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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기담-356화 (356/813)

〈 356화 〉 350 현대

* * *

정신 상태가 평범한 사람이라면 차원 이동 현상에 휘말렸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공황 상태에 빠지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그것은 신비에 익숙한 니오네브레스인도 마찬가지.

그럼에도 그녀들이 패닉에 빠지지 않은 이유는 어디까지나 환인이라는 심리적 기둥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결론은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뿐이라는 거네.=

휴, 한숨과 함께 중얼거린 안느의 이야기에 환인이 달래듯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시간만 보내는 건 괴롭겠지. 너희가 바란다면 지구에 대해서 좀 더 알려줄까 하는데.”

=네. 부디 부탁드려요.=

=다른 세상의 이야기라니, 기대되네.=

지구는 언젠가 살아갈 장소다. 미리 공부해두어서 나쁠 것은 없다는 마인드가 드러나는 반응.

환인은 그녀들의 긍정적인 태도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가 마트에서 사온 과자 봉지를 여러 개 뜯어 그녀들 앞에 내려놓았다.

“이걸 먹으면서 하지. 성분을 보면 고기가 첨가되지 않은 것 같지만…… 안느 네가 먹어도 괜찮은지 모르겠군.”

=음? 일단 냄새는 괜찮은데.=

양파 모양의 동그란 과자의 냄새를 맡아보던 안느는 한 입 먹더니 눈을 부릅떴다.

=우와, 맛있어! 이거 뭐야? 바삭바삭하고 짭짤한 게… 술을 부르는 맛이야!=

안느의 호평에 이실리테와 유르파도 과자에 손을 뻗는다.

=도령. 술 사온 거 마셔도 될까?=

“그건 니오네브레스로 돌아가면 마시기로 하고.”

환인은 도수가 매우 낮아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와인을 가져와 여자친구들에게 따라주며 2차 교육을 시작했다.

“지구에는 대략 200여 개에 가까운 국가가 존재하는데 보통 1세계, 2세계, 3세계로 나뉜다. 이렇게 나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니오네브레스에서 촌락, 마을, 도시로 나누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내가 지금부터 해줄 이야기는 이 나라, 한국에서 태어날 경우 겪게 되는 일이다.”

지구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그녀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기초 상식일 것이다.

그점에 착안해 환인은 사람이 태어나면 그때부터 나이를 먹어가며 하게 되는 일,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을 차분히 풀어나갔고, 여자들은 마치 그 일을 직접 경험하는 듯한 착각을 느끼며 환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한동안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이야기 속의 아이가 성인이 되어 사회에 진출해 처음으로 수입이 생긴 대목에서 이실리테가 손을 작게 들고 질문했다.

=최저 시급이라는 건 법으로 정해져 있는 건가요?=

“그래. 지키지 않는다면 고용주는 법의 처벌을 받게 된다.”

=최저 시급이 10,830원이면 니오네브레스 돈으로 얼마야?=

“1동화 8철화 정도겠군.”

여자들은 환인이 낮에 은행에서 출금해온 1,000만 원의 돈 무더기를 보며 계산해보았다.

=1시간 최저 시급이 10830이고 하루에 8시간, 일주일에 5일 일하면 433,200원. 한 달은 여기도 4주니까 한 달 1,732,800원이네. 1000만원을 벌려면 대충 반년 동안 한 푼도 안 쓰고 모아야 하는 돈인가…….=

=1인 한 달 생활비가 120만 원 정도라니까 50만 원씩 1년 8개월을 모아야 하는 거 아니야?=

=이슬이 아가씨, 그건 집세 포함이잖니. 우리는 자기 집에서 생활하면 되니까 거기서 50만원 더 해야 해. 그러니까 10개월을 모아야 하는 돈이야.=

=우리는 셋이잖아. 율이 언니랑 이슬이랑 나랑 셋이서 모으면 3개월이면 돼.=

=그건 우리 셋 다 낙오됐을 경우니까…….=

=……아.=

여자친구들의 대화를 조용히 듣던 환인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돈다발 위에 내려놓았다.

“아무튼, 현금은 저 서랍에 넣어둘 테니 혹시나 현대에 남는 사람은 여기서 돈을 빼서 쓰면 된다. 그리고 이 카드, 이 안에 1억가량이 들어있으니 현금을 쓰기 전에 이 카드부터 먼저 쓰도록 하고.”

