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3화 〉 347 현대
* * *
환인의 집은 욕실/화장실의 분리형이었고 안방에도 샤워가 가능했기에 안방은 유르파가, 욕조가 설치된 욕실은 이실리테와 안느가 들어갔다.
욕실 내 전등의 불빛보다 하얀 피부의 이실리테가 수도꼭지와 벨브, 샤워기를 한 번씩 작동해보곤 그 압도적인 편리함에 감탄했다.
=이렇게 돌리기만 하면 뜨거운 물이랑 차가운 물이 저절로 조절되다니, 너무 편해.=
=응. 이 정도 되는 설비는 주도의 특급 호텔에나 가야 있는데 지구에는 이게 보편적인 거래서 진짜 놀라워.=
=주도에도 이런 시설이 있어?=
먼저 씻고 욕조에 들어가 있던 이실리테가 호기심에 묻자 샴푸와 바디 워시의 냄새를 맡던 안느는 두말할 것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긴 전부 마도구라서 숙박비도 그렇고 굉장히 비싸. 그런데 여기는 물세랑 그 전기세? 라는거 조금만 내면 된다니……. 문명은 이쪽이 훨씬 발달한 거 같네. 그, 쿠에 없이 그런 속도로 달리는 철마차라던가.=
타고 왔던 그 신기한 마차를 떠올리던 안느는 다시 꽃향기 비슷한 액체에 시선을 돌렸다.
이걸 스펀지볼에 뭍히고 몇 번 쥐면 된다고 했지?
뭔가 기분 좋은 말랑함이 손아귀에서 몇 차례 발생하자 좋은 냄새와 함께 점점 거품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이건 뭘로 만든 걸까? 거품이 잔뜩 난 스펀지볼로 가슴을 문지르던 안느는 주륵 흘러내린 거품이 사타구니 골짜기로 흘러 들어갔음에도 따끔거리지 않는다는 것에 놀랐다.
=와, 돌아갈 때 이거 가져가고 싶어.=
=그렇게 좋아?=
이실리테의 웃음 섞인 물음에 안느는 스펀지 볼로 아래를 깨끗이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율이 언니가 만들어준 세정제는 여기 사타구니에 닿으면 좀 따끔거렸거든? 지금은 하나도 안 그래.=
허벅지를 벌려 자신에게 속살을 드러내는 안느의 행동에 이실리테가 작게 눈을 흘겼다. 쟤는 진짜…… 말만 하면 되지 그걸 꼭 보여줘야 하나?
=넌 피부가 약한 편이니까 그렇겠네. 유리 언니한테 좀 순한걸로 만들어달라고 해봐.=
=물어봤는데 그 이상 순하게 만들기는 어렵다더라.=
슥삭슥삭, 콧노래를 부르며 온몸을 거품투성이로 만들어가는 안느. 이실리테는 욕조 난간에 턱을 괴고 그 모습을 가만히 구경했다.
그러다 3평 남짓한 욕실을 둘러본다.
차갑고 매끌거리고…… 손을 뻗어 맨들맨들해 보이는 타일 벽을 만져본 이실리테는 이게 무슨 재질일까 궁금해졌다.
천장의 발광 마도구도 눈이 부시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운 빛이고…….
촤아악!
받아둔 물을 머리부터 뒤집어써 단숨에 거품을 씻어낸 안느는 이실리테를 욕조 가운데로 밀어내고 들어가서 그녀를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아 뭐야.=
=왜~ 좀만 이렇게 있장.=
등에 닿는 가슴의 몽글몽글한 감촉과 자신의 허리, 배를 더듬는 가느다란 손가락에 부르르 몸을 떤 이실리테가 몸을 일으킨다.
