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5화 〉 339 산란못 미궁 2차 진입
* * *
불침번은 밸런스를 위해 환인유티가 초번, 안느롬디스가 중번, 이실리테렉탈을 말번으로 3교대를 정했다.
시엘라는 위상력 회복을 위해 불침번에서 열외된 것이 고마우면서도 미안해했는데 그러는 것도 모포를 몸에 감고 드러눕자마자 사라졌다.
눕자마자 그대로 기절하듯이 잠들어버린 것.
=…마, 많이 피곤했나 보군.=
그렇게 말한 롬디스도 애인인 시엘라의 옆에 누워 날개로 그녀를 덮어준 뒤 빠르게 잠들었고 렉탈은 번데기처럼 모포를 몸에 둘둘 감고 쪼그려 앉아 잠든다.
이실리테와 안느도 무기를 옆에 두고 조용히 잠들자 야영지는 순식간에 고요해지며 적막이 야영지를 뒤덮어갔다.
구륵 구르륵
쓰륵 쓰쓰쓰
어디선가 개구리 울음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는 미궁의 첫날밤.
유티는 혹시 자다가 습격받으면 어쩌나 고민했지만, 그런 고민이 무색할 만큼 탐사 첫날밤은 무탈하게 지나갔다.
2일 차 탐사의 흐름은 첫날과 비슷하게 흘러갔다.
롬디스와 렉탈은 구출한 여자들이 실린 수레를 번갈아 가며 끌고 마차 주변을 지킨다.
시엘라는 환인의 옆에서 이형종이 출몰할 때마다 생명력 탐지 성술로 피해자를 탐지한다.
유티는 마차 주변에서 대기하다가 산란못에 피해자가 탐지되면 비상과 함께 산란못을 헤집는다. 그리고 전투가 끝날 때마다 이실리테와 안느에게 다가가 그녀들의 갑옷에 묻은 이형종의 피와 살점을 물로 씻어준다.
비슷하지 않은 점은 전투가 1일 차보다 더욱 격렬했다는 것.
“오늘은 어제와 비교하지 못할 만큼 강행군을 실시할 예정입니다. 롬디스 씨 일행은 뒤에서 천천히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그 경고가 상냥하게 느껴질 정도로 환인은 본격적으로 전투에 참여, 이형종을 만나 전투가 벌어지면 여자친구들과 비상에게 하급 정령 강령을 걸어준 뒤 비상을 타고 날아올라 주변의 이형종을 죄다 몰아왔다.
그리고 ‘하늘’에서 영혼 화살과 영혼 폭발을 난사해 이형종을 말 그대로 학살했다.
지상에서는 빛의 대검과 철의 대검을 두 손에 들고 폭풍처럼 휘두르는 이실리테가, 하늘에서는 비상을 타고 바람과 함께 보이지 않는 화살을 쏟아붓는 환인이.
두 명의 강력한 딜러 덕분에 100여 마리가 넘는 이형종이 몰려와도 평온의 파동으로 일시적인 혼란에 걸린 이형종은 제대로 된 반항조차 못 하고 쓸려나갔다.
롬디스 일행은 전율했다.
저게 6급 파티의 진짜 실력인가. 아니, 저건 이미 영웅급 파티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나.
특히 녹색 쿠에를 타고 하늘에서 보이지 않는 화살과 폭발을 일으키는 성자님은 말 그대로 창공의 사수死手였다.
세밀한 세공이 가미된 스틱 형태의 지팡이를 휘두를 때마다 반드시 2마리 이상의 이형종 머리가 날아갔고 손을 들어 흔들 때마다 보이지 않는 폭발이 일어나 대여섯 마리의 이형종을 집어삼켰다.
=이, 이게 성자님 일행의 진심인가…….=
첫날 느껴졌던 피가 뜨거워지는 호승심과 투지는 씻은 듯이 사라진 지 오래다.
지금은 그저 저분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뒤에서 쥐죽은 듯이 있을 뿐.
그러한 전투 덕분에 환인 일행은 2일 차가 저물 즈음 축구장 사이즈의 산란못 10개, 대형 호수급 산란못 1개, 소형 호수급 산란못 2개 및 대형 산란못 두 곳의 일부를 정리해낼 수 있었고 피해자도 10명을 더 구출해낼 수 있었다.
