딘가 거동이 불편한 느낌이긴 해도 정신적인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괴물의 뱃속에 갇혀 끊임없이 괴물의 새끼를 배고 낳고 했던 것에 비교하면 멀쩡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게 가족들의 일도 돕고 조금씩 끊임없이 움직이며 건강을 되찾아가는 중이던 그녀들에 비하면, 중핵의 산란장에서 구출한 여자들은 폐인이나 다름 없는 상태였다.
젖가슴에 괴물의 새끼가 기생한 적도 없었고 배가 찢어질 듯이 부풀어 오를 정도로 자궁에 괴물의 새끼를 담은 적도 없었지만, 그녀들의 정신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거다.
구호소가 아닌 정신병동으로 보일 만큼 온갖 정신병 증세를 보이는 여자들. 비슷한 신세였지만 멀쩡히 밖에서 활동하는 여자들.
그녀들의 차이라면 후자는 평온의 파동을 20여 차례나 받았었다. 많이 받은 이는 40회가 넘는다.
그러나 후자는 고작 한 번. 구출한 직후 뿐이었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평온의 파동이 효과를 발휘했다는 게 의외지만.’
평온의 파동이 장기적인 정신안정의 관리 및 치료 측면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 환인은 자신이 구출한 119명의 여자를 앞에 두고 평온의 파동을 펼쳤다.
파아아앗…….
한차례 회백색 빛의 파문이 아름답게 퍼져나자 반응은 둘로 극명하게 나뉘었다.
=아…… 이 느낌이야…….=
=하아…….=
=으응, 기운이 막 솟아오르는 거 같아.=
한쪽은 정신적인 휴식을 만족스럽게 취한 것처럼 얼굴 표정이 온화하고 밝아진 반면…….
=으….=
=…….=
다른 쪽은 일순간 정신적인 마취를 당한 것처럼 행동을 멈추고 흐리고 멍한 눈으로 환인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후자가 중핵의 산란장에서 구해진 여자들이었다.
비쩍 마르거나 눈빛이 위험할 정도로 흔들리던 여자들 중 한 명이 눈물을 주룩 흘리자 다른 사람들도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사람은 정신적으로 극한에 몰리면 오히려 눈물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상태인 사람에게 울라고 하는 이유, 혹은 눈물을 보이는 것에 반색하는 이유는 범람하기 직전의 둑에 물길을 내서 물을 빼는 것과 같은 이치다.
감정이 틀어막히다 터지면 그 여파와 후유증은 신체의 영구적인 상실에 버금갈 정도다. 그런 상황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눈물을 시작으로 감정이 흘러나올 구멍을 만드는 것이다.
환인은 흐느끼고 오열하는 여자들을 비슷한 경험을 한 여자들이 위로하고 안아주는 것을 지켜보다 치료소를 나왔다.
한 번에 여러 번 파동을 펼치는 것은 무의미하다. 적어도 1시간에서 2시간 정도의 텀을 두어가며 펼치는 게 좋다.
‘그러면…….’
자신의 호위로 따라붙은 안느와 마을 광장으로 이동한 환인은 자신의 잘린 머리 앞에서 좀비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남자 영혼에게 다가갔다.
다른 머리의 주인은 모두 성불했는지 홀로 남아있는 영혼 하나.
그 남자 영혼과 감응을 일으키자 혼돈을 형상화한 듯한 복잡하고 음울하기 짝이 없는 감정이 흘러들어온다.
얼핏얼핏 스쳐 지나가는 남자 영혼의 기억들.
여신처럼 아름답고 강한 이실리테와 안느를 훔쳐보며 정신적으로 수음하는 장면이 먼저 나온다.
그 후 이실리테와 안느에 대해서는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한 주제에 종족적으로 하등하다 여긴 유르파에게는 추잡한 마음으로 음해와 모략을 일삼는다.
유르파를 험하고 거칠게 다루는 상상의 짤막한 단편에 환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이어서 경비병들에게 포박당해 장대에 매달리는 장면, 마을 사람들에게 돌팔매를 당하는 장면,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하는데 대한 원망을 라비올라에게 던지는 장면, 그리고 허리에 작은 날개가 달린 여기사에게 목이 달아나는 장면이 차례대로 지나간다.
남자 영혼의 마음속은 온갖 마이너스 감정이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었다.
절망, 고통, 비참, 좌절, 원망, 증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주변 탓으로 돌리는 성품과 인성. 거기다 혼돈으로 물들어가는 영적 상태.
내버려 두면 혼재가 되어버릴 테지. 그렇다고 해서 이런 놈을 성불시켜줄 생각은 없는 환인이었다.
