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346화 (346/813)

〈 346화 〉 340 산란못 미궁 2차 진입

* * *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기에 성자님과 일행분들을 모시러 찾아왔던 라비올라는 식사 후 다시 출발한다는 환인의 이야기에 적잖이 당황했다.

왜 갑자기? 뭔가 성자님의 심기가 상하는 일이 있었나?

이런 생각을 저도 모르게 할만큼 성자님은 냉기를 풀풀 흘리고 있었다.

‘아까 낮에 헤어질 때는 부드러운 분위기였는데…….’

식사 도중에도 라비올라는 계속 환인을 훔쳐보며 고민했다.

성자님도 성자님인데 성투사님하고 검희님의 표정도 대단히 안 좋다.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다. 그리고 저분들이 화를 낼만한 일이라면 역시 마을에 관련된 일일 가능성이 크다.

‘왜 그러시는지 여쭈어볼까…….’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만약 마을 사람들이 뭔가 성자님께 결례를 끼쳤다면 사죄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기 때문.

마을이 소멸할 위기를 구해주셨으니까 내 목숨으로 사죄해야 하나……?

그런 거라면 상관없다. 어차피 성자님이 안 오셨다면 마을과 함께 스러졌을 목숨, 성자님께 돌려 드리는 게 뭐가 아쉬울까.

아니, 처녀로 죽는 건 좀 아쉬운가?

아무튼, 라비올라의 머릿속에는 마을의 누군가가 성자님에게 결례를 저질렀다는 게 기정사실이 되었다.

그리고 성자님에게 결례를 저지른 놈만큼은 제 손으로 잡아 주리를 비틀고 싶은 마음에 식사가 끝난 뒤 성자님에게 다가갔다.

마침 일행분들은 출발 준비를 위해 자리를 비운 상황.

라비올라는 저물어가는 태양을 별채 마당에서 바라보는 성자님께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저…… 성자님, 혹시 마을 사람들이 뭔가 무례한 행동을 저질렀나요…?=

돌아온 대답은 어이가 없다 못해 증발해서 소멸할 수준의 이야기였다.

“저는 평범하게 걸어서는 도착할 수 없는 먼 곳에서 찾아왔습니다. 그 때문에 어떤 종족에게도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만…… 이 나라의 사람들에게는 편견이 생길 것 같습니다.”

그 이상의 말은 나오지 않았지만 어떤 일이 있었을지 쉽게 유추할 수 있는 단어, 편견.

그녀는 극도로 분노했다. 어찌나 분노했는지 혈압이 급격히 상승해 얼굴이 뜨거워지고 눈앞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아니, 호멘이라는 그 호로씹새가 유르파 님한테 결례를 끼치고 뒤진 사건을 전파하면서 절대, 절대!! 유르파님에게 실례되는 말은 절대!!! 하지 말라고 그토록 이야기했는데 어떤 미친놈이……!!

그러다 환인이 식사 전에 한 말이 그녀의 머릿속에 재생되었다.

저녁을 먹은 뒤 출발한다는 이야기. 목적지가 나와 있지 않은 짧은 문장.

설마 미궁에 가시는 게 아니라 마을을 떠나신다는 건가? 프라버의 지원이 이틀 뒤에 도착하니까?

그럴리 없다. 성자님은 미궁을 닫겠다고 말씀하셨고, 성자님은 한 번 하신 말씀은 반드시 지킬 성품을 지니셨었으니까.

하지만, 성자님이 미궁을 닫고 마을을 떠나신 뒤에 마을에 있었던 일이 밖에 알려지면……!

현기증에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심호흡한 라비올라는 고양이 귀를 한껏 눕히고 처량하고 간절하고 애원하는 얼굴로 성자님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성자님, 마을 사람들을 관리 못 한 제가 죽일 년이에요. 호멘이라는 모험가가 죽은 뒤로 수차례나 당부하고 또 당부했는데 그런 일이…….=

으으,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눈물을 글썽인 라비올라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성자님께 드릴 말씀이 없어요……. 마을을 뒤집어엎어서라도 그런 소리를 한 놈을 찾아 주둥이를 찢어놓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

라비올라는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성자님의 모습에 정말로 화나셨다는 걸 깨달았다.

