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341화 (341/813)

〈 341화 〉 335 산란못 미궁 2차 진입

* * *

“여기서 잠시 쉬었다가 진입한다.”

털썩, 풀썩.

3시간동안 경보로 이동, 미궁 입구에 도착한 환인의 선언에 성술사인 시엘라와 청술사인 유티는 쓰러지듯이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흐악, 학! 하악!=

=헉, 흐헉, 허읍…. 헉.=

온몸이 땀에 젖은 채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헐떡이는 두 여자의 모습에 롬디스는 짐을 내려놓고 애인인 시엘라와 이번에 함께 하게 된 유티를 부축해 일으키며 말했다.

=드러누우면 나중이 더 힘들다. 일어서서 조금이라도 걸어.=

=안……돼…. 나, 죽을… 것 같…… 흐우우.=

실 끊어진 인형처럼 자신의 손길에 따라 흐느적거리던 애인이 다시 풀썩 쓰러지는 걸 본 롬디스=팔마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중간부터 짐을 자신과 렉탈이 전부 들어주었는데도 이런 꼴이라니.

그래도 시엘라는 자신과 함께 긴 시간을 돌아다녔기에 상태가 나은 편이다. 유티는 헐떡이다 혼절해버렸으니까.

고개를 돌린 그는 10kg의 가방을 여전히 등에 멘 채 지도를 들여다보는 환인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마에 살짝 땀이 맺히긴 했지만 멀쩡한 모습. 30분마다 10분씩 쉬었다지만 신체 능력 강화 보너스가 없는 직업 계통이 저 정도로 신체를 단련했다는 것은…….

‘역시 무인 출신이신 건가.’

매일 꾸준히 신체를 단련하고 기술을 연마하는 무인. 그런 출신이라면 영혼 기사님들의 스승이라는 것과 이런 장거리 달리기에도 멀쩡한 것이 설명된다.

그때 성자님의 시선이 자신과 시엘라, 유티를 한 번씩 훑고 지나가는 걸 본 그는 속으로 짧게 자책하며 시엘라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시엘라. 치료술을 쓰는 게 좋겠다.=

=으, 응? 이런 일에…?=

=유티 씨가 혼절했다. 곧 미궁에 들어가야 하는데 이 상태라면 제 상태를 찾기 어려워.=

=아… 응.=

체력 배분과 관리도 못 하는 한심한 파티 이미지를 남길 수는 없다.

시엘라는 심장이 이상하게 뛰어서 가슴이 아팠지만, 애써 정신을 집중해 자신에게 먼저 치료술을 걸고 낯빛이 하얘진 채 식은땀을 흘리는 유티에게도 치료술을 걸었다.

=으…….=

=정신 들어요?=

=……아, 고마…워요. 이제 살 것 같네요…….=

치료술을 받아 정신을 차린 유티는 시엘라에게 먼저 감사인사를 한 뒤 그녀의 파티 리더인 롬디스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롬디스 님.=

=아닙니다. 지금은 성자님 파티의 같은 지원 인력이니 함께 힘내도록 합시다.=

=네.=

눈치를 주기 전에 동료를 챙겼으면 좋았을 텐데. 거기까지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걸 바라는 것은 무리겠지.

환인은 롬디스가 파티를 챙기는 걸 보고 나서야 지도를 말아 넣고 입을 열었다.

“자, 출발한다. 대열은 전위에 안느와 이실리테, 중열에 나와 시엘라 양. 후열에 롬디스 씨의 파티와 비상이다.”

=네.=

=응.=

=옙.=

모두의 대답을 듣고 일행을 이끌어 재차 진입한 산란못 미궁은 처음 진입했던 장소와 완전히 동일한 길이었다.

그래서일까. 푸른 안개가 사라지자마자 눈앞이 확 트이며 슬슬 부패하고 있는 개구리 이형종들의 시체가 고약한 냄새와 함께 먼저 나타났다.

=으음.=

롬디스는 일행의 뒤를 따라가다 좌우로 즐비한 십여 개체의 대형 이형종 사체에 시선을 주며 짧게 침음을 흘렸다.

이 정도면 기존에서 0.5등급을 추가해야 할 수준의 덩치인데.

지나가며 검집으로 쿡 찌르자 단단하고 질긴 가죽이 느껴졌다. 2.5급 정도인가 3급이라고 봐도 될 거 같기도 하고.

“이번에는 좌측으로 간다.”

성자님의 발언과 함께 일행이 좌측으로 방향을 트는 것을 따라가며 롬디스는 렉탈에게 물었다.