말없이 영혼 화살 한 발을 장전한 환인은 남자 영혼의 머리를 꿰뚫었다.
「끄아어억…!? 브어어거그극…….」
머리에 난 구멍으로 바람이 주입되는 듯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다 이내 펑 소리를 내며 터지는 남자 영혼.
희미한 빛가루가 대기를 떠다니는 먼지처럼 부유한다.
영적인 파동이 흘러나왔기 때문일까. 그쪽으로 약간 예민한 안느가 환인의 곁에서 물었다.
=도령 방금 뭔가 했어?=
“그래. 반성도 후회도 하지 않고 남을 원망하며 혼재화 하려는 영혼 하나를 소멸시켰다.”
=…….=
그의 앞에 꿰인 갈색 퓨마 남자의 머리에 시선을 한 번 주었던 안느는 이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환인도 별 말 없이 머리를 무심히 응시하며 생각을 이어나갔다.
그 백치령이라는 여자가 멋대로 끼어들어 이 사람들을 죽여버렸기에 자신이 나설 자리는 없어졌다.
여기서 자신이 재차 나서면 자신의 꼴만 우스워진다.
일단은 계획대로 프라버를 방문해 영주에게 항의 서한을 보내고…….
‘롬디스 일행은 용서해주어야겠군.’
근 일주일에 가까운 강행군에도 군말 없이 따라오며 자신의 지시를 성실히 수행했다.
자신이 트립해서 모습을 감춘 뒤에도 여자들을 호위해 마을로 돌아왔고, 거기서 끝낸 게 아니라 하늘 기사단과 행동을 함께 하며 자신의 수색을 거들었다고 유미안과 라비올라가 이야기해주었다.
처음에는 통신 수정관리부서 부서장의 일로 항의 서한을 보낼 때 그들의 이름도 올리려 했지만, 그들의 성실함을 고려하면 보상으로 그들의 이름은 빼주는 게 인간의 도리겠지.
그 대신 하늘 기사단의 기사단장이 저지른 일을 베이스로 통신 수정관리부서가 한 짓은 조미료 정도로 뿌리도록 하자.
그 정도만 되어도 프라버의 영주는 얼굴이 시뻘개져서 아랫것들을 조질 것이다.
“안느, 마을을 한 바퀴 돌지.”
=응.=
그 후 마을 사람들의 공경 어린 시선을 받으며 마을을 한차례 둘러본 환인은 광장의 스물한 명 외에 다른 피해자가 나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
영주 일족이라고 멋대로 패악질을 부린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렇다면 백치령이라는 여자가 그 사람들을 죽인 것은 프라버의 영주를 비롯해 이 마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식이었을 가능성이 더 커진다.
내가 이렇게 일을 하고 있다고, 성자의 평판을 생각해서 움직인다고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지만.’
환인은 프라버의 영주에게 서한을 전달할 방식을 구상하며 거리를 걷던 중 시장에서 식재료를 사는 이실리테와 마주쳤다.
=아, 주인님.=
그녀는 환인에게 =잠시만요.= 기다려달라고 부탁한 뒤 잠자리 계통의 충인족이 벌여놓은 좌판에서 여성기와 흡사하게 생긴 갈색 채소를 들고 손짓을 동원해 가격을 흥정한다.
=히로익이 비싼 재료라는 건 잘 알아요. 하지만 여기 꼭지 부분과 열매 아래쪽의 주름을 보세요. 이건 수확을 이르게 한 중급품이라는 증거잖아요? 그런데 가격은 상등품이라니, 너무해요.=
그러자 회색 면사포 같은 것으로 얼굴 대부분을 가린 충인족이 잠자리 특유의 앞발로 성인 머리 크기만 한 흑판을 꺼내 거기다 회색 분필 같은 것으로 글을 적는다.
[이야~ 못 말리겠구만. 예쁜 아가씨는 히로익을 자주 먹어봤나 봐? 히로익 품질 구분법도 다 알고 있고 말이야.]
=고급 하녀 양성기술원 출신이거든요. 그러니까 이거하고 이거, 이거, 이거 해서 3은화에 주세요.=
[그렇게 악착같이 가격 깎지 마. 그렇게 가져가면 난 뭐 먹고 살라고(흑흑 우는 그림)]
=아저씨 같은 청령족은 먹고 사는 건 전부 숲에서 해결하잖아요. 마을에 나온 건 갑각에 예쁜 색을 내기 위한 광물을 구하러 나오신 거고요. 그러니까…… 부탁드릴게요.=
[크으으. 희귀 직업자 아가씨면서 엄청나게 알뜰살뜰하구만. 좋아, 3은화만 줘. 이건 덤이야.]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그래. 크라빈 마을의 구원자이신 성자님의 영혼 기사님이라서 싸게 드리는 거야. 그분께 맛있게 요리해드리라고.(엄지척하는 그림)]
=네. 그럴게요.=
까득까득, 충인족 특유의 웃는 소리에 살짝 목례한 이실리테는 저쪽에서 장신구 좌판을 구경 중인 환인에게 재빨리 다가가 섰다.