=아흣, 진짜. 난 나갈 테니까 혼자 해.=
=에이, 그러지 말고. 금방 들어왔잖아~ 좀만 더. 응? 조금만 더 있다가 나가자~.=
=넌 붙으면 가슴이랑 막 만지잖아!=
=이렇게 멋진 가슴이 앞에 있는데 어떻게 안만질 수 있어?!=
너무나도 당당한 태도에 잠시 말문이 막힌 이실리테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해맑은 표정의 안느에게 물었다.
=안느 너 동성애 성향 있는 거 아니지?=
=응? 음…… 다른 사람은 싫은데 이슬이 너랑 율이 언니라면 괜찮을지도.=
=그게 뭐야.=
찰싹, 가슴에 올라오는 안느의 손등을 때린 이실리테는 작게 한숨을 쉬며 자신보다 머리가 하나는 더 큰 안느의 가슴에 등을 기댔다.
주인님의 듬직하고 단단한 팔에 안기는 것과는 또 다른 이상한 느낌.
뒤에서 들려오는 안느의 콧노래 소리, 콧노래일 뿐인데도 아름다운 음율이 느껴지는 것을 잠시 듣던 이실리테가 안느의 예쁜 손가락을 만지면서 말했다.
=안느 넌 기분이 어때?=
=무슨 기분? 도령네 나라에 처음 온 소감 같은 거?=
=응. 난 조금 걱정 돼. 주인님 말씀을 들어보면 되게 복잡한 세상 같은데 나중에 여기서 살게 되면…… 잘 적응 할 수 있을까?=
=별로 복잡할 건 없던데? 아까 타고 온 철마차도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말이랑 쿠에가 자그맣게 변해서 그 안에 들어가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전기는 위상력이라고 생각하고 인터넷은 멀리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도서관 같은 거고.=
안느가 말하는 대로 치환해서 대입해보던 이실리테는 ‘어?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온갖 게 처음이라서 긴장되는 거 뿐이야. 살다 보면 익숙해질 테고 익숙해지면 다 거기서 거길 테니까 벌써부터 걱정하지 마. 뭣하면 도령이 도와줄 거잖아?=
=……그건 그래.=
어딜 가더라도 침착을 잃지 않는 주인님의 모습을 떠올린 이실리테는 작게 미소 지었다가 젖꼭지에서부터 시작된 소름에 안느의 못된 손을 콱 물었다.
[쏴아아—— 첨벙, 철벅, 촤악]
환인은 집안의 난방 장치를 가동시킨 뒤 여자친구들의 목욕 소리와 샤워 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찻물을 올리면서 신분증명서 발급 브로커에 대해 생각했다.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은 결코 접할 일 없는 세계지만, 친인척이라는 이름의 아귀들을 물리치기 위해 다소 불법적인 일에 손을 댄 결과 알게 되었다.
그때 혹시 필요할지 몰라 일단 모아놓긴 했는데…….
“…….”
환인은 약간 고민에 빠졌다.
불법적인 쪽으로 손을 쓰면 피드백은 즉각적이다. 여자친구들은 정규 비자를 발급받아 입국한 외국인처럼 한국에서 살 수 있겠지. 한글을 배우고 시험을 쳐서 귀화도 가능할 거다.
하지만 여자친구들의 외모가 워낙 뛰어나다 보니 이쪽의 수단을 쓰면 백 퍼센트 트러블이 생길 거라고 확신하는 환인이었다.
여자친구들의 외모에 혹한 사람들이 신상을 턴다던가, 아니면 브로커 쪽이 나쁜 생각을 품고 접근한다던가.
합법적인 쪽으로 진행할 경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불법체류 외국인 신분으로 진행해야 하니 절차에 따라 어쩌면 국외추방을 당할 수도 있는 일.
추방 쪽은 문제없다. 자신이 그녀들을 따라가면 되니까. 하지만 될 수 있으면 한국에서 그녀들의 기초 지식 정도는 쌓은 뒤에 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치나 경제 쪽은 어떻든 총기 거래가 불법인 나라이기에 안전만큼은 확실한 편이니까.
보글보글
찻주전자 속에서 끓어오르는 물을 바라보던 환인의 손이 주머니에 들어갔다 나온다.
