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354화 (354/813)

〈 354화 〉 348 현대

* * *

짹짹, 째륵­

“…….”

새 소리에 눈을 뜬 환인은 방 안이 푸르게 물들어있는 것을 보고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창문에 드리워진 커튼으로 한차례 걸러진 부드러운 빛무리. 옆에서 자던 안느도 없고 커튼을 젖히자 한겨울의 강한 햇살이 무자비하게 쏟아진다.

침대 옆 탁자의 자명종을 들어보자 시침이 11시를 가리키고 있다.

환인은 흘러나오려는 한숨을 억눌렀다. 아무리 어제 밤늦게까지 생각을 정리하다 잠들었다고 이 시간까지 늦잠을 자다니.

달칵.

문을 열고 나가자 거실의 탁자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는 여자친구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베란다 섀시 너머로 정원에 드러누워 일광욕 중인 비상과 그런 비상의 가슴깃털 위에 누워있는 환연.

=아, 주인님. 일어나셨어요?=

=자기, 잘 잤니?=

=도령이 이 시간까지 자는 건 처음 봤어.=

여자친구들의 인사에 환인은 잠시 그녀들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다가 사과했다.

“미안하다. 늦잠 자고 아침 훈련까지 빠졌군.”

=어? 아냐아냐. 도령이 엄청 고생하는 건 우리도 잘 알고 있으니까.=

=1년도 넘게 타지에서 지내다가 집으로 돌아온 거니까 긴장이 조금 풀어져서 그랬던 걸 거야. 그동안 쌓인 피로도 있었을거구.=

=유리 언니 말이 맞아요. 저희가 깨워드릴 수도 있었는데 주인님은 조금 더 주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일부러 안 깨워드렸어요. 요즘 술의 힘을 빌려서 피로를 푸시는 걸 봐서 걱정되기도 했구요.=

그것도 알고 있었나……. 고개를 작게 저은 환인은 세면실에서 얼굴을 씻고 나와 물었다.

“집에 식재료가 하나도 없었을 텐데 아침은 어떻게 했지.”

=찬장에 말린 면 같은 게 있어서 그걸로 간단히 해먹었어요.=

국수 면을 말하는 건가.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여자친구들과 함께 외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현재 집에는 먹을게 없다. 집을 최소 몇 년은 비울 생각이었기에 상할 수 있는 것들은 전부 정리했기 때문.

당장은 니오네브레스로 돌아갈 것 같지 않으니 그사이 먹을 것도 사고…….

‘지구가 어떤 곳인지 그녀들에게 교육도 해야겠지.’

결정을 내린 환인은 니오네브레스에서 입던 가벼운 복장의 여자친구들을 잠시 살핀 뒤 직접 몇 가지 코디를 지정해주었다.

“지금부터 잠시 외출하지. 안느는 전에 입었던 라운드넥 티셔츠에 반바지와 내 외투를 입어라. 이실리테와 유르파는 제 어머니의 옷을 입으면 괜찮겠군요.”

어제는 어쩔 수 없이 저쪽 세계의 옷을 입었다지만, 대낮에 외출하면서 그 옷을 또 입는다면 여러 가지 의미로 시선을 받을 것이다.

=오, 도령 옷이당.=

=이 천은 무슨 재질일까? 얇아도 너무 얇네.=

=조, 조금만 힘을 줘도 찢어질 거 같아요…….=

환인이 가지고 나온 옷들로 갈아입은 여자친구들은 자신이 봐도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였다.

저쪽에서의 옷차림이 후지거나 낡았다는 게 아니라, 환인이 지구인이다 보니 발생하는 취향의 차이였지만 아무튼.

꾸우!

환연을 가슴 포켓 주머니에 넣고 여자친구들과 집을 나서려던 환인은 비상이 허리띠를 물고 놔주지 않아 조금 곤란한 얼굴로 비상을 바라보았다.

“비상. 지구에는 너와 비슷하게 생긴 동물은 없다. 네 모습이 알려지면 큰 소란이 생긴다. 낮에 함께 나가는 것은 곤란해.”

꾸으…….

“내 예상일 뿐이지만 지구에 여기에 오래 있을 것 같진 않으니 그동안은 이해해다오.”

…쿠웃.