안느가 묻는다.
=뭘 샀길래 3은화나 낸 거야? 그리 많이 산 거 같진 않은데.=
=히로익이랑 채화인데 본 적 없어?=
=둘 다 처음 들어. 라드세아 작물인가 보네.=
=응. 맛있기도 하고 히로익은 특히 여자한테 좋대. 아이를 밴 여자가 먹으면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할 정도야.=
=그래? 근데 난 왜 몰랐지.=
=딱히 군생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땅속 깊은 데서만 자라는데 그 특유의 냄새를 충인족들 밖에 못 찾는다고 해. 그래서 굉장히 희귀한 편인데 그 때문이 아닐까?=
그리 말하며 여자 생식기와 흡사하게 닮은 가지 크기의 채소를 꺼내자 안느의 얼굴이 사르르 붉어진다.
=되게 이상하게 생겼네.=
=그치? 생긴 게 이래서 히로인이라고 불리기도 해.=
“향이 강렬하군.”
=이 향 때문에 최고급 히로익은 향미료로도 쓰인다고 해요.=
모양도 다르고 용도도 비슷하지 않지만, 채취법이나 향이 트러플에 비견된다.
그녀에게서 히로익을 받아든 안느가 조심스럽게 다루며 향을 크게 맡는다.
=……와, 나 이 냄새 맡았더니 뱃속이 조금 뜨거워지는데?=
=히로익은 조금 호불호가 갈리는 식재료인데 안느한테는 취향 적중인가 보네.=
“중독 현상 같은 것은 없는 건가. 이야기를 들어보면 의존도가 발생하는 것 같은데.”
=없이는 못 산다고 할 정도인 사람들이 안느랑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고는 들었지만 중독 증상이 생겼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어요.=
“그런가. 재미있군. 지구에도 비슷한 식재가 있는데 다음에 가면 다 같이 시식해보는 것도 좋겠어.”
=그때가 기대되네요. ……야, 그만 냄새 맡고 이리 줘.=
=조금만, 조금만 더…….=
내미는 손을 피해 소심하게 반항하던 안느는 사람 손에 오래 타서 좋을 게 없는 식재라며 강제로 빼앗기곤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보다, 이실리테는 충인족에 대해서 잘 아는 건가.”
=잘 안다고 할 정도는 아니고 용병으로 활동할 때 충인족 전사와 함께 싸운 적이 몇 번 있어요.=
“그들 특성은 어떻지.”
=한 마디로 타고난 직업자야. 일반인이 하급 직업자에 가까운 능력을 가지고 있거든.=
안느가 냉큼 끼어들며 대답하자 충인족에게서 산 채소를 보존 주머니에 담던 이실리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껍질은 고급 판금 갑옷을 능가할 정도에 다리와 뿔은 부러지거나 금이 가도 금방 낫는 천연의 창검류에요. 그리고 나이를 먹을수록 강도가 점점 더 올라가고, 직업자가 되면 술사나 엽사도 전사나 투사만큼의 신체 방어도를 지니게 되어서 1급 전사가 3~4급 전사 수준의 신체 능력을 보유하게 되요.=
“곤충형이라면 비행 가능한 개체도 있을 텐데. 적으로 만나면 까다롭겠군.”
=맞아. 4급 전사인 충인족을 본 적 있는데 혼자서 6급 거인족하고 맞서 싸우더라니까? 만약 충인족의 숫자가 많았다면 니오네브레스는 4대 종족이 아니라 5대 종족이 되었을 거야.=
하지만 충인족은 번식도 잘 하지 않고 번식률도 낮아 전 세계 통털어 그 수가 몇 천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그마저도 울창한 숲속에서만 지내기에 보기도 어렵다고.
대화 주제가 한 차례 끝이 나고, 이야기가 끊긴 틈을 타 안느에게 바짝 붙은 이실리테가 속삭이며 묻는다.
=마을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 주인님 표정이 조금 좋아 보이시는데.=
=응? 별일은 없었어. 평온의 파동으로 여자들 정신을 치료해주고…… 아, 언니 욕보인 놈 영혼 하나 완전히 소멸시켰어. 그 때문인가?=
=그런 일로 주인님의 기분이 좋아질 거 같지 않은데……. 혹시 유미안 씨랑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지?=
갑자기 유미안 이야기가 왜 나오지? 살짝 고개를 갸웃거린 안느가 일단 질문에 대답해준다.