그럴만도 하다. 자신의 여자를 욕보인 남자에게 결투를 신청해 죽인 분이시니까!

마을을, 마을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지? 선조님들이 만들어오고 키워온 마을이 사라지지 않게 하려면……!

=……어차피 성자님이 오시지 않으셨다면 사라졌을 마을이고 사라졌을 목숨이에요. 유르파 님께 무례한 소리를 지껄인 놈들은 제가 모두 찾아서 목을 매단 뒤에 저도 목숨을 끊어서 사죄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 말한 라비올라는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마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걸로 성자님이 화를 푸실지 모르겠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성 상납을 하든 재산을 바치든 비위를 맞추든 할 텐데 성자님 같은 분의 화를 풀게 하려면 뭘 해야할지 정말 모르겠다.

그래서 일단 마을을 지키기 위해 원흉이 된 놈들부터 죽이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 눈물이 차오른다.

내가 진짜…… 씨잉,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엄마도, 사도 아줌마도 마을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는데…… 괴물한테 끌려간 사람들은 그런 인간들을 위해서 끌려간 거야……?

소매로 눈물을 강하게 훔친 라비올라는 표독한 얼굴로 어둠 속에서 서히 불이 켜지는 마을을 둘러보았다.

할머니는 자고로 은혜도 모르는 털짐승은 몽둥이로 대가리를 깨버려야 한다고 하셨었다.

죄없는 언니 오빠들, 아저씨 아줌마들, 마을 동생들하고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남김없이 찾아내 때려죽이리라.

그때 어깨를 붙잡힌 라비올라는 움찔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표정이 누그러진 성자님의 얼굴이 있었다.

순간 치민 격정에 눈물이 다시 왈칵 흘러넘쳤다.

“라비올라 양이 죽을 필요는 없습니다. 뒤에서 수군거린 사람들을 죽일 필요도 없습니다.”

=하, 하지만… 죄송해요으…… 흑….=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생각도 없습니다. 이건 그 사람들 문제라기보다 사회의 문제인만큼…….”

환인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푸른 고양이 귀의 처녀에게 자신이 떠난 뒤 해야할 일을 살짝 귀띔해주었다.

* * * *

마차와 쿠에를 두고 숲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성자님 일행을 마을 망루에서 배웅한 라비올라는 서슬 퍼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세피 언니.=

=응. 당장 사람들을 모을게.=

라비올라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마을 경비대장도 그녀 못지않게 깊은 빡침을 느꼈다.

진짜 대가리에 도끼가 꽂히지 않고서야 어찌 마을의 은인이신 성자님의 일행에게 그딴 개소리를 할 수 있을까.

평소 행실을 생각해보면 그런 말을 할만한 인간은 뻔하다.

세피어스는 그런 병신 같은 소리를 할만한 인간의 목록을 이미 만들어놓은 상태.

망루 아래로 내려간 세피어스는 마찬가지로 눈에 불을 켜고 흉흉한 기색을 피워올리는 경비대원들을 산개시켜 마을 사람들을 모두 공터에 모으라 명령을 내렸고.

웅성웅성와글와글

마을 사람 800여 명 전원이 모이는 데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야 당연한 일이다. 성자님의 일로 인해 급한 문제가 생겼으니 모여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 마을에 그 말을 듣고 모이지 않을 사람은 1명도 없다.

=라비 아가씨, 무슨 일이야? 성자님은 어디 계시고?=

=혹시 우리 도움이 필요한 일이야?=

=그런거라면 말만 하라고! 소매 걷고 나서서 도와줄 테니까!=

맞아맞아!

라비올라는 눈물이 핑 돌았다. 저렇게 멀쩡하고 착한 사람들 속에 대가리 터진 새끼들이 숨어있다니.

엄마는 세상에 병신의 절대치가 있어서 절대로 그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는다고 했었는데…….

‘엄마가 옳았어요. 병신은 어디에나 있었네요.’

마을 사람들은 단 위에 있는 라비올라가 눈물을 훔치는 모습에 웅성거렸다.

유미안(라비올라 모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나중에 울겠다며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라비올라였는데 눈물이라니?

직후 라비올라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마을 사람 태반을 경악시켰다.

