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1화 〉 345 현대
* * *
……아아아아아앙—……!!
고막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경적이 다가왔다 멀어져가는 소리에 환인은 눈을 번쩍 떴다.
만졌다간 베일듯한 날카로운 눈매가 빠르게 주변을 훑는다.
회색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빌딩과 빌딩 사이의 뒷골목. 가로등 하나가 외롭게 서서 주황색 작은 빛을 뿌리는 어두컴컴한 골목길.
그런 골목길의 끝에 자동차가 오가는 불빛과 화려한 네온사인의 간판들이 환인의 눈에 들어온다.
깊은 밤이다.
숨을 들이마시자 좀 전까지 느껴지던 물비린내와 습지의 냄새 대신 매캐한 매연과 음식점에서 나온 음식 쓰레기의 냄새, 그리고 콘크리트 숲의 진한 회색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그리워한 적 없는 불쾌한 냄새들의 향연에 환인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매연과 스모그라고는 없는 세계에서 1년 넘게 지내서일까 목이 콱 막혔기도 했지만,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잠시 어이가 출타했기 때문이었다.
‘현대로…… 돌아왔다고?’
몸이 묵직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자 이실리테, 안느, 유르파가 자신의 몸에 반쯤 기댄 채 한데 뭉쳐 쓰러져있었고, 그 옆에는 멀쩡한 비상이 부리 끝으로 늘어진 환연을 집어 올리고 있었다.
꾸?
환인과 눈이 마주친 비상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마치 여기가 어디냐고 묻는 듯한 시선.
“잠시.”
여기가 진짜 현대라면 지금은 곤란한 상황에 직면한 상태다. 여자친구들의 복장도 복장이지만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생물인 비상은 더욱 곤란하다.
혼절한듯 축 늘어진 환연을 받아 가슴 포켓 주머니에 넣은 환인은 비상의깃털색 변화 마도구를 조작해 어둠에 가까운 색으로 바꾸었다.
이러면 바로 들키지는 않을 거다. 약간의 시간 벌이는 할 수 있겠지. 그 후 여자친구들을 깨우려다가 그녀들의 몸에서 아우라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손을 멈칫했다.
‘아우라가 왜 사라졌지. 내가 아우라가 없는 것과 연관성이 있는 건가.’
일단 그녀들을 깨우는 게 먼저였기에 환인은 그녀들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그녀들을 불렀다.
“이실리테, 정신 차려라. 안느, 유르파.”
찰싹찰싹, 뺨을 가볍게 때리며 깨우지만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여자들.
“씨발 그때 형이라는 새끼가 대가리에 총 맞았는지~!”
“으하하하!”
“지가 실수한 걸 왜 나한테 뒤집어씌우냐고 좆같은 새끼가!! 크아악 짜증 나!!”
그리고 환인이 내켜 하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다. 술기운이 잔뜩 느껴지는 고성과 함께 함께 일단의 무리가 골목길로 들어온 것이다.
골목길로 들어온 남자들이 환인 일행을 보곤 호들갑을 떤다.
“뭐야. 우와, 야야! 저기 봐봐, 골목 가운데!”
“우왓, 씨발. 와꾸 수준 실환가…?”
“입고 있는 거 봐. 갑옷 아냐? 코스프레 촬영 중인가 본데.”
“병신아 카메라가 없잖아. 코스프레하고 술 마시다 꽐라된 거겠지. 시발 존나 부럽네.”
“골뱅이로 만들어서 호로록 따먹으려 한 거 같은데, 거기 아저씨! 우리가 좀 도와줄까?!”
술기운을 빌린 용기로 이죽이는 목소리. 거기에 경박하기 짝이 없는 말투.
가까이 다가오는 남자들의 시선이 룸에 들어온 아가씨들을 품평하는 눈빛으로 바뀐다. 그리고 일행 중 유일하게 노출이 심한 이실리테에게 몰리는 것을 느낀 환인은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급한 일이 아니라면 돌아가시죠.”
“어~? 뭐야~. 아저씨, 우리 나쁜 사람 아니야~. 경계 안 해도 돼! 큭큭큭.”
“마자마자. 경계할 필요 없어, 이 힘들고 각박한 세상 서로 돌려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어?”
“우리는 선량한 시민이니까, 좋은 거 혼자 먹지 말고 같이 먹읍……?!”
무리 중 가장 앞으로 나와 있던 남자는 말하다 말고 온통 검은 옷의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심장이 콱 잡히는 감각에 숨이 턱 막혔다.
어둠 속에서 날붙이처럼 살벌하게 빛나는 눈동자.
같은 그룹에서 감옥에 다녀온 형이 말했었다. 사람 하나 담가본 사람의 눈빛은 보면 알 수 있다고.
저 눈이 틀림없다. 사람 하나가 아니라 수십 명은 죽인 살인자의 눈빛이다.