=렉탈. 방금 그 전투의 흔적, 네가 보기엔 어떻지.=

=……한자리에서 한 번의 전투로 모두 해치웠다. 두 명의 흔적이다. 타격으로 깨부순 흔적과 날카로운 것으로 베어버린 흔적.=

=전자는 성투사님이겠지. 후자는 검희님이실테고.=

=한 마리씩 상대한 것이 아니고 일격에 두어 마리씩 해치웠다. 우리와는 격이 다르다.=

롬디스는 기대감과 긴장감에 주먹에서 살짝 땀이 차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방해하지 않도록 속삭였다.

=렉탈, 시엘라. 이번 미궁은 우리에게 또 다른 지표가 되어줄 기회다. 긴장 풀지 말고 성자님 일행의 일거투일수족을 지켜보며 배울 수 있는 점은 모두 배우도록 하자.=

=음.=

=응.=

이런 롬디스의 기대는 잠시 후 상상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어둡고 음침한 숲, 좁은 오솔길 같은 길을 지나자마자 살아있는 나무들이 뒤엉켜 동굴 비슷한 형태를 꾸민 곳에서 무려 9마리의 대형 개구리들이 튀어나왔고.

=시엘라! 사람은?!=

=잡힌 사람은 없어요!=

=좋아!=

전투가 벌어지자마자 별다른 대화도 없이 성투사님과 검희님이 번개같이 튀어 나가더니 숨 몇 번 쉬는 사이 대형 마차 사이즈의 개구리 이형종 아홉 마리를 모조리 도륙 내버린 것이었다.

전술이나 작전이 무의미해지는 압도적 폭력.

자이언트 워해머가 내려찍을 때마다 개구리 이형종이 한 마리씩 박살 났고, 허공을 빛의 대검이 가로지를 때마다 개구리 이형종이 두 마리씩 반 토막 나서 허공에 피와 내장을 흩뿌린다.

쿠우!

“서쪽에서 한 무리가 온다! 시엘라 양, 생명력 탐지 준비를.”

=네? 네넷!=

뭐? 이형종이 또 몰려온다고?

롬디스는 청각을 열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아주 희미한 기척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자신도 정신을 집중해야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는 조그마한 소리를 이 거리에서 자신보다 먼저 알아챘다는 건가?

잠시후 나타난 11마리의 거대 개구리 무리에 롬디스는 전율이 흘렀다.

방금 9마리가 출현했을 때 롬디스는 작은 괴물 방과 마주쳤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11마리라니.

그 뒤에는 16마리와 마주쳤고 그다음에는 14마리와 마주쳤다.

=외곽부터 괴물들이 많이 몰려나오네. 근처에 대형 산란못이 있는 건가?=

“가능성이 높으니 주의해라.”

=응.=

롬디스는 다시 전투를 벌이는 영혼 기사들의 모습에 이게 평범한 수준이라는 걸 깨닫고 목덜미의 솜 깃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뭐야, 이 미친 미궁은?=

뭔데 이형종이 괴물방 급으로 몰려나오는 거지?

그새 이형종을 쓸어버리고 돌아온 안느가 그 혼잣말을 듣더니 웃으며 말했다.

=뭐 이정도 가지고 그래. 좀 더 깊은 곳에 들어가면 40마리, 50마리도 나와.=

=……예?=

=그저께 빠져나오기 직전에는 호수 크기의 산란못이 나왔는데 100마리가 넘게 밀려오더라.=

순간 얼이 빠졌던 롬디스는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고 물었다.

=그, 그 정도면 군대가 동원되어야 하는 규모 아닙니까? 여길 세 분이서 절반을 정리하셨다고요?=

=절반은 아니고.=

안느는 피식 웃으며 대열로 돌아갔고 롬디스는 자신들이 의뢰를 받아 올 곳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 생각은 그 직후에 현실로 다가왔다.

“안느! 좌측 북서방향으로 9마리가 온다!”

=응!!=

콰과광! 뻐벙­!!

“우측에 독화살 개구리 두 마리다! 비상!=

쿠웃!

콰르르르­!

“이실리테, 안느! 사이 전방에 13마리가 추가된다!”

=네!=

=흐아압!!=

씨이잉­ 촤아악­!

쿠궁­! 쿠구구궁!!

흐릿한 안개로 가려진 시야 한켠, 산란못 근처에서 연속적으로 벌어지는 전투.

롬디스의 파티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처음에는 13마리와 싸우기 시작했는데 소리에 이끌렸는지 이형종이 7~21마리가 계속해서 밀려온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득한 초대형 괴물들. 빛의 검이 허공울 수놓으니 피와 내장이 분수같이 치솟는다.