잘그락, 그의 손에 몇 개의 금화가 올려졌다.
‘순도가 어떤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금화를 처분해서 뇌물을 먹이는 쪽도 생각해봐야겠군.’
지금까지 벌어둔 돈이 있지만 그걸로는 조금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해당 기관의 기관장과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는 것도 돈이 필요하고.
부모님의 사망 보험금은…… 이럴 때 쓰라는 거겠지. 부모님도 미래의 며느리들을 위해 쓰는 거라면 아까워하지 않으실 것이다.
불을 조절한 뒤 거실로 돌아와 소파에 몸을 파묻는다.
다른 방식을 생각한다면, 마도기 제작에 관해서는 매우 뛰어난 유르파이니 매혹이나 현혹 마도기를 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
그걸 이용해 관련 기관장을 회유해 다소의 혜택을 받아낼 수도 있다. 아니면 아예 불법 브로커를 통해 신분증을 받아낸 뒤 후환이 없도록 조직을 쓸어버려도 되는 일이고.
초자연적인 힘을 얻은 이상 불법과 위법을 신경 쓰지 않으면 쓸 수단은 무궁무진하다.
그때 가슴 포켓 쪽에서 꾸물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속에 든 것을 꺼내자 손바닥 위에 앉은 환연이 철푸닥, 에로틱한 자세로 넘어지더니 눈을 감은 채로 웅얼거린다.
「여긴…… 으디야…?」
“내가 나고 자란 집이다. 몸은 괜찮나.”
「으웅… 어, 엄청나게 막대한 에너지 때문에 졸도한 거… 같지만, 괜차나…….」
꾸으.
“…….”
옆에서 괜찮냐고 묻는 비상의 머리 위에 환연을 올려준 환인은 주방에서 적당한 사기그릇과 쟁반을 챙기고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과 찬물을 따로 받아 거실로 가지고 나왔다.
공기가 찬 거실에서 목욕은 감기에 걸리기 좋은 짓이다. 그러나 입욕제를 뿌리고 물 온도를 유지만 할 수 있다면 온천이나 다름없는 환경이 된다.
적당히 물 온도를 맞춘 환인은 가루형 입욕제를 넣고 저어서 풀어준다.
작게 거품이 일면서 투명한 물이 옅은 장미색으로 물들어간다. 100% 합성화학물은 아니고 천연과 인공을 적당히 섞은 것으로 순해서 아기 피부에도 잘 맞는다는 제품이며, 어머니께서 종종 쓰시던 거다.
욕실에 들어갈 때 깜빡 잊고 자신을 불러 미안한 얼굴로 입욕제를 부탁하시던 어머니를 생각하던 환인은 비상의 머리 위에 죽은 듯이 엎드려있는 환연을 불렀다.
“뜨거운 물에 목욕하고 나면 좀 나을 거다. 옷 벗고 들어가라.”
「힘이 엄써…… 벗겨줘…….」
“…….”
미묘한 감정에 환인은 말없이 유르파가 손수 만들어준 치파오 커스텀 원피스 비슷한 옷을 벗겼다.
속옷까지는 만들 수 없어 옷을 벗기자마자 곧장 드러나는 환연의 알몸.
전에 보았던 요정은 초등학생 같은 신체 비율이었는데 환연은 이실리테와 안느의 중간 정도 되는 성인 여성의 몸매 그 자체다.
이실리테의 볼륨이 남자의 꿈과 희망과 낭만을 집약시킨 파라다이스고 안느의 몸매가 슬렌더의 끝판왕이라면 환연은 그 중간, 남자 열 명 여자 열 명을 모아놓고 물으면 스무 명 전원 호?를 부르짖을 몸매.
이것도 자신의 피의 영향인 걸까.
사기그릇의 가장자리에 벌거벗은 환연을 조심스레 앉혀주자 발 끝으로 물 온도를 확인하더니 스륵 미끄러지다시피 어깨까지 물 속으로 잠겨 든다.