어쩔 수 없지, 하고 환인의 허리띠를 놓아준 비상은 휴면기에 들어간 누런 잔디밭에 주저앉아 삐진 듯이 흥, 콧김을 내뿜는다.

자신의 집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좌우로 집이 들어서 있는 곳의 가장 안쪽에 있는 데다 뒤쪽으로는 산과 작은 숲이 둘러싸고 있다.

담장도 높아 어지간해서는 보일 일이 없으니 정원에서만이라면 지내도 괜찮을 것이다.

비상 혼자 남아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린 것일까. 환연은 환인의 가슴 포켓에서 나와 비상의 머리 위로 자리를 옮겼다.

「난 그냥 비상이랑 있을게. 넷이서 다녀와.」

“그래.”

환연이 남아준다면 안심할 수 있지.

둘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환인은 주차되어있는 자가용에 여자친구들을 태우고 집을 나섰다.

=우와, 이슬아 저기 봐. 온통 유리창이야!=

=굉장해……. 거기다 엄청 높고…….=

=대체 어떤 소재로 어떻게 지은 거지? 이어붙이거나 돌을 쌓아서 만든 것도 아닌데…….=

환인의 여자들은 20층 이상 건물이 즐비하고 거기에 유리가 잔뜩 사용된 것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젯밤에는 어두워서 잘 몰랐는데 낮에 보니 정말 어마어마하다.

강철로 된 상자가 쿠에만큼이나 빠르게 움직이는 것도,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지하로 내려가고 올라오는 것도, 고개를 한참 젖혀야 보이는 높고 거대한 건물들도, 땅에 뭘 깔아놓았는지 흙이 안 보이는 것도.

그녀들의 눈에는 보이는 모든 게 신기하고 이해 못할 것들 투성이었던 것.

두두두두두두­

그때 머리 위로 소방 헬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가자 유르파가 화들짝 놀란다.

=자기! 저, 저건 뭐니? 괴물?=

“이 자동차처럼 사람을 태우고 날아다니는 탈것입니다.”

=…….=

=…….=

멍한 표정으로 저 멀리 사라져가는 빨간 헬기를 쳐다보는 모습이 귀엽다.

환인은 1년하고도 2개월 만의 운전이라 실수 하지 않을까 우려 했지만, 우려가 무색하게 운전대를 잡으니 몸이 기억하고 있던 운전 실력이 나와 대형 할인 유통점이 입점해있는 빌딩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은행부터 먼저 가지.”

=여기도 은행이 있나 봐?=

“의외로 지구와 니오네브레스에 흡사한 점이 많다. 너희도 지내다 보면 놀랄 테지.”

대리석과 타일로 깔끔하게 마감된 빌딩 내부로 들어오자 내부를 환히 밝히는 조명과 여기도 가득 사용된 유리,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경험한 안느가 놀란 눈으로 중얼거린다.

=그 전기라는 걸로 문명이 이렇게나 발전하는 거야?=

“200년 전, 전기과학이 급격한 발전을 이루기 전에는 가장 발달된 도시가 헬루멘과 비슷한 문명 상태였다. 평균을 내본다면 오히려 니오네브레스보다 뒤떨어졌겠지. 지구에는 술법과 위상력의 존재가 없으니까. 그러나 전기과학이 발전하고 거기서 전기공학의 진보가 이루어지며 100년간 문명은 말도 못할 만큼의 진화를 이루었다.”

=으응. 그렇게만 들으면 잘 체감이 안되는걸.=

유르파의 감상에 환인이 유리로 이루어진 엘리베이터 바깥 풍경으로 시선을 주며 대답했다.

“그럼 이렇게 말해볼까요. 100년 전에는 전 세계 인구가 약 16억 명이었습니다. 그리고 2023년 현재는 몇 명인지 짐작이 됩니까.”

16억이라는 숫자에 헉, 놀랐던 여자들은 놀람을 잠깐 미뤄두고 생각하다가 말했다.

=20억?=

=오히려 줄었을 수도 있지. 난 10억일 거 같아. 이슬이는 어떻게 생각해?=

=……50억이 넘지 않을까? 먹을 것만 있으면 사람은 금방 늘어나니까.=

=에이. 그래도 50억은 너무 나갔다. 메리아놀 전체 인구가 2천만 명이 조금 안 된다고 들었는데. 50억이라니.=

안느의 이야기에 유르파도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지식이 얕은 이실리테는 그녀들의 이야기에 그런가? 하고 웃어넘긴다.