2일 차 야영이 시작되었을 때, 일행은 마차에 죽은 듯이 나란히 누워있는 19명의 여자를 보며 걱정을 드러냈다.
=사람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네…….=
=성투사님. 일찍 구한 사람들은 벌써 하루 넘게 아무것도 먹지 못했는데 괜찮을까요?=
=유티가 물은 먹여주고 있잖아. 도령 말에 따르면 사람은 물만 마셔도 4일은 버틸 수 있다고 하니까 아직은 괜찮을 거야.=
시엘라와 유티는 성자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맞겠지 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그런 설명을 한데에는 나름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두꺼비 괴물이 먹인 알과 괴물의 새끼가 위장에 있으니 수분만 공급되면 사나흘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라고 판단을 내린 것.
환인은 손뼉을 쳐서 모두의 시선을 끌어모은 뒤 내일 일정을 이야기했다.
“여기서는 여자들을 케어할 여건이 안 된다. 내일 일정은 아침 일찍 1차 탐사 때 정리한 산란못을 빠르게 살핀 다음 그곳의 피해자를 구출해낸 뒤 2차 탐사를 마칠 예정이니…….”
=마을로 돌아가서 일단 피해자들을 인계할 생각인 거구나?=
“그래. 한 번 이형종을 정리한 곳이니 전투는 거의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본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경향을 봐서는 호수급 산란못에만 피해자가 모여있었으니 피해자가 있을 곳으로 예상되는 장소는 이 세 곳.”
그러니 오전 중에 파악을 끝내고 이탈하는 게 목표라는 이야기에 일행은 한 치의 의문과 의심을 품지 않고 납득했다.
롬디스는 다시금 눈이 뜨이는 느낌을 받았다.
이거다. 파티를 이끄는 리더라면 저 정도의 통솔력은 발휘해야지. 봐라, 일행 중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잖아.
말을 지지리도 듣지 않던 호멘을 잠깐 떠올렸다가 흘려보낸 롬디스는 한층 번쩍거리는 눈으로 성투사님과 검희님에게 브리핑하는 성자님을 응시했다.
‘하지만 저런 통솔력은 어떻게 해야 발휘할 수 있는 걸까. 조리 있는 이야기? 호소력 짙은 목소리?’
롬디스가 모두에게 믿음을 주는 언변의 중요성을 체감한 다음 날.
일행은 어제 들었던 이야기와 한치도 틀리지 않게 상황이 전개되는 것에 적지 않게 놀랐다.
환인과 함께 공중 정찰에 나선 시엘라는 성자님이 어제 지목했던 곳에 정확히 피해자들의 생명력이 탐지되는 것에 크게 놀랐고, 그 주변으로 이형종이 거의 없다는 것에는 비교적 덜 놀랐다.
어떻게 그걸 알아내신 걸까. 단지 호수급 산란못에서만 피해자가 나왔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그런 결과가 나왔다고는 믿기 어려운데.
시엘라와 함께 비상을 타고 선행 정찰을 마친 환인은 일행을 이끌고 지도에 표시된 호수급 산란못 세 곳, 그 외 크고 작은 산란못을 전부 둘러본 뒤 호수급 산란못에서 6명의 피해자를 더 구출, 총 25명을 구해내고 그 즉시 크라빈 마을로 복귀했다.
2차 입장 후 3일째였다.
크라빈 마을은 다시 한 차례 난리가 벌어졌다.
이형종에게 끌려가 죽었다고 생각한 사람들 중 25명이나 멀쩡한 상태로 살아 돌아온 것이다.
=이야나, 이야나!=
=엘라 언니, 살아있었어…! 아아……!=
=엄마! 눈 좀 떠봐 엄마아……!=
환인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여자들이 가족들의 품에 돌아가는 것을 차가운 눈으로 보다가 라비올라에게 말했다.
“피해자들은 극심한 정신적 충격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저 상태를 간단히 약탈당해 문을 닫은 가게라고 할 수 있겠지요.”
=네, 네.=
옆에서 듣기만 해도 어깨가 움츠러드는 냉랭한 목소리.