「흐아…….」
작은 신음과 함께 장미색 물속에서 둥실 떠오르는 환연의 알몸.
적당히 보기 좋게 퍼진 젖가슴과 근육 및 군살 하나 없는 매끈한 복근과 허리, 그리고 약간 육덕진 느낌의 허벅지 사이 소담스레 난 음모와 도끼 자국.
작은 몸이라지만 있어야 할 건 다 있는 그 모습에 환인은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말 그대로 미묘한 불편함. 꼴 보기 싫다거나 짜증 난다는 감정에서 오는 불편함이 아니라 뭔가 해선 안될 것을 하는 데서 오는 불편함이다.
“물이 식거나 뜨거우면 말해라. 조절해줄 테니.”
「응… 지금은 딱 좋아……. 그런데 이 물 뭐야? 미끌거리고 좋은 향기가 나….」
“입욕제다. 피부가 저리다던가 아프지는 않나.”
「괜차나아…….」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익사자처럼 둥둥 떠 있는 환연을 조금 더 살피다가 태블릿을 가져와 켰다.
집의 전자기기, 특히 바깥의 CCTV와 연동되어있는 태블릿으로 14일간 있었던 일, 특히 자신이 터트린 폭탄이 이전 직장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비리를 폭로하기 위한 메일은 제대로 전달 되었는지, 폭탄은 제대로 폭발했는지, 자신을 사회적으로 매장하려던 강하연의 집안은 어떻게 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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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한 만큼만 터졌군.’
환인이 의도한 것은 삼안 물산 내 부장 간의 다툼, 삼안 물산 임원의 횡령, 삼안 물산 사장단의 비리 세 가지.
자신이 딱 예상한 수준만큼의 논란이 일어난 것을 보면 삼안 물산이 완전히 망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기 자신의 정보수집력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자신이 더 잘 안다. 만약 제대로 휩쓸렸다면 자신이 알아내지 못한 비리와 논란이 겉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을 텐데 그 정도에 그쳤다는 것은…….
‘적당히 논란을 일으킨 뒤 뜯어먹겠다는 거겠지.’
너덜너덜해진 고기는 누구도 원하지 않을 테니까.
쿠우.
태블릿을 신기해하는 비상을 향해 화면을 기울여주며 좀 더 기사를 살펴보지만, 이런 비리 촉발이 누군가의 의도로 인해서라는 것은 음모론 사이트에서도 다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신분을 감추고 활동한 게 제대로 먹힌 모양새다.
[아얏! 무, 물지 마!]
[꺅! 미안해! 미안……!]
첨벙첨벙, 촤아악
안느의 비명이 욕실 쪽에서 흘러나온다. 또 이실리테의 가슴을 주무르기라도 한 건가.
「환인. 물이 조금 식은 거 같아….」
그녀가 들어가 있는 사기그릇에 뜨거운 물을 조금 더 부어 물의 온도를 올려준 환인은 강 부장의 이름과 강하연의 이름을 키워드로 연관 검색을 해봤지만 기사는 없었다.
“…….”
강하연 그 여자의 성격이면 억측으로라도 자신을 범인이라고 몰아갈 것 같았는데.
턱을 매만지던 환인은 집 담장과 구석, 보이지 않는 곳에 설치한 CCTV 카메라의 대용량 스토리지에 접속해 지난 14일간 기록된 동적 영상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동작이 감지되면 영상을 녹화해주는, 환인이 외국의 업체에서 주문해 직접 설치한 감시 시스템.
‘2번, 4번, 5번은 기록된 게 없고…….’
3번, 6번 카메라에 기록된 것은 참새와 고양이가 움직이는 것 뿐.
집 앞 거리를 비추는 1번 카메라를 켠 뒤 64배속으로 빠르게 돌렸다. 고사양 기능 덕에 64배속이지만 화면이 끊기지 않고 스무스하게 이어진다.