=여러분 중에 성자님의 연인이신 유르파 님을 뒤에서 욕보인 사람이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어요.=

아니, 며칠 전에 직업자 나부랭이도 부리 잘못 털어서 뒤졌다고 했잖아. 라비올라가 모두 모아서 부디 입을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도 그런 개소리를 한 놈이 있다는 거야?!

마을 사람들이 흥분하는 모습에 라비올라는 울분을 억누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제보가 성자님의 귀에도 흘러들어 갔어요.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방금 말씀드린 그 이야기, 성자님께 직접 들은 거에요.=

무거운 정적이 마을 광장에 내려앉았다.

잠시간의 정적이 지나간 뒤에는 분노가 찾아왔다.

=그런 개소리를 어떤 새끼가 한 거야?!=

=당장 튀어나와! 나오라고!!=

=사람이 어떻게 그런 소리를……!=

이형종에게 몇 번이나 상처받고 가족을, 친구를, 연인을 잃은 군중의 분노는 매서웠다.

그런 분노 앞에 나설 인물이었다면 뒤에서 그런 말도 하지 않았겠지.

나오지 않는 범인으로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져 갔다. 마을 사람들은 급기야 자신의 기억에 행실이 별로 안 좋았던 무작위 대상을 찍으며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너냐?! 니가 그런 말을 했지?!=

=너야말로 그랬겠지! 조금만 기분 안 좋아도 뒤에서 다른 사람 헐뜯고 욕했었잖아!=

=난 봤어! 니가 유르파 님을 멀리서 지켜보면서 인상을 쓰던거! 니가 범인이지!?=

=무슨 개소리야?! 난 유르파님이 그런 일을 겪고도 마을을 도와주시는게 감사하고 안타까워서 쳐다본거 뿐이라고!=

라비올라는 성자님이 이야기했던 대로 상황이 흘러가는 것을 보며 새삼 성자님의 무서움을 실감했다.

이런 상황을 태연스레 예측하는 분이시다. 그분은 이미 마을의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도 알고 계시지 않을까?

혼란과 분노와 시기와 질투 등의 감정으로 뒤덮여가는 마을 사람들을 보며 라비올라는 성자님이 당부했던 대로 입을 열었다.

=조용! 조용!! 그만들 하세요!!=

성량 확대 술법으로 증폭된 목소리가 마을을 쩌렁쩌렁 울렸다.

=……서로를 의심하지 않아도 돼요. 조금 전, 성자님이 남은 사람들을 구하고 미궁의 이형종을 잡으러 가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옆사람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다고요.=

=그렇다고 해도 마을의 구세주이신 성자님이잖나. 그런 말을 한 놈을 내버려 두자는 말인가?=

마을 어른의 질문에 라비올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성자님은 그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모두가 어려울 때 뒤에서 남을 험담하고 음해하고 비난하는 사람은 영혼의 축복을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입니다.”라고요.=

=그, 그 말은……?=

=네. 그 사람은 틀림없이 영혼의 저주를 받을 거예요. 성자님이 직접 저주를 내리시겠죠.=

술렁하고 동요가 퍼져 나가는 군중.

=지금은 잡혀간 사람들의 구출과 미궁을 닫는 게 급선무여서 바로 출발하셨지만, 며칠 뒤 돌아오시면 바로 저주를 내릴 거예요. 만약 저주를 내리지 않더라도 이틀 뒤에 도착할 프라버의 하늘 기사단 기사님들이 성자님을 모욕한 마을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둘까요? 그러니 여러분이 굳이 다른 사람들을 의심할 필요는 없어요. 내일도 평소처럼 자기가 할 일을 하면서 지내시면 돼요.=

=잠깐, 잠깐만! 라비 아가씨, 성자님께서 그……놈들을 다 알고 있으시단 말이야?!=

라비올라는 지금 질문을 한 놈, 일도 안 하고 남자로서 의무도 무엇하나 지지 않으면서 놀고먹던 마을의 놈팽이를 노려보았다.

병신 새끼.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자기가 범인이라고 자백하는 꼴이라는 걸 모르는 걸까?