라비올라는 마차에서 떨어진 장소에서 더러운 것을 보는 듯 수군거리는 주민들을 향해 눈을 부라렸지만 통하지 않아 애가 탔다.
“다행인 점은 시엘라 양의 회복 성술로 겉모습이 예전과 다를 바 없다는 겁니다. 정신을 차리기만 한다면 비록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그러니까 미궁에서 당했던 기억이 마음의 크나큰 상처가 되겠지만, 시간이 약이 되어줄 겁니다.”
=넵.=
이야기를 들을수록 라비올라는 가슴이 거세게 두방망이쳤다. 환인이 흘리고 있는 기세 탓이다.
저 사람들은 눈치도 없나?! 왜 저렇게 보이는 데서 저러는 거야!
환인은 모여있는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게끔 복식호흡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같은 마을 사람들이 차별하고 핍박한다면 저 사람들은 힘겨운 삶을 살다가 슬프기 짝이 없는 선택을 할지도 모릅니다.”
웅성웅성. 성자님의 목소리라는 것을 눈치챈 마을 주민들이 환인을 찾다가 이어진 목소리에 고개를 숙였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마을을 위해 헌신하다 끔찍한 일을 겪고 돌아온 사람들이 같은 마을 사람들의 차별에 신음 받고 고통받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는 겁니다.”
=……!=
=…….=
“영혼사들이 순례행을 하는 이유는 다들 아실 겁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이후 제가 크라빈 마을을 구한 것을 후회하는 일이 없기를 그저 바랄 뿐입니다.”
그렇게 말한 뒤 마차를 향해 수군거리는 마을 사람들과 한 번씩 눈을 마주친 환인은 몸을 돌려 저택으로 향했다.
진심을 말하자면 환인이 생존자를 구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여자친구들이 그들을 구해내고 싶어 했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떠돌아다니는 피해자의 영혼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랬기에 생존자들이 이후 어떤 삶을 살든 환인은 큰 관심이 없었다. 저들을 구해준 것으로 자신이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수적인 성과라고 여겼던 영혼은 이후 한 명도 발견하지 못했고.’
이런 마당에 자신과 여자친구들이 고생해서 구해온 마을 사람이 집단따돌림으로 자살하거나 한다면 자신의 노력은 그야말로 헛짓거리가 된다.
그런 꼴만큼은 보기 싫었던 환인이었기에 입장을 이용, 마을 사람들을 은근히 협박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협박은 제대로 통했다.
환인이 냉랭한 기운을 풀풀 풍기며 몸을 돌리자마자 마을의 어른들이 나서서 호통치기 시작한 것.
=아니! 자네들 거기서 뭣 하는 겐가?!=
=예, 예?=
=지금 자네들이 보여주는 그 태도가 뭘 뜻하는 건지 물은 게야!=
=아니… 저희는…….=
=아니겠지?! 부디 내가 생각한 그런 이유가 아니길 바라네! 짐승 가죽을 뒤집어쓴 사람이라면 그러지 않을 테니!=
=…….=
연륜이 있는 사람들이 생존자들에게 비우호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마을 사람을 발견, 불같이 다그쳤고 마을 사람들은 서로를 머쓱하고 계면쩍은 표정으로 모여 피해자들을 추스른 뒤 어디론가 옮기기 시작한다.
환인은 피해자들을 혐오스러워하는 분위기가 적잖이 전환된 것을 느끼며 전전긍긍해 하며 따라오는 라비올라에게 질문했다.
“라비올라 양, 마을 주변 분위기에 대해 아시는 것이 있습니까.”
=네! 순찰대를 구성해 3회차, 마을 주변을 조심스럽게 탐색했는데 개구리 이형종은 한 마리도 볼 수 없었어요. 그 후에 환연 요정님도 마을 주변을 한 번 정찰해주셨는데 정찰 결과 마을 주변 10km 안에는 이형종이 없어졌다고 확인해주셨어요.=
“그나마 안심되는 이야기군요.”
환인은 조금 고민했다. 마을에 더 이상 위기가 없다면 환연을 데려가도 괜찮을 듯한데…….
=저, 그리고 오늘 오전에 통신 수정구로 연락이 들어왔어요. 프라버에서 출발한 지원병력이 마을에서 이틀거리에 도착했다구요.=
“그건 좋은 소식이군요.”