한 달이라는 시간만 저장되는 만큼 14일이면 전부 기록되어있을 터.
자신이 사라진 그날부터 영상을 돌려보던 환인은 중간중간 사람이 보일 때마다 1배속으로 줄였다가 64배속으로 늘리길 반복하며 거동이 수상한 사람의 접근을 확인한다.
그때 반신욕으로 정신이 들었는지 환연이 한결 또렷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환인. 여긴 어디야?」
“지구다.”
「……니오네브레스가 아니야?」
“그래. 심핵을 부수면서 이쪽으로 날려진 거 같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글쎄. 전조라고 한다면…….”
한 가지 짐작이 가는게 있긴 하지만, 저쪽 세계 기준으로 생각해보아도 허무맹랑한 이야기인지라.
심핵이 자신을 부순 대상의 가장 강한 바람을 들어준다는 거,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비웃기 좋은 이야기지 않은가.
환인이 대답하지 않자 흐응, 콧소리로 흘려넘긴 환연은 그가 손에 들고 있는 판 같은 것에 시선을 주며 물었다.
「지금은 뭐 보고 있어?」
“집을 비운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고 있다.”
「나도 볼래. 보고 싶어. 보여줘.」
수영장처럼 그릇 가장자리에 매달려 올려다보는 환연. 지금 자기 모습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고는 있는 건가.
……알고 있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고 봐야겠지. 환인은 태블릿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와 이거 뭐야. 판에 그림이 막 움직이잖아?」
흥미롭게 구경하는 것도 잠시, 집 앞 도로만 비추니 금세 흥미를 잃었는지 어깨까지 몸을 담근 환연은 자기 팔이며 다리, 가슴을 만지작거리다가 신기하다는 듯이 물었다.
「이건 무슨 물이야? 막 미끄럽고 맨들맨들하고…… 향기도 장미꽃 향기랑 비슷한 거 같은데.」
“입욕제다. 네가 반인반요다 보니 몸에 어떨까 싶었지만 괜찮아 보이는군.”
뜨거운 물 속이 조금 답답해진 환연이 촤악, 자리에서 일어나 그릇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되묻는다.
「뭐가 괜찮다는 건데?」
“이쪽 세계의 물품이나 사회는 전부 사람을 위주로 조성되어있다. 그 입욕제가 약하고 힘없는 아기를 기준으로 맞춘 거라지만, 화학 물질이 일부 포함되어있어 네 몸에 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했다.”
「왜 전부 사람 위주로 조성된 건데? 화학 물질은 뭐고?」
“이 세계에 언어를 사용하는 지성체는 사람 뿐이니까. 화학물질이란…….”
질문에 대답하자 호기심과 흥미가 다시 발동하는지 환연의 질문이 쏟아진다. 화학은 뭐야? 전기는 뭐야? Tv는 뭐야? 태블릿은? 컴퓨터는?
환인은 차분히 환연의 궁금증을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설명해주고 부족한 설명은 검색을 통해 차근차근 알려준다.
“……그러니 네 몸에 목욕제가 맞다고 해서 콘크리트와 시멘트, 아스팔트도 네 몸에 맞으리란 법은 없다.”
「그것도 다 자연에서 나오는걸로 만드는 거라며. 자연의 산물인 만큼 자연의 존재인 나한테도 무해할 수 있다고 봐.」
“독도 자연에서 나는 거다. 그런 독을 모아서 정제한다고 독이 정화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치명적인 독이 되기 마련이지.”