=모르죠.=

짧은 대답에 안도가 퍼져나가는 얼굴. 라비올라는 극심한 역겨움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영혼은 어디에나 있어요. 그리고 성자님은 그런 영혼들과 대화하실 수 있는 분이시죠. 성자님이 마을에 도착한 뒤 가장 처음에 하신 일이 무엇인지 기억 안 나나요?=

경비대장 세피어스는 라비올라의 이야기에 안색이 유달리 바뀌는 놈들이 자기가 생각했던 놈들과 일치하는 것을 보고 단 아래의 경비대원들에게 저 연놈들을 사로잡으라 지시했다.

=뭐, 뭐야?! 왜 이래!?=

=아악! 가, 갑자기 뭐하는 거야?! 왜 날 묶는 건데!!?=

=아, 아파요! 꺄악!=

경비대원들은 발악하는 사람들의 고함과 외침을 무시하고 입에 재갈을 물린 뒤 그들 열일곱 명을 즉시 포박해 장대에 매단다.

17명. 그중 다섯이 남자고 열둘이 여자다. 라비올라가 그들을 무섭게 노려보며 얼떨떨해하고 당혹해하는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 사람들은 방금 제 이야기에 안색이 눈에 띄게 변한 사람들이에요. 찔리는 게 있으니까 그에 걸맞은 반응을 보인 거겠죠?=

=…….=

=…….=

라비올라는 거칠어진 숨결을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틀리리라 생각하진 않지만, 어차피 성자님이 돌아오시면 유죄인지 무죄인지 결정될 테니 그때까지 공터에 매달아두겠어요. 그때까지 누구도 저 사람들을 건드리지 말고! 때리지도 마세요! 성자님이 돌아와서 처벌하실 테니까요!=

=자, 잠깐만. 라비 아가씨? 만약 표정을 숨기는 게 능해서 잘 피한 놈이 있으면 어찌할 건데?=

=표정을 숨기는데 능해서 피해 간 사람들도 어차피 영혼사님이 돌아오면 들통 나서 처벌받을 거에요. 오히려 더 큰 저주를 받겠죠.=

=어이 세피 대장! 이 자식 얼굴이 파래졌어! 이놈도 성자님을 욕한 거 같은데?!=

=이 사람은 아까부터 식은땀을 흘리고 있어요!=

=여기 이 사람도 이상해!=

여기저기서 거동 수상자의 제보가 잇따라 올라왔지만, 라비올라는 =조용히 하세욧!!= 버럭 고함질러 모두의 입을 다물게 했다.

=아까 내가 뭐랬어요?! 서로 의심하지 말라고 했죠!=

=…….=

=…….=

=……아무튼 이걸로 용무는 끝났어요. 다들 돌아가셔도 좋아요. 며칠 뒤 성자님이 돌아오시면 다시 소집할 테니 그땐 지금보다 더 빨리 모이시고요. 알겠어요?=

=어, 어어.=

=알았어…….=

마을 사람들은 술렁이며 삼삼오오 흩어지기 시작했고 잠시 뒤에는 높이 4m짜리 장대에 매달려 읍읍거리며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는 17명과 경비대장, 경비대원 몇 명만 남게 되었다.

라비올라는 한숨을 푹 내쉬고 세피어스 경비대장에게 뒷일을 부탁한다고 말한 뒤 저택으로 돌아……가려다가 관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노동 의욕이라곤 정말 새 모이만큼이나 나지 않는 날이지만, 그래도 할 일은 해야지…….

다음 날 아침, 라비올라는 세피어스 경비대장을 통해 두 집이 야반도주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라비올라는 도망자 명단을 적어 마을 게시판에 붙였다. 다시는 마을에 정착하지 못하게 하려는 조치다.이러면 사태가 진정된 뒤에 돌아오더라도 마을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히고 배척당할 테니까.

그 다음날.

도망자 명단을 붙여서일까. 이번에는 아홉 집이 야밤을 틈타 마을 밖으로 도망쳤다. 그들도 명단을 작성해 마을 게시판에 붙였다.

마을 사람들은 명단의 72명을 향해 사람 얼굴을 한 짐승 새끼들이었다며 도망간 사람들을 욕했지만, 라비올라는 슬퍼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엄마의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 대부터 마을을 번영시키기 위해 이토록 노력해왔는데, 간신히 마을 인구 천 명을 넘겼는데 순식간에 700명으로 쪼그라들었다.