=넵. 병력은 프라버의 하늘 기사단 2군님들과 수행원으로 총 30명이라고 했어요. 보통 이런 중간 경과 연락은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 아마 성자님이 계셔서 연락이 들어온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한 라비올라는 환인에게 무한한 감사의 감정을 내보였다.
=정말 감사드려요, 성자님. 만약 성자님이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우리 마을은 꼼짝없이 멸망했을 거에요…….=
“그것이 짐승신님의 인도와 시련이겠지요.”
환인의 이야기에 크게 감격하고 감동하는 라비올라.
그녀와 드문드문 이야기를 나누며 별채에 도착한 환인은 먼저 돌아와 장비 수입과 도구 정리, 소모품 확인하느라 분주한 일행을 볼 수 있었다.
유르파도 근처에 있었다.
라비올라와 헤어진 환인은 별채에 붙은 마차 보관고에서 바지 작업복에 각종 마도 공구를 수납한 공구 조끼를 입고 마차를 손보는 중인 그녀에게 다가갔다.
‘마차에 기능을 추가하는 건가.’
냉방 기능을 추가해야겠다고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는데 그런 기능 추가라고 보기에는 외장에 신경을 쓰는 느낌이다.
보관고로 다가가자 마차 밑에 들어가 있던 유르파가 엉금엉금 나오더니 환한 얼굴로 다가온다.
=자기 왔어?=
“예. 별일 없었습니까.”
=계속 별채에만 있었는데 별일 있겠니? 아, 만들어둔 생활 마도구를 라비 아가씨가 많이 사줬어. 여기 14 금화.=
유르파가 작은 금화 주머니와 함께 내민 쪽지에는 1급 위상석 10개와 2급 위상석 2개로 총 76개의 마도구를 만들어 팔았다고 적혀있었다.
제작 항목은 보온, 청결 유지, 내구 증가, 보존, 정화 등등의 기능이 새겨진 주전자, 식칼, 도마, 접시, 수저, 오븐 플레이트, 분쇄기, 조미료 보관통, 식기 세척기 등등.
2급 위상석은 라비올라 저택의 지하 냉동고와 보관고에 청결 및 보존 술법진을 설치하는 데 썼다고.
=16 금화를 벌었는데 2 금화는 다음 마도구 제작하는데 쓸 금속이랑 목재를 살 예정이라 빼놓은 거야.=
위상석의 값을 다 해봐야 1.9 금화일 뿐인데 약간의 재료와 금속을 더해 16 금화로 부풀린 건가. 새삼 유르파야말로 연금술사라고 생각하며 물었다.
“수고했습니다. 그보다 전투에 쓰는 반지 마도기를 만든다고 하지 않았었습니까. 생활 마도구는 언제 76개씩이나 만든 겁니까.”
=자기랑 아가씨들이 미궁에 들어갔을 때부터 만들었어. 아무래도 마을 같은데는 생활 마도기가 가장 많이 팔리니까. 전투용 액세서리 마도기는 프라버에 가면 팔려구.=
“…….”
환인은 말없이 유르파의 눈을 들여다보았고, 자신의 시선에 슬쩍 시선을 피하는 그녀의 턱을 잡아 되돌린 뒤 살짝 들었다.
=앗.=
하얗다기보단 창백한 유르파의 얼굴에 햇빛이 정확히 닿으며 거칠어진 피부결과 눈 밑에 살짝 거뭇거뭇한 다크서클이 드러난다.
죄지은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는 유르파를 빤히 바라보던 환인은 조용히 물었다.
“그렇게 만들어 팔고는 마차에 새 기능을 추가 중인 거군요.”
=으, 응. 이번에 프라버랑 조금 그런 일이 있었잖니? 자기가 정체의 공개에 신경 쓰는 거 같아서 구조 변화 기능을 추가하는 중이었어. 색이랑 외장만 바꿔도 사람들은 못 알아볼 테니까.=
“마차의 외형도 바꿀 수 있는 겁니까.”