「약도 독이 되고 독도 약이 된다는 사례를 보면 마냥 부정적인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 실험 정신, 도전 정신이라는 말도 있잖아.」
“그런 도전정신은 목숨보다 명예가 중요하거나 이타적인 사람들이 하는 거다. 너나 내가 이타적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그 연장선에서 너와 그녀들의 몸에 무담과 무리가 가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
「두려움을 품고 시도를 피하면 그건 겁쟁이라고 할 수 있잖아. 문제가 있더라도 안느의 성술도 있고 유르파의 약도 있어. 정보를 획득하기 위한 위험은 어느 정도 감수할 만 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에서라면 정령의 행동을 내세울 수 있다. 콘크리트와 시멘트 주변에는 정령이 다가오질 않아. 그걸 보면 정령의 몸에 해롭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데 네 몸 또한 절반은 정령이다. 영향을 받는 게 당연하다. 내 우려도 이런 점에서 비롯된 거고.”
목욕을 끝마치고 상쾌한 기분으로 나온 이실리테와 안느는 환인과 환연이 대화하는 것을 보고 풋, 웃음을 터트렸다.
=또 저렇게 토론하고 있네.=
=주인님이랑 환연이 대화하는 거 듣고 있으면 머리가 아파…….=
이대로 몇십 분 동안은 저렇게 정신이 멍해지는 대화를 주고받겠지.
안느는 환인의 근처에 앉아 이실리테의 치아 자국이 선명한 팔을 주무르다가 환연이 몸을 담그고 있는 액체에 손가락을 담궈보았다.
=어, 이건 무슨 물이지?=
약간 미끄럽다. 손가락을 문지르자 거품도 일어난다.
=왜?=
=너도 만져봐.=
빗으로 머리를 빗던 이실리테도 사기그릇에 담긴 자주색 물에 검지를 살짝 찍어서 만져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거 비누 비슷한 거 같아.=
=그치? 이거도 목욕용품인가?=
“입욕제다.”
이쪽의 이야기 소리에 대화가 끊겼는지, 자신의 궁금증에 대답해주는 환인에게 안느가 반색했다.
=꽃이나 향유를 넣고 하는 건 알지만 이런 것도 있구나. 도령, 이거랑 욕실에 그 바디워시 있잖아. 돌아갈 때 그거 가지고 갈 수 없을까?=
“비싸지 않으니 마음에 들었다면 내일 나가서 몇 개 사 오지.”
달칵, 유르파도 샤워를 끝냈는지 촉촉히 젖은 모습으로 거실로 나온다. 샤워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 얼굴에 웃음꽃이 만개해있다.
여자친구들이 모두 나온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난 환인은 주방으로 걸어가며 이실리테를 불렀다.
“이실리테, 주방 기기 사용법을 알려줄 테니 이리로.”
=네, 주인님.=
「유르파. 거기 뜨거운 물 조금만 여기 부어줘. 물이 식은 거 같아.」
=응? 이렇게?=
「꺅, 뜨것! 조금씩! 조금씩 부어줘!」
=아, 미안해.=
주방으로 들어온 환인은 이실리테에게 고화력 가스레인지와 싱크대 등의 사용법을 알려주며 준비했던 찻물을 내린 뒤 여자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수백 마리 이형종과 싸우고 수십 명의 여자를 구하고 중핵하고도 싸우고 차원 이동도 경험하고.
큰일이 많았던 하루였지만, 차원 이동이라는 신기한 경험 탓에 다들 별로 피곤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피로가 몇 배로 밀려올 터.
“방은 네 개가 있는데 저쪽 큰 방만 빼고 쓰고 싶은 곳을 쓰면 된다. 저 문은 서재고 저 문은 지하실로 내려가는 문, 저 문은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문이다. 다락방에 침구가 많으니 부족하면 가지고 내려와서 쓰고.”
환인은 알아서 쉴 수 있도록 방을 알려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령은 이제 뭐 할 거야?=
“나도 씻어야지.”
안방으로 들어와 간단히 샤워만 하던 환인은 거울에 비친 가슴, 심장 부근에 이상한 것이 아주 희미하게 새겨진 것을 발견했다.
얼핏 보면 그림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문양 같기도 한 그것.
“…….”
자신의 가설을 좀 더 보완해주는 단서에 환인의 눈빛이 깊어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