이 숫자를 다시 채우는 게 내 대에서 가능할까?

이런 슬픔이 머릿속을 채우는 가운데 라비올라의 머릿속에 흑표범처럼 아름다운 흑색 머리카락의 성자님이 떠올랐다.

성자님은 도망치는 사람을 막지말라고 했었다. 왜일까. 대자연 속에서 벌을 받길 바라셔서?

아무리 숲이 안전해졌다지만 그래도 마을 밖 숲에는 맹수와 작은 괴물들이 활보한다. 설령 운좋게 숲을 빠져나갔다하더라도 다음 마을이나 촌락까지 가지못해 죽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세 번째 날이 밝았을 때.

부우우우웅­!

고둥 소리와 함께 프라버에서 출발한 구조 병력이 마을에 도착했다.

전원 3급 이상의 직업자로 이루어진 프라버의 하늘 기사단 기사 8명과 그 수행 종자 22명이었다.

* * * *

산란못 미궁 3차 입장 3일째 오후.

“환연.”

「응. 얘들아, 저 연못 안에 있는 저놈들을 여기까지 끌고 와. ……어? 안돼안돼. 다리만 붙잡고 끌고만 와. 뭐?! 때리면 안 된다니까! 안! 돼!! 너희 왜 그렇게 폭력적이 된 거야?!」

환연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다 대고 실랑이를 벌이고 1분 뒤, 산란못 속에서 뒷다리가 잡혀 끌려오는 고양이처럼 기생촉수 두꺼비 세 마리가 끌려나왔다.

아니, 정확하게는 산란못 가장자리까지 끌려온 뒤에는 밀쳐지듯이 못 바깥으로 튕겨 나왔다.

환인은 그 즉시 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세 마리를 영혼 화살로 머리통을 날려버렸고, 환인의 여자들과 롬디스 일행은 곧장 시체에 달려들어 주둥이를 벌리고 칼로 촉수를 자르고 세 명의 여자를 구출해낸다.

롬디스와 렉탈도 이제는 움찔거리거나 멈칫거리지 않고 재빨리 구해낸 여자를 좌우에서 부축해 일으켜 세운다. 그러면 유르파가 염력 증폭 반지를 낀 뒤 염동력으로 여자의 뱃속과 가슴에 들어찬 기생 괴물의 새끼를 긁어낸다.

그게 끝나면 환연이 물의 정령으로 여자를 깨끗하게 씻기고 시엘라가 회복의 성술을 걸어준 뒤 안느가 모포로 몸을 감싼 다음 마차에 올려놓는다.

수십 번 반복해서 이제는 익숙해지고 숙달된 손놀림.

절반은 분풀이를 겸해서, 절반은 좀 더 빠른 탐사를 위해서 환연과 유르파를 데려온 환인은 그녀들을 데려오는 게 정답이었다고 생각했다.

고작 사흘 만에 미궁 전체 지도를 완성해냈고(비상을 타고 환연과 함께 미궁을 한바퀴 빠르게 돌았다), 8할에 이르는 산란못을 전부 탐색했으며, 35명이나 되는 여자를 구출해낸 것이다.

탐사 속도가 2배 넘게 빨라진 이유에는 단연코 환연의 활약이 컸다.

유티가 있을 때는 일단 산란못 밑바닥을 흔들어 흙탕물로 만드는 시간에 이형종이 물가로 나와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있었다. 거기에 걸리는 시간이 길면 30분정도.

그랬는데 환연이 온 뒤부터는 매우 짧고 간소해졌다.

중급 물과 땅의 정령에게 부탁하면 1분도 지나지 않아 이형종이 물 밖으로 밀려 나오는 것이다.

여기에 전투 시간도 큰 폭으로 줄어들었다.

환인이 평온의 파동을 펼쳐 이형종이 혼란 상태에 빠지면 환연의 광역 공격, 흙과 물의 창이 땅에서 치솟아올라 적을 꿰뚫는다. 이어서 꼬챙이에 꿰인 상태인 적에게 쏟아지는 비상의 칼날 바람.

이 콤보 공격이 한차례 지나가면 대부분의 이형종은 크게 다쳐 빈사 상태가 되거나 몸 어딘가가 불편해져 기동력이 대폭 떨어진 상태가 된다.

