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361화 (361/813)

〈 361화 〉 355 숲 옆 마을 크라빈

* * *

=은인님.=

=성자님!=

테라스를 통해 뛰어 들어온 푸른 머리카락의 여자들은 환인을 보곤 감격에 겨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만 엄마 쪽인 유미안은 그저 안도할 뿐이었지만, 딸인 라비올라는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환인 앞에서 정신없이 고개를 숙여댔다.

=성자님! 엄마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성자님이 오시지 않으셨다면 우리 마을은, 엄마는……!=

말하는 도중 사파이어처럼 푸른 눈동자로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는 라비올라.

환인은 속으로 이채를 드러냈다. 4개월이나 흘렀는데도 이렇게 선명한 감정을 드러낼 줄이야.

예상 밖의 일이라고 생각하며 그녀의 어깨를 잡고 멈춰 세운 환인은 조용히 그녀를 다독였다.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해야 할 의무였습니다. 그보다…… 괜찮습니까. 모습이 말이 아니군요.”

잘 보니… 아니, 잘 볼 필요도 없이 볼살이 눈에 띄게 홀쭉해졌고 눈 밑에도 피로가 감추지 못할 만큼 묻어나고 있다.

유미안도 그랬다면 격무로 피로가 쌓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유미안은 후유증을 모두 이겨냈는지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

=아, 저… 그러니까 이건.=

살짝 붉어진 얼굴,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할 만큼 수줍어하는 태도.

말하기 곤란한 것처럼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환인은 어찌 된 일인지 알아차렸다.

“고맙습니다. 이토록 마음고생을 하셨을 만큼 우리를 생각해주었다니, 지금까지의 노력이 보답받는 기분입니다.”

=앗… 그…….=

“자, 그만 눈물을 그치고 죽은 이들을 위해서라도 웃음 지어주십시오. 행복과 축복은 미소를 찾아오는 법이니까요.”

그가 작게 웃으며 뺨과 눈 밑을 살짝 어루만져주자 그녀의 머리 위에 솟은 푸른 고양이 귀가 격렬하게 반응한다.

유미안은 뒤에서 자신의 딸이 한 마음고생까지 알아봐 주는 모습에 어째서 마을 사람들이 100일이 넘어감에도 성자님을 잊지 못했는지 알 수 있었다.

성자님의 이런 인품 때문이겠지.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미궁을 돌파하며 납치당한 마을 사람을 120명이나 구해내셨다.

듣기로 미궁 밖에서도 죽인 괴물만 천여 마리가 넘었고, 미궁 안에서도 비슷한 숫자의 이형종을 때려죽인 끝에 미궁을 무너트리셨다.

거들먹거려도 오히려 당연히 여길 정도의 위업이다. 여기에 존중받고 존대 받아야 마땅한 신분까지 지녔음에도 전혀 그런 티를 내지 않으신다.

=죄송합니당……. 성자님이 무사하신 걸 봤더니 감정이 북받쳐서…….=

유미안은 소녀처럼 구는 딸과 그런 딸을 다정하게 달래는 환인을 보며 허무와 공허에 좀먹힌 가슴이 조금씩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중핵의 씨받이로 다뤄지던 유미안은 자신처럼 구출된 119명과 함께 두 달 만에 마을로 돌아왔다.

살아서 다시 밟을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마을에 도착한 그녀는 솔직히 말해 자신처럼 결혼해서 애까지 낳았던 여자들은 몰라도, 결혼도 하지 않은 어린 여자들은 남은 인생이 고달프겠다고 생각했었다.

괴물들의 씨를 받아 번식에 사용된 몸뚱이다. 남자들의 기본적인 성격을 생각해본다면 받아들여질 리가 없다.

하지만 마을에 돌아온 유미안은 마을 사람 전원이 생환한 자신들을 고생했다며 보듬는 모습에 적지 않게 놀랐었다.

두 달간 있었던 일로 죽어가던 유미안의 마음이 일순간 활력을 되찾을 정도로.