몸이 덜덜 떨린다. 동물원에서 호랑이가 코앞에서 울부짖는 것을 경험했을 때보다 몇 배는 더한 공포심이 밀려온다.
그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일행도 앞을 가로막은 남자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웃음기를 싹 지우고 침을 꿀꺽 삼키며 뒷걸음쳤다.
환인은 고개를 좀 더 들어 자신보다 한참 작은 남자들을 깔아보며 나직이 말했다.
“3 초안에 사라지지 않으면 죽여버린다. 꺼져.”
“으, 으아악!”
“히이익!”
진짜로 죽일 거 같은 목소리에 남자들은 겁을 집어먹고 줄행랑쳤다. 그중 한 명은 지렸는지 달려가는 꼴이 엉거주춤하다.
그 모습을 응시하던 환인은 이거 하나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쓸데없는 시비가 걸릴 상황이면 살기를 내뿜는 것으로 간단히 해결된다는 것.
부모님은 자신이 주먹다짐을 하고 싸우는 것을 싫어하셨기에 이때까지 일부러 분란이 생길만한 장소는 피해 다녔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환인이 웬 냄새나고 이상한 사람들을 쫓아내는 걸 지켜보던 비상은 한데 뒤엉켜 쓰러져있는 여자들을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친구가 저러고 있는 줄도 모르고 퍼져서는!
꾸! 뀨으, 쿠읏!
퍽퍽, 콕콕콕.
=으, 으응. 아야, 아야야…….=
=우… 콜록. 우엑, 이거 무슨 냄새야…….=
=끙. 아, 머리 아파….=
비상의 발길질과 부리 쪼기에 얻어맞은 여자들도 하나둘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환인은 그녀들을 일으켜 세워준 뒤 짧게 상황부터 전했다.
“모종의 이유로 내가 살던 세계로 돌아온 것 같다.”
=……네?=
=뭐? 진짜?=
눈을 크게 뜨는 여자친구들에게 고개를 끄덕여준 환인은 작은 돌조각을 주워 불빛을 내는 가로등의 전구를 향해 던졌다.
틱 파삭!
둔탁한 소리와 함께 훅 삽시간에 암흑으로 변해버린 골목길. 환인은 여자친구들에게 말했다.
“일단 갑옷은 굉장히 눈에 띄니 벗고 간단한 일상복으로 갈아입어라. 유르파도 로브를 벗어야겠습니다.”
=어? 어어.=
=네에.=
주인님이 살던 세계? 그럼 니오네브레스가 아니라는 건가? 어떻게? 왜?
머릿속에 의문이 가득하지만, 여자친구들이 일단 환인의 말대로 갑옷을 벗고 개인용 아공간 주머니에서 일상복을 꺼내는 사이 환인도 자신의 복장을 살폈다.
남들이 보면 중2병이라고 할법한 복장이지만, 사용감과 고급스러운 재질에 180cm가 넘는 키 덕분에 유치한 느낌은 없다.
신기한 시선을 받기야 하겠지만 그 정도는 문제 되지 않는다.
환인은 그 후 몇 가지 실험을 진행했다.
일단 영혼 시야를 열어본다.
‘펼쳐지는군.’
그 후 주위를 면밀히 살핀다.
우선, 여긴 자신이 금화를 발견하고 주웠던 그 장소다.
검은색투성이인 길가. 썩었을 거라고 생각한 음식 쓰레기와 찌꺼기는 의외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연녹색으로 표시되고 있다.
어둠 속에 잠긴 길 곳곳에 시궁쥐로 판단되는 청록색과 엽록색이 보이고, 고양이인지 저 멀리 담장 위에 웅크린 노란색의 생물도 눈에 들어온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지 CCTV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주차되어있는 차도 없어 블랙박스를 신경 쓸 필요도 없을듯하다.
쉬잉
마도기방벽도 제대로 작동한다. 마도구도 멀쩡하고 영혼술도 제대로 펼쳐진다.
하지만 정령이 보이지 않는다. 시멘트와 콘크리트로 자연이 뒤덮여서일까.
영혼시야를 연 상태로 평상복을 주섬주섬 입고 있는 여자친구들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녀들의 몸 위로 푸른색 아지랑이 같은 마력의 흔적이 보인다.
“…….”
위상력이 사라진 것도 아닌듯한데 아우라가 왜 없어진 걸까.
그때 겨울의 찬바람이 위에서 불어와 환인의 코트를 들추었다. 고개를 든 환인은 작은 바람의 정령이 하늘로 다시 올라가 것을 발견했다.
자신의 몸에 하급 정령을 강령한 환인은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벽의 돌출물을 잡고 4층 높이 빌딩의 옥상으로 기어 올라왔다.
힘이 세지니 영화에서나 보던 일이 가능해진다.
‘정령이 없진 않아.’
하늘 높은 데서 바람의 정령이 날아다니는 게 눈에 들어온다. 콘크리트로 자연이 뒤덮인 곳에는 정령이 찾지 않는 걸지도 모르겠다.