그러면 이실리테와 안느가 투입되어 나머지를 정리하니 기존 대비 절반 넘게 줄어든 것.

1시간만에 작은 산란못 네 개를 정리할 정도로 압도적인 효율이었다.

=도령, 구해낸 아가씨를 마차에 전부 올렸어.=

“그래.”

보고하러 왔던 안느는 미궁 전체 지도를 놓고 생각에 잠겨있는 환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언제 봐도 질리지 않는 얼굴이다. 질리긴커녕 보면 볼수록 기분이 좋아진다.

짜증나고 화났을 때 도령의 얼굴만 보면 짜증과 분노가 사르르 녹아 사라질 정도.

=주인님. 이제 어디로 가실 건가요?=

도령의 얼굴을 너무 쳐다봤나 보다. 옆에 이실리테가 다가오는 줄도 몰랐던 안느는 살짝 반성하면서 환인이 펼쳐놓은 전체 지도로 시선을 내리고 말했다.

=역시 여기에도 미궁 중핵은 없었네. 여기 제일 큰 산란못에 있겠지?=

=그렇지 않을까? 동쪽하고 북동쪽에 산란못이 좀 남았지만, 훨씬 작으니까.=

=흠. 숲의 수호자가 우리라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했고 똑같이 두꺼비라고 했으니까 큰 걱정은 안 되지만, 그래도 모습이라도 알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중핵이니까 강하겠지?=

=아우라 때문에 최소 6급일걸. 폭군룡 미궁의 6급 아룡 수준이거나 그보다 조금 더 강할 거야.=

여자친구들의 대화를 들으며 생각에 잠겨있던 환인은 일단 가장 큰 산란못을 정리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여기만 정리하면 미궁은 이제 끝이라고 봐도 되겠지. 먼저 중핵을 찾아 죽이고 그 뒤에 주변 산란못을 살펴 피해자가 더 없는지 마저 확인한다. 20분 휴식한 뒤 거대 호수급 산란못의 남쪽으로 이동할 테니 좀 쉬어두도록 해.”

휴식을 선언한 환인은 롬디스와 렉탈이 하나씩 끌고 있는 마차로 다가가 몇 명,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여자들에게 말을 걸었다.

“잠시 후 이 미궁의 핵을 지키는 괴물을 죽이고 나머지 산란못까지 다 살핀 뒤 미궁을 빠져나갈 예정입니다. 짧으면 반나절 정도 걸릴 예정이니 조금만 더 견디십시오.”

=저, 저희는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 괜찮으니까요.=

=네에. 저, 정말로 괜찮…아요.=

모포로 온몸을 꽁꽁 감싼, 이제 15살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소녀를 응시하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얼굴 근육이 뻣뻣한 것처럼 굳어있던 소녀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이번 사흘간 구한 여자 중에는 정신을 잃지 않고 있던 여자도 더러 있었다.

대부분이 직업자였는데 전원 근접 전투계통이었다. 환인은 강인한 신체와 강화된 정신력 탓에 정신을 잃지 못한 것으로 파악했다.

그때문에 구출 당시에는 반쯤 미쳐있었다.

회복의 성술로 몸을 깨끗하게 되돌렸음에도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뱃가죽을 손톱으로 긁고 젖가슴을 쥐어뜯으려 했고 롬디스와 렉탈을 공격하기도 했으며 실성한 듯 울고 웃고 몸부림쳤었다.

그러나 환인의 강력한 평온의 파동, 여기에 전투 때마다 터져 나오는 평온의 파동에 수십 번 노출되자 망가진 게 아닐까 싶던 정신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고, 사람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되었다.

공격성과 자해도 대폭 감소했지만 상태가 호전되었을 뿐이지 완치된 것은 아니다.

정신의 문제로 지목하는 말더듬증과 간헐적인 경련이 그녀들 전원에게 나타나고 있었던 거다.

환인은 자신을 향해 기도하며 눈물을 줄줄 흘리는 여자들에게 평온의 파동을 한 차례 더 쏘아준 뒤 일행이 모여 휴식 중인 곳으로 걸어갔다.

(산란못 미궁 전체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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