대체 마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을 반기는 모습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여자들이 있었기에 그녀는 우선 여자들을 마을에 마련되었다는 구호소로 이동시켰다.

구호소도 생각 이상으로 제대로였다.

침상이 100개 넘게 준비되어있었고 방마다 10개씩 10명이 들어갈 수 있게 깔끔하게 정돈되어있었으며 한 번에 40명은 들어갈 수 있는 대욕실은 물론 대식당도 붙어있는, 도시에서나 볼법한 기숙사 느낌의 건물.

=성자님의 말씀에 따라 준비한 곳이에요.=

=……그 성자님이 이런 것까지 신경 써주셨다는 거냐?=

=네. 병… 병원? 병원 식이라고 하셨어요. 마을에서 나이가 많아 노동력이 조금 떨어지는 분들을 고용해서 환자들을 살피게 하셨고요.=

=성자님이 돈이 어디 있어서?=

=마을에 도착하시자마자 마을에 떠돌아다니던 영혼들을 성불시켜주셨거든요. 그에 마을 사람들이 사례품과 답례품을 드렸는데…….=

그것을 성자님은 고스란히 마을에 되돌려주셨고 그 결과가 이 병원이라는 말이었다.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성자님의 일행이신 유르파 영혼 기사님이 약초를 다루는 법과 약으로 상처를 낫게 하는 법 등을 일부에게 가르치며 병원이 운영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셨다고.

세상…에. 영혼사님이 이런 일에도 신경 쓰신다니.

유미안은 성자님의 행적을 읽은 뒤 찬탄을 넘어 진심으로 경외심을 품었다.

40 평생 스무 번이 넘는 영혼사를 봐왔지만 맹세코 이렇게까지 하는 분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영혼사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통틀어 이렇게나 이타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처음 봤다.

그랬기에 슬픔을 억누르지 못했었다. 자신들이 아니라 성자님 같은 분이 살아남으셔야 했는데.

하지만 그분은 미궁의 심핵을 부순 직후 강렬한 황금빛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그 사실을 떠올리면 제정신으로 있기 힘들었기에 그녀는 곧바로 마을에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청에서 업무에 몰두했다.

=그대가 이 마을의 고족인가.=

=네, 백치령 기사단장님.=

일단 딸과 함께 마을의 현 상황을 파악하던 그녀는 다음날, 딸이 말했던 프라버의 늦은 지원 병력 책임자를 만날 수 있었다.

어제 자신들을 구하러 출진했지만 길이 엇갈려 오늘 복귀한…… 프라버의 하늘 기사단 2군과 그 수행원 및 종자들.

딸에게 듣기로 성자님이 아니었다면 평생 볼 일이 없었던 사람들이며 늦어도 한참 늦은 사람들이었다.

=마을의 모험가에게 성자님이 미궁에서 생환하지 못하셨다고 들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도록.=

백 씨 일족, 프라버 영주 호족의 성을 이은 여자의 거만한 태도에 느낀 거부감을 유미안은 능숙하게 가슴 속으로 숨기며 당시 상황을 설명한다.

어째서 거부감이 드는 걸까. 이건 평생을 겪어온 호족의 당연한 태도인데.

=……해서 성자님 일행은 황금빛과 함께 모습을 감추셨습니다. 저희는 경악하여 성자님을 찾았지만, 그 장소에는 부서져 널린 수정뿐이었습니다…….=

그 후 미궁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유미안은 롬디스 씨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미궁을 탈출했다 설명하였고, 예상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어째서 살아 돌아왔지? 성자님은 네년들 수백 보다 더 고귀한 분이시다. 미궁 안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분들을 찾았어야 할 것 아니냐.=

=…죄송합니다…….=

=이번 성자님도 그래. 도저히 이해할 수 없군. 이런 무지렁이들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버리다니.=

=…….=

=되었다. 그분의 수색은 우리가 알아서 할 터이니 네년들은 내가 머물 곳이나 재단장하여라. 어제 보니 돼지우리나 다름없더군.=

=예, 백치령 기사단장님…….=

말투는 안 좋았지만 그녀가 말하는 것은 전부 사실이었기에 유미안은 눈물을 흘렸다.