콰광, 쿵, 진동과 굉음이 울려 퍼질 때마다 박살 난 이형종의 살점과 팔다리가 사방으로 흩뿌려지고 그 사이로 개구리들의 울음소리와 간간이 녹색 폭발과 폭음이 울려 퍼지며 섬광이 번쩍인다.

성자님의 호령이 터질 때마다 영혼 기사들은 한치의 두려움도 없이 수십 마리의 이형종이 몰린 곳으로 뛰어들어 무기를 휘두른다.

3명이 수십 마리와 싸우는, 전투가 아닌 전쟁이라 할법한 광경.

그 결과 이형종은 맥도 추리지 못하고 고깃덩어리가 되어 사방으로 쓸려나가고 있었다.

강한 것은 영혼 기사들뿐만이 아니었다.

“비상. 저쪽이다.”

큐삣!

퓨퓨퓩­

“이실리테가 지나가는 자리에 바람 폭발을 써라. ……지금.”

삣!

퍼벙­ 촤라라락!!

5급 성수로 분류되는 녹색 쿠에여서일까. 성자님의 이야기를 알아듣는 것처럼 성자님이 지시할 때마다 정확하게 바람의 칼날과 바람의 대화살을 쏘아내는 모습에 롬디스가 크게 감탄한다.

=대단하군! 5급 녹술사를 능가하는 수준이야!=

위력은 이미 5급 녹술사를 능가하는 수준이고, 주문 시전 속도도, 명중도도 그가 이때까지 보아왔던 어느 녹술사보다 훌륭하다.

저런 대단한 쿠에를 저렇게나 조련하다니, 녹색 쿠에니까 당연히 하늘도 날 수 있겠지? 그러면 성자님은 저 쿠에를 타고 하늘도 날아다니실 테니…….

=하. 다른 것보다 녹색 쿠에가 가장 부럽군.=

평소에는 하루 다섯 마디 이상 말하지 않는 렉탈마저도 부러움이 묻어나는 말을 할 만큼 성자님과 함께 이형종을 공격하는 모습은 말 그대로 예술적이었다.

저런 쿠에와 함께 세상을 여행한다면 얼마나 즐거울까.

그때 주둥이에 가시가 삐죽삐죽 솟아난 두꺼비가 느닷없이 폭발을 일으켰다.

빛의 칼이 날아가지도 않았는데, 뭐지?

전투에 들어갈 때마다 성자님 주변에 여섯 자루의 빛의 검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검이 성자님의 손짓에 따라 날면 여지없이 거대 개구리의 머리통이 꿰뚫리거나 안에서부터 폭발해 걸레 짝처럼 너덜너덜해졌다.

롬디스 일행은 환인이 어떤 공격을 하는지 짐작도 못 하는 상황.

그랬는데 방금은 어떤 징조도 없이 갑자기 폭발했다. 누구의 기술이지? 혹시 성자님의 선천 능력인가?

쿠궁. 두두둑. 두두두두­

=어, 어어.=

=잠깐, 잠깐만요. 이형종 너무 몰리는 거 아닌가요!? 도, 도와드려야 하는 건……!=

뒤에서 얌전히 전투를 지켜보던 유티가 세 방향에서 갑작스레 몰려드는 이형종 무리를 보고 놀라 안절부절못한다.

왼쪽 땅과 오른쪽 땅, 그리고 물속에서 성자님 일행을 향해 모여드는 그 숫자만 물경 60여 마리.

시엘라도, 렉탈도 눈을 부릅뜨고 자신들이라도 힘을 보태야 하나 생각했을 무렵. 느닷없이 성자님을 중심으로 회백색의 강렬한 빛의 파동이 터져 나왔다.

일반 영혼사들의 파동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짙고 뚜렷한 빛의 파도.

이어진 현상에 롬디스 파티는 눈을 부릅떴다.

평온의 파동에 휘말린 이형종들이 돌진해오다 말고 혼란에 걸린 것처럼 엉거주춤하다가 자기들끼리 이리저리 부딪치고 엉키며 체증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걸 본 시엘라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드, 들어본 적 있어. 강력한 평온의 파동은 사람에게 크나큰 평온과 안정을 가져다주지만, 이형종이나 마수들한테는 오히려 혼란을 부추긴다고…….=

영혼사가 이형종이나 마수와 싸우는 일은 어지간해서는 없다.

싸움이 벌어지더라도 영혼사를 보호하고 호위하는 영혼 기사가 싸우지, 영혼사가 직접 나서는 일은 없다.