=없었는데? 치료 후에 도령은 바로 거길 떴고 유미안은 여자들을 살핀다고 남았으니까.=
대답하던 안느는 그녀가 이런 질문을 한 이유를 알아차렸다.
아까 유미안이 도령을 주인님이라고 불렀었지? 주인님은 자신만의 주인님이고 싶다는 건가?
안느가 히히 웃으며 팔꿈치로 이실리테의 풍만한 옆가슴을 쿡 찌르자 이실리테도 자신의 속내를 안느가 알아차렸다는 걸 눈치채곤 뺨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돌린다.
=유미안은 아이까지 낳은 아줌마잖아. 거기다 도령이 그런 말을 한 걸 보면 데려갈 생각은 없어 보이니까 라이벌이라곤 생각 안 해도 될 거 같은데?=
=그, 그런 거 아니거든! 그냥, 주인님을 아무나 주인님이라고 부르게는 못하고 싶은, 뭐 그런…….=
=……마음이라는 거지? 나도 이해해. 누가 대뜸 도령을 도령이라고 부르면서 알랑거리면 오, 나랑 싸우자는 건가 싶을 테니까.=
“…….”
여자친구들이 작은 목소리로 대화하는 걸 듣던 환인은 그 주제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호칭의 선점권이나 점유권을 이해하는 것은 일반인도 무리가 아닐까.
그러나 여자들의 저런 것은 이해하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걸 아버지를 통해 배웠다.
어머니와 결혼하신 뒤 한 번도 다툰 적 없으신 아버지의 말씀이니까 이번에도 맞겠지.
환인은 여자친구들의 속삭임을 흘려들으며 향후 계획을 재정립했고, 별채로 돌아오자마자 그 건으로 유르파를 호출했다.
=음…… 흥미로운 가설이네. 몸 밖의 위상력을 배제하고 접근을 차단할 경우 아우라의 방출이 사라진다니. 근거는 있니?=
“사료로는 저 하나 뿐이라 불충분하지만, 일단은 위상류가 그 증거가 됩니다.”
=아…….=
=오…….=
이실리테와 안느의 탄성에 그쪽을 잠깐 쳐다봤던 유르파가 다시 환인에게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가설로는 신빙성이 있어.=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겠습니까. 만약 그것으로 아우라의 발현을 감춘다면 유르파가 그 마도구의 제작자로 이름을 알릴 수 있게 될 겁니다.”
눈을 내리깔고 곰곰히 생각하던 유르파는 한층 밝아진 얼굴로 대답했다.
=확실히 가능할 것 같아. 위상력과 반발하는 마력 문자로 술식을 새기고 조정해서 특징 술법을 부여하면…… 아, 그러면 유사 위상류도 재현할 수 있는 건가?=
=율이 언니. 그럼 반대로 위상류를 줄일 수도 있다는 말 아니야? 그걸 마도구로 만들어서 도령이 착용하면 도령도 아우라가 생기나?=
=이론은 되겠지만 반발과 중화는 전혀 다른 개념이야. 그리고 후자가 몇 배나 더 어려워서 내 실력으로는 구현하기가 좀…….=
환인 앞에서 자신감 없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지만, 중화는 공간 전이, 이동과 마찬가지로 7급의 영역이다.
“지금은 아우라를 감추는 것에 집중하도록 하지요. 지금 이대로 프라버에 입장한다면 대번에 정체가 특정될 테니까요.”
그의 시선이 이실리테의 특별한 아우라에 닿으니 유르파도 상황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지금 하고 있는 거 다 멈추고 집중하면 사흘 정도 걸릴 것 같아.=
재료는 모두 있고 마력문을 새길 반지나 팔찌, 목걸이도 속성 저항 마도구를 제작하기 위해 미리 만들어둔 게 있다.
이틀 동안 술식을 계산하고 설계한 다음 하루면 시제품을 뽑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시작할까?=
“부탁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산란못의 피해자들의 정신을 치료하는데 시간이 걸리니 사흘 후 크라빈을 떠나기로 하겠습니다.”
=앗, 시제품이 완벽할 거라는 보장은 없는데?=
“프라버까지 이동하는데 드는 시간이 있으니까요.”
=아앗. 응. 프라버에 도착하기 전까지 어떻게든 성과를 내볼게.=
“예. 이실리테와 안느도 그렇게 알고 출발 준비를 마치도록 해라.”
=네.=
=엉.=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