=어려운 건 아니야. 마차의 기본 골자는 건드리지 않고 외관의 형질을…… 그러니까 지금 모습을 기록해놓은 다음 재질에 변화를 주는 식이야. 소나무나 참나무, 편백나무, 박달나무로 바꾸는 거거든.=
지금 마차는 니오네브레스에만 존재하는 특이한 나무를 소재로 만들었다. 그 때문에 질감도 굉장히 고급스러운 데다 색도 무광의 검은색이고 형태도 특징적이어서 한 번 보면 잊기 어려운 수준.
그걸 재질 변화 및 세부 변화로 내부는 가만히 두고 외부만 바꾼다는 이야기였다.
=아! 그리고 아우라를 없애는 건 힘들지만, 살짝 변화를 주는 마도기도 구상 중이거든? 조금만 더 연구하면 완성될, 완, 완성…….=
말하다 말고 말 없는 환인의 시선에 우물쭈물하면서 시선을 피하던 유르파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한다.
=혹시 더 필요한 게 있다면 이야기해줘! 바로 반영할게!=
“아닙니다. 그 정도만 되어도 만족입니다.”
하지 말라고 해도 오히려 가만히 있는 게 그녀에게는 더 힘든 일이겠지.
환인은 작게 웃으며 유르파의 뒷목을 잡고 입술에 진한 입맞춤을 해주었고, 유르파는 수줍고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하다가 다시 마차 밑으로 기어들어 가버렸다.
마차 밖으로 삐져나온 유르파의 다리를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돌린 환인은 서늘한 감정이 드러나려는 것을 숨기며 비상과 놀고 있는 환연을 불러 물었다.
“마을 사람들이 유르파를 업신여기거나 하진 않았나.”
「안 했어. 유르파가 네 여자라는 게 소문이 쫙 퍼졌거든.」
“그래서 대신 이런저런 눈치를 줬던 건가. 그 때문에 유르파는 방에 틀어박혀서 마도구만 만든 거고.”
「……유르파한테 들었구나.」
칫, 작고 예쁜 외모에 걸맞지 않게 혀를 강하게 찬 환연이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마을 쪽을 노려보며 투덜거린다.
「앞에서는 널 대하는 것처럼 엄청 공경하지만 뒤에서는 반반한 얼굴로 성자님을 홀렸다느니 뭐 그런 말이 많아. 아무래도 유르파 종족 때문에 차별하는 분위기?」
“…….”
「안 보이는 데서 안 들리게 말한다고 해도 유르파가 눈치 없는 것도 아니고 다 알아채지. 유르파 앞에서 뭐라 했다면 박살 내버렸을 건데 사람 없는 데서 씹어대는 걸 내가 뭐라 할 수도 없고. 그래서 좀 짜증 나.」
유르파를 지키면서 눈에 밟히던 마을 인간들의 나쁜 점을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던 환연은 말할수록 환인의 표정이 냉랭하게 변하는 것을 보고 읭? 하는 기분이 들었다.
……어?!
「뭐야! 유도신문 한 거야?!」
“안 했다. 네가 멋대로 착각해서 말한 거지.”
「악 진짜! 유르파가 이거 말하지 말랬는데!」
망했다는 얼굴로 자기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작은 비명을 지르던 환연은 이윽고 원망의 화살을 환인에게 돌렸다.
「너 성격 진짜 음흉해! 나쁜놈!」
환인은 자신의 귓불을 잡아당기고 앙앙 깨물어대며 분풀이하는 환연을 사로잡아 상의 포켓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마차 보관고를 찾아 바퀴를 달아놓은 판자 위에 누워 마차 하부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유르파의 다리를 잡아당겼다.
=꺅?! 뭐, 뭐니?!=
드르륵 바퀴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끌려 나온 유르파가 화들짝 놀라 바동거리다가 환인을 보곤 눈을 동그랗게 뜬다.
이어 환인의 얼굴에 약간의 분노가 스며들어있는 것을 눈치챈 유르파는 환인의 가슴팤 주머니에 고개만 빼꼼 내민 채 미안해하는 표정의 환연을 보곤 일이 어떻게 됐는지 깨달았다.
=자기…….=
“화내거나 하진 않습니다. 마차 기능 추가는 나중에 하고 이동할 준비를 하십시오. 저녁에 출발할 겁니다.”