때문에 평온의 파동이 이형종에게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소문만 분분했는데 설마 그 소문이 진짜였다니.

그때였다. 성자님이 손을 든 순간.

꽈과과과광!!! 뻐벙, 콰과광! 쿠과과과광……!!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깃털이 부르르 떨릴 정도의 강한 폭발이 족히 스무 번 넘게 벌어지며 몰려오는 이형종을 뒤덮는 광경에 시엘라는 주춤,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큐삐­잇!!

거기다 녹색 쿠에가 좌우 길이 5m가 넘는 녹색 날개를 활짝 펼치자 우우웅­ 공기가 이형종이 모인 곳에 집결하더니…….

뻐어어엉­!!!

커다란 굉음과 함께 대폭발을 일으켰다.

화산폭발처럼 산산이 터져 나오는 땅과 물보라. 폭발로 인해 쑤웅­ 기파가 흙먼지를 휘감고 주변을 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황급히 팔을 들어 눈을 가렸던 롬디스 일행은 이어 드러난 광경에 숨만 몰아쉬었다.

60여마리 중 절반이 죽거나 크게 다쳐 버르적거리고 있었고 폭심지를 벗어난 이형종은 그 충격에 재차 혼란에 빠져 서로를 물어뜯고 들이받고 난리가 벌어졌다.

롬디스는 이어진 광경을 멍한 눈으로 응시했다.

=하아압­!!=

길이 10m의 대검을 두 손으로 쥔 검희님이 혼란에 빠진 이형종 무리로 떨어져 내린다.

반달이 허공에 그려질 때마다 괴물들이 토막 난다. 부웅­ 빛의 검을 부메랑처럼 날리자 그 길목에 있던 괴물들에게서 피보라가 뿜어져 나와 사방을 칠해버린다.

어느샌가 붉은색의 아름다운 대검을 쥐고 살아남은 이형종을 도륙내는 검희님.

그사이 성투사님이 놀고 있었냐고 하면 아니었다.

성자님의 폭격과 평온의 파동, 녹색 쿠에의 대규모 협공에 위협을 느낀 거대 개구리 무리 일부가 돌진해왔고, 성투사님은 횃불처럼 위상력으로 불타는 천벌의 망치와 성벽처럼 거대한 자이언트 타워실드로 모조리 막아내고 어그로를 끌며 성자님에게 향하는 이형종을 모조리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사이 한쪽을 모두 정리한 검희님이 재차 날아들어 성투사님을 넘지 못해 아우성인 이형종을 쓸어나간다.

‘이게 영웅급 파티의 전투……!’

호멘 그 자식이 살아있을 때였다면 2~4급의 이형종 20마리는 뭐, 어떻게든 이길 수는 있었을 거다.

자신들은 날아다니며 하늘에서 공격할 수 있지만, 저것들은 침을 뱉는 두꺼비를 제외하면 원거리 공격 수단이 없으니까.

하지만 영혼 기사와 성자님은 우직하게, 지상에서 정면으로 이형종을 들이받아 깨부쉈다.

그래, 저게 진짜 전투다. 자신들이 지금껏 해왔던 것은 전투가 아닌 그저 사냥, 일방적으로 공격을 퍼붓는 사냥이었을 뿐.

때문에 롬디스와 렉탈은 전사의 피가 뜨겁게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도 저기서 싸우고 싶다. 내 실력을 드러내며 저 영웅들의 틈에서 함께 전투를 치르고 싶다……!

향상심을 가진 직업자라면 누구나가 공감할 감정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나서지 못했다. 얼핏 무질서하게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자님 ­ 성투사님 ­ 검희님 세 명의 보이지 않는 유기적인 연대로 호흡을 맞춰 싸우고 있다.

저곳에 자신들이 끼어들어 봤자 방해만 되고 위기를 불러일으킬 뿐.

=엇! 성투사님, 검희님! 위상석 탐지는 저희들이 하겠습니다!!=

=네, 저희에게 맡겨주세요!=

전투가 끝나고 이형종의 확인사살까지 끝나자 위상석 탐지 도구를 들고 움직이는 이실리테와 안느의 모습에 롬디스 일행이 허둥거리며 달려나간다.

잘 보여야하는 마당에 가만히 놀고 있을 수 없다. 이런 일이라도 해야지.

=음. 도령, 어떻게 해?=

“그들이 하고 싶어한다면 맡겨도 괜찮겠지.”