=1억이나? 우와, 도령 부자였구나.=

“이것 말고 해외 계좌에 더 많은 돈이 있지만 지금 당장은 들여오기 어렵다. 그래도 1억이면 최소 5년은 버틸 수 있는 돈이지. 그리고 여기서 5년이 흐를 경우, 니오네브레스는 152년이나 되는 시간이 흐르게 된다. 1억을 모두 쓰기 전에 되돌아올 테니 걱정 말고 기다리도록 해라.”

=엑, 여기서 하루가 저쪽의 한 달이란 말이니?!=

“예. 저쪽에서 10년 이내에 결판을 낼 수 있을 거라 보고 있으니…… 이곳에서 4개월이 흐르는 정도가 되겠군요.”

10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기들이라면 결코 10년 내에 차원 이동을 할 거라는 비전을 그리지 못한다는 것.

여자들은 잠시 멍하니 환인을 바라보다가 제각기 형태는 다르지만 같은 의미의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괜히 걱정했잖아. 난 또 도령이 돌아올 때까지 막 10년, 20년 기다려야 하는 줄 알았어.=

=나도…….=

=하지만 시간은 상대적일 수도 있는 거잖니. 안느 아가씨는 지금부터라도 자기랑 꼭 붙어 다녀줘.=

=아, 그러네요. 안느가 주인님이랑 같이 있으면 수목화로 주인님이 오래오래 사실 수 있으니까요.=

며칠 전에 수목화가 시작됐다는 소식을 들은 이실리테와 유르파는 그 사실을 떠올리곤 안느를 환인의 옆자리로 밀어놓는다.

=으흐흠! 아무튼!=

이실리테의 힘에 밀려 엉겁결에 환인의 품에 안기게 된 안느는 얼굴이 발개진 채 주제를 돌리기 위해 지폐 다발을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아무튼 1철화가 100원이라면 이 집은 13 금화 정도라는 거지? 엄청 싸네.=

“글쎄. 내가 라드세아를 여행하며 느낀 거지만 환전 비율은 동화까지가 흡사하고 은화 정도에 들어서면 물가의 차이와 상품의 가격 대가 급격히 벌어지는 느낌이었다. 특히 마도구, 마도기에 관해서는 비교가 의미 없을 지경이지.”

=응? 그래?=

“그래. 체감상 10금화가 이쪽의 5천만에서 1억 정도로 느껴졌다.”

=흐응…… 그보다 마냥 돈을 까먹으면서 지내는 건 안 내키는데. 도령,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여긴 괴물 같은 게 없다고 했으니 관련된 일도 없을 것이고…… 힘을 쓰는 직업은 없어?=

잠시 그녀들의 성격과 능력에 맞는 직업에 대해 생각해보던 환인은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사화의 쓴맛을 먼저 알려줘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솔직히 여자친구들의 얼굴이면 어딜 가도 굶지는 않을 거다. 아니, 얼굴만으로 수십억을 버는 것도 어렵지 않을 테지.

하지만 지구인종의 악의는 그녀들 처지에서 상상을 초월할 수준이다.

잔뜩 경계해도 시원찮을 마당에 그녀들의 기를 세워주었다간 인터넷으로 단련된 사람의 악의에 신세가 나락으로 처박히는 것은 시간문제일 터.

“싸움 쪽으로 하는 말이라면 있다.”

=있으면 그거 하면 되겠네!=

반색하는 안느에게 환인은 이래도 하고 싶으냐는 뉘앙스로 입을 열었다.

“한국에는 없지만 외국에는 PMC가 다수 존재한다.”

=피엠씨가 뭔데?=

단어의 약자는 통역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건가.

“한마디로 말해 전쟁 용병이다.”

=……그건 좀.=

사람을 죽이고 돈을 버는 일이라는 이야기에 안느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진다. 이실리테는 별다른 표정 변화는 없지만 용병이라는 말에 내키지 않는 기색이 묻어나고 있었다.

과거 기억이 그녀에게 다가온 거겠지.

“중요인물 경호 같은 직업이 있지만 이쪽도 그에 걸맞은 격식과 지식이 필요하고 인맥과 평가도 필요하다. 그마저도 너희 신체 능력이라면 대번에 이상함을 눈치채겠지. 말썽으로 이어질 게 틀림없다.”

