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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기담-338화 (338/813)

〈 338화 〉 332 숲 옆 마을 크라빈

* * *

잠시 후 소식을 듣고 찾아온 라비올라는 죽은 호멘의 모습에 흠칫했지만 이내 어찌 된 일인지 사태를 파악했다.

홀로 죽어 널브러진 호멘, 그리고 별채에 계신 성자님과 그 옆에 붙어있는 롬디스=팔마 씨의 파티.

자신이 관여할 일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지만, 롬디스의 파티가 마을을 돕기 위해 왔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들을 향한 눈빛이 한층 차가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집사를 불러 시체를 정리하라 지시한 라비올라는 환인에게 달려가 그가 무사함에 안도했고, 미궁 내에 수천 마리의 이형종이 있을 것으로 예측된다는 말에 아연실색했으며, 그런 미궁의 1/3 정도를 정리했다는 소식에 표정 관리가 안될 정도로 기뻐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푹 쉬실 수 있도록 하녀장에게 당부해놓을 테니 오늘은 편히 쉬세요!=

“고맙습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때 가지고 들어가고 싶은 물품이 있습니다. 그것을 준비해주셨으면 합니다.”

=네? 앗, 넵! 무엇을 준비하면 될까요?!=

환인은 미리 적어둔 쪽지를 건네주며 설명을 덧붙인다.

“이런 식으로…… 평소는 아공간 가방에 넣어 다닐 수 있고 필요하면 조립할 수레가 필요합니다. 수레 하나당 20명은 탈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모포나 몸을 감쌀 수 있는 천도 150여 장은 필요합니다. 보존식량도 200인분 정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요구사항이 의미하는 바에 라비올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얼굴에 격정이 치밀어 오르고 푸른털의 고양이 귀가 격심하게 파닥거린다.

환인은 그녀가 더 흥분하기 전에 손을 들어 기대를 무참히 꺾었다.

“만약을 위해 가져가는 것일 뿐입니다. 여기, 처음 발견한 분입니다.”

환인은 산란못 미궁에서 죽은 여자의 초상화와 머리카락 묶음을 건네주자 라비올라의 얼굴에 슬픔이 차올랐다.

순간적이나마 어머니가 살아있길 기대했는지 하늘로 치솟았던 푸른색 고양이 귀와 꼬리가 힘없이 늘어진다.

=유이 언니…….=

“좋은 소식은 절대 장담하지 못합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 시신을 옮기기 위한 수레라고 생각하십시오. 얇은 천은 시신을 감싸기 위한 용도이니 깨끗한 것으로 준비해주십시오.”

=네…….=

“그리고 미궁에 함께 들어갈 네 명 정도가 필요합니다. 역할은 전투를 제외한 운반과 혹시 모를 관리입니다. 직업자 중 희망자에 한해서만 뽑아주시길 바라며 사망 위험성도 존재한다는 것을 주지시켜주십시오.”

=넵.=

수심이 깊어졌지만 수심은 수심이고, 중요한 것은 성자님 일행의 지원이라고 속으로 되뇌인 라비올라는 풀어지려는 정신을 바짝 조였다.

성자님과 영혼 기사님들은 미궁을 닫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전투를 벌이고 계신다. 자신이 해이해지면 어쩌자는 건가.

라비올라는 머릿속으로 성자님이 지시한 사항을 이행하기 위해 적합한 인재를 떠올리며 허리를 꾸벅 숙이고 되돌아가려다 유르파에게 붙잡혔다.

=라비 아가씨?=

=네?=

=성자님이 말한 수레 있잖니. 그건 이런 식으로 하면 좋으니까…… 아니다, 나도 같이 갈게. 목수들이 도면은 알기 어려울 테니까 내가 옆에서 알려주는 게 좋겠어.=

=네, 유르파 님.=

=유리 언니. 내려가시면 식량과 식수도 가방 두 개에 담을 만큼 사다 주시겠어요? 저희는 짐을 정리해야 할 거 같아서요.=

=응, 전에 사갔던 그 위주로 준비하면 되지?=

=네.=

이실리테의 부탁까지 접수한 유르파는 호멘과 있었던 트러블은 모두 잊은 듯, 기운찬 모습으로 라비올라와 함께 마을로 내려갔다.

이실리테와 안느는 미궁에서 사용했던 도구와 갈아입었던 옷과 속옷의 세탁 및 손질에 들어갔다.

=으히~ 기분 나빠!=

=갑옷이 예쁜 건 좋은데 그만큼 손질하기 어려운 곳도 많아…….=

5일간 축축한 곳을 돌아다녀서일까, 갑옷의 이음매라던가 평범하게는 손이 닿지 않던 갑옷의 틈새에 생긴 물이끼의 감각에 진저리치는 여자친구들.