몰래 위상석을 빼돌릴 인성도 아니었으니 위상석 수색은 맡겨도 될 것이다. 그리 판단한 환인은 가라앉은 눈으로 사체로 가득한 주변을 둘러보았다.

‘산란못이 호수 수준이라 사람을 삼킨 이형종이 나올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120마리 가까이 정리했음에도 사람을 삼킨 이형종은 나타나지 않았다. 산란못이 넓다지만 미궁 가장자리여서 그런 건가.

물론 맞닥뜨린 산란못도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흐릿한 안개 너머로 산란못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도령. 사람은 없대?=

무기와 방패, 갑옷에 묻은 살점과 피를 닦아내던 안느의 질문에 환인은 그녀와 이실리테의 원기를 채워주며 대답했다.

“그래. 발견하면 알려달라 했는데 말이 없으니 없는 거겠지.”

=으응…. 영혼도 없었지?=

“음.”

지난 5일간 미궁 가장자리를 돌면서 사람 영혼을 목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당시에는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었다.

끔찍한 일을 당했으니 죽음 당시 원한이 강해 영혼으로 남을 수도 있지만, 인적 드문 장소에서 태어난 미궁이니만큼 구원을 바랄 수 없어 스스로 성불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외에도 이런저런 이유, 아직 끌려온 사람들 대부분이 살아있다거나 미궁 가장자리여서 없다던가 미궁에 혼이 사로잡혔다던가 하는 이유로 깊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발견하면 시엘라 양이 알려줄 테니 그때까지는 전투에 집중해라.”

=알았어.=

각자 위상석 탐지 도구를 들고 위상석을 수색하는 롬디스의 파티, 그리고 혹시 모를 습격을 대비해 그들을 지키는 이실리테와 안느.

그들을 잠시 바라보던 환인은 지도를 펼쳐 이번 전투 지역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번 2차 입장에서 왔던 곳을 이어서 공략하지 않고 좌측으로 방향을 튼 것은 자신이 계산한 미궁의 축적 확인과 미궁의 총 면적을 계산해보기 위해서였다.

만약 축적이 계산대로라면 지금까지 이동한 만큼 서쪽으로 가면 미궁을 가르는 외벽이 나타나겠지.

그러면 미궁 공략은 거의 끝이나 다름없다.

지도를 그린 뒤 접어서 품에 넣은 환인은 저 멀리 뿌연 안개로 가려진 미궁 너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과연 미궁의 끝에 무엇이 있을까.’

환인은 어제 친목 식사자리에서 롬디스에게 물어보았었다. 미궁의 공략 경험이 있느냐고.

그결과 그들도 미궁 공략 경험은 없었고 미궁 끝에 무엇이 있는 지도 모른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저 미궁을 돌파하고 공략하면 부와 명예를 거머쥔다는 소문뿐이라고.

그 이야기라면 안느에게도 들었었다.

“…….”

소문이 퍼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 소문이 매우 위험하던가 아니면 매우 가치가 높아 위에서 통제하던가 둘 중 하나다.

미궁 공략에 대한 정보가 돌지 않는다는 것은 미궁 공략이 위험해서 기도 하겠지만, 미궁을 공략할 경우 그 보상이 크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는데…….

‘의문은 공략하기 수월한 1급이나 2급 미궁의 공략 경험담도 없다는 거였지.’

오울링에서 2급 미궁을 보았었으니 2급 미만의 미궁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닐 터. 그렇다면 위정자들이 일부러 정보를 통제하고 있다는 가설이 힘을 얻는다.

이 세계는 미궁과 역사가 함께하는데 정보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미궁에 대해 생각하며 안개 너머를 응시하던 환인은 시에라가 헐레벌떡 달려오는 것을 보곤 그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서, 성자님! 물 속에, 물 속에 사람의 생명력이 탐지되고 있어요!=

시엘라가 발견했다는 곳으로 걸어간 환인이 영혼 시야를 켰지만, 산란못은 여전히 적색 색계통으로만 보일 뿐이다.

“어느 방향입니까.”

=저 방향으로 130m 정도예요!=

시엘라가 가리킨 곳도 매한가지다. 산란못의 색계통이 너무 짙어 수심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

‘물 속에 이형종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때까지는 딱히 확인해야 할 가치가 없어 내버려두었었는데 이제는 내버려둘 수 없다.

지금까지 사람을 속에 담은 이형종을 단 한 마리밖에 보지 못한 이유? 사람을 속에 담은 것들은 당연히 번식을 위해 일부러 싸움을 피했기 때문일 거다.

환인은 조금 귀찮아졌다고 생각하며 비상과 유티를 불러들였다.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