흔한 마을의 고족과 마을 사람인 자신들보다 더 세상을 이롭게 하실 분이신데 그런 분이 미궁에서 헛되이 돌아가시다니.

잠깐이었지만 그분의 인품을 보았으며, 눈앞의 호족과 자연스레 비교했더니 더더욱 처연해졌다.

하늘 기사단은 그다음 날부터 미궁이 있던 장소를 중심으로 근방을 넓게 수색하며 이형종과 괴물을 가리지 않고 토벌해나갔다.

유미안과 라비올라는 그것을 지켜보며 약간의 희망을 손에 쥐고 기도했다.

그 위험한 미궁을 동료 세 분과 돌파하신 분이다. 그런 분들이 그리 허망하게 돌아가실 리 없다.

수십 명의 기사와 종자들이 그 근처를 수색 중이니 곧 좋은 소식이 들려올 것이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을 넘어 넉 달이 흘렀음에도 그분은 돌아오지 않았다.

백치령 기사단장은 한 달간의 수색을 끝마친 뒤 성자님이 사망하셨음을 선언하고 돌아가 버렸으며 자신의 딸은 미소를 잃어버렸다.

‘아아…….’

유미안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마을 일에 몰두했다.

마을이 두 달간 봉쇄된 후유증은 생각보다 컸다.

마을에 비축된 물자는 거의 바닥을 보이는 중이었고 상인들과 상단의 방문이 끊겨 생필품의 보충이 중단되었으며 이번 사태로 잃은 마을 인구가 전체 인구에서 15%에 가까웠다.

이대로 가면 마을이 고사해버릴 상황.

유미안은 이형종에게 끌려가 겪은 괴로움과 성자님의 일을 가슴에 묻어두고 마을을 되살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평소 아껴둔 인맥을 활용해 상인과 상단을 부르고 약초꾼과 사냥꾼, 채집꾼들을 풀어서 특산물의 채취를 독려했다.

마을 바깥의 이형종을 성자님이 대부분 정리하셨지만, 그래도 겁먹고 잘 나가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다독여 마을 주변의 논밭을 다시 일궜다.

힘이 남아도는 사람들을 보내 목재를 공수해오는 한편 무너진 건물을 새로이 짓고 부서진 건물을 고쳤으며 망가진 마을 건물을 수리했다.

사망해서 공석이 된 마을 순찰대, 자경대의 자리를 보충해 훈련과 순찰을 병행했고 하루하루 들어오는 숲나물, 약초, 각종 술법 및 마력 가공 소재 같은 특산물의 손질을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 마을 주민들이 유례없이 협조적으로 나와 그녀를 놀라게 했다.

=여길 개간하면 되는 겁니까?=

=뭐 별거 없구먼. 얼른 끝내자고.=

=어어.=

언제나 뺀질거리고 ‘오직 전투만이 남자가 할 일이다!’라고 개소리를 해대던 남자들도 군말 없이 논밭의 개간과 채집 지역의 정돈에 나섰고.

=크흠. 오늘은 운이 좋았습니다.=

=아니, 클라빈티아 적색초 아닌가! 자네 오늘 운이 좋았구먼!=

=…자네야말로 피지 않은 로아팅스 달맞이꽃을 여섯 송이나 가져오다니. 전성기의 실력이 나오는군.=

채집꾼들과 약초꾼들은 은근슬쩍 비장의 채집 지역에서 고가의 소재와 숲나물 같은 특산품을 아낌없이 캐와 마을의 부흥에 모두 쏟아부었다.

