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0화 〉 354 숲 옆 마을 크라빈
* * *
환인 일행이 크라빈 마을로 돌아오는 데는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전부 크라빈 숲이 몰라보게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와, 크라빈 숲이 원래 이랬나? 엄청 상쾌해.=
=그러게.=
산란못 미궁이 사라지며 청명하게 바뀐 것인지, 발목을 붙잡는 성가신 수풀과 덤불이 잔잔한 잔디로 바뀌었고 나무는 곧게 뻗었으며 불쾌하게 앞을 가리던 희미한 안개도 없어져 이동에 큰 힘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방해 없이 빠르게 이동한 덕에 금세 도착한 크라빈 마을은 일단 겉으로 보기에 멀쩡했다.
망루와 마을 입구에는 경비병이 서서 경계 근무 중이고 활짝 열린 마을 입구를 통해 보이는 대로변의 가게 및 노점은 모두 문을 열어 열심히 장사 중이다.
대로를 따라 오가는 사람들의 복장도 마을 사람으로 안 보이는 이들이 많다.
단적으로 크라빈 마을 인구가 대략 천명이다. 산란못 미궁 사태로 800명까지 줄었으나 자신이 구해준 사람을 더하면 920명까지 늘었을 터.
하지만 대로에 보이는 사람만 족히 백여 명은 넘어 보인다.
대낮에 마을 인구 10%가 저기 모여있을 리 없으니 이제 봉쇄가 끝나고 여행자들이나 상인 같은 방문자들이 오가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 증거로 사람들의 표정이 근심·걱정 없이 밝다.
환인 일행이 마을 입구에 가까워지자 망루 및 입구에 서서 근무 중이던 경비병의 눈이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어? 야, 저기 오시는 분들…….=
=……헉?=
=서, 성자님! 성자님이 돌아오셨다!!=
경비병들의 표정이 의아놀람경악환희 순으로 바뀌더니 경보종이 땡땡땡땡 격하게 울려 퍼진다.
=뭐야! 무슨 일인데!? =
=괴물의 습격이야?!=
=아니야! 성자님이 살아 돌아오셨어! 성자님이 돌아오셨다고!!=
=뭐!?=
입구 근처가 삽시간에 어수선해지며 몇 명의 경비병이 더 튀어나오거나 고개를 내밀었다가 안으로 황급히 뛰어들어간다.
환인의 여자들은 자신들을 보고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구는 마을 경비병들의 모습에 작게 실소를 흘렸다.
=엄청 놀라네요.=
=놀랄 만도 하 않겠니? 죽었을 거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4개월 만에 돌아온 거니까.=
우당탕, 쾅!
급기야 경비소의 나무 문짝이 굉음과 함께 산산이 조각나면서 마을 경비대장 세피어스가 눈을 부릅뜨고 뛰어나왔다.
이어 환인과 시선이 마주친 그녀의 얼굴이 괴상망측하게 변했다.
환희를 기본 바탕으로 그 위에 안도감과 기쁨, 그리고 아주 약간의 괴로움을 버무린듯한 표정.
세피어스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거리는 경비병들에게 소리쳐 지시를 내렸다.
=너! 당장 마을 관청으로 달려가서 유미안 님과 라비에게 이 소식을 알려! 그리고 너는 유미안 님의 집으로 가서 그분들께 소식을 전하고 너는……!=
정신없이 몇 가지 지시를 내린 세피어스는 인견족 특유의 접힌 강아지 귀가 휘날릴 정도로 달려와 비상을 타고 있는 환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성자님, 무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예. 하늘이 도와 다행히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비상의 등에서 내린 환인이 그녀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우자 황송해하며 고개를 들지 못한다.
=아아. 저는 정말… 성자님께서 실종되셨다는 소식에 얼마나 괴로웠는지, 마을을 지키는 입장에서 아무것도 못 한 게 너무도 죄송스러워서…….=
“아무것도 못 했다니요. 우리가 도착하기 전까지 마을을 지킨 것은 세피어스 씨와 경비분들이 아닙니까.”
여러분들의 노력과 희생이 아니었다면 크라빈 마을은 진작에 잿더미가 되었을 겁니다. 자부심을 느끼셔도 됩니다.
이렇게 말하는 환인에게 세피어스의 단정한 얼굴이 감격에 물들어간다.
=성자님…….=
흔히 남자는 자신의 노력을 알아봐 주는 여자에게 반한다고 한다.