=어, 어디 가는데?=
“산란못 미궁입니다. 환연, 너도 동행한다.”
「으응.」
환연의 목 뒤 옷깃을 잡아 들어 올린 뒤 유르파의 가슴 위에 내려준 환인은 장비 손질이 끝난 일행에게 가서 저녁에 다시 출발한다는 것을 알렸다.
적어도 오늘 밤은 쉬고 갈 거라 생각하던 환인의 여자친구들과 롬디스 일행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다.
=어? 저녁 먹고 바로?=
“그래. 이번에는 유티 양 대신 유르파와 환연이 합류할 거다. 유티 양, 사흘간 고생하셨고 이건 함께 고생해준 보수입니다.”
환인이 내미는 황갈색의 흔한 1급 위상석(13 은화) 하나를 받아든 유티는 얼떨떨해하다가 이내 밝아진 얼굴로 허리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성자님! 성자님을 도울 수 있어서 큰 영광이었어요!=
“유티 양의 앞날에 짐승신 님의 가호가 있길 빌겠습니다.”
지난 사흘, 2차 탐사 때 획득한 위상석은 2급이 18개(576 은화), 3급이 7개(13 금화 23 은화), 4급이 5개(37 금화 80 은화)로 57 금화에 가까운 양이었다. 1차 때 수익은 40 금화가 못 되는 양이었고.
거기서 13 은화는 1%도 안 되는 양이지만, 애초에 유티의 임무는 구출자들의 목욕과 식수 보급, 산란못의 흙탕물을 일으키는 데 도움을 주고 설거지나 기타 자질구레한 일이었다.
사흘 바짝 고생하고 무려 13 은화, 자신이 석 달은 바짝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을 받게 된 유티는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억누르며 환인에게 허리를 꾸벅 숙였고 이실리테, 안느, 롬디스 일행 순서대로 꾸벅꾸벅 인사한 뒤 기쁜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실상 그녀에게 있어 지난 사흘간의 미궁 탐사는 무척이나 힘들고 무서운 경험이었다.
그녀의 성향과 모토는 온건, 그리고 무사안일.
싸우는 게 싫어 모험가로도 활동하지 않고 마을에서 청술사의 힘만 적당히 써가며 살아온 서른 살 남짓한 인생이었다.
저녁에 다시 미궁으로 향한다는 이야기에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내심 암담했는데 안 들어가도 된다니! 거기다 무려 1급 위상석도 받다니!
유티가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내려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안느가 환인에게 물었다.
=도령, 왜 갑자기 생각이 바뀐 거야? 거기다 율이 언니도 데려간다니…….=
“내일모레면 프라버에서 출발한 병력이 도착할 예정이라더군. 유르파가 마을에 남아있어보았자 좋은 꼴을 못 볼 것 같아서 데려가려 한다.”
작은 마을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 프라버에서 오고 있다는 사람들이 유르파를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물론 그런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환연을 일행에 추가할 경우 미궁의 남은 구역도 사나흘 내외로 공략할 수 있을 것 같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롬디스 일행이 있으니 유르파의 안전도 확보할 수 있을 것이고 말이다.
=잠깐, 좋은 꼴을 못 본다니? 무슨 말이야, 마을 사람들이 율이 언니를 괴롭히기라도 했단 말이야?=
“괴롭히는 수단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는 괴롭힘이라고 의식도 못 하는 행위도 있고.”
상상을 부추기는 환인의 화술에 이실리테와 안느의 표정이 안좋아졌고 롬디스 일행은 환인의 눈치를 살피다가…….
=저, 성자님? 그, 그럼 저희는 출발 준비 좀 하고 오겠습니다.=
“잠시 후에 라비올라 양이 저녁을 준비한다고 하셨으니 그때까지 돌아오시면 됩니다.”
=옙.=
그에게 허락을 구하고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표현하기에는 조금 맞지 않지만, 그래도 지은 죄가 있다보니 냉기를 풀풀 날리는 환인의 곁이 마치 가시 방석 같았던 것.
롬디스 일행에게도 스플뎀을 준 환인은 차가운 눈으로 저녁을 준비하는지 하얀 연기가 곳곳에서 올라오기 시작하는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