소동이 빚어진다면 지구에는 없는 신체 능력으로 정부, 국가가 너희를 사로잡아 시험용 쥐처럼 사용할지 모른다고 이야기해주니 여자들의 표정이 안 좋아진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일이야 하고자 하면 뭐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이 얼마나 자신에게 맞느냐, 그리고 수입이 얼마나 되느냐가 아닐까. 그리고 현재 상태라면 너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 그 정도야? 지금은 우리가 지식도 없고 여기 언어로 말도 못하지만, 지식을 쌓고 말을 배우면 적어도 사회 중산층 이상은 될 거라고 봤는데…….=

“지식도 경험이 받쳐주어야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어중간한 지식과 경험으로 나서다간 인생의 쓴맛을 보기 십상이다. 니오네브레스에도 사기꾼은 있지 않나.”

=어…….=

“비단 사기꾼뿐만이 아니다. 지식이 얕은 사회 초년생은 어디를 가나 호구취급 받기 마련이지. 그리고 사람의 악의는…… 자랑은 아니지만 지구인종이 니오네브레스인보다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

채찍이 연이어 쏟아지니 그녀들의 표정이 시무룩해진다. 하지만 우울해하거나 기분 나빠하거나 슬퍼하지는 않았다.

셋 중 가장 머리가 나쁜 편인 이실리테도 지식이 조금 모자랄 뿐, 지혜는 남들 못지않다. 그런 그녀들이었기에 환인이 무엇을 전하려 하는지 금방 이해한 것.

충분히 채찍질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환인은 당근을 들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너희들의 능력에 지식과 경험이 받쳐주면 누구도 너희들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그만큼 너희가 가진 능력과 자질은 대단한 거니 말이다.”

=그, 그런가~?=

“지구에는 괴물이 없다. 이형종도 존재하지 않지. 그 때문에 너희들이 가진 능력과 기술을 십분 발휘하기 어렵겠지만, 싸움과 관련된 능력을 제외하더라도 너희들이 가진 것은 적지 않아.”

안느의 친화력과 외모라면 인터넷 방송 쪽으로 쉽게 두각을 드러낼 것이다. 아니, 외모만으로도 상위 1%는 가볍게 씹어먹겠지.

그리고 상위 3퍼센트의 수익이 나머지 97퍼센트의 수익을 능가한다는 것은 이미 하나의 법칙으로 정착된 상황.

이실리테에게도 싸움 외에 다른 능력이 있다.

바로 요리.

한 번이지만 여행 중 만난 호족 가문의 노파마저도 감탄시킨 요리 실력이다. 지구 요리의 현지화를 거친다면 그녀의 외모까지 더해져 사회 최상류층이 방문하는 초일류 레스토랑도 성공시킬 수 있지 않을까.

유르파는 애초에 전투 쪽이 아니라 제작에 특화된 능력이다. 더욱이 마도구는 지구에서도 쓸 수 있다는 점에 착안, 미력한 체력 회복 정도의 마도구를 숨겨진 효과처럼 판매할 경우 이실리테나 안느보다 더 큰 거금을 만질 수 있겠지.

“……그러니 지식과 경험만 충분하고 확실한 신분만 있다면 걱정할 일은 없을 거라고 본다.”

무식한 힘과 싸움 외에도 자신들에게 다른 장점이 있음을 알아봐 주는 남자친구의 이야기에 여자들은 얼굴을 발그레하게 물들이고 부끄러워했다.

그만큼 자신들을 유심히 살펴봤다는 뜻이 되니까.

=그, 근데 도령. 인터넷 방송은 뭐야?=

“일종의 연극배우라고 생각하면 된다. 입담과 재치, 친화력과 외모가 필요한 직종이지.”

=오…….=

여자들은 이야기를 들으며 생긴 궁금증을 환인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레스토랑은 어떤 곳이며 무엇을 하는 건지, 인터넷 방송을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명품 수공예 공방이 되려면 조건이 어떻게 되는지 등등.

지구에 적응하고자 하는 그녀들의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에 환인도 최대한 그녀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도와주며 그녀들의 모습을 살폈다.

‘아우라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다행이군.’

만약 니오네브레스에서처럼 아우라가 겉으로 드러났다면 지구에서의 삶은 불가능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이게 인터넷 방송이다.”

태블릿을 조작해 인방 쪽으로 유명한 여성 스트리머를 보여주자 여자들이 관심을 두고 화면을 들여다본다.

신기한 것을 발견한 고양이들처럼 옹기종기 모여 태블릿을 들여다보는 여자친구들의 모습에 환인은 생각했다.

일단 지구로 돌아온다는 대승적인 관점에서의 목표는 이루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할까.

‘모두가 보다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의 구축이겠지.’

그녀들이 지구에서 적응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그녀들에게 걸맞는 직업과 환경을 꾸며주는 것.

여자친구들의 매니저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환인의 머릿속에 훗날의 계획이 싹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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