그것은 반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피어스가 환인을 흠모의 눈으로 바라보는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환인의 여자들이 그걸 보고 뒤에서 속닥거린다.
도령은 진짜 가는 곳마다 여자를 만드네.
여자가 훨씬 많은 루크랑이라서 더 그럴 거야.
반하지 않으면 그게 여자겠니?
세피어스는 그런 영혼 기사들의 반응에 퍼뜩 정신 차리고는 허리를 꾸벅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피로하실 텐데 제가 눈치도 없이 그만.=
“아닙니다. 마침 잘되었군요. 경비대장님에게 물어볼 것도 있으니 시간이 되신다면 잠시 함께 하시겠습니까.”
=예, 모시겠습니다.=
어느센가 10명 정도 모여 자신을 선망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경비병들을 지나 마을로 들어선 환인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전의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든 말 한마디 나누고 싶어서 우르르 몰려들었다면, 지금은 차마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무릎을 꿇거나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린다.
그게 마치 숭배대상을 마주한 신자 같은 모습이다.
‘아무리 미궁을 없애고 마을을 구했다 해도 과한 태도인데.’
120명을 구출해서라고 보기에도 어딘가 석연치 않다. 저기, 명백한 상인의 차림을 한 하마 머리의 남자도 무릎을 꿇고 있지 않은가.
이전에 마을 사람 전체가 모였을 때 하마 머리의 루크랑족은 없었는데 말이다.
의아함에 그들을 지나치며 면면을 자세히 살피자 얼굴과 태도에서 두려움과 공포가 약간이지만 전해졌다.
두려움과 공포라니. 혹시 유미안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압제하기라도 한 건가.
그렇게 마을의 광장에 도착한 환인은 도무지 마을에 어울리지 않는 심볼에 눈을 가늘게 뜨고 그 흉한 것을 응시했다.
“…….”
=윽. 저건…….=
=…유리 언니, 저 사람들 맞죠?=
=으… 으응…….=
방부 처리에 수분 제거라도 했는지 미이라처럼 쭈글쭈글해진 남녀 21명의 머리가 꼬챙이에 꽂힌 채 마을 광장 중앙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걸 발견한 환인의 여자들 표정이 어두워진다. 환인도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저건 대체 뭐지. 자신이 라비올라를 부추긴 여파인가?
……그건 아니다. 라비올라에게는 자신이 돌아와 벌을 내릴 거라는 식으로 말했다. 자신을 신봉하다시피 하는 그녀가 그걸 무시하고 마을 사람을 처형했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유미안이 한 짓인가? 그렇다고 보기도 어렵다. 유미안을 구출한 직후, 사람이 가장 본성을 드러내기 쉬운 상황에서 본 그녀는 침착하고 사려와 배려가 깊은 모습이었으니까.
제3의 경우, 프라버에서 지원온 자들이 저지른 패악질일 가능성에 추를 올리며 환인은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세피어스를 차가운 목소리로 불렀다.
“세피어스 씨. 저 사람들은 어떻게 된 겁니까.”
=저… 여기 길가에서 드릴 말씀은 아닌지라…….=
“먼저 한 가지만 확인하겠습니다. 유미안 씨나 라비올라 양이 한 일입니까.”
만약 라비올라가 직접 움직여 저런 짓을 저질렀다면 환인은 그녀에게 죄를 물어야 한다.
자신의 지시로 사람을 죽이는 것과 저들이 정신적으로 몰려 극단적인 선택을 해 목숨을 잃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저런 살인 행위를 자신의 이름과 명성을 뒷배 삼아 저지른 셈이 되기에 환인 자신도 그 책임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하면 영혼사의 지위를 악용해 사람을 해친다는 식으로 소문이 퍼질 수 있는 사건.
그런 소문이 따라붙는다면 영혼사라는 입장에서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사피어스는 거기까지 생각은 못하고 그저 환인이 화가 난 것만 느끼곤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아닙니다!=
그러면 문제될 것은 없다. 다만, 라비올라에게 지난 4개월간의 사정을 듣기에 앞서 사피어스에게 먼저 확인을 해야겠다.
대질심문 아닌 대질심문이 필요하다.
“마을 관청으로 가려 했지만 목적지를 바꾸겠습니다. 유미안 씨의 별채로 갑시다.”