=이형종이 사라지긴 했나 봅니다. 짐승과 동물들이 돌아오고 있어요.=

=새들도 다시 날아들고 있습니다. 북서쪽 호수에 우리카 뿔백조가 가득 모여있더라고요.=

사냥꾼들도 각자 소득을 챙겨 돌아오니 마을의 아낙들도 요령 피우지 않고 분주하게 움직여 상품으로 가공해나갔다.

조류의 깃털과 목재, 쇳조각으로 화살대, 화살 깃을 만들고 짐승의 뼈로 화살촉을 만들어 화살을 대량으로 제작한다.

뼈를 갉아 바늘 및 생활도구를 제작하고 가죽을 무두질해 옷과 신발, 지갑 등을 제작해낸다.

이들이 이토록 협조적인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성자님이 마지막 미궁 공략을 위해 떠나시기 전 하셨던 말씀, ‘모두가 어려울 때 뒤에서 남을 험담하고 음해하고 비난하는 사람은 영혼의 축복을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며, 영혼의 저주를 받을 겁니다.’가 비약되고 확대되어서…….

‘남들 어려울 때 혼자 이득을 취하려 하면 저주를 받아서 신의 정원에 못 갈 거다.’

……이렇게 변해 마을 사람들의 머릿속에 인식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덕에 며칠 뒤 도착한 상단 및 행상인들과 거래할 물량을 확보해낼 수 있었으며, 유미안은 화려한 화술과 언변으로 그들을 구워삶아 평소보다 더 높은 대금을 확보해낼 수 있었다.

물론 그 대금은 그들이 가져온 생필품과 잡화의 구매에 전부 소비되었고, 그것만으로도 부족해 라비올라가 만든 마도구를 팔아 번 수익을 전부 쏟아부어야 했다.

분배는 각자의 기여도에 따라 이루어졌다.

누가 보아도 공정하다고 느낄 기준에 따라 공개된 장소에서 진행되었다. 그 덕에 사람들은 불만을 가지지 않았고 더욱 힘내서 생산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자 유미안과 라비올라를 비롯해 마을 사람들의 노력에 바닥을 보이던 마을 곳간은 다시 채워졌고 방문자들이 마을을 찾아오기 시작했으며 마을이 빠르게 정상화되어가며 사람들의 얼굴에 다시 웃음꽃이 피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일이 점차 줄어들어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여유가 생기자 유미안의 가슴 속에 묻혀있던 괴로움이 싹을 틔웠다.

몸이 편해질수록 괴물에게 끌려가 겪었던 그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나며 그녀를 밤낮으로 괴롭혔고, 그곳에서 성자님이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떠나신 것이 떠올라 죄책감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유미안 씨. 그럼 저희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무력한 저희를 대신해 그분의 수색에 힘쓰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롬디스 님.=

=아닙니다. 그보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

=……그러니 기운 내십시오.=

자신이 돌아온 지 두 달째 되던 날 기사들이 떠나간 뒤에도 남아 그분들을 찾던 모험가들도 떠나갔다.

유미안과 라비올라는 성자님의 사망을 선고받은 느낌이었다.

죽었으니 허튼 기대 따위는 하지 말라는 선고.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하루에 몇 시간 자지도 않고 일에 몰두하는 유미안 덕에 다시 2개월이 흘렀을 무렵 마을은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예전의 모습을 되찾지 못했다.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씨받이 때의 기억과 죄책감이 그녀의 마음을 좀먹어가며 삶과 의욕을 빼앗아가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시간이나 멍하니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시간을 죽이는 모습에 마을 사람들도 조금씩 걱정을 드러낼 무렵이었다.

=유미안 님! 성자님께서, 성자님과 영혼 기사님들께서 돌아오셨습니다!!=

=……?=

어제처럼 오늘도 멍하니 시간만 죽이고 있을 때 경비병이 뛰어 들어오며 소리친 내용에 유미안은 순간 제대로 반응을 하지 못했었다.

돌아왔다고? 누가?

……영혼사님이?

진짜? 어떻게?