“이실리테가 그나마 정답에 가깝군. 작년 전체 인구는 약 77억이었다.”

유르파와 안느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100년 동안 전체 인구가 5배나 늘어났다는 거야?

할 말을 잃은 여자들은 투명한 엘리베이터의 벽 너머로 독특한 차림의 수많은 차림이 길을 오가는 걸 내려다보았다.

정말, 정말로 여긴 전혀 다른 세상이구나.

여자친구들에게 통역 현상을 상기시키며 다시금 말 하면 안된다는 사실을 주의시킨 뒤 주거래 은행을 방문한 환인은 국내에 남겨놓았던 예금 중 1000만 원을 현금으로 출금했다.

혹시 그녀들 중 누군가가 현대에 낙오 당하게 되면 쓸 자금 목적이다.

마음 같아서는 은행에 들어있는 돈 대부분을 인출하고 싶지만, 고액현금거래 보고제도 때문에 1일 1000만 원 이상 인출하면 정부 기관의 관심을 살 수 있다.

증여 혐의나 탈세 및 자금 세탁 같은 범죄에 연루되어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여 세무조사 같은 것이 나올 수 있는 것.

현금 입출금기에서 현금을 인출한 환인은 사람이 안 보는 데서 아공간 주머니에 현금다발을 집어넣은 뒤 지하의 대형 할인 유통점을 방문했다.

지상층에서는 사람들이 얼마 없어 시선이 몰리지 않았지만, 주말이어서인지 사람이 평소보다 더 많았고 당연히 시선도 더 많이 몰렸다.

아니, 시선이 몰리는 수준이 아니라 연예인의 뒤를 따르는 일반인들처럼 환인의 뒤로 인파가 모여들기 시작한다.

“세상에, 저 여자들 좀 봐. 머리 개작아!”

“엄청 예쁘다……. 어디서 촬영 나왔나?”

“촬영 카메라가 없잖아. 근데 진짜 무지무지 이쁘당……. 사람이 아니라 인형 같아.”

“남자도 잘생겼는데 여자들이 너무 우월하니까 상대적으로 밀리는 느낌이네. 얼굴이 조금 아쉬운 느낌?”

“넌 거울도 안 보냐? 니 얼굴부터 보고 얼평해라.”

“내 얼굴이 어때서 새꺄!”

주위에서 자신들을 보며 숙덕거리지만 여자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경험은 니오네브레스에서도 수 차례 겪었던 것들.

그런 것보다 이곳을 구경하는 게 먼저다.

환인은 진열대에 비치된 물건에 눈을 떼지 못하는 여자친구들을 보며 그녀들에게 카트를 하나씩 붙여준 뒤에 말했다.

“사고 싶은 게 있다면 여기에 담으면 된다. 계산은 나갈 때 하는 법을 알려주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 여자들은 호기심을 드러내며 이것저것 살펴보고 카트에 담으며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찰칵, 찰칵.

그렇게 여자친구들이 보내놓은 환인은 일부가 폰을 들어 여자친구들을 찍어대는 모습에 가까이 다가가 제지했다.

“초상권 침해하지 마시고 사진 지우시죠.”

“당신이 뭔데…… 네넵, 당, 당연히 지워야죠. 죄송합니닷!”

반항하려던 사람은 환인의 살기에 그대로 노출되어 늑대를 본 토끼들마냥 후다닥 흩어졌고, 환인은 약간 못마땅한 기분에 그냥 일정한 살기를 지속해서 흘렸다.

사람이 살기에 노출되면 반응은 주로 두 가지로 나뉜다.

영문도 모른 채 두려움에 떨며 그 자리를 벗어나는 유형, 그리고 살기의 근원을 역추적하는 유형.

후자의 경우에는 동종업계 종사자들에게서나 나오는 반응이다.

마트에 장을 보러 오거나 쇼핑하러 온 사람들은 영문 모를 컨디션 난조를 호소하며 쇼핑을 관두고 마트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환인이 살기를 뿌린지 10분이 지나자 사람들로 북적이던 마트 내부는 한산하다고 할 만큼 사람이 줄어들었고, 환인은 그제야 곤두선 신경을 누그러트리며 여자친구들과 마트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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