=네, 네. 성자님.=
세피어스를 재촉해 라비올라, 유미안의 저택으로 돌아온 환인은 별채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게 정돈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자신들의 마차도 혹시 빛바래거나 먼지가 앉을까 햇살처럼 하얀 천이 덮여 고이 보관되고 있다.
자신들이 돌아올 거라 확신하고 주기적으로 청소해놓은 모양새다.
쿠에~
쿠웃! 쿠우엣!
쿠으으.
별채 쪽으로 들어서자 쿠르티와 쿠핀, 쿠라가 울타리에 붙어 이쪽을 향해 쿠엣 쿠에~ 울면서 안달을 낸다.
어디 갔었던 거냐고, 왜 이제 오냐고, 보고 싶었다고.
=쿠르티, 잘 지냈어?=
쿠에. 쿠우으.
=아이고, 우리 쿠핀이 누나 많이 보고 싶었나 보네.=
쿠엣!
여자친구들이 쿠에들과 잠시 재회를 나누는 사이 비상을 환연과 함께 마구간에 들여보낸 환인은 별채의 거실에서 세피어스와 마주앉았다.
“이제 말씀해주십시오. 우리가 출발한 그날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진 겁니까.”
=그, 성자님과 영혼 기사님들이 마지막으로 미궁을 향해 떠나신 그날 밤에…….=
세피어스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틀간의 이야기는 자신이 예상한 대로였다.
자신과 여자친구들이 떠난 직후 라비올라는 극도로 화가 나서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유르파의 험담을 하고 뒷담화한 인간들에게 주의와 경고를 주었다.
그 과정에 범인으로 추정되는 열일곱 명이 제 발 저린 짓을 저질렀기에 사로잡아 장대에 매달았고, 처벌은 성자님이 돌아온 뒤에 이루어질 거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겁을 주었다.
모두가 어려울 때 뒤에서 남을 험담하고 음해하고 비난하는 사람은 영혼의 축복을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며, 성자님이 그런 사람들을 잡아내서 저주를 내릴 거라고 말이다.
그 결과 첫날밤에 두 집이 겁을 집어먹고 야반도주했고 이튿날에는 아홉 집이 야음을 틈타 도망쳤다.
여기까진 예측했었다.
일반인 입장에서 영혼의 저주를 받아 신의 정원에 들지 못하고 나락에 떨어지는 일은 죽어서도 피하고 싶은 일일 테니까.
거짓말을 어떻게 잡아낸다고?!
그렇게 생각하기에 그들은 정신적 여유도 없었으며 성자님이라면 거짓말도 잡아낼 거라는 맹신적인 믿음이 있었다.
원래 계획은 이즈음 되돌아와 유르파를 험담하고 뒷담한 자들을 사회적으로 말살시키는 거였다.
자신이 만나기 전의 유르파가 어떤 생활을 보냈는지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을 만난 이후의 그녀를 철화 한 푼에 가랑이를 벌리는 창녀라느니, 임자 있는 마을 남자에게 추파를 던지는 화냥년이라느니, 남자 자지에 죽고 못 사는 발닦개보다 더러운 갈보년이라는 음해는 참을 수 없다.
남자가 유르파의 몸매를 보고 더러운 생각을 하고 더러운 말을 던지는 것도 용서할 수 없다.
그렇기에 라비올라를 뒤에서 조종한 건데…….
=문제는 셋째 날에 벌어졌습니다. 프라버에서 도착한 지원 병력 중에 하늘 기사단의 기사단장이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장대에 매달린 마을 사람들의 죄목을 듣더니 대뜸 그들의 목을 쳐버린 겁니다.=
“라비올라 양이 그걸 두고 봤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성자님이 돌아와서 벌을 줄 거라고 제지했는데도 기사단장이라는 여자는 듣지 않고 영혼사님과 영혼 기사님을 모욕한 자들은 한시라도 살려둘 수 없다며 목을 베어버린 겁니다.=
그 말대로라면 기사단장이라는 여자는 남의 직권을 침범한 셈이다.
영혼 기사를 모독했다면 그에 대한 처벌은 영혼사가 내려야 한다. 그런데 파견 나온 일개 기사단장이 멋대로 처단해버렸다.
이유는 대강 짐작 간다. 그 기사단장이라는 자는 자신의 충성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서, 그리고 자신의 뒷배에 호족 영주가 있다는 것을 믿고 그런 짓을 저질렀겠지.
하지만 원론적으로 보자면 기사단을 지휘하는 영주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일이다.
“그 후에는 어떻게 됐습니까.”