정령들을 부르자 이쪽 세계의 정령도 강제력이 통하는지 으아~ 꺄아~ 즐거워하는 비명을 지르며 다가와 영혼 구슬로 변화한다.
이쪽 세계에서도 여전히 빛에 휘감겨있는 왼팔을 쓰다듬으며 짧게 생각을 정리하던 중, 아래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다시 골목길로 내려왔다.
=도령, 다 갈아입었어.=
“음.”
환인은 가까이 다가온 비상의 머리 위에 올려진 환연을 가슴 포켓에 집어넣고 여자친구들의 복장을 살폈다.
약간 하늘거리는 느낌의 블라우스와 가죽 코르셋, 가죽 바지에 부츠를 신은 이실리테.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백레스 셔츠와 허벅지 중간까지만 가리는 반바지에 가죽 신발의 안느.
캐미솔과 주름치마의 비교적 가벼운 차림인 유르파.
소재와 디자인이 현대의 트렌드와 맞지 않아 이질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여성복은 여러 종류가 있기도 하고 저 정도는 독특하다는 수준으로 볼 수있기에 크게 지장은 없을 것이다.
외모도 한국적이지 않지만 외국인이라 하면 문제없다. 문제라면 너무 아름다운 게 문제일까.
무차별 오징어 확산범으로 체포당해도 웃지 못할 수준이다.
안느의 은발 사이로 모습을 내민 한 뼘 길이의 뾰족한 귀가 조금 문제 되긴 하지만, 그런 액세서리라고 둘러대면 된다. 유르파의 백발과 하얀 피부도 알비노증으로 통할 테고…….
환인의 시선이 멀뚱멀뚱 자신을 쳐다보는 비상에게 향했다.
한국은커녕 전 세계를 찾아봐도 없을 특이한 생명체.
=그런데 여기가 도령이 살던 데라고? 그러면 이쪽 세계로 완전히 넘어온 거야?=
“아직은 알 수 없다. 유르파는 공간 계통을 공부하셨다고 하셨지요. 이런 현상에 대해서 들은 적 없습니까.”
=공간 도약에 대해서는 몇 가지 알려진 사례가 있는데 황금빛이 사방을 채우는 현상은 없었어. 내가 연구 중인 공간 도약도 그런 현상은 아닌 거로 판단되고…….=
“그렇군요.”
공간 도약이 아니라면 역시 차원 이동인가. 잠시 비상을 바라보던 환인이 유르파에게 물었다.
“유르파, 마차를 축소시킬 수 있다고 하셨지요. 혹시 비상도 작게 만들 수 있습니까.”
=얼마나?=
“작으면 작을수록 좋습니다. 이 세계에는 쿠에가 없어서 사람들의 눈에 띄면 큰 소란이 일어날 겁니다.”
=아, 그러면 곤란하겠네. 가능은 해. 잠시만.=
비상에게 양해를 구한 유르파는 비상의 몸 곳곳을 만져보다가 환인에게 말했다.
=살아있는 생물의 크기 조절 술법은 적용이 까다롭고 유지 기간도 짧아. 길어봤자 30분 정도가 한계인데 괜찮아?=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알았어. 비상아, 지금부터 술법을 걸 거야. 크기가 작아지지만 그건 일시적이니까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알았지?=
꾸으~
유르파가 비상에게 술법을 걸 준비를 하는 사이 이실리테와 안느가 당황이 약간 드러나는 모습으로 이야기를 나눈다.
=내가 차원 이동도 경험할 줄 생각도 못 했어. 도령이랑 다니니까 정말 지루할 틈이 없네.=
=차원 이동은 확실한 거야? 엄청난 거리의 장거리 공간 이동이 아니고?=
=나도 모르지. 도령이 차원 이동이라고 확신하니까 나도 그런가 보다 하는 거야.=
=응…… 여기가 주인님의 나라라면 여행은 이걸로 끝이려나.=
이실리테의 혼잣말에 환인이 끼어들었다.
“아직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가장 간단히 설명되는 게 차원 이동이기에 그리 말했을 뿐, 어쩌면 아득한 거리에 니오네브레스가 있을지도 모르지.”
우주의 개념을 간단히 설명해주고 그 우주 어딘가에 니오네브레스가 있다면 방금 우리들이 겪은 것은 차원 이동이 아니라 공간 이동이라고 하자 이실리테와 안느는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 그러니까 여기서 저기 보이는 달까지 거리가 40만 킬로미터라는 건가……. 니오네브레스가 있다면 수천억 광년은 떨어져 있고…? 1광년은 9조 4,600억 킬로미터……?=
“아무튼, 이 현상의 원인은 미궁의 심핵이겠지. 내가 니오네브레스로 트립하기 직전에 있던 장소가 여기인 걸 보면 이 현상이 벌어지게 된 것도 나 때문이라고 본다.”
환인의 이야기에 여자들이 눈을 끔뻑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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