죽은 듯이 처져있던 심장이 조금씩 뛰기 시작하며 죽어있던 뇌세포가 조금이지만 깨어나는 느낌에 유미안은 머리가 깨어났다.

그래, 그런 분을 짐승신님이 일찍 데려가실 리가 없지.

그 실종은 짐승신님의 착각이 있으셨던 게 틀림없다.

“…….”

환인은 유미안과 함께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작은 언덕에서 그녀가 풀어주는 이야기를 끊지 않고 조용히 경청했다.

그녀에게 궁금했던 것은 초반에 모두 해소되었다. 마을의 정상화 과정이야 환인의 관심 밖인 일.

‘미궁의 심핵을 깨트리고 나면 역시 미궁이 소멸하나 보군.’

여자친구들이 그렇다고 해주었지만 그래도 확실한 사례가 필요했는데 이 정도면 참고 사례로 확정해도 될 듯하다.

그렇다면 다음 미궁을 공략할 때는 미궁 탈출 수단을 마련해둬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나중에 유르파와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고.

환인은 이야기가 끝나 입을 다문 유미안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돌아올 때 숲이 몰라보게 바뀌었더군요. 지금이 원래 크라빈 숲의 모습입니까?”

=아니요. 크라빈 숲은 여느 숲과 다를게 없었는데…… 은인님께서 미궁을 부순 이후로 숲이 더욱 맑아지고 자연의 은총이 강해졌습니다. 요 넉 달간 채집과 사냥으로 벌어들인 수익이 예년의 2배를 웃돌 정도예요.=

“다행이군요. 그 고생을 하셨으니 이제부터 낙을 보셔야 할 텐데 자연도 그걸 알고 배려해주나 봅니다.”

=…….=

유미안은 볼수록 호족들과 전혀 다른 눈앞의 남자에게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정말 오랜만에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세상의 호족들이 모두 이분 같다면 더 살기 좋을 텐데.

그녀의 미소에 환인도 작게 웃음 지어준 뒤 여기서도 잘 보이는 광장의 머리 꼬챙이를 응시하며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마지막으로 광장의 저것에 관해서 질문이 있습니다.”

=네…….=

“프라버의 하늘 기사단이 저지른 짓이 확실합니까?”

=네. 저들을 죽인 사람은 백치령 하늘 기사단 2군 기사단장으로 백중강 영주님의 직계 혈족입니다.=

“……조금 화가 나는군요.”

화가 난다고? 그런 것과 전혀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분이신데…….

싫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인간적인 면모가 보여서 더 좋아졌다. 마냥 좋은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며 그것은 자신의 철학과 주관이 완성되어있다는 이야기니까.

유미안은 잠시 고민하다가 여쭈었다.

=외람된 질문입니다만…… 성자님께서도 그자들을 처벌하고 단죄하려 하지 않으셨습니까?=

오히려 기사단장이 목을 쳐주었으니 번잡하고 귀찮은 일에서 해소되어 좋지 않느냐. 그런 요지의 질문에 환인은 차가워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유미안 씨. 솔직히 말해 처형은 제대로 된 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

“그렇기에 저는 저분들에게 기회를 드리고자 했습니다. 이전 자신의 평가와 행동이 어떠했느냐에 따라 용서받고 살아갈 수도 있는 길을 열어드리려 했지요.”

딸에게 들은 게 기억난다. 롬디스 씨의 일행 중 호멘이라는 작자는 성자님의 거듭된 사과 요구에도 거부하다가 목이 꿰뚫려 죽었다고.

성자님은 그들에게도 기회를 드리려 하신 건가? 별 볼 일 없는 무지렁이들이 자신의 여자이자 영혼 기사를 모독한 일임에도?

“그래서 저는 제 이름으로 저주를 내리려 했습니다.”

저, 주……?

성자님의 저주라니, 그건 오히려 죽음보다 더 무서운 벌이 아닌가.