=기사단장은 본보기로 삼는다며 머리를 꼬챙이에 꽂아 광장에 널어놓았습니다. 이걸 훼손하는 것은 프라버의 주인이시자 이땅의 지배자이신 영주님을 모욕하는 일이라고 강하게 경고했고요.=
‘역시.’
=그리고 다음날 기사단장은 기사들을 이끌고 산란못 미궁을 향해 출진했습니다. 그날 오후에는 롬디스 일행이 유미안 님과 잡혀갔던 사람들과 함께 마을로 복귀했고 길이 엇갈렸는지 기사단은 다음날 정오에 복귀했습니다.=
기사단장은 롬디스(5급 조인족 전사는 어딜 가나 대우받는다고), 유미안과 하루를 통으로 대화하더니 한 달간 마을 인근을 수색하며 이형종과 괴물의 탐색 및 토벌 퇴치를 실행했고…….
=그동안 성자님이 돌아오지 않으시니까 기사단장은 성자님께서 죽었다고 결론짓고 프라버로 복귀해버렸습니다.=
프라버의 기사단장 쯤 되는 인물이면 지역 사회의 고위층 고족, 혹은 최하급 호족은 될텐데 어째서 경칭을 붙이지 않나 했더니 이 때문이었던가 하고 환인은 생각했다.
“잘 들었습니다. 라비올라 양이나 유미안 씨가 한 일이 아니라고 하니 안심이 되는군요.”
=어…….=
“만약 두 분이 제 이름을 등에 업고 그런 행위를 저질렀다면 저도 뼈를 깎는 고통으로 두 분께 벌을 내렸어야 했을 겁니다. 솔직하게 이야기해주어서 고맙습니다.”
=네, 넵.=
벌이라는 이야기에 침을 꼴딱 삼킨 세피어스는 유미안이 성자님을 찾고 있을 테니 가서 부르겠다고 말한 뒤 환인에게 다시한번 무사히 돌아오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기고 돌아갔다.
옆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안느가 물었다.
=도령. 어떻게 할 거야?=
“프라버는 패스한다. 프라버에 도착한 뒤 잠깐만 머무르고 알류겔 호수 북부의 알소프로 출발하지. 프라버 영주성에는…… 항의 서한을 한 통 쓰는 걸로 끝내고.”
=항의?=
“유르파를 뒤에서 험담한 자들에게는 내가 죄를 묻고 벌을 내리든 용서하든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기사단장이 멋대로 그들을 참살한 것은 명백히 월권행위다.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넘어간다면 훗날 이 일이 알려졌을 때 다른 자들이 우습게 볼 여지가 있다.”
더욱이 통신 수정관리부서의 일에 대해서도 언급을 해야 하니 그때 함께 처리할 생각이다.
=영주 체면이 많이 깎이겠는걸.=
“그걸 염두에 둔 조치다. 거기다 지금 상황에 방문했다간 프라버의 영주성에 붙들려 쉽게 빠져나오지 못할 상황이 벌어질 거다. 구차한 핑계를 대며 붙잡고 이런저런 뇌물과 향응을 먹이려 들 테니까.”
4개월이 흘렀다. 비자룩스에서 벌어졌던 일을 포함해 헬루멘에서의 일도 전부 라드세아의 도시급 영주들 귀에 다 들어갔다고 봐도 될 거다.
헬루멘에서 있었던 귀찮고 성가신 일은 더 사양인 환인이었다.
=주인님. 그럼 도망쳤다는 열한 집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신경쓰지 않는다. 태반이 들판에 쓰러져 죽었을 테니까.”
직업자도 아닌 일반인들, 거기다 전투 훈련도 받지 않은 자들이 10일이 넘는 여정 길을 무사히 보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자신들만 봐도 이동 중 사나흘에 한 번씩 크고 작은 괴물이나 짐승의 습격을 받았다.
쿠에 네 마리에 대형 마차, 거기다 직업자들로만 이루어진 일행인데도 이럴진대 도망친 자들은 오죽할까. 그들이 다른 촌락이나 마을에 무사히 도착하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어찌어찌 하늘이 도와 무사히 도착했다 하더라도 문제를 일으켜 도망친 꼴인 자들을 다른 마을 주민들이 받아들이는 일은 없겠지.
“괜히 촌락이나 마을이 소개비를 주어가며 이주자를 찾는 게 아니다.”