잠시 그 모습을 거실의 창너머로 지켜보던 환인은 유르파가 마련해준 중형 양피지에 산란못 미궁 지도를 자와 각도기를 써서 최대한 축적에 맞게 옮겨 그리기 시작했다.

=…….=

그 모습을 거실 한쪽에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던 롬디스는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어 어지러웠다.

일단 알칸=드람의 의뢰는 실질적으로 실패라고 간주해야 한다.

크라빈 마을에서 성자를 도와 지원이 도착할 때까지 마을을 지켜달라는 의뢰였는데 성자가 마을 주변 안정화에 이어 미궁까지 공략하고 있으니까.

고개를 돌려 거실의 창문 밖으로 시선을 주자 저택의 하녀들이 앞마당의 핏자국에 흙을 덮어 지우고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그랬는데 자신의 파티원이 성자님의 영혼 기사에게 성희롱을 걸었고, 자존심을 내세우다가 성자님께 죽어버렸다.

=…….=

성자님이 그때 보인 기술은 무엇인가. 무직자나 다름없는 신체 능력으로 어떻게 호멘을 죽일 수 있었나.

게다가 영혼 기사님들은 6급, 5급의 고위에 혼합, 희귀 직업자이신데 어째서 빨래를 저택의 하녀들에게 안 시키고 왜 자신이 직접 하시는 거지?

또 성자님은 어떻게 저렇게 정확한 지도를 그리는 법을 알고 계신 거고?

어쨌든 하나 확실한 것은, 이대로 가면 자신은 물론 동료들의 커리어는 끝장이라는 거다.

프라버의 하급 호족에게 찍혀 일감이 줄어들 테고, 성자님 일행에게 시비를 털었던 파티원이 있던 파티라는 게 소문나 누구도 찾지 않겠지. 누구도 자신들과 함께하려고도 안 할 거다.

그런 꼴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앞날에 드리운 암운을 거둘 수 있는가.

반쯤 죽은 동태 같은 눈알로 성자님이 그리고 있는 양피지 지도를 멍하니 보고 있는데 옆구리가 쿡, 찔리는 느낌과 함께 애인의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롬.=

그쪽을 돌아보자 10년을 함께 해온 연인이 염려하는 얼굴로 손을 잡고 거실의 구석으로 이끈다. 그리고 매우 작은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할지 생각해둔 거 있어?=

=…모르겠다. 뭘 어떻게 해도 우리 파티는 끝장이라는 미래 밖에 안 보여.=

초조함이라는 늪에 빠진 기분에 롬디스는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여자친구를 돌아보며 물었다.

=…시엘라, 이렇게 곤란한 상황에서 네 말을 듣고 손해 본 적은 없었지. 이번에도 너의 그 지혜가 필요해. 뭔가,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 지혜를 짜내줘.=

=휴……. 롬, 아까 성자님이 고족 아가씨한테 하셨던 말 기억나?=

=지원 인원이 필요하다는 이야기?=

=응.=

=그건 나도 생각해봤지만, 성자님은 전투가 아닌 보조 인원이 필요하다고 하셨잖아. 우리는 전투원이다.=

=롬, 생각을 바꿔야 해. 성자님과 그분의 기사들에 비하면 우리는 전력에 포함할 이유가 없는 상대적 약자들이야. 그렇다고 계속 마을에 있을 거야? 닷새 동안 습격 한 번 없어 전투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지금은 뭐든 해서 성자님한테 밉보인 걸 어떻게든 풀어야 할 상황이잖아.=

=…네 말이 맞아……. 지금은 짐꾼이라도 해야지.=

=응. 성자님은 미궁에 끌려간 여자들을 구해냈을 때 그 여자들을 챙길 사람이 필요하신 게 틀림없어. 기대감을 죽이기 위해 잔인하게 대답하셨지만, 내가 보기에는 틀림없이 구출을 위한 준비야.=

=그래, 미궁 공략과 피해자들을 호위할 사람이 필요하겠지. 미궁의 정신 침해에 익숙한 사람도.=

=그런 의미에서 롬하고 렉스는 전사니까 힘이 세잖아. 그리고 나는 성술을 쓸 수 있고. 땅신교단 성투사님이 계시지만 그분은 전투에 성력을 쓰셔야 하니 우리가 제격이야.=

애인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앞길에 드리워진 먹구름이 조금 걷히며 광명이 내리쬐는 기분이다.