“저에게 저주받으면 당연히 마을 사람들의 배척과 괄시, 멸시가 이어질 겁니다. 인생이 송두리째 망가지는 경험이 되겠지요.”

과거 행실이 나빴다면 더욱 큰 모멸이 쏟아질 것이고, 한순간의 실수였다면 상대적으로 덜하겠지만 마찬가지로 견디기 힘든 고통의 시간이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로 잘못을 뉘우치고 오랜 시간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마을 사람들도 다시 그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물론 그 길은 길고 험난할 겁니다. 하지만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그러한 가능성을 송두리째 지워버립니다.”

=아…….=

유미안은 성자님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눈치채고 꼬리에서 시작된 소름과 전율이 온몸을 돌아 심장과 성감대에 모여드는 것을 느꼈다.

이 어찌 무자비하면서도 자비로운 말씀이란 말인가.

죽음을 내리는 것은 짧은 고통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리지만, 성자님의 말씀대로면 오히려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만큼 고통스러울 것이다.

절망만 주는 것보다 절망 속에 희망을 끼워주는 게 훨씬 더 괴롭고 고통스러운 법이니까.

주륵­

“……유미안 씨?”

유미안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에 당황했다.

“괜찮으십니까.”

=네, 네. 괜찮, 괜…찮습니다. 네…….=

괜찮다고는 하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가슴이 터질 듯이 옥죄이며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아니, 이게 왜…….

“괜찮습니다. 참으려 하지 말고 눈물에 모든 걸 흘러내십시오. 아픔도, 괴로움도, 전부 그 눈물에 담아 흘려보내면 마음이 한결 나아질 겁니다.”

유미안은 조심스럽게 보듬어주는 그 따스함에 환인의 품에 안겨 소리 없이 오열했다.

그의 품에서 한동안 오열하며 앞섬을 흠뻑 적신 유미안은 갑작스레 차분해진 모습으로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낮추었다.

신하가 군주에게 예를 올리는듯한 자세다.

=성자님께 헤아리지 못할 크나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성자님의 노고와 아낌없는 지원에 크라빈 마을의 유미안 크라빈, 마을을 대표해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번 횡액에 유명을 달리한 마을 주민들의 명복을 빕니다.”

환인은 자신의 답에 유미안이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작게 미소짓는 것을 보았다.

그 모습이 다 타고 남은 잔불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녀가 겪은 일을 생각하면 착각이 아니겠지.

입을 열려던 환인은 유미안이 더더욱 머리를 숙이는 모습에 멈칫했고, 이어 자신의 발등에 입을 맞추는 행동을 보곤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지구에서라면 발등에 입을 맞추는 행동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헌신과 충성, 부정적인 의미에서 복종과 모욕, 수치의 강요다.

하지만 여긴 니오네브레스다. 이 상황에서 이런 행동을 하는 건 뭘 뜻하는 걸까.

환인은 다시 고개를 든 유미안의 눈 속에서 몇 가지의 감정과 태도를 읽었다.

체념, 포기, 그리고 무기력함.

전체적으로 자살자의 징후와 흡사하다.

=그날 은인님이 황금빛에 휩싸여 사라지신 이후, 무너지는 미궁을 탈출한 뒤 성자님의 실종 수색도 하지 못한 채 돌아온 저는 죄인이 되었습니다.=

“…….”

=원한에는 보복으로, 은혜에는 보답으로. 은인님께서는 저의 목숨을 구해주셨으나 저는 그에 답하지 못하였으니 이번 생의 목숨을 은인님께 바치겠습니다. 이 순간부터 이 몸뚱이의 주인은 은인님이시니 부디 편하게 사용해주시길 바랍니다…….=

그 모습에서 환인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목숨을 바치겠다는 말은 중의적인 표현이 아닌 말 뜻 그대로라고.

놀라서 꽁꽁 얼어버린 듯한 라비올라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던 환인은 유미안의 가지런한 정수리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어깨에 손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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