환인의 냉철하고 냉혈한 분석에 여자들은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환인은 그런 여자친구들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유르파. 마침 좋은 기회이니 말하겠습니다.”
=으, 응?=
“당신의 과거가 어떠했든 지금 당신은 제 여자입니다. 뒷담을 듣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무례한 짓거리를 한다면 참지 말고 지팡이로 머리를 깨버리십시오. 그런 일이라면 실수로 죽여도 괜찮습니다. 제가 책임질 테니까요.=
무대포적인 발언에 유르파의 입이 살짝 벌어진다.
“이건 이실리테와 안느 너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혹시라도 성희롱을 당한다거나 여자라고 업신여긴다면 머릴 쪼개버려라.”
대놓고 머릴 두쪽 내버리라는 이야기에 세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푸훗,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냉정하고 살벌한 말 속에 자신들을 배려하는 환인의 마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세피어스가 돌아간 뒤 이실리테와 안느, 유르파는 집안 이곳저곳을 살펴보다가 자신들의 짐이 마차 안에 수납되어있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롬이 신경 써서 챙겨줬나 보네.=
=일단 다 가지고 들어가서 정리 겸 확인해보자.=
=응.=
4개월이나 지났으니 보존 주머니가 아닌 일반 아공간 가방에 든 내용물은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
집안에서 가방을 늘어놓고 내용물을 확인하던 여자들은 몇 가지 물품의 정리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보존식량 쪽은 거의 남아있지 않아. 우리 식재 주머니는 멀쩡한데…… 안느, 거기는 어때?=
=천이랑 모포가 한 장도 없어. 크라빈에서 준비한 소모품은 거의 다 동난 거 같아. 우리 개인 물품은 손 안 댔는지 다 멀쩡해.=
성수포도 마르거나 성수가 휘발될 것을 막기 위해 보존 주머니 안에 넣어두는 덕에 멀쩡하다. 술이야 시간이 흘러도 상관없으니 제외.
=율이 언니는? 언니 짐이 우리 짐 중에 가장 비싸잖아.=
=응. 소재 주머니랑 도구 주머니, 보관 가방 전부 멀쩡해. 손댄 흔적도 없구.=
이실리테와 안느가 아공간 가방을 다시 정리하는 사이 유르파는 산란못 미궁의 중핵에게서 얻은 6급 위상석의 정밀 감정을 실행했다.
그리고 역시나.
=생명력 확장 기능의 6급 위상석이야. 6급 초입이긴 하지만 중핵한테서 채취한 거라 기운도 정갈하고 순도도 높아. 판다면 프리미엄으로 2배 이상이 붙을 수준이야.=
=오, 2배. 그러면 400금화가 넘는다는 거지? 경매장에 올리면 희귀품으로 가격이 더 붙겠네.=
=아니. 팔 생각이라면 경매장은 나쁜 수단이야. 이런 귀물이 올라오면 작당이 들어와서 시가보다 더 싸게 팔릴 수 있어.=
=엥? 그런 일도 있어?=
=사람의 욕심을 얕보면 안 돼.=
대답하며 시야 확대 및 초점 보정의 술법이 새겨진 외눈 안경 마도구를 내려놓은 유르파가 환인에게 말했다.
=팔 생각이면 자기 인맥에 파는 게 좋겠다. 파르히스트의 헨리 후스티오 성주님이나 헬루멘의 시하 사이지 영주님한테 주면 틀림없이 그 이상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에이, 파는 거보다 도령이 써야지.=
=저도 안느의 말에 동감이에요. 주인님이 쓰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자기한테는 이런 것보다 더 급한 게 있잖니? 이 정도면 그리모암의 나머지 유물 중 하나와 교환할 때 교환 재료로 써도 잘 통할 게 틀림없어.=
유르파의 의견을 들은 두 여자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가공하지 않은 생 위상석도 효과를 볼 수 있다.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쓰다가 때가 되면 교환해도 될 일이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지금 쓰고 있는 재생 목걸이처럼 이것도 끼워서 쓸 수 있도록 제작해주십시오.”
=응. 멋지게 만들어줄게!=
그렇게 이야기가 마무리되었을 때, 세피어스의 소식이 전해졌는지 다다닷 빠르게 달리는 소리와 함께 두 여자가 별채 쪽 마당에 들어섰다.
기쁨과 안도, 당황 등의 감정이 한껏 드러나는 닮은꼴 얼굴.
얼핏봐서는 모녀가 아닌 자매처럼 보이는 유미안과 라비올라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