이러다보니 죽어버린 그 자식이 떠올라 아쉬움과 함께 울화가 치밀었다.

=제길, 호멘 그 멍청한 자식이 사고만 치지 않았어도……!=

그녀석이 사고만 저지르지 않았어도, 아니 사과하고 성자님께 용서만 구했어도 성자님을 도울 수 있었을 테고 그걸로 나름대로 명성이 쌓였을 텐데!

=롬, 말이 나온 김에 빨리 말씀드려야 해. 고족 아가씨가 지금이라도 인원을 뽑아서 돌아오면…….=

=그 기회마저 날아가겠지. 알았어.=

롬디스=팔마는 후우, 심호흡하고 성자님의 앞으로 가서 배에 힘을 주고 말했다.

=성자님, 여러 말 하지 않고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에게 부디 마지막 기회를 주십시오!=

“…….”

10초가 지났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롬디스는 이쪽으로 시선조차 주지 않고 지도를 그려가는 성자님에게 허리를 90도 각도로 숙이며 다시 소리친다.

=성자님께서 라비올라 아가씨에게 말씀하신 그 인원, 저희를 데려가 주시기 바랍니다! 성자님께서 원하시는 것, 그 이상을 책임져 보이겠습니다!=

“제가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서 하는 말입니까.”

드디어 돌아온 대답!

=미궁에 끌려간 혹시모를 생존자를 챙길 인원이 필요하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녀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치료하는데 저와 시엘라, 렉탈이 적임입니다! 저는 5급 전사, 렉탈과 시엘라는 4급 전사와 성술사입니다!=

다시 10초간 침묵이 이어진다.

롬디스는 깃털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설마 이게 아닌가? 혹시 전투 보조가 필요하신 건가?

“좋습니다.”

1초 1초 깃털과 피가 마르는 기분에 부리를 꾸욱 다물고 있던 롬디스는 드디어 흘러나온 환인의 목소리에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해냈다!

돌파구를 열었다는 희열에 고개를 번쩍 들고 감사하다고 말하려 한 롬디스와 멀찍이 뒤에서 지켜보다 잘됐다고 속으로 방방 뛰려던 시엘라는 이어진 환인의 이야기에 피가 얼어붙는 느낌을 받았다.

“당신들이 바라는 평가 재조정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겁니다.”

=……!=

=……!?=

“호감이 악감정으로 변하기는 쉽지만, 비호감이 호감으로 변하는 것은 어려운 법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들어가려는 미궁은 여타 평범한 미궁과는 다릅니다. 굳이 고생을 자처하기보단, 알칸=드람 씨에게 돌아가 의뢰를 실패했다고 전하는 것이 고난을 피하는 길이 되겠지요. 그래도 돕겠다는 겁니까?”

=옛!! 성자님을 꼭 돕고 싶습니다!!!=

이때 그냥 관두겠다고 말하는 것은 머저리나 다름없다. 성자님의 적의를 받을 일이 없어졌다고 해도 하급 호족의 경멸과 분노는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의뢰 실패의 과정이 알려지면 자신들은 두 번 다시 라드세아에 발을 디디지 못한다.

그런 생각으로 롬디스는 우렁차게 소리치며 허리를 다시 숙였고, 안절부절못하던 시엘라도 달려와 그의 옆에서 허리를 숙였다.

=성자님이 하시는 일을 거들고 싶어요, 부탁드립니다!=

“출발은 내일 아침입니다. 가서 준비하십시오.”

=네, 네!=

롬디스=팔마와 시엘라는 서둘러 별채를 나오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까는 순간적으로 속내가 들켰다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오히려 성자님이 조건을 내어준 것과 다름없다.

시엘라가 떨리는 한숨을 내쉬며 별채를 힐끔 돌아보았다.

=롬, 열심히 하자.=

=후우, 그래.=

짧은 대화가 끊기고, 저택으로 향하던 그들의 머릿속에는 성자가 보여주었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호멘을 간단히 죽여버리는 그 능력과 냉정함.

7~8급 직업자한테서나 느낄 수 있는 위압감과 압박감.

영혼 기사들은 물론이고 고족마저도 완벽하게 장악한 카리스마…….

그후 두 사람이 공통으로 떠올린 것은, 그를 절대 화나게 하거나 거슬려서는 안 되겠다는 감상이었다.

‘생각해보면 드람 부서장이 긴장하며 보냈다는 것부터가 그분이 보통이 아니라는 의미였어.’

그걸 깨닫지 못해 죽어버린 호멘, 그 자식의 멍청함이 안타까우면서도 짜증의 한숨이 나오는